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주
두문불출한 채 낯빛이 누렇다
수행하는 걸까
숨죽인 채 덮어쓴 이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띄운 지 얼마나 되었을까
추위에 갈라터져
메마른 표정에 금이 갔다
너무 오래 묵힌 건가
햇볕도 쬐어야 하건만
방치된 늙은 세월
짚이라도 엮어 자신을 달아매고 싶다던 독거노인
소식 없는 자식들
오지 않는다
흰 곰팡이 검게 피어도
동안거해제를 알리려는지
닫혔던 방문이
활짝 열렸다
이윽고
낯선 사람들 손에
노인의 관이 들려 나왔다
시취가노인의 죽음을 제일 먼저 알렸다
모처럼
노인은 햇볕 쬘 수 있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에스컬레이터의 기법
30도의 기울기란
마음이 먼저 쏟아지지 않는 경사
알 수 없는 자력이 몸을 곧추세운다
그냥 밟고만 있어도
높이가 커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굳이 거슬러 내려가지 않고
계단의 물결에 발을 맡길 것이다
거슬러 오르는 멋진 오류는 연어의 일
한계단씩 베어 먹은 사람들의 높은 입
그들은 먹이를 얻기 위해 날마다 입을 벌린다
외마디 비명도 없이 공중에 떠 있는 현기증
어떤 뒷모습이라 할지라도 바라보면 쓸쓸하고
꼭 그만큼만 보여주는 생의 짧은 치마
넘치지 않는 저울질로 평등하게 내려놓고
빈 계단만 층층이 접히는 지평선
맞물린 관계 속에
서로 먹고 먹히는 다정한 세계
기울어진 생계를 떠안고
마음이 쓰러지지 않게
흙이 묻지 않는 보법으로 반복되는 생성 소멸
오늘밤
달은 발자국 남기지 않고 가던 길을 갈 것이다
11월
눈앞의 먹잇감마저 손쉽게 놓쳐버려
동공이 텅 빈 자들은 얼마나 선량한가
불안이 또렷해지는 밤일수록 갈 길은 멀어
어느 것 하나 분명하지 않은 헐거운 나날
지난 시간은 기억할 수 없어 흐린 날인 거다
낯선 이국의 밤을 보내는 것만 같아
한장 남은 계절을 두고
고양이는 검게 울더라
비의 목록
손바닥에 닿으면 부러지는 연약한 비
비가 거리의 목록에서 노점을 지웠다 오늘은
가난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산을 펴자 비가 우산 위로 사납게 달려들었다
우산은 우산 크기만큼만 비를 가려주었다
온다는 소리 없이 집집마다 비가 다녀갔다
섭섭하지만 비를 뒤쫓아갈 필요가 없었다
훗날을 기약하며 보내주기로 했다
비를 모금함 속에 모아두는 엉뚱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사람을 불러모으는 재주를 가진 노점이 사라진 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에 스며들었는지
한산한 거리가 비로 시끌벅적했다
비에 쫓겨난 봄꽃은 어디서 보상 받을는지
생계가 막막해진 봄꽃이
뿔뿔이 자취를 감추었다
손바닥에 닿으면 부러지는 연약한 비에도
바퀴의 노동은 멈추지 않고, 내일도 모르고 앞만 향해 자꾸
달려간다 이런 날, 바퀴도 없이 미끄러지는 사람이 꼭 있더라
저만치 자신을 내팽개치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비가 거리의 목록에서 이제 웃음조차 지우려 한다
오늘은 비의 목록에 따뜻한 위로가 추가되어야 할 것 같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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