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혼돈에 빠진 21세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책의 제목은 “공부하는 보수”이다. 나는 평생 ‘공부’를 해온 사람이고, 지금까지의 삶 중 절반이 넘는 시간 동안 공부를 하고 가르치는 것이 ‘업業’인 사람이었다. 남아 있는 세월 동안에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공부’를 계속할 것이다. 공부라는 단어는 너무 익숙해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새삼스러울 정도다. 문제는 ‘보수’라는 단어인데, 이제는 그 단어가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생각할 때, 이명박 정권은 보수를 표방하고 들어선 첫 정권이었지만 독단적인 국정 운영과 부패·비리 의혹으로 얼룩져 실패한 정권이었다. 박근혜 정권은 그런 오점을 청산하고 태어난 합리적인 보수정부이기를 기대했건만, 지금까지의 결과로 봐서는 더 이상 기대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한 보수정권은 부패했고, 또 다른 보수정권은 무능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라 생각하니 허무하다.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의 칼럼니스트 조지 윌George Wil은 “보수운동은 ‘지적 운동Intellectual Movement’으로 시작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의 ‘보수’는 긍정적인 가치를 상징하기보다는 기득권을 수호하고, 부패하고 안일하며, 툭하면 색깔론이나 들고나오는 ‘몰상식한 집단’으로 인식되어 있다. 지적인 것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 ‘한국의 보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보수는 진보의 실패에 힘입어 2007년과 2012년 대선에서 두 차례 성공했고, 진보 역시 지난 1997년과 2002년 보수의 실패에 힘입어 두 차례 대선에서 승리했다. 물론 선거는 상대방의 실패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정권을 잡은 후에는 철학과 비전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이른바 ‘보수정권’은 집권 후 성적이 낙제점이다.
매사를 진영 논리로 설명하고 대응하는 것도 우리 사회의 심각한 병폐가 되어버렸다. 특히 이명박 정권은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영역인 언론 자유 침해 및 검찰권 남용, 환경과 과학의 영역인 4대강 사업까지, 모든 것을 진영 논리로 호도했다. 이런 문제가 있으면 한쪽 지식인들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다른 한쪽의 지식인들은 상대방을 통째로 매도해왔다. 이런 현실을 지적知的인 기준에서 평가한다면, 한국의 보수는 무지하고 한국의 진보는 편향되어 있다는 게 나의 솔직한 평가다.
이 책을 준비하다 보니 세상을 낙관했던 내가 어느덧 비관론자로 변해 있는 듯해서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1968년은 젊은 나에게 큰 영향을 준 해였다. 북베트남군은 구정舊正 대공세를 취했고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은 전쟁 실패를 인정하며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신좌파New Life 운동이 서유럽과 미국의 캠퍼스를 흔들었고,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가 암살당했다. 1971년에는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 ‘베트남 전쟁 비록The Pentagon Papers’이 발표돼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1972년 미국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발생했던 워터게이트 사건이 《워싱턴 포스트》에 의해 폭로되어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이 사임해야만 했다.
1975년 남베트남은 패망했고, 우리나라에도 안보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내가 학부생이던 1970년대 초부터 동숭동 캠퍼스는 민주주의 열기로 뜨거웠다. 나는 학부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미국 대법원에 대해 공부했다. 얼 워런Earl Warren 대법원장이 이끄는 진보적 대법원이 판결을 통해 미국 사회를 바꾸어놓는 데 감명을 받았고, 동시에 그런 대법원을 비판한 사법 보수주의자 알렉산더 비켈Alexander M. Bickel 교수의 책을 읽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진보적 대법원을 공부하다가 보수 법학자에게 매료된 것이다.
나는 지미 카터Jimmy Carter 대통령의 실패를 통해 ‘진보’를 표방하는 정권의 무능을 보았다. 카터는 외교에 실패했고 경제에서도 실패했다. 중남미에 반미 정권이 들어섰고, 이란에는 근본주의 이슬람 정권이 들어섰으며,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카터는 인플레이션, 석유 위기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 결과 카터는 1980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에게 참패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는 외교를 정비하고 경제 회복 정책을 통해 미국이 특별한 나라라는 것을 다시 인식시켜 주었다. 페기 누넌Peggy Noonan은 미국에 “다시 아침이 왔다Morning Again”고 했다. 190년대 미국이 로널드 레이건의 시대였다면, 1980년대 영국은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의 시대였다. 대처는 방만한 공공 부분을 개혁하고 강력한 탄광 노조를 제압했으며, 포클랜드전쟁에서 승리하여 영국의 자존심을 지켜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1983년에 귀국하여 중앙대학교에 자리를 잡은 나는 세상을 낙관했다. 1980년대 들어서 자유 진영은 다시 승리하고 있었고, 세계 경제도 점차 나아지고 있었나. 나는 우리나라 경제에 대해서도 낙관을 했다. 문제는 물론 민주화였는데, 1987년 6월 사태를 거쳐서 민주 헌법이 제정될 수 있었다. 1988년 미국 선거에서 공화당의 조지 H. W. 부시George H. W. Bush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보수의 전성시대를 이어갔다. 그리고 1989년 가을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된 것이다. 레이건이 1987년 6월에 베를린에서 했던 연설이 현실이 된 것이다.
1990년대는 냉전이 끝나고 찾아온 좋은 시절이었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해서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 군대를 섬멸했다. 그리고 미국이 추진하는 세계화 물결이 일었다. 세계경제는 IT 붐에 힘입어 호황이었고, 교역 자유화와 지구환경 문제가 세계적 이슈로 등장했다. 국제환경법과 국제경제법을 미리 공부한 준비된 전문가인 나는 국내외 회의에 참석하고 정부에 자문하는 등 무척 바빴다. 하지만 1990년대의 번영은 빨리 끝났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말이다. 1997년 경제 위기로 인해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가 금융개혁을 하지 못했고 부실기업 문제도 해결하지 못해서 그런 사태를 초래한 것이다.
1989년 초 레이건은 성공적인 8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1990년 말에는 대처가 11년 동안의 총리직을 마감하고 물러났다. 1992년 선거에서 조지 H. W. 부시는 전후 세대인 빌 클린턴Bill Clinton에게 패배해서 재임에 실패했다. 번영의 1990년대를 이끌었던 클린턴은 윤리 의식이 부족한 ‘포스트모던’한 대통령이었다. 그 결과 2000년 대선에서 보수가 다시 결집하여 조지 W. 부시George W. Bush를 당선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부시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그가 전쟁 대통령War President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1990년대가 냉전과 ‘테러와의 전쟁’ 사이에 잠시 있었던 태평성대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 것이다. 2001년 9월 11일, 일단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납치한 민간 항공기 두 대를 뉴욕시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들이받아서 폭파시켜 버렸다. 그들이 납치한 항공기는 미국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에도 추락해서 큰 피해를 냈다. 인명 피해도 중대했지만,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이 처참하게 무너졌고 미국 군사력의 상징 역시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었다.
그날 이후 세상은 보다 적대적이고 위험한 곳으로 바뀌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이어서 이라크도 침공했다. 그러나 미국이 10년 넘게 벌인 ‘테러와의 전쟁’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아직도 건재할뿐더러 오히려 세력을 넓혀가고 있지만, 반면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피폐해졌다. 전 세계에 걸쳐 반미 감정이 팽배해졌고, 미국 자체도 분열되어 갔다.
21세기 들어서 ‘세계화’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선진국에서는 제조업이 경쟁력을 잃고 쇠락의 길을 갔으며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전 세계적으로 저금리 시대가 도래하더니 값싼 크레디트에 맛을 들인 개인과 탐욕스러운 금융자본은 신용 공황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중국, 그리고 이란은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자유 진영의 영향력이 쇠퇴하자 힘을 앞세운 나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가는 셈이다. 로버트 케이건Robert Kagan의 표현을 빌자면 “역사가 돌아온 것”이다.
내가 10년간 공부하고, 30년간 연구하면서 가르친 분야는 법法이었고 그중에서도 환경과 자원에 관한 법이었다. 하지만 젊었을 적부터 관심이 많았던 세계 역사의 흐름과 미국 정치에 대한 공부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나는 알렉산더 비켈로부터 사법 보수주의Judicial Conservatism를 배웠고, 윌리엄 버클리William F. Buckley, Jr.가 이끈 지적 보수주의 운동Intellectual Conservative Movement에 감명을 받았다.
조지 W.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벌일 때 우리나라에는 진보를 표방한 정부가 들어섰는데, 나는 그 정부가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우리나라에도 합리적이고 지적 배경이 있는 보수정권이 들어서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2007년 한나라당은 나라를 망칠 것이 뻔한 사람을 대통령 후보로 뽑았고, 그는 결국 대통령이 돼서 4대강 사업이니 뭐니 하면서 임기 내내 나라를 시끄럽게 했다. 나는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합리적인 보수정책을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나라를 잘 이끌어갔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어떻게 인연이 닿아 2012년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이 되어 대선에 이르는 정치 과정에 참여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상황을 보아하니 박근혜정권이 성공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합리적 보수정권이 되기 위한 모든 약속을 파기했으니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2008년 선거에서 미국인들은 검증되지 않은, 그러나 연설과 토론을 무척 잘하는 버락 오바마Barak Obama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공화당 정권은 이라크전쟁에서 실패했고 또 경제마저 망쳤으니 민주당의 승리는 당연했다. 21세기는 ‘미국의 세기’가 될 것이라면서 “역사 발전은 끝났다”고 호언장담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2006년에 나온 《기론에 선 미국Amercia at the Crossroads》에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음을 인정하고 미국의 보수는 광야에 가서 수련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시 정부의 실책이 워낙 커서 공화당이 정권을 다시 찾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미국의 보수는 티파티Tea Party 운동을 두고 자체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형편이다.
많은 사람들은 21세기가 풍요와 평화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기대는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나 또한 냉전을 종식시키고 시작하는 새로운 세기에 많은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21세기의 15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생각할 때, 앞으로 우리와 우리의 문명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앞선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과격 이슬람이 야기하는 문제가 가장 심각하고 서방의 경제 위기 역시 쉽게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다문화주의의 함정에 빠져서 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한 유럽은 세계의 문제는커녕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능력마저 상실했다.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격차가 더 커졌고, 한 나라 안에서도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등 실패하는 나라가 늘어나고 있고 아프리카는 대륙 전체가 그런 상황으로 가고 있다.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으며, 이제는 문제를 풀고자 하는 의지마저 사라져가고 있다. 닥쳐오는 난국을 애써 외면하면서 당장의 안락에만 몰두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인 것 같다.
그래도 미국의 양식 있는 지식인들은 자기 나라의 미래와 서방 문명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갈 길을 잃어버린 심정이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존중하면서, 합리적인 정책을 가지고, 국민을 화합으로 이끌 수 있는 보수정부가 우리나라에 들어설 가능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지난 7년 동안 미국과 한국에서의 ‘보수의 실패’를 보면서 내가 읽었던 책을 정리하고, 그 책에서 다룬 주제에 대한 나의 생각을 더한 책이다. 이 책에 소개된 책 중에는 내용이 무겁고 깊은 책도 적지 않은데,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한 책들이 그런 편이다. 몇몇은 국내에 번역·소개되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번역되지 않았고 번역하기도 어려운 책들이다.
이 책이 자신을 ‘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보수정책이고, 어떤 것이 보수철학인지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또한 자신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이 책에서 소개한 100권의 책이 다루고 있는 시기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개시한 후부터 2008년 시작된 경제 위기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했던 2013년까지이다. 이 책을 읽고 보다 깊이 있는 정보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가급적 원서 읽기를 권하고 싶다. 국내에 소개된 책 중 몇몇은 엉뚱한 제목으로 나와 이씩도 하고, 번역 과정에서 원 저자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치와 사회, 그리고 중동 정치에 관한 책은 시장성이 희박한 탓인지 깊이 있고 좋은 책이라도 번역되지 않은 게 많다.
무려 7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의 출판을 기꺼이 맡아주고 편집에 애써준 책세상 여러분들게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이 지면을 빌려 아버지 고故 이승우 님에 대한 추억과 어머니 고계본 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자 한다.
2014년 9월
이 상 돈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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