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뚫린 원전 안전시스템
2011~2012년 한국의 프로스포츠계가 발칵 뒤집혔던 시기다. 2년 사이 잇달아 승부 조작 사건이 터졌다. 2011년 6월 프로축구 K리그, 2012년 2월 프로배구 V리그, 2012년 3월 프로야구 등 한국을 대표하는 스포츠 분야에서 승부 조작 사건이 줄줄이 발견돼 스포츠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승부 조작은 특정 선수들이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자들과 짜고 경기 중 일부러 실수를 하는 식으로 공공연히 자행됐다. ‘페어플레이’의 신화가 산산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고작 몇백만 원에 경기연맹, 구단, 심판 등 한국 프로스포츠의 역사가 훼손되고 시스템이 뚫렸다. 승부 조작에 가담한 선수들은 퇴출됐지만 프로스포츠가 팬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이 시기 한국의 원전 안전시스템도 논란이 되었다. 2012년 2월 고리원전 1호기 정전 은폐사고가 ‘인적 오류와 안전 불감증’때문이었다면, 같은 해 드러난 원전 부품 납품에 얽힌 일련의 사건들은 그 배경에 ‘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부정부패, 비리, 안전 불감증…. 한수원의 30여 년 역사 동안 쌓인 문제들이 양파껍질처럼 벗겨도 벗겨도 계속 터져 나왔다.
승부 조작은 해당 선수를 퇴출시키면 그만이다. 피해자도 많지 않다. 하지만 원자력은 다르다. 원전은 수백만 개의 부품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돌아가는 거대한 시스템이다. 부품 하나에 수십, 수백만 명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중고·짝퉁 부품으로 돌아가는 원전
고리원전 1호기 정전 은폐 사고의 충격이 채 가시기 전인 2012년 4월 25일, 울산지방검찰청(이하 울산지검)은 고리원전 3호기에 정품이 아닌 ‘짝퉁’ 부품이 설치돼 사용 중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표한다. 이 과정에서 한수원 고리원전본부 직원이 운전 부품인 ‘밀봉 유니트’를 울산의 한 기계 제작업체로 빼돌리고 그 대가로 수천만 원을 받은 사실도 드러난다. 밀봉 유니트는 원자로내부 계측기에 들어가는 부품으로 원자로 중성자 검출기의 이동용 안내관을 밀봉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정품이 아닌 복제된 제품이 2010년 5월 정식 계약을 통해 고리원전 3호기에 설치된 것이다. 검찰 발표 뒤, 한수원은 재빨리 해명 자료를 내놓는다.
한수원의 설명은 “외국 제품을 빼돌려 모방한 것은 맞지만 국내 업체가 기술을 개발해 특허를 받은 정품이다. 전문기관에 안전 검증도 받았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역시 안전에는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로 ‘억울함’마저 느껴진다. 억울함은 ‘개발 선정품’이라는 표현에서 강하게 읽힌다. 해외에서 매번 수입해야 하는 부품을 한수원과 국내 업체가 손을 잡고 국산화시켰으니 칭찬받을 일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외국산 제품보다 기능도 뛰어나고, 제품 가격은 외국산보다 20% 정도 저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해명에는 국가 주요 시설의 부품이 외부로 빼돌려졌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돈이 오갔다는 사실이 가려져 있다. 정품을 써도 고장과 사고의 위험이 상존하는 게 원전이다.
심지어 다섯 달 전인 2011년 12월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고리 원전에 주요 기기 부품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한 번 사용된 중고품을 새 부품처럼 사용한 것이다.
부산시 기장군 고리원자력발전소가 주요 기기의 부품을 교체하면서 한번 사용된 중고품을 새 부품처럼 사용한 사실이 드러나 검찰이 수사를 벌이고 있다. 이에 따라 여러 차례 고장을 일으킨 고리원전의 안전성 문제가 다시 불거질 것으로 보인다.원전을 운영하는 한국수력원자력 관계자는 5일 “고리 제2발전소에 터빈밸브 작동기를 납품하는 업체 사장과 원전 직원이 서로 짜고 중고 부품을 납품했고, 이 가운데 일부가 사용됐다”며 “직원 진술과 물품 서류 등을 통해 이를 확인했다”고 말했다.경쟁 업체로부터 납품 비리를 진정 받은 부산지검 동부지청은 해당업체를 압수수색하고 고리원전으로부터 자료를 제출받았다. 이 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고리원전 신○○ 과장과 발전 설비 제조업체 ㅎ사의 황○○ 사장은 자취를 감췄다. 검찰은 이들에 대해 출국 금지조처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한수원, 납품 업체, 검찰 등의 말을 종합하면, 고리원전 3·4호기를 운영하는 제2발전소는 2008~2010년 ㅎ사로부터 모두 3차례 32억여 원 어치의 터빈밸브 작동기를 납품받았다. 터빈밸브 작동기는 원자로에서 만들어진 증기를 조절해 터빈으로 보내는 구실을 한다. 원전 한 기당 작동기가 20개 설치돼 있다.ㅎ사는 납품 과정에서 원전 직원과 짜고 덮개 구실을 하는 ‘칼럼’과 배관 구실을 하는 ‘매니폴드’를 교체할 때 이미 사용된 뒤 원전 창고에 보관 중이던 중고품을 새 제품 대신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담당 직원은 작동기의 핵심 부품인 ‘스프링’을 교체할 때도 납품을 받지 않고 원전에 보관 중인 제품을 사용했다. 그러나 한수원은 스프링은 중고품이 쓰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중략)
두 사건은 원전 부품 납품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한지, 여기에 대한 한수원의 인식 수준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준다. 두 사건 모두 한수원 내부 검증 시스템에서 걸러내지 못하고, 외부 업체의 진정이나 검찰 수사로 세상에 알려졌다. 한수원과 다수의 ‘하청업체’로 이뤄진 구조에서 ‘갑’인 한수원 직원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돈을 챙길 수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그들만의 리그’인 원전 생태계에 대해서는 이 책의 2부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문제는 이전에도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했으리라는 것이다. 검증되지 않은 부품들이 얼마나 많이 우리 원전에 설치되었을까. 울산지검은 2012년 7월 10일 납품 편의를 봐주고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한수원 간부 22명을 기소했다. 한수원 처장급(1급) 2명 등 본사 간부 6명과 고리, 영광, 월성 등 지역 원전에서 근무하는 현장 실무팀 간부 16명이 포함됐다. 당시 울산지검은 언론에 “이들이 주고받은 뇌물은 총 22억 2000여만 원으로 한 사람당 평균 1억 원이 넘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원전을 둘러싼 ‘비리 복마전’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부품 품질조차 위조, 5년 동안 흘러다닌 미검증 부품
홍석우 지식경제부 장관은 고개를 떨구는 일이 잦았다. 2012년 11월 5일 오전에도 그는 지식경제부 1층 기자실로 내려와 또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번에는 품질검증서가 위조된 미검증 부품이 최소 5년 동안 대량으로 원전에 공급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해당 부품을 교체하기 위해 각각 100만㎾ 규모인 전남 영광원전 5·6호기의 가동이 중단됐다.
지식경제부는 “원전 부품 납품업체 8개사가 제출한 해외 품질 검증기관의 품질검증서 60건이 위조된 것을 외부 제보로 확인해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수원의 품질관리 시스템 전반을 종합적으로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8개월 전 고리원전 1호기 정전 은폐 사고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때였다. 더구나 겨울을 앞둔 11월에 멈춰 선 원전은 겨울철 전력 수급에 경고등이 들어오는 것을 뜻했다. 시민들은 직장과 사무실에서 난방온도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절전 스트레스’를 겪을 수밖에 없게 됐다.
당시 지식경제부 발표를 보면, 제대로 검증을 받지 않은 채 원전에 납품된 제품은 5년(2008~2012년) 동안 모두 237개 품목 7682개 제품, 8억 2000만 원 규모였다. 영광원전 3~6호기와 울진원전 3호기 등 실제로 원전에 사용된 부품은 136개 품목, 5233개 제품이었다. 물론 이 숫자는 추후 조사가 이어질수록 늘어났다.
김종신에 이어 한수원 사장을 맡은 김균섭은 “문제가 된 제품은 원전의 격납용기 내부의 핵심 안전 설비에는 사용되지 않는 품목이어서 원전 사고의 위험은 없다. 문제 부품이 90% 이상 광범위하게 사용된 영광 5·6호기의 전반적인 안전점검과 부품 교체를 위해 가동을 정지하겠다”고 말했다.
이 사건 역시 한수원과 원전 운영을 감독하고 규제하는 원자력안전위원회,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등이 자체적으로 파악한 내용이 아니었다. 외부로부터 전해진 제보였다. 사건과 연루된 8개 업체 가운데 한 업체가 “경쟁사들이 품질검증서를 빠른 시간에 받는 것이 의심된다”며 한수원에 제보하면서 사건의 실체가 드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보통 미국 기관을 통해 받는 품질검증서는 발급까지 적어도 한 달 정도 걸리는데, 특정 업체만 예외였으니 업계에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2012년 9월 21일 제보를 접수한 한수원 감사실은 자체 조사를 시작했다. 사건의 전말을 대략 파악한 시기는 11월 1일쯤이었다. 취재 과정에서 한수원 감사실 관계자는 자체적으로 조사한다는 점을 유독 강조했다. 그러면서 전담 조직을 만들어 전수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제보 없이 한수원이 자체적으로 조사를 시작할 수 있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문제가 된 부품은 퓨즈, 온도 스위치, 다이오드, 냉각팬 등 일반 산업 기계에도 쓰이는 품목들로 원전의 핵심 설비를 보조하는 소모품들이다. 모두 미국, 유럽에서 수입하는 부품들로 해외(주로 미국) 품질 검증기관에서 기술평가와 성능실험을 거친 뒤 입찰 등을 통해 납품된다.
원전에 사용되는 안전성 품목(Q등급이라고 부름)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데, 문제가 된 곳은 수입 대행업체들이다. 그중 서울 강남구에 있는 한 업체를 가보니 10평 남짓 넓이의 사무실에 책상 몇 개가 전부였다. 대부분의 수입 대행업체는 이처럼 영세한 경우가 많았다. 이들에게 품목당 300만 원이 드는 검증 비용과 국외 체류 비용, 검증 시간 등이 부담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브로커를 통해 품질검증서를 위조하는 거에 대한 유혹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한수원은 “미검증품은 모두 원자로 격납 건물 외부에 있는 보조설비에 사용됐으며, 원전의 ‘다중화 시스템’이 부품의 오작동을 감지하고 있으며, 원전에는 ‘순차적 사고 방지 시스템’이 구축돼 있어 방사성 물질이 누출되는 사고 가능성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해명에도 한수원의 부품 검증 시스템이 취약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당시 진보정의당(현 정의당)이 밝힌 사실에 따르면, 원전 규제기관인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은 이 사건 발생 8개월 전에 품질검증서와 부품 납품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시정을 요구한 바 있다.
하지만 그 뒤에도 한수원은 서류의 위조 여부를 제대로 점검하지 않았다. “시정 요구를 받고 직원들을 교육했다”는 게 한수원이 내놓은 해명의 전부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원전은 수백만 개의 부품 중 어느 하나에 문제가 생겨도 멈춰 설 수 있다. 이런 특성상 품질 검증이 안 된 부품들이 쓰인 원전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
핵분열은 격납용기 안의 원자로에서 일어나지만, 전원 공급·온도조절 등 운전과 관련된 모든 제어는 격납용기 밖의 설비들(보통 ‘2차 계통’이라고 부른다. ‘1차 계통’은 원자로를 지칭한다)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사고로 연결될 수도 있다. 실제로 일본 후쿠시마 원전의 경우도 원자로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2차 계통에서 문제가 발생한 바 있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수백억 원대의 원전 부품 시장을 놓고 벌이는 업체 간 피 말리는 경쟁도 자리 잡고 있었다. 경쟁하면 가격은 내려가고 소비자들의 편익은 증대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부작용이 있다. 싼 가격에 납품하려다 보니 부품의 질이 떨어진다. 당시 한수원은 저가 낙찰제를 고수했다. 제작비용을 최소화해야 하는 업체들로선 300만 원이라는 품질 검증 비용을 어떻게든 줄이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 품질검증서 위조에 참여한 A업체 사장은 전화 통화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나는 그냥 슈퍼마켓 주인이나 마찬가지예요. 도매상에서 물건 떼와서 납품하는 건데, 품질 검증 비용 싸게 준다고 하면 덥석 무는 거지….”
또 다른 B업체 사장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피 터지게 입찰해서 납품한 죄밖에 없다고. 한 업체가 싸게, 빠르게 주니까 거기에서 구매한 것뿐이에요.”
C업체 사장의 이야기도 구구절절하다.
“우리는 80원에 사서 입찰되면 20원 이득 보는 것밖에 없어요. 피터지게 입찰하고 납기 맞춰 납품한 죄밖에 없어요.”
그들에게 책임을 모두 뒤집어씌울 수는 없을 테다. 하지만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렇다면 안전은 누구의 책임인가? 싸구려 원전 부품이 가져올 엄청난 재앙을 그저 남의 탓으로 돌리고 넘어갈 것인가?
대기업, 품질 인증업체 연루된 총체적 비리
2013년 5월 28일 아침은 유독 화창했다. 원자력안전위원회의 긴급 브리핑 공지가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은철 위원장이 굳은 표정을 한 채 직접 마이크를 잡고 기자들 앞에 섰다. 그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화창한 날씨는 관심사에서 점점 벗어났다. 원자력안전위원회 관계자들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품질 서류 위조 사건이 또다시 터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품의 중요도가 과거와 달랐다.
품질 서류, 정확히 말하면 시험성적서가 위조된 부품은 원자로 안에 들어가는 ‘제어케이블’이었다. 한수원은 1차 계통과 2차 계통의 고장과 사고를 엄격히 구분해왔다. 원자로 안, 즉 1차 계통에 생기는 문제가 더 심각하기 때문이다.
제어케이블은 원전 1기당 약 5㎞씩 설치돼 있다. 사고 발생 시 안전 계통에 제어 신호를 전달하는 부품으로 수소 감시 설비, 안전 주입 탱크, 안전 주입 펌프 등과 연결되어 있다. 즉, 제어케이블에 문제가 생기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처럼 방사능 유출이나 폭발 등 심각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원자력안전위원회와 한수원은 냉각재 상실 사고LOCA, Loss of Coolant Accident 시험을 거친 제어케이블의 납품을 요구하고 있다. 이 시험은 원자로의 냉각재가 상실된 것으로 가정하고, 최고 190℃의 고온과 약 4.5㎏/㎠의 압력에 6시간을 노출시켜 케이블이 이를 견딜 수 있는지를 테스트한다. 그만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그런데 원자력안전위원회의 발표에 의하면 이러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제품이 버젓이 원전에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과정은 이렇다. 국내에는 아직 냉각재 상실 사고 시험을 진행할 설비가 없다. 그래서 국내 시험기관에서 캐나다의 검증기관에 의뢰했고, 12개의 시편(시험용) 가운데 3개만 합격한 것으로 나왔다. 나머지 케이블은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 ‘불량 부품’들이 원전에 설치됐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던 것일까?
새한TEP라는 시험기관이 캐나다 검증기관이 보내온 시험 그래프를 조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케이블은 신고리 1·2호기와 신월성 1·2호기에 설치된다. 건설 중인 신고리 3·4호기에도 일부 설치되었음이 확인된다. 사태를 파악한 원자력안전위원회는 문제의 제어케이블이 설치된 원전의 가동을 중지하고 부품 교체에 나섰다. 검찰에 수사도 의뢰했다. 2013년 여름도 역시 지독한 전력난과 절전 스트레스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이 사건이 충격적인 이유는 제품의 성능을 책임져야 할 시험기관이 오히려 시험 성적을 위조하고, 사업자인 한수원이나 안전규제기관이 10여 년 동안 이런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다. 아래의 계통도를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원전 부품 시험기관은 ‘전력사업 기술기준’(전력산업 분야 KS)에 부합하고 대한전기협회의 인증을 받은 업체로, 국내에 7곳이 있다. 이 사건이 놀라운 것은 납품업체에서 자기들 성적표를 위조한 적은 있어도 이처럼 인증받은 기관이 조작에 가담한 경우는 처음이라는 점이다. 새한TEP가 시험 검증을 맡은 것은 이번만이 아니었다. 자료에 의하면 2010년 12월 1일부터 2012년 7월까지 모두 23건의 검증 프로젝트를 수주한 것으로 나온다. 국내 원전 10기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브라카원전BNPP 1~4호기다.
영세 중소업체가 아닌 대기업 계열사가 기준 미달 제품을 납품한 것도 눈에 띈다. 그동안 원전 비리는 작은 하청업체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대기업인 LS전선 계열사인 JS전선은 우리나라 원전 대부분에 케이블을 납품한 업체였다.
젶무을 원전에 설치하기 전, 최종적으로 서류를 검토하는 한국전력기술이 위조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는 점 또한 놀랍다. 최후의 안전장치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한국전력의 자회사인 한국전력기술은 일종의 감리회사 역할을 한다. 부품·설비의 설치 전 최종 점검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여기서 문제점을 제대로 잡아냈다면 이처럼 기준 미달의 제품들이 설치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자체적으로 검증하지 못했다는 점, 내부에서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에서 1년 전의 복제품 사건과 닮아 있다.
원자력안전위원회에 신고리 3·4호기 제어케이블 서류가 위조됐다는 제보가 들어온 건 2013년 4월 26일이었다. 이번에도 경쟁 업체의 제보였다. 당시 의혹의 시선은 한수원→한국전력기술→새한TEP로 이어지는 얽히고설킨 관계로 향했다.
새한TEP의 대주주·이사인 고○○ 씨는 한국전력기술 부장 출신이었고, 부사장 남○○씨는 한국전력기술 처장 출신인 것으로 알려졌다. 새한TEP를 성능 검증기관으로 인증해준 대한전기협회에는 한수원(발주처) 사장과 JS전선(납품업체)의 모기업인 LS전선 대표가 임원으로 있었다. 조사 결과, 엄○○ JS전선 고문과 문○○ 전 간부, 이○○ 새한TEP 내환경 검증팀장, 이○○한국전력기술 부장을 포함한 새한TEP 임원과 한국전력기술 고위간부 등 7명이 모여 대책회의를 한 사실도 확인됐다. 또 납기 일자를 맞춰야 한다며 한수원 담당자가 직접 조작을 지시했다는 수사 결과도 추가됐다.
법원은 2013년 12월 열린 1심 재판에서 이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사문서 위조 등으로 180여억 원의 이득을 본 혐의로 구속 기소된 엄 고문은 징역 12년을, 위조에 공모했던 한수원·한국전력기술 간부들은 징역형 또는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오○○ 새한TEP대표도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수사과정에서 오 대표가 한국전력기술 간부들에게 골프 접대, 금품 접대 등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JS전선은 그 뒤 금품 로비의 증거가 밝혀지지 않아 혐의를 벗었지만, 회사의 명성에는 이미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뒤였다. 납품업체, 시험 검증기관, 최종 점검기관, 발주기관이 모두 연루된 이번 제어케이블 위조 사건은 원전 비리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사건이었다.
우리 사회가 입은 피해도 컸다. 금전적인 피해만 놓고 보면 케이블교체 비용으로 원전 한 기당 180억 원이 들었다. 교체하는 동안 원전을 세우면 그만큼 손해가 난다. 대체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 LNG나 등유와 같은 비싼 원료를 수입해야 한다. 한수원 자체 추정으로 3조 원 안팎의 손실이 예상됐다. 여기에는 국민들이 겪어야 했던 ‘절전 스트레스’는 돈으로 환산하기조차 어려울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원전은 안전하지 않다’는 공포가 우리 사회를 휘감게 됐다는 점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13년 6월 6일,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김균섭 한수원 사장과 안승규 한국전력기술 사장을 면직 처리했다. 그러나 한번 무너진 신뢰는 회복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기에 원전 비리가 2년에 걸쳐 끊이지 않고 터져 나왔던 걸까.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