번역 후기
올 스페인행 짐 가방에도 어김없이 『돈키호테』 원본과 번역 원고가 들어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원본과 교정지를 호텔 방 테이블의 어슴푸레한 불빛 아래 꺼내 놓고 앉아 있자니 문득 레오나르도 다빈치 생각이 떠올랐다. 지오콘다 부인을 그린 「모나리자」를 수년간 자신의 여행 보따리에 넣어 다니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했던 그의 마음이 내 마음에 닿아서였을까.
스페인에는 『돈키호테』 읽기 행사가 있다. 책의 날인 4월 23일부터 만 하루, 총 스물네 시간을 쉬지 않고 누구나 교대로 읽을 수 있는 대국민 참여 행사이다. 또한 대도시는 물론이고 시골 마을 구석구석에도 『돈키호테』에 나오는 구절들을 새겨 놓은 타일들이 담에 붙어 있어서, 단순히 미관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의 문화 수준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그래서 나는 스페인 사람이면 『돈키호테』를 모두 다 읽었고 이해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구어체 표현이나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 어휘들, 역사, 문화적 배경이 포함된 이야기들을 다짜고짜 그들에게 묻고 다녔던 건 그런 믿음이 있어서였다. 마드리드 대학 스승에게나 책방 주인에게, 라만차 거리에 있던 아낙네에게, 연로하신 스페인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밑도 끝도 없이 질문을 하던 내 모습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돈키호테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세르반테스가 가졌던 그 느낌 그대로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은 마음으로 돈키호테가 모험을 찾아다녔던 모든 여정을 따라가기도 했다. 돈키호테가 처음으로 모험을 떠나기 위해 길을 나선 몬티엘 들판에도 서 있었고 기사 서품식을 받은, 지금은 식당과 가게로 변한 푸에르토 라피세의 객줏집, 풍차 마을 크립타나, 끊겨 버린 이야기의 원고가 발견된 톨레도의 알카나 시장, 고행을 하러 들어간 시에라 모레나와 둘시네아 공주의 마을 엘 토보소에도 있었다. 연극배우들과 모험을 벌인, 지금은 연극의 고장으로 알려진 알마그로에 들렀고, 돈키호테가 환상과 현실의 묘한 모험을 경험했던 몬테시노스 동굴 속에 들어가 박쥐와 인사도 나누었다. 일곱 개의 루이데라 늪에서는 과디아나 강의 흐름을 추적할 수 있었고, 사라고사 인근 페드롤라에서는 공작 부부의 부에나비아 궁전에서 지냈던 돈키호테의 일상을 회상하기도 했다. 페드롤라 중심가와 자그마한 다리 하나로 연결된, 왼쪽으로 에브로 강이 유유히 흐르는 바라타리아 섬에서는 이를 통치하느라 고뇌에 찬 산초의 좌상과 마주했고, 이어 바르셀로나를 돌며 돈키호테의 마지막 모험을 같이하기도 했다.
라만차와 아라곤과 카탈루냐 지역의 마을과 도시로의 여정은 안달루시아로 이어졌다.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는 세르반테스가 세금 징수원이자 징발관으로 돌아다녔던 안달루시아 곳곳이 녹아 있다. 돈키호테에게 기사 서품식을 해준 객줏집 주인이 젊은 시절을 보냈다는 세비야와 산루카르, 〈포로 이야기〉에서 포로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조국 땅인 벨레스 말라가 등지에서 나는 그들이 되어 보았다.
이렇듯 몸으로 경험한 것들을,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에서 언급한 내용에 맞추어 옮기기 위해 노력했다. 작품 『돈키호테』의 서문은─소설에 서문이라니, 누구는 의아해하며 글감으로 삼을지 모르겠지만─나에게 번역을 위한 훌륭한 길잡이였다. 책의 가장 앞부분에 위치하지만 집필을 마친 후에 비로소 쓰는, 작품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작가의 친절한 안내가 바로 서문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나에게 이것은 세르반테스가 자신의 책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지 일러 주는 조언이었다. 그는 돈키호테를 가리켜 〈가장 순수한 연인에 가장 용감한 기사〉이자 〈품위 있고 명예로운 기사〉라고 했으며, 산초에 대해서는 〈쓸데없는 잡동사니 기사 소설들에 흩어져 있는 종자들이 지닌 모든 매력들을 한꺼번에 보여 주는 종자〉라고 했다. 이런 인물들의 모험과 언행들을 〈의미 있고 정결하며 잘 정돈된 단어들로 평범하며 울림이 좋고 유쾌하게〉 썼다고 했으니, 나도 해당 인품의 인품이나 성격에 어울리고 울림이 좋으며 평범한 어휘들로 옮기고자 애를 써야 하지 않았겠는가.
이러한 모든 노력은, 프랑스 문예비평가인 생트 뵈브가 〈인류의 바이블〉이라고 정의한 『돈키호테』가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평가 절하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다. 이러한 나의 뜻에 진심으로 동참해 준 이들이 적지 않다.
먼저 나를 믿고 번역을 의뢰해 준 열린책들 관계자들이다. 기존 번역의 문제점을 직시하여 번역자를 물색하던 중 내가 그 레이더망에 걸렸던 모양이다. 번역 작업이 오래 걸리다 보니 담당자가 세 번이나 바뀌었다. 아직도 내 휴대 전화에 연락처를 두고 인연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있는 전임자와 우리나라 독자의 눈으로 번역의 완성도를 높여 준 담당 편집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번역자들 중에는 문화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없는 독자라도 외국 작품을 어렵지 않게 이해하리라 착각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 줄 알았는데, 이번 편집 작업을 통해 그 사실을 다시 깨우칠 수 있었다.
안부를 묻듯 번역 작업 진행을 물어 가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동료 교수 네 분께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 번역 작업을 마치는 것으로 그 고마움을 갚을 수 있도록 심적, 물적으로 큰 힘이 되어 준 친구 같은 인생 선배들이다. 그리고 같이 독해하며 오자와 탈자를 잡아 주고 좋은 표현을 찾아주었던 대학원 제자들 홍민, 미현, 일주, 수현, 은아, 고맙다.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늘 막내딸 건강이 먼저이신 우리 친정아버지에게는 감사하다는 말이 부족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교수가 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 주셨던 정신적인 지주이자, 귀찮아 식사를 거르고 있을 때면 영락없이 멋진 식당으로 불러내 주시는 나의 건강 지킴이이시다. 또한 몇 년에 걸친 〈돈키호테 여정〉에서 훌륭한 기사이자 짐꾼으로 고생해 준 남편과 〈그러다가 엄마가 돈키호테 되겠다〉는 무뚝뚝한 말 한마디로 내심 걱정을 내비친 아들 현원이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번역하는 동안 내 발치에 앉아 지친 내 몸과 마음을 쉬게 해주었던, 하지만 작업을 마치기 두 달 전 영원히 저세상으로 가버린 내 사랑하는 꼬미가 내 마음을 느낄 수만 있다면…….
번역 후기로 내 글이 좀 길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세르반테스가 원했던 대로의 『돈키호테』 번역은 스페인 문학을 전공한 이래 오랜 숙원이었기에 내 정열을 다 바쳤고, 이 정도의 감사 인사로는 부족할 정도로 많은 격려와 도움을 받았으니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끝으로 한 가지 사족을 더하자면, 『돈키호테』의 등장인물이 직접 언급하듯이 이작품은 누구나 즐겁고 유익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많은 독자들은 아직도 이 책이 왜 성서 다음으로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지 잘 알지 못하는 듯하다. 이러한 문제가 본 번역서만으로 부족하다면, 그것을 나에게 주어진 또 다른 책임으로 여겨 돈키호테 해설서로 다시 독자들을 만나도록 준비할 것이다.
2014년 11월
안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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