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현실과 이념의 사이에서
중국은 농업대국이다. 13억 명의 인구 가운데 9억 명이 농민이다. 그러나 농민들이 농촌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대다수의 도시인들이 잘 모르게 된 지 오래되었다. 이제는 어렴풋이 기억나는 일이지만, 지난 세기인 1970년대에 세계를 놀라게 한 위대한 개혁은 농촌에서 시작되었다. 농촌에서 ‘청부제大包干’를 시행한 이래, 농업생산은 매년 다 팔기 곤란할 정도로 대풍년을 거두었고, 허다한 벼락부자가 생겨났다. 한때 중국의 농민은 부자가 되어서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후 오래지 않아 도시개혁이 심화됨에 따라 중국의 농업, 농촌, 농민에 관한 소식을 다시 듣게 되는 일은 극히 드물어졌다. 날이 갈수록 많은 농민이 생명처럼 생각한 토지를 버리고 서로 의지해왔던 촌락과 손에 익숙한 농사를 떠나 외로움과 굴욕과 멸시를 참으면서도 각지의 도시로 밀려드는 광경을 보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100만 명을 단위로 헤아리는 중국 농민이 불러일으킨 ‘농민공農民工의 물결’은 점차 지난 세기말의 10여 년간 하나의 기이한 풍경이 되었다.
요 몇 년 우리는 르포를 쓰기 위해 각지의 농촌에 파고들어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적지 않은 농민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들이 농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자주 듣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원래 우리의 인상에 남아 있던 농촌의 풍속화는 머나먼 환상적인 전원의 목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농촌의 풍속화는 도시의 들뜬 생활이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도시인이 농촌에 대해 갖는 일종의 동경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 생활 속의 농촌은 결코 그렇지가 않고, 농민이 바라보는 농촌은 전혀 달라서 농민에게 그렇게 한가한 정취는 없으며, 그들의 생활은 매우 피로하고 매우 무겁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전에 우리는 화이허강淮河이 오염된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안후이성安徽省 화이베이평원华北平原의 한 촌락을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의 수많은 농가는 집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사방의 벽밖에 없을 정도로 너무나 가난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어떤 집은 놀랍게도 전 가족이 채소를 판 돈 5위안(2014년 환율로 한화 약 900원─옮긴이)으로 봄 한철을 지냈으니 생활의 궁핍함이란 해방 당시의 몇 년만도 못한 것이었다. 어떤 농민은 우리에게 손가락을 꼽아가며 계산을 해보였는데, 종자와 화학비료, 관개, 기계사용료와 각종 세금과 비용을 빼고 1묘畝(1묘는 약 666.7제곱미터─옮긴이)당 밀의 산출이 900근이 안 된다면 올 한해 농사는 헛수고 한 셈이라고 한탄했다. 그런데 화이페이평원의 농촌에서 1묘당 900근의 밀을 산출하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800근만 산출해도 꽤 괜찮은 편이었으며, 보통은 겨우 600근 정도였다. 말하자면 지금의 농민생활로는 이미 농사도 계속하기가 어려운 상태인데 농민들은 오히려 쇠털만큼 많은 각종 세금과 비용을 부담하고 있었던 것이다.
농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청부제가 우리에게 남겨준 좋은 점은 벌써 오래전부터 조금씩 사라져서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습니다!”
생각지도 않게 안후이성에서 가장 가난한 지방은 강남에, 그것도 천하에 유명한 황산시黃山市에, 도로도 불통이고 전화도 불통인 황산시 슈닝현休寧縣 바이지향白際鄕에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놀랍게도 다산리大山里의 농업이 아직도 원시적인 화전경작 상태에 머물러 있는 현실을 목격했다. 농민은 1년 내내 수고해도 평균수입이 겨우 700위안, 월평균 58위안(한화로 1만 440원─옮긴이)에 불과했다. 많은 농민들이 깨진 흙벽돌로 만든, 어둡고 습기 차고 비좁은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어떤 집은 기와를 올릴 수 없어서 지붕도 나무껍질로 덮고 있을 정도였다. 가난하기 때문에 일단 병에 걸리면 작은 병은 참고 견디고 큰 병이 걸리면 죽기만 기다릴 뿐이라 했다. 향鄕 전체 호수는 620호인데, 그중 빈곤호가 514호로 무려 82.9퍼센트, 인구로는 전체 인구 2,180명 중에서 빈곤자가 1,770명으로 81퍼센트에 달했다. 그러나 이렇게 가난한 향촌에 대해서 몇 년 전부터 향촌 간부들이 과장된 허위보고를 해서 상급정부로부터 “이미 빈곤을 벗어났다”라고 간주되어 가혹한 세금이 부과되어 왔으니, 농민들은 참으로 갑갑한 상태였다. 게다가 이 향의 향장鄕長은 우리가 가기 직전에 처벌을 받긴 했지만 농민의 골수를 빨아먹는 탐관오리였다. 우리는 법을 어기면서 자기 배를 불리는 자가 없는 곳이 없다는 사실에 놀람과 동시에 숨이 막힐 정도로 사태가 심각하다고 느꼈다.
바이지향을 떠나던 그날, 우리는 특별히 저장강浙江 쪽에서 하산하기로 했다. 도중에 지상의 ‘천당天堂’이라고 불리는 항저우시杭州市의 춘안현淳安县 중저우진忠州镇에 들렀는데, 그 풍요로움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2000년 봄 후베이성湖北省 젠리현监利县 치반향棋盤鄕 당위원회 서기 리창핑李昌平이 국무원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농민은 괴롭고 농촌은 가난하며 농업은 위험하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우리가 안후이성 농촌에서 보고들은 것이 다른 많은 곳에서도 똑같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리창핑의 ‘삼농三農’(삼농은 농업, 농촌, 농민을 가리킨다. 삼농문제란 농업의 저수익성, 농촌의 황폐, 농민의 빈곤을 뜻한다─옮긴이)문제에 관한 상서上書는 분명히 총리의 마음을 움직였다. 주룽지朱镕基(1998~2003년 국무원 총리─옮긴이)는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 “‘농민은 괴롭고 농촌은 가난하며 농업은 위험하다’라는 말이 전면적인 상황은 아닐지라도 문제는 우리가 종종 일부 좋은 상황을 전체상황으로 간주하고 말단기관의 ‘좋은 소식’을 잘못 믿고 문제의 엄중함을 경시한다는 데 있다.”
이 사건으로부터 우리처럼 평생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백번을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문제가 뚜렷이 떠오르게 되었다. 오늘날 중국의 거대한 변화는 20여 년 전에 세계가 주목한 대변혁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 대변혁의 선두에 선 것은 수억 명의 농민들이었는데, 지금 그들은 왜 이렇게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져버린 것인가?
우리가 중국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새로운 시대에 들어선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하층 인민, 특히 9억 명 농민의 생존을 소홀히 한 점에 대해서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철저히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당면한 것은 결코 단순한 농업문제나 간단한 경제문제가 아니라 신시대의 집권당이 당면한 최대의 사회문제라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이유도 없이, 나날이 발전하는 도시에 살면서 광대한 농촌을 망각하고 있지만, 9억 명의 농민형제가 진정으로 풍족함을 누리지 못하는 한, 모든 낙관적인 경제통계숫자는 그 의의를 잃어버릴 것이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경제학자 드와이트 퍼킨스Dwight Perkins는 “미래의 개혁자에게 말하자면, 중국이 겪은 정치 경험은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지만 한 가지 잊어버린 것이 있다. 그것은 개혁 과정 중에 수익자가 반드시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의 말은 지금도 깊이 되새겨 볼 가치가 있다. 지난 세기의 개혁 초기에 수익자는 청부제를 행한 농민과 개별 상공업자와 선전深川 특구의 개척자들이었다. 그러나 개혁의 중심이 도시로 이동하면서 수익자도 신생 기업가 계층이나 인맥과 뇌물을 통해 신속히 부를 쌓은 정부관리들 그리고 어느 정도 집단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도시 중산층으로 바뀌었다. 이 사회 최대의 집단인 9억 명의 농민은 이제 수익자가 아닐 뿐 아니라 생산이 늘어도 수입은 늘지 않기 때문에 지방에 따라서는 심지어 “옛나이 더 좋았다”라는 국면도 출현하는 상태이다.
우리는 늘 세계 7퍼센트의 경지로 세계 인구 21퍼센트를 먹여 살리고 있다든가 우리 농민이 13억 명의 인구에게 충분한 양곡을 제공하는 것은 세계적인 위대한 공헌이라고 하면서 자랑하지만, 종종 미처 생각지 못하는 것이 있다. 바로 세계 농민의 40퍼센트를 차지하는 중국 농민이 세계 인구의 21퍼센트를 먹여 살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의 농업 수준이 상당히 낙후되어 있고 절대다수의 농민은 극히 낮은 생활수준에 놓여 있따는 사실을 설명해준다.
유엔이 발표한 「인간발전보고서Human Development Report」는 지구상의 162개 국가와 지역을 발전지수에 따라서 순위를 매기고 있는데, 중국은 87위에 머물러 있다. 이 순위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다. 20여 년에 걸친 개혁개방의 성공에 따라 중국의 GNP는 비약적으로 증가해 기적의 경제성장이라고 칭찬을 받고 있지만, 중국의 농업문제를 주시하고 있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로렌스 클라인awrence Klein은 중국 경제에는 두 가지의 큰 문제, 곧 농업과 인구문제가 있다고 지적했고,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양전닝楊振寧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바로 “중국이 당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는 1인당 평균수입이 너무 낮다는 점”이다.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농업, 농촌, 농민문제는 이미 미래 중국의 현대화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자 국가 전체의 운명과 관련된 문제이고, 현재 우리의 현대화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와 관련된 문제이며, 우리가 노력과 투쟁을 통해 어렵게 창조해온 개혁개방의 성과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도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르포작가로서 우리는 늘 현실을 직시한 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준엄한 문제에 직면해서 작가는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2000년 10월 1일 허페이合肥에서 출발해서 안후이성 50여 개 현과 시에 걸친 광대한 농촌을 융단식으로 뛰어다녔고, 다음에는 농업문제 연구와 실천의 전문가 및 관리를 중앙에서 지방까지 찾아다니며 가능한 한 취재했다. 이렇게 2년에 걸쳐 진행한 조사는 힘들고 쓰라린 것이었다.
우리는 안후이성의 농촌이 보여주는 면모가 농업을 주된 산업으로 하는 중국의 전국 12개 성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고 확신한다. 농촌의 개혁에 대해서 말한다면 안후이성은 전국의 모든 성과 시와 자치구 중에서 더욱 전형적인 의의를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신중국 농촌의 3대 개혁이라 칭하는 토지개혁, ‘청부제’, 농촌세비農村稅費개혁 중 뒤의 두 가지가 안후이성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주룽지는 여러 차례 “농업문제에 관해 중앙정부가 중대한 정책을 결정할 때, 나는 종종 안후이성에 가서 조사하고 연구했다. 많은 성공 경험이 모두 안후이성에서 왔고, 안후이성은 중국의 농업에 매우 큰 공헌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원자바오溫家寶(2003~13년 국무원 총리─옮긴이)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농촌정책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우선 안후이성에 가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생각한다. 안후이성에는 농촌의 사정을 숙지하고 의욕적으로 의견을 진술하는 동지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올 때마다 수확이 있었다.” 따라서 안후이성의 광대한 농촌을 취재하면 그대로 중국의 농민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본래 농가에서 태어나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다. 이제 낯설어진 들판을 분주히 돌아다니다 보니 갑자기 어머니의 품속에 돌아온 것같이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것은 대자연의 혈육과도 같은 정情이었다. 우리가 도시로 이주한 이래 다시 느껴본 적이 없는 정이었다.
우리 같은 요즘의 작가에게는 열정과 냉정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중구의 농민에게 다가갔을 때 우리는 이제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놀라움과 고통을 느꼈다.
지금의 중국은 어디를 가도 아직은 결코 행복한 세상이 아니며, 우리에게는 아직도 가난한 곳과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오늘날 도시를 떠나본 적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 전체가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다고 생각하고, 어떤 외국인들은 한번 와 보고는 중국이 모두 이렇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본 것은 당신이 상상도 못한 가난, 상상도 못한 죄악, 상상도 못한 고난, 상상도 못한 어쩔 수 없음, 상상도 못한 항쟁, 상상도 못한 침묵, 상상도 못한 감동, 상상도 못한 비장함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번에 안후이성에서 솔선해서 진행한 농촌세비개혁 실험작업이 20여 년 전 안후이성에서 발생한 ‘청부제’와 똑같이 경악스러움과 가슴 졸이는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리의 취재활동은 이번 개혁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 때문에 취재활동도 개혁과 똑같이 마음이 격동되고, 똑같이 불안과 초조에 애를 태우고, 똑같이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다가 결국 개혁의 시도와 똑같이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고뇌 끝에 원래의 계획을 포기하게 되었다.
문제가 엄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여러 번 자신의 능력과 용기에 회의를 품고, 이렇게 중대하고 민감한 과제에 작가로서의 임무를 다할 수 있는지 회의했던 것인데 이 또한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계속해나갔다. 왜냐하면 문학과 사회의 책임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창백한 과거의 기억이어서는 안 되며 독자와 함께 역사가 오늘에 제시하는 무언가를 찾는 것일 터이다. 다시 말해 중국의 내일은 우리의 오늘의 지혜와 노력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제 중국의 농업, 농촌, 농민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먼저 자신부터 냉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의 평정이 없다면 우리의 심중에 일어났던 저 무수한 파란을 가라앉힐 수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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