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2009년 2월 13일 낮 12시 20분, 김포공항을 이륙한 전일본항공ANA 1292편은 두 시간 남짓 날아 도쿄 인근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도쿄로 가는 신칸센 전철 안에서 생각은 더욱 골똘해지고 있었다.
손창섭, 그는 살아 있을까. 아니면 이미 유명을 달리했을까. 그가 살아 있다 해도 과연 만날 수 있을까. 실로 질문할 게 많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일단 부딪혀볼 수밖에. 내게 있어서 손창섭은 ‘환멸’과 ‘폐허’의 문학 그 자체였다. 그래서 궁금한 것이다. 그의 뇌리엔 아직도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전쟁이라는 시뻘건 용암 위에서 휘어져 버린 시간들. 폐허의 산물인 그의 상상력과 위악적 모순들, 그의 일본인 아내와 양녀, 그리고 일본 처갓집에 맡겼던 두 명의 자식들은 또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나의 취재 노트는 그야말로 물음표의 연속이었다.
오래전, 손창섭의 「비 오는 날(1953)」을 단숨에 읽었을 때 창밖에서 비가 오는 것 같았다. 창밖이라고 했지만 내가 방 안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소설 속에서 내리는 비는 안과 밖의 경계를 지우며 나를 빗물 뚝뚝 떨어지는 처마 밑에 있게 했고 젖은 툇마루 끝에 있게 했다. 나는 1953년에 내린 비에 흠씬 젖어 있었다. 비의 장막 너머로 소설의 공간인 임시 수도 부산 동래의 전차 종점 부근이 눈에 아른거렸다. 소설의 풍경은 간혹 사실보다 더 현실적일 경우가 있다.
사십 일이나 계속된 긴 장마, 진득진득 걷기 힘든 비탈길, 일제강점기 당시 무슨 요양원으로 사용되었다는 낡은 목조 건물, 들이치는 비를 막기 위해 한 장도 남지 않은 창문 안쪽에 드리운 가마니때기, 다다미를 걷어서 벽 한구석에 기대어 놓은 판장板墻, 널빤지로 둘러친 울타리뿐인 실내, 여기저기 널려 있는 취사도구 옆에서 매캐한 연기를 피워내고 있는 풍로…….
내가 태어나 성장했던 광주 서석동에서의 기억은 서너 살 시절인 1962-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은 십 년 전에 끝났는데도 골목길엔 짝짓기를 하다가 꽁무니가 붙은 채 고통스럽게 짖어대는 비루먹은 개들이 어슬렁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동네 사람들은 뜨거운 물을 뿌려 암수를 갈라놓으며 혀를 빼물었다. 그 시절, 대중목욕탕엔 알몸에 게다짝을 신은 채 때를 벗기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어머니를 따라 배급 쌀을 타러 간 동사무소 입구엔 총을 멘 군인들이 땟국물 흐르는 군복에 허줄한 운동화를 신은 채 서 있었다.
국가는 가난했고 개인도 가난했던 그 초췌한 전후 시대의 풍경은 오랫동안 바뀌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국가 자체가 거대한 난파선이었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난민이었다. 전후문학은 가히 난민 문학에 다름 아닌 것이다. 내가 태어난 서석동 주민이나 여덟 살 때 상경해 성장한 서울 은평구 녹번동 개천가의 주민들도 고향을 등지고 생계를 찾아 날아든 철새이긴 마찬가지였다. 찌그러진 놋주발에 비가 내렸고 재래식 시장의 난전 위로 비가 내렸으며 서로 멱살을 잡고 악다구니하는 들머리판에도 비가 내렸다.
나는 1950년대 태생의 대열에 마지막 순번으로 턱걸이를 한 까닭에 스스로 1950년대에 연루되어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1950년대는 내게 있어서 시간이 아니라 장소인 것이다. 1950년대는 내 아버지의 시대였지만 나의 잠재의식에도 침투해 있었다. 내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장소인 1950년대를 찾아가는 일을 가능케 해준 건 문학일 것이니, 어떤 장소는 시간에서 벗어나 있기도 한다. 그리고 그 장소에 도착한 나에게 누군가 삶을 구성하는, 또는 소설을 구성하는 최소 인원에 대해 묻는다면 세 명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건 「비 오는 날」의 등장인물인 대학 졸업생 원구, 원구의 친구 동욱, 동욱의 여동생 동옥 때문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세 명이면 이야기는 충분히 풀어갈 수 있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세 꼭짓점으로서의 세 사람. 대학까지 나왔지만 리어카 잡화 행상을 하며 생계를 꾸려야 하는 원구, 대학에서 배운 영어로 미군 초상화를 주문받아 그림 솜씨 좋은 여동생에게 일감을 건네주며 무위도식하는 동욱, 한쪽 다리가 짧은 신체적 불구로 인해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는 동옥이 내가 도착한 장소에 살고 있었다.
게다가 비는 잠깐 오다가 그치는 비가 아니다. 그건 사십 일간 끊임없이 내리는 ‘장맛비’이다. 아니, 1950년대의 비가 한 번 내리기 시작한 후 그쳤다는 보고는 아직 없다. 그 비가 주는 비애감으로 인해 내 성장기는 마치 누군가의 유언을 듣는 시간처럼 더욱더 무겁게 가라앉았는지도 모른다.
「비 오는 날」, 「잉여인간」 등 손창섭이 1950년대에 발표한 단편소설들은 일찌감치 한국 전후문학의 대표적 수작으로 평가받았지만, 장편 『부부(1962)』에서부터 『봉술랑(1978)』에 이르기까지 그가 1960년대 이후 신문 연재에 전념하며 남긴 10여 편의 장편소설은 문학비평에서 논외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태반이 책으로 묶이지도 않았다. 더구나 그의 문학을 깊이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생애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평양 태생인 그의 가족사와 만주, 일본을 떠돌았던 등단 이전의 성장기는 물론이고, 작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얻고도 도일渡日을 결행한 이유와 도일 이후의 행적에 관해서도 밝혀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내 옆자리엔 통역을 맡은 박종채 선생이 앉아 있었다. 박 선생은 내 부친의 광주 서중 후배이다. 1935년생인 그는 전남대학교를 졸업하고 전남일보사에서 오랜 기자 생활을 했으며 1960년대엔 국회 출입 기자로 활동했고 1970년대 초엔 연구원으로 도쿄에서 체류한 적이 있는 일본통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손창섭을 찾아 일본행을 서두르던 나는 통역 문제로 고민하던 중 박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넌지시 함께 일본에 가자고 요청했던 것이다. 손창섭의 괴팍한 성격과 대인 기피증, 그리고 아내 우에노 여사의 나이를 고려하면, 젊은 사람보다는 연륜이 묻어나는 박 선생 같은 분이 제격일 것 같았다. 이런 고민을 털어놓자 그는 대뜸 “특히나 나이든 일본인과 대면할 때는 작은 선물이 필수인데 일본에서는 귀한 돌김(이와노리)이 좋겠다.”면서 직접 돌김을 준비해 올 정도로 예민하고도 배려 깊은 심성을 내비쳤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박 선생이 도쿄의 숙소에 도착해 가방에서 꺼내 보인 돌김은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고가품이었고 그것도 열 봉지나 되었다.
이동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전철 안에 걸린 광고판은 내가 도착한 곳이 근대와 현대가 교차하는 시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장소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광고판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게 설립한 게이오慶應 대학 창립 90주년을 알리는 광고였다. 1919년 종합대학으로 공식 출범한 일본 최초의 사립대 게이오 대학은 19세기 말 이래 일본 근대화에 크게 기여한 일본 사학(私學)의 상징이다. 메이지 시대의 풍운아였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열도를 탈아脫亞론으로 무장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는 1884년 12월, 조선의 근대화를 목표로 하는 김옥균 등 친일파가 경성에서 쿠데타를 결행하기까지 정신적·물질적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김옥균 일파는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한때 조선 왕궁을 점거하고 반대파를 숙청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삼 일째 되던 날, 청나라군에 진압되어 쿠데타는 실패했고 일본 공사관도 소실되었다. ‘탈아론’은 친일파의 쿠데타 실패에 대한 실망에서 쓰인 것이었다.
일본 최고액 지폐인 만 엔권에 그려져 있는 인물도 후쿠자와 유키치이다. 일본 근대화의 국부인 그는 일찍이 김옥균, 박영효와 같은 개화파의 스승이었고, 이광수는 ‘하늘이 일본을 축복하셔서 이러한 위인을 내리셨다.’고 존경할 정도였다. 그의 대표작인 『문명론의 개략(1875)』을 보면, 그가 서양 정신의 핵심에 접근하는 이해 방식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는 서양의 발달된 문명의 근원에는 회의의 정신과 자유로운 탐구가 있다는 것을 간파했고, 일본 역시 그런 철저한 지적 활동을 위하여 봉건적 제도와 기존 사상을 근본적으로 청산하지 않으면 문명권에 접어들 수 없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여기서 의당 제기되어야 할 질문이 있다. 그것은 무엇을 위한 문명화인가라는 것이다. 후쿠자와는 이 질문에 대해서 이중의 대답을 제시한다. 첫째는 보편적인 차원의 대답이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란 다름 아니라 사람의 몸을 안락하게 하고 마음을 고상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며, 인류 공통의 이 이상은 한없이 추구되어 나아가야 한다. 달리 말하면 그는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고른 발달로 말미암아 인간의 완전 가능성을 겨냥했던 19세기 서양의 진보사관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의 극성스런 서양 제국주의에 노출되었던 일본의 사정을 생각하면 국력 배양을 위한 문명화라는 후쿠자와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그 문명화라는 것은 열강의 일원으로서 일본이 당당히 끼어들어 승자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목적을 위해서 ‘문명’이란 말의 뜻을 뒤틀어 동원한다. 그에게 있어서 문명은 사람의 몸을 안락하게 하기 위한 지식의 활용이 아니라 대포를 만드는 기술을 의미하고, 또 정신적인 면에서는 마음을 고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패기를 진작하는 수단을 의미한다.
이러한 문명론의 제국주의적 편향이 결실을 보게 된 것이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였다. 후쿠자와는 승전보를 접하자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면서 크게 기뻐했고, 그 후 한일합병으로 향해가는 일본의 노골적인 책동에도 매우 동조적이었다.
이제 후쿠자와의 시대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시점에 하나의 의문이 생겨난다. 오늘날 일본은 국가주의와 제국주의를 청산하고 후쿠자와가 애초에 정의했던 문명의 본의로 되돌아온 것인가. 식민통치, 정신대 문제, 난징대학살, 태평양전쟁, 교과서 왜곡 등의 문제를 둘러싼 일본 우파 지배층의 노골적인 발언을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래서 내 눈에는 만 엔권의 후쿠자와 초상이 문명의 본뜻을 밝힌 지성인의 모습이기보다는, 제국주의의 과거를 정당화하려는 끈질긴 국가주의적 발상의 배후자로 비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 오면 늘 마음이 무거웠다.
후쿠자와를 떠올리며 도쿄로 진입한 나는 신주쿠 동쪽에 소재한 아스카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일본 근대화의 상징적 인물인 후쿠자와의 땅에서 손창섭이 삼십 년을 살아왔을 것이라는 상념과 함께 내가 손창섭의 일본 내 주소를 확보하기까지의 과정이 마치 영화를 보듯 눈앞에 펼쳐졌다. 영화는 옴니버스처럼 몇 토막으로 나뉘었고 그 토막마다 다른 주인공이 등장해 서로 다른 연기를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한 시절의 손창섭과 옷깃을 스친 인연의 고리로써 그들은 자신의 연기를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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