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우리가 다 하는 경험 중에 이런 게 있다. 당신이 친구들 또는 친척들 사이에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천박한 데다 경솔하고 주제에도 어긋난 쇼킹한 말을 꺼낸다. 쇼킹한 말 자체는 그나마 낫다. 제일 불안한 건 어떤 사람도 그 말에 반박조차 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당신은 한줌의 우려나 한마디의 반박이라도 나오길 헛되이 기대하며 이리저리 둘러볼 것이다.
어느 겨울밤 나는 런던 동부의 고급주택가에 있는 친구 집에서 그런 순간을 체험했다. 매끄럽게 썰린 블랙커런트 치즈케이크가 나왔고 대화는 신용위기 사태까지 흘러왔다. 그런데 손님 중 하나가 분위기를 띄우려고 별 악의없는 농담을 던졌다.
“울워스Woolworth(미국의 다국적 대형 유통업체, 영국에선 2008년 연말 폐업했다─옮긴이)가 문을 닫다니 아쉽군. 이제 그 많은 차브들은chavs 어디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살까?”
그 손님이 스스로를 밥통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기 있는 사람 누구도 마찬가지였다.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던 사람들은 다들 교육 수준이 놓고 열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혈통도 다양했으며 성별도 반반에다가 고지식한 부류도 아니었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이 정치적으로는 중도좌파적인 성향이었을 것이며 자신이 속물로 취급받는다면 발끈했을 사람들이다. 만약 참석자 중 누군가가 파키Paki(파키스탄인을 얕잡아 부르는 말─옮긴이)나 푸프poof(남자 동성애자를 얕잡아 부르는 말─옮긴이) 따위의 말을 입에 올렸다면, 그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울워스에서 쇼핑하는 차브에 대한 농담에는 움찔하지 않았다. 아니, 정반대였다. 그들은 모두 웃었다. 이 경멸에 찬 말이 ‘아이’를 의미하는 집시 언어인 차비chavi에서 유래된 말이라는 걸 그들이 알고나 있는지 궁금했다. 그들은 10만 독자들이 읽었다는 『차브에 관한 작은 책The Little Book of Chavs』을 읽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두툼한 교양서에 따르면 ‘차브’란 ‘급증하는 무식쟁이 하층계급’을 뜻한다. 그들이 서점에서 그 책을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차브는 슈퍼마켓 계산대의 계산원이나 패스트푸드점의 점원 또는 청소부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 모두 ‘차브’란 특별히 노동계급을 가리키는 모욕적인 언사임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농담’을 쉽게 바꿔 말하면 다음과 같다. “울워스가 문을 닫다니 아쉽군. 이제 끔찍한 하층계급 사람들은 어디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살까?”
하지만 나를 가장 불편하게 한 것은 그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가 그 말을 했으며 함께 웃었느냐는 것이다.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모두 연봉이 괜찮은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인정하든 안하든, 자신들의 성공에는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들은 안정적인 중간계급 가정에서, 흔히 말하듯 나무가 우거진 교외에서 자란 사람들이었다. 몇몇은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를 나왔고 대부분은 옥스퍼드나 런던정치경제대학LSE, 또는 브리스톨대학 출신이었다. 노동계급 출신이 그들처럼 될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조롱하는 그 수백년 묵은 현상을 목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느 계속 생각했다. 어찌하여 노동계급을 멸시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공공연한 일이 되었는가? 사립학교 출신의 백만장자 코미디언이 차브 차림을 하고 『리틀 브리튼Little Britain』 같은 시트콤에 출연해 우리를 웃긴다. 신문은 ‘차브의 생활’에 대한 경악에 찬 이야기를 악착같이 채집해서는 그것을 곧장 노동계급 사회의 전형으로 만들어버린다. 차브스컴ChavScum(차브쓰레기─옮긴이) 같은 인터넷 사이트는 차브들을 물어뜯는 캐리커처로 가득하다. 마치 노동계급이야말로 이 사회에서 뭔가 현실적으로 언급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그룹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 영국에서 리처드 힐튼Richard Hilton만큼 차브를 헐뜯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힐튼은 런던에서 피트니스 열풍을 타고 한창 성업중인 짐박스Gymbox의 대표다. 체육gym 수업에서 이름을 따온 짐박스는 뻔뻔하게도 한달 회원료 72파운드 외에도 가입비로만 175파운드를 청구하면서 부유층 운동광들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 힐튼이 설명하듯이 짐박스는 화이트칼라 전문직 고객들의 불안감에 호응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그는 말했다. “고객들은 런던에서의 삶을 불안해하기 때문에 호신술반을 선호합니다.”
2009년 봄, 짐박스는 이미 진행되던 다양한 과정들(볼 에어로빅, 폴 댄스, 비치 복싱) 외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이름하여 차브 파이팅Chav Fighting이다. “차브에게 반사회적행동금지명령Anti-Social Behaviour Orders, ASBO(폭력 등 반사회적 행동을 금지한 영국 법원의 명령─옮긴이)에 해당되니 그만두라는 서글픈 야유를 보내지 마십시오.” 짐박스의 홈페이지는 계속 꼬드긴다. “차브들을 그냥 걷어차버리세요.” 나머지 홍보문구 역시 취지가 뚜렷한 자경단의 목소리로 주먹을 날린다. “애들한테 뺏긴 사탕은 잊어버리세요. 윗도리를 벗고 바카디(럼주의 제품명─옮긴이)를 빼앗는 방법, 꿀꿀대는 것들을 낑낑대게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드립니다. 차브 파이팅에 오세요. 여기는 펀치백이 있는 곳, 세상을 정의롭게 만듭니다.” 광고전단은 더욱 노골적이다. “펀치백과 널빤지로 기술을 연마해보세요. 차브들을 때려눕힐 때가 옵니다. (…) 여기서는 바카디 브리저(럼주의 일종─옮긴이)가 당신의 칼이 되고 반사회적행동금지명령이 당신의 트로피가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폭력을 찬양하는 것은 분명 선을 넘은 행위다. 광고규제기구ASA에서 압박을 가해오자 짐박스는 조목조목 따졌다. 짐박스는 “어떤 사람도 차브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즉 누구도 차브에 속하길 원하지 않으므로” 그건 공격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놀랍게도, 과고규제기구는 차브 파이팅이 “특정사회집단에 대한 폭력을 용납하거나 조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짐박스의 혐의를 부정했다.
계급을 자극한 그 깊이있는 혐오에 감사하다는 말을 리처드 힐튼에게 전해야 할 지경이다. ‘차브’를 ‘버버리를 걸친 젊은 스트리트 키즈’로 정의하면서 힐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잉글랜드에 살면서도 그들은 이 나라를 ‘엥어랜드Engerland’(주로 축구장에서 국가대표팀을 응원할 때 쓰는 속어─옮긴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발음이 어눌한 데다 스펠링도 모르고 제대로 글을 쓸 줄도 모른다. 또한 칼만큼이나 공격적인 개도 좋아하는데 그들과 가볍게 스치거나 좀 삐딱하게 쳐다보기만 해도 당신을 칼로 그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들은 열다섯살쯤 아이를 낳고 하루 종일 엄청나게 담배를 피워대거나 늘 땀이 고인 손에 걸리는 것은 무엇이든 뭉개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스무살이 되도록 그들이 보호시설에 수용되지 않는다면, 천하장사 또는 운 좋은 놈으로 사람들의 큰 존경을 받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차브가 영국에서 어려운 시절을 겪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가 노골적으로 “그럴 만하니 그렇죠”라고 대답한다고 해서 전혀 놀랄 일은 아니다.
차브 파이팅은 체육 애호가들에게 확실히 인기가 있었다. “우리가 해본 것 중에 가장 인기있는 과정”이었다면서 힐튼은 주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면서 즐거워했어요. 누리꾼 몇몇은 괜한 비판을 일삼다가 공격을 당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흥미롭게도, 힐튼은 스스로를 속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성차별, 인종차별, 동성애혐오는 “쩔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꽤 성공한 사업가인 리처드 힐튼은 낮은 사회계층을 향한 중간계급 런던 거주자들의 공포와 혐오에 손을 내밀었다. 도시의 은행원들이 거의 야수처럼 자라온 불쌍한 아이들에게 경기후퇴에 따른 불만을 쏟아내며 땀을 흘리는 이미지를 떠올려보라. 그것은 정말 흥미진진한 장면이다. ‘짐박스에 오시오. 계급전쟁이 신체단련과 만납니다.“
힐튼의 침착한 경멸은 어이가 없지만, 실은 중간계급에 널리 퍼진 노동계급 청소년의 이미지를 잔인하게 각색한 것이다. 이들 청소년의 이미지는 미련하고 폭력적이며 범죄적인 데다 짐승처럼 ‘번식하는’ 것이다. 물론, 이 차브들은 고립돼 있지 않다. 그들은, 결국 ‘공동체 안의 천하장사들’이다.
영국 노동계급의 존재에 대한 중간계급의 폭넓은 공포를 이용하는 회사는 짐박스뿐만이 아니다. 액티버티즈 어브로드Activities Abroad는 2천 파운드가 넘는 휴일 해외여행을 제공하는 여행사다. 그 품목에는 캐나다의 자연을 탐방하는 사파리, 핀란드 오두막여행 등등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차브들은 신청할 필요가 없다. 2009년 1월 이 여행사는 2005년도 『데일리 메일Daily Mail』기사를 인용하면서 2만 4천명의 고객에게 홍보 이메일을 보냈다. 그 기사에 따르면 ‘중간계급’이름을 가진 아이들은 ‘웨인Wayne’, 드웨인Dwayne’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아이들보다 중등교육자격시험GCSE에 합격하는 비율이 8배나 높다고 한다. 이 발견에 고무된 회사는 액티버티즈 어브로드 여행에 어떤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했는지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료를 대대적으로 뒤져서 두 리스트를 뽑아냈다. 하나는 ‘휴가에서 왠지 만날 것 같은’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은 이름이다. 앨리스Alice, 조지프Joseph, 찰스Charles 같은 이름은 전자에 속하는데, 결국엔 액티버티즈 어브로드 여행은 브리트니Britney, 샨텔Chantelle, 다자Dazza 같은 이름은 찾아볼 수 없는 여행이었다. 그들은 정당하게 ‘차브 없는 휴일여행’을 약속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또한번 불쾌한 일이 벌어졌지만 그 회사는 수치스러운 줄도 몰랐다. “중간계급이 스스로를 대변할 때가 온 것뿐이죠.” 앨리스테어 맥클린Alistair Mclean 상무의 말이다. “계급전쟁이든 아니든, 내가 중간계급이라는 걸 사과할 필요는 없잖아요.”
내가 그 회사의 간부 중 하나인 배리 놀란Barry Nolan과 대화를 했을 때, 그 역시 저항감을 드러냈다. “『가디언Guardian』(영국의 진보언론─옮긴이) 독자들이 엄청난 분노를 표출하던데 그건 그 사람들이 차브들 근처에서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이죠. 잘못된 분노일 뿐입니다. 우리 여행사를 통해 휴일을 보내고 싶어 하는 부류들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엄청난 고객층을 확보했다는 증거죠.” 실제로 『가디언』에서의 소동이 있고 나서 그들은 매출이 44%나 성장하는 기쁨을 누렸다.
짐박스와 액티버티즈 어브로드는 약간 다른 관점을 지닌다. 먼저 짐박스는 어두운 복도에서 칼을 들고 그들을 기다리는 폭력적인 무리가 바로 사회적 하층계급이라는 중간계급의 두려움에 다가갔다. 반면 액티버티즈 어브로드는 중간계급의 외국 휴가를 ‘침해하는’ 노동계급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저가항공에 대한 혐오감을 이용했다. “요즘은 노동계급을 피해 외국으로 도망가기도 힘드네”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 둘은 주류 중간계급이 얼마나 노동계급을 싫어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똑같은 사례다. 즉 차브 공격이라는 이미 낯설지 않은 혐오감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사용한 경우다.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그저 그런 이야기가 안티-차브 서사를 ‘증명하는’ 손쉬운 미끼로 사용될 때 이런 면모는 더 뚜렷해진다.
2010년 7월 라울 모트Rauol Moat라는 사람이 감옥을 탈출해서 전 애인의 남자를 죽이고 도피행각을 이어갔을 때 그 사내는 노동계급의 반反영웅으로 추켜세워졌다. 범죄학자인 데이비드 윌킨슨David Wilkinson 교수는 모트가 “상심에 처한, 백인 남성 노동계급의 심금을 울렸다. 그들이 모트처럼 행동함으로써 세상에 자신을 정당하게 드러낼 수는 없다는 점에서 보통사람의 영웅으로서 아픈 곳을 건드린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백인 노동계급이 한순간에 준법의식이 결여된 원시인 수준의 암살자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인터넷은 독설로 가득 찬 무료 파티장이 되었다. 『데일리 메일』에 게재된 다음과 같은 댓글을 보자.
슈퍼마켓이나 버스, 최근 더 흔하게는 길거리를 둘러보면 문신을 하고 시끄럽게 상스러운 말을 내뱉으며 요란한 차림을 한 애들과 그들 뒤로 방귀를 뀌며 쫓아가는 녀석들을 볼 수 있다. 그놈들은 예의범절이라고는 알지도, 인식하지도 못하는 놈들이며 마음속으로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우겨대는 놈들이다. 이런 놈들이 바로 그 불량한 살인자에게 동정을 품는 것이다. 그놈들은 가치도, 도덕도 없으며 낯짝이 너무 두꺼워서 무슨 비난에도 고개를 쳐든다. 차라리 피하는 게 상책이다.
이런 식의 계급혐오는 없어서는 안될 영국 문화의 존경받을 만한 일부가 돼버렸다. 계급혐오는 신문, TV 코미디프로, 영화, 인터넷 토론회, 소셜네트워크 등 매일매일의 대화에 등장한다. ‘차브’현상의 핵심에는 노동계급 다수의 현실을 호도하려는 이런 시도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모두 중간계급We’re all middle class now”이라는 흔한 주문에 능력도 없이 반항을 일삼는 옛 노동계급의 잔당은 끼어들 자리가 없다. 사이먼 헤퍼Simon Hefer는 이런 견해를 강력하게 옹호하는 사람이다. 영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우파 저널리스트 중 한 사람인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른바 존경받는 노동계급은 거의 다 소멸됐다. 사회학자들이 노동계급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이제 거의 노동을 하지 않으며 오히려 복지국가의 지원이나 받는 신세가 돼버렸다.” 이른바 ‘부랑자 하층계급’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내가 헤퍼에게 그 말의 진의를 묻자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존경받는 노동계급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사라진 거예요. 그들은 열망이 있었고, 사회가 그 열망을 충족시켜줬거든요.” 그들은 사회적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들은 “대학에 갔고 화이트칼라 전문직 종사자가 되었으며 그래서 중간계급이 되었다.”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수백만의 사람들 또는 대학에 가지 못한 사람들까지 이런 주장에 들어맞느냐는 문제제기는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헤퍼에 따르면 영국 사회에는 두 주류그룹이 있을 뿐이다. “그런 종류의 존경받을 만하고 소박한 환경을 대대로 누리는 가정은 더 이상 없어요. 그들은 복지국가의 식객인 하층계급이 되었든지 아니면 중간계급이 되었죠.”
이것이 바로 헤퍼의 시각에 비친 사회의 모델이다. 그에 따르면 한편에는 중간계급이, 다른 한편에는 구제불능의 쓰레기(열망은 물론 열의조차 없는 노동계급)가 존재한다. 사회가 실제로 어떻게 구축되었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도대체 왜 그걸 알아야 한단 말인가? 결국 이런 견해를 쏟아내는 저널리스트들이란 자신들이 깎아내리는 사람들과 어떤 접촉도 하지 않는다. 헤퍼는 뼛속까지 중간계급 출신인 인물로 자기 아이들을 이튼(영국의 명문사립학교─옮긴이)에 보낸 사람이다. 어느 순간 그가 덧붙인다. “나는 하층계급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그러면서도 그는 잘 모르는 하층계급을 물어뜯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차브’라는 말을 옹호하면서 주장하기를, 노동계급은 전혀 악마화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차브’는 그저 반사회적 훌리건이나 폭력배를 지칭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건 좀 문제다. 우선, 싫어도 그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확실히 노동계급이기 때문이다. 2005년 ‘차브’라는 말이 처음 콜린스 영어사전에 등재되었을 때, 그 말은 ‘캐주얼 스포츠 복장을 한 젊은 노동계급’이라고 돼 있었다. 그때부터 이 말의 의미는 상당히 확대되었다. 급기야 차브가 ‘공영주택에 거주하는 폭력적인 사람들Council Housed And Violent, CHAV’을 뜻한다는 유명한 신화까지 만들어졌다. 많은 경우 그 말은 신중하고 우아한 부르주아와 달리 소비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조잡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돈을 쓰는 노동계급을 향한 혐오감을 드러낸다. 데이비드 베컴David Beckham, 웨인 루니Wayne Rooney, 셰릴 콜Cheryl Cole 같은 노동계급 출신의 유명인들은 때만 되면 차브라는 놀림을 받는다.
무엇보다, 최근 거론되는 ‘차브’라는 단어는 폭력, 게으름, 청소년 임신, 인종주의, 주정 같은 노동계급의 부정적인 특징과 연결된다. 『가디언』의 조 윌리엄스Joe Williams 기자가 쓴 대로 “차브라는 말이 원래 뭔가 정통적인 것─그냥 쓰레기나 친구가 아니라 버버리 차림의 쓰레기!─을 전달하면서 대중적인 상상력을 사로잡았다면 현재 그 말은 ‘프롤레타리아’ 또는 ‘가난하기 때문에 쓸모없는 인간’ 같은 폭넓은 의미를 가진다.” 보수 성향의 『데일리 텔레그래프Daily Telegraph』 수석기자인 크리스토퍼 호스Christopher Howse 같은 사람조차도 “많은 사람들이 차브를 낮은 계급에 대한 혐오를 위장하는 말로 사용한다. (…) 어떤 사람을 차브라고 부르는 것은 사립학교 학생들이 좀 노는 애들을 ‘머저리Oiks’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고 지적한다.
‘차브’는 종종 ‘백인 노동계급’을 가리키는 말로 취급된다. 2008년 노동계급을 집중 취재한 BBC의 프로그램 「화이트White」가 그 예로 노동계급층을 퇴영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며, 인종주의에 물든 전형적인 집단의 사례로 그려냈다. 실제로 대처리즘Thatcherism 이후 ‘노동계급’이란 말은 터부시된 반면 ‘백인 노동계급white working class’이란 말은 21세기초에 들어와 점점 더 자주 쓰이고 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