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필요한 건 명함이 아닙니다
최근 문용린 교육감이 엉뚱하게 명함 타령을 하고 있다. 문 교육감은 강연에서 교사들이 명함을 만들지 않는 것이 바로 교사들이 위축되어 산다는 점을 보여 주는 징표라고 하면서 “교사들의 프라이드pride(자긍심) 찾기”의 상징적인 방편으로 ‘명함 만들기’를 제안했다. 아울러 “선생님들이 명함으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드러내고 긍지와 품위를 세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밝히면서, “교사가 자신감을 가질 때 우리 아이들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교사들이 자신감을 가져야 하며, 위축된 교사들의 어깨를 펴 주어야 한다고 한 주장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또 명함 파는 것 자체를 가지고 시비할 일도 아니다. 교육청에서 교사들 명함을 파 준다면, 그거야 전혀 나무랄 일이 못 된다. 문제는 이 명함론 저변에 깔린 현실인식이다. 문 교육감은 이 명함 논란과 관련하여 현재 교직사회에 대해 큰 오해를 두 가지 범하고 있다. 첫째, 교사들이 자기가 교사라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위축되어 있다는 인식, 둘째, 그 원인이 교사들 스스로의 마음가짐, 즉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자각이 부족하다는 것에 있다는 인식이다.
실제로 교사들이 스스로 위축되고 심지어 사회적 열등감을 느끼기까지 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산업 개발이 한창이던 1970~1980년대의 일이다. 물론 문 교육감이 주로 활동적으로 살았던 시기가 그 무렵이라는 점과 현재 그의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교육관료들이 가르치는 일에서 벗어나고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교사들에 대해 오해하는 것을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서울 교육의 수장이라면 실제의 교사, 현실 속 교사의 목소리를 듣고 정확한 판단을 해야 한다.
1997년 이래 교직에 입직한 교사들 중 교사라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고, 밝히기 싫어하거나 위축되어 있는 교사는 거의 없다. 또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없다. 그들은 오히려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는 20~30대 교사들이 전교조 가입을 꺼리는 이유도 전교조가 교육보다 정치 중심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다. 문 교육감이 생각하는, 열등감을 느끼고 사회적으로 위축되고 역할에 대한 자각이 없는 교사세대는 이미 퇴직하거나 아니면 교육관료가 되어 문 교육감 주변에 포진한 지 오래다.
물론 교사들은 명함이 없고, 교수들은 명함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교사들에게 명함이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학교에서 만들어 주지 않으며, 또 만들어 봐야 구태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교사들은 교수들과 달리 이런저런 규정으로 인해 사회적, 정치적 활동이 심각하게 제약되어 있다. 그들의 활동공간은 학교, 집, 그리고 공공 도서관 정도다. 명함을 돌릴 이유가 없다. 이렇게 별 쓸모도 없고,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 명함을 구태여 자기 돈들여서 만들 교사가 얼마나 되겠는가?
물론 지금 교사들이 자존감과 자신감을 많이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 학교의 현실은 교사들이 자존감과 자신감을 갖지 못해서 문제가 아니라, 자존감과 자신감을 가져도 그것을 꺾어 버리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젊은 교사들은 교직에 입직할 때 자신감이 충천해서 들어온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수능 4개 영역이 모두 1~2등급이라야 교대에 갈 수 있는데, 거기서 다시 좁은 관문을 통과한 대한민국 5퍼센트라는 자존감과 자신감에 가득 찬 젊은이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이 자긍심을 상실하고 자괴감 속에서 한탄하게 만드는 데 채 한 달이 걸리지 않는 것이 학교 현실이다.
보수나 처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요구되는 일의 성격과 구조 때문이다. 그들은 교사의 역할에 대해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 가르치고, 연구하고, 관계 맺는 일이 바로 그것이며, 교대에서도 사대에서도 내내 그것만 준비해 왔고, 임용고시에서도 면접에서도 그 이야기만 했다. 그런데 막상 학교에서는 그들이 갈고닦아 온 가르치고, 연구하고, 관계 맺는 능력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새 교육과 무관한 이런저런 행정문서 셔틀이나 각종 전산입력 시스템의 클릭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에 무슨 자신감과 역할 자각이 있겠는가?
교사더러 연구하지 않는다며 사회적 질타는 쏟아진다. 그러나 정작 방해받지 않고 연구할 공간 하나 없고, 말단 행정직처럼 좌석이 배치된 교무실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이 시간만 잡아먹는 형식적인 페이퍼에 파묻혀서 시간을 다 빼앗기고 있다. 자신감이니 역할 자각이니 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감정에 불과하다.
10년, 20년을 꾸준히 학생들을 가르치며 방대한 노하우를 쌓아 온 교사라 할지라도, 그런 것에 대해서는 어떤 사회적 인정도 보상도 없다. 교장, 교감이 아니며, 하다못해 한낱 보직에 불과한 부장교사조차 아니면, 그는 교육과 무관한 행정 위주의 부서에 편성된 일개 계원으로 취급받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무슨 자신감이며 역할 자각인가? 설사 명함에 ‘사회교사, 교육학박사(사회통계 전공)’라고 써 놓고 역할을 자각하더라도, 학교가, 사회가 그 명함에 박힌 역할대로 취급하고, 보상하고, 인정해 주는가? 괜히 명함 팠다가 인지부조화, 더 나아가 정신분열증 걸리기 십상이다.
현실은 참혹하다. 학생들이 사랑하며 잘 따르는 백발의 노교사가, 교사는 가르치는 직업이라 생각하여 가르치는 일 외에는 한눈팔지 않았던 것이 후회되며, 교육보다는 행정에 더 열중했던 사람들이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되어 자신을 깔보고 마구 대할 때 무력하기만 한 자신의 모습에 인생의 회의가 느껴진다고 하는 판이다. 이게 그 교사가 자신감이 부족하고 역할 자각이 안 되어서인가? 아니면 명함을 안 파서인가?
어디 이뿐인가? 교사를 양성하는 교대, 사대에서조차 20년간 무수한 수업모형을 개발하고, 엄청난 교육 노하우를 축적하고, 박사학위까지 소지한 교사를 인정하지 않는 판국이다. 명색이 교원양성기관의 교수들 입에서 교사가 바로 교수가 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으니, 한 다리 더 거쳐서 와야 한다는 식의 발언이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실정이다. 법대 교수가 변호사를, 의대 교수가 의사를, 그리고 그들의 경험과 축적된 노하우를 이런 식으로 홀대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이렇게 학교 안팎으로 교사의 자신감을 꺾는 기제가 널려 있는 판에 그까짓 명함 한 장 있고 없고가 무슨 문제이며, 무슨 징표씩이나 되겠는가? 유능한 교사의 자존심과 자신감은 교실에서 한껏 고양되다가 교무실만 내려오면 땅바닥에 곤두박질치며, 교문 밖으로 나가면 땅속으로 들어갈 지경이다. 20년 이상 훌륭한 교육경력을 쌓아 온 교사들은 되도록이면 교장, 교감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다. 비교육적인 이유로 교육자로서의 자존감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들은 학교 안에서 은둔자가 되어 간다.
물론 교사들이 자신감을 잃어 가는 현실에 대한 문 교육감의 안타까운 심정은 백배 공감한다. 그러나 그것을 교사 스스로 마음가짐을 고쳐먹음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심지어 명함에 새겨진 자기 역할을 보면서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인과관계를 거꾸로 뒤집은 것이다.
지금 교사들은, 특히 자신감과 역할 자각이 잘된 교사들은 자신들에게 학교와 교육당국이, 전문직이라고 써 놓고 말단 행정직이라고 읽는 기만과 희롱을 하고 있다는 참혹한 느낌 속에 있다. 이 깊은 상처에 대한 힐링은 전시회를 하고 콘서트를 여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에 충실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이는 교사들이 교감, 교장이 되는 것을 승진한다고 여기지 않고 교육을 지원하기 위한 일을 한다고 여기는 교육체제, 교사가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의 90퍼센트 이상이 가르치거나 가르치는 것을 준비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교육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일들에 대한 계획과 비전 없이 공연히 명함 이야기를 꺼낸다면, 학교마다 명함 만들자면서 소동만 일어나고, 명함 만드는 잡무만 늘어날까 걱정된다. 교육감의 현실적인 판단을 기대한다. (2013. 4)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