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가 불탔으니 이로써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
천사는 머물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_발터 벤야민
살아오면서 몇 번, 조금 있으면 무슨 일인가 벌어질 텐데 그러고 나면 이전의 나로 돌아가지 못하리라 예감할 때가 있었다. 그 한 번은 1989년 2월, 대입 후기시험 합격자 발표를 보기 위해 혜화역 4번 출구의 기나긴 통로를 걸어갈 때였고, 또 한 번은 1994년 4월,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에 내 소설이 당선됐다는 연락을 받고 출판사 앞까지 찾아갔다가 차마 올라가지 못하고 일층 카페에 앉아 있을 때였다. 두 번 다 느낌은 거의 비슷했다. 어떻게 되나 한번 해본 건데, 이렇게 덜컥 (합격/당선)될 줄이야. 이거 어떡하지? ……뭐, 그런 느낌. 지금 생각하면 뭔가 일이 되려면 그런 느낌이 먼저 들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암튼 고민 끝에 ‘에라, 나도 모르겠다. 일단 가보자’며 그 일을 받아들였는데, 그렇게 해서 오늘날 나는 이렇게 ‘소설가의 일’을 쓰는 사람이 됐다는 이야기.
그때의 일들은 삶을 바라보는 내 방식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인생이라는 게 뭐 그따위!’라는 걸 깨닫게 된 게 가장 큰 소득이라면 소득이랄까. (역시, 이따위 소득 같은 거 바라지도 않았건만, 어쨌거나.) 대학 신입생 때 나는 학교 수업을 거의 빼먹고 도서관에서만 지냈는데,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치고 말하자면, 그건 공부하기 싫어서 그랬다기보다는, 우연히 영문학과에 들어온 나의 성적이 고교 시절 내내 영문학과를 목표로 공부한 친구들보다 더 좋다는 건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는, 무척 이치에 맞는 생각이 있어서, 라고는 절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건만, 역시 믿거나 말거나. 암튼 일찌감치 인생의 묘미는 뭔가 일이 벌어지는 데 있으며, 그러고 나면 예전과는 다른 삶이 전개되는 데 있다는 걸 알게 된 덕분에 나는 공부보다는 소설 쪽에 걸맞은 인간으로 바뀌어 간 것이다.
그 깨달음은 어떻게 나를 소설에 걸맞은 인간으로 만들었는가? 그건 이런 뜻이다. 누누이 말했다시피 소설을 쓰는 대부분의 시간은, 그러니까 내 경험으로 창작의 대략 팔십 퍼센트는, ‘아, 잘못 썼구나’라는 걸 깨닫는 시간이다. 내 인생이 애초에 원했던 대로 제대로 풀렸다면 그런 시간을 내가 버틸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여기까지는 뭐 다들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고, 더 중요한 건 그 다음부터다. 때로는 ‘아, 잘못 썼구나’라고 생각한 뒤에도 계속 쓰는 경우가 있다. 내가 가려고 했던 길이 아닌데도 어쨌거나 계속 간다는 소리인데, 그렇게 해서 내가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던, 하지만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담하고도 훌륭한 소설을 쓴 적이 몇 번 있다. 이 지경이 되고 보면, 도대체 실패란 무엇이고 성공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한 인간이 소설가가 된다는 게 어떻게 보면, 그러니까 인생 계획을 세워서 착실하게 하나하나 이뤄가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일 수도 있다는 건 다른 작가들도 모두 아는 모양이다. 얼마 전 작업실까지 걸어가면서 『대산문화』라는 잡지를 읽는데, 함정임 선배가 자신의 데뷔 시절에 대해서 쓴 글이 있었다.
1990년 1월 1일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신춘문예 발표 공지란에 동시에 이름이 올라가기 전까지 나는 소설가가 되어 살리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당선 소식을 듣던 그날 아침을 생각하면 거짓말처럼 믿어지지 않을 뿐이다. 소설 습작이라고는 제대로 해본 적도 없었고, 어쩌다, 안에서 밀어내는 어떤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시보다는 좀더 긴 문장으로, 어떤 형상을, 어떤 사태를, 어떤 부끄러움을 누구에게 고백하듯이 썼을 뿐인데, 당선이라니. 이렇게 소설가가 되어도 되는가. 기쁨보다는 당혹스러움이 앞섰다. 폴 오스터가 말했던가. 작가가 되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는 선택되는 것이라고.
이렇게 소설가가 되어도 되는가? 아리따운 함정임 선배님의 이 진지한 질문에 대답할 자격이 있다면, 나는 “소설가의 인생이라는 게 원래 뭐 그따위! 인가봅니다요”라고 말하겠다. 소설가로 향하는 다리를 건넌 뒤에 나는 되돌아갈 수 없게 다리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나는 소설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대부분의 인생에서도 그게 다리였는지도 모르고 지나가고, 그러고 나서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뒤늦게 그게 다리였음을, 그것도 자기 인생의 이야기에서 너무나 중요한 갈림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 게 아닐까? 여기에 뭔가가 있었다.
1999년 이미 두 권의 책을 펴낸 나는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편의 소설만 더 써보기로 했다. 인생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을 닮은 소설, 그러니까 지나가고 난 뒤에야 앞부분의 어딘가에 결정적 순간이 있었음을 깨닫고, 모든 이야기를 다시 쓰는 그런 소설을 말이다. 그렇게 해서 쓰게 된 소설이 『꾿빠이, 이상』이다. 이상의 삶은 그가 도쿄에서 죽은 뒤에 천재의 삶으로 완전히 다시 쓰여졌다. 이상에게 결정적 순간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그가 경성고공 졸업앨범에 ‘箱’이라는 웃긴 이름으로 자신을 표현하던 순간이나 남들이 모두 선망하는 총독부 기수의 자리를 그만두고 총독부에서 나오던 순간, 혹은 배천온천에서 피부가 까맣고 몸집이 작은 여자 금홍을 만나는 순간이 아닐까. 처음에 그 순간들은 다른 순간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했으나, 이상이 죽고 난 뒤에는 그런 결말로 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결정적 순간들이 됐다.
이야기 작법에서는 예상치 못한 결론으로 이르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이런 지점들을 플롯 포인트plot point라고 부른다. 플롯 포인트는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키는데, 대개의 이야기에는 두 개의 큰 플롯 포인트가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3막 구조인 셈이다. 시드 필드 같은 시나리오 작가는 모든 영화는 시작하고 삼십분이 지날 무렵에 첫 번째 플롯 포인트를 지난다고 말한다. 대개 백이십 분짜리 영화라면 첫 플롯 포인트는 삼십 분에, 두 번째 플롯 포인트는 구십 분쯤에 있다. 이 지점을 지나면 이야기의 방향이 크게 바뀌면서 주인공은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특히 첫 번째 플롯 포인트를 가리켜 ‘돌아갈 수 없는 다리’, 혹은 ‘불타는 다리’라고도 부른다. 1막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은 어떤 사건을 경험하는데, 그러고 나면 다시는 예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서사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산다. 처음에는 그냥 닥치는 대로 살고, 그다음에 결말에 맞춰서 두 번의 플롯 포인트를 찾아내 이야기를 3막 구조로 재배치하는 식으로 한번 더 산다. 인생이 그렇다면, 소설도 마찬가지겠지. 그렇게 해서 소설은 원래 두 번 쓰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강연에서 이런 말을 하자, “처음부터 잘 쓰지 그랬냐?”라는 사람도 있더라. 그런 말을 들으면 그런가 싶어서 그 사람 얼굴을 쳐다본다. 인생 처음 살면서 ‘지금이 내 인생의 첫 번째 플롯 포인트로구나. 이 불타는 다리를 지나면 돌이킬 수가 없으니 최선을 다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기 있구나 싶어서. 처음부터 잘 쓰지 그랬냐고? 아직 결말을 모르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잘 쓰나? 마찬가지다. 내 인생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무슨 수로 처음부터 잘 살겠나? 소설을 쓰는 일은 ‘인생이라는 게 원래 뭐 그따위’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는 일로 시작한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처음부터 잘 사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그건 소설도 마찬가지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소설은 시작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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