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서구는 우월하고, 동양은 열등하기 때문에?
서구의 부상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근대 세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세계가 <유럽의 특징>으로 정의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필요한 근거와 내용을 동시에 제시한다. 유럽인들은 처음에 자신들의 우월성을 기독교에서 찾았다. 그러다가 17세기와 18세기에 계몽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리스 문화의 유산에서 기인한 이성적이며 과학적인 사고에 자신들의 우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흐르면서 1700년대 후반 산업혁명과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거치게 되면서 유럽인들은 이제 자신들이 단순히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세계가 정체하고 있는 동안 유럽은 급속도로 진일보하고 있다는 의식을 강화했다. 결국 유럽이 다른 세계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것이었다. 서구의 부상에 관한 초창기 내용은 마치 다음과 같이 릴레이 경주처럼 진행되었다. 즉 고대 그리스인들이 민주주의 사상을 창안하고 고대 로마인들에게 물려주었지만 로마 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암흑기가 도래하면서 그만 바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윽고 기독교가 그 바통을 이어받아 봉건시대 유럽의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면서 다시금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 후 고대 그리스의 유산이 르네상스 시대에 재발견되고 계몽시대로 들어와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지면서 마침내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 전쟁을 통해 서구의 부상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애덤 스미스, 토머스 맬서스, 데이비드 리카도와 같은 고전적인 영국의 경제학자들은 서구의 부상에 연관되는 또 다른 내용을 창안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 발전을 진보progress라고 여기는 사상이었는데 그 사상에 의하면 서구는 진보적인 성향으로, 반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는 퇴보적이고 전제적인 성향으로 간주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 유럽의 경제가 급속도로 변화되고 아시아가 내부적으로 쇠퇴를 겪으면서 애덤 스미스와 토머스 맬서스 같은 경제 분석가들은 아시아가 서구보다 월등히 앞섰다는 기존의 관점을 전환하여 서구를 역동적이며 진취적이고 진보적이며 자유로운 곳으로, 아시아는 침체적이고 퇴보적이고 전제적인 곳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자본주의 세계를 가장 맹렬히 비판하던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조차 19세기 유럽의 확장 정책이 다른 세계에 진보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다. 20세기의 전환기에 활동했던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 또한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오직 유럽에서만 발전했던 과정과 요인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해석에서 차이를 보였다. 마르크스가 유물론에 입각하여 해석했다면, 베버는 서구의 가치와 문화, 특히 프로테스탄티즘과 연계한 이성주의와 직업윤리가 자본주의 부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버는 서구의 부상에 대한 생각을 오직 서구에 대한 연구에만 초점을 두지 않고 중국과 인도 사회를 조사하여 유럽과 비교하면서 적어도 그 두 국가 그리고 다른 모든 비유럽 국가들은 자본주의에 필요한 문화적 가치가 부족하다고 결론지었다.
서구의 세계 지배는 과연 필연적인 것인가?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의 사회 이론가들은 산업화된 국가들과 다른 세계, 즉 서구와 동양 간에 점차 벌어지는 격차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서구 유럽인들은 <근대화modernization>의 비밀을 굳게 지키고 있지만 다른 세계 사람들도 그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애덤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 막스 베버의 추종자들은 세계역사가 전개된 방식으로 전파론傳播論을 제기했다. 먼저 유럽인들이 산업화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방법을 찾았고 이후 일본을 비롯한 일부 국가들이 유럽의 방식을 습득하며 추격을 시작했다. 따라서 세계의 모든 국가들도 저마다 근대화를 저해하는 지역적 제도와 문화적 특성을 파악하고 제거한다면 근대화를 달성하게 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오늘날 21세기 초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런 견해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듯하다. 특히 전파론에서 주장한 것과 달리, 부유한 국가들과 가난한 국가들의 격차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를 비롯해 맬서스, 리카도, 마르크스, 베버 같은 유럽의 이론가들은 모두 <유럽의 특수성>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했다. 오늘날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유럽인들이 특수하고 궁극적으로 우월하다고 인식되는 이유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고 있지만, 이제 수많은 사람들은 그런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유럽이 가장 먼저 근대화했기 때무넹 유럽이 어떤 고유한 특성을 지닌다는 주장은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장애물이 자체적인 근대화 발전을 저해하는 세계 전역에서 오직 유럽만이 근대화를 촉진할 수 있는 윤리적 권위와 권력을 갖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내용은 서구의 부상에 따른 <서구의 세계 지배>를 옹호하고 정당화한다. 하지만 근대 세계의 형성을 바라보는 이런 관점, 즉 서구의 부상과 서구식 권력의 확산이 다른 세계에 대한 우월성에 기반을 둔 것이라는 관점이 잘못된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 이론의 엄청난 오류는 적어도 1759년대 이전에는 아시아의 대부분이 유럽보다 산업적 측면에서 훨씬 우위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명확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런 의혹은 특히 지난 20년 동안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제 역사학자들은 더 이상 세계를 단순히 수세기 전 유럽에서 시작된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경향이 지속되는 모습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은 인구와 산업 및 농업의 생산성이 아시아에 집중되었던 세계이다. <산업 자본주의>와 <민족국가>로 대표되는 유럽의 세계는 아주 최근에 등장한 시대적 조류이며, 이는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아시아가 주도했던 흐름이 역전된 현상이다. 더불어 이 추세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지는 아주 큰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유럽인들은 서구의 우월성이라는 밑그림 위에 서구의 부상을 그려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시아의 힘과 경제력>은 다시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의도하는 것처럼 새로운 시각을 통해 세계의 현재와 과거를 두루 살펴볼수록 서구의 부상은 그 이면에 숨겨진,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형태를 서서히 드러낼 것이다. 그 숨겨진 형태를 살펴보려면 반드시 <유럽 중심적 관점>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한 비평가는 서구가 인종적, 문화적, 환경적, 정신적 특수성 같은 고유한 역사적 이점을 지니고 있어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모든 사회들에 대해 영구적 우월성을 갖는다는 견해는 한낱 <유럽 중심주의의 신화the myth of Eurocentrism>일 뿐이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유럽 중심주의를 서구의 세계 지배를 감추기 위한 교묘한 이데올로기 혹은 <진실의 왜곡>이라고 간주했다. 또 다른 사람은 세계의 운영 방식에 대한 여러 해석들 가운데 하나의 이론적 모델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좀 더 깊이 들어가서 비평가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유럽 중심적 세계관은 유럽을 세계사의 유일한 형성자, 심지어 세계사의 근원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유럽은 행동하고 다른 세계는 따라온다. 유럽은 힘을 지녔고 다른 세계는 수동적이다. 유럽은 역사를 만들고 다른 세계는 주변이다. 유럽인들은 스스로 변화와 근대화를 시도할 수 있지만 다른 세계는 그런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이다.
세계가 이루어지는 방식과 세계를 바라보는 유럽 중심적 사상은 미국인들에 의해 계승, 유지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역사는 이따금 가장 순수하고 가장 잘 표현된 서구 식민화의 정점으로 간주된다. 이제 유럽의 역사, 심지어 세계사까지도 유럽 중심적 관점에 의해 결정되고 있으며 대체로 그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이런 현실은 「매트릭스」의 키아누 리브스나 「트루먼쇼」의 짐 캐리가 직면했던 상황과 아주 흡사하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 자신들이 매트릭스 세계나 텔레비전 화면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유럽 중심주의도 마찬가지다.
나는 근대 세계의 기원을 설명하는 유럽 중심적 방식을 거부했다. 그렇다면 유럽의 특징들을 지닌 현재의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비非 유럽 중심적 방식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이제까지 배제했거나 간과했던 다른 세계를 포함하면서 그 범위를 확장하면 가능하다. 즉, 다른 관점에서 시작하여 다른 결론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방식을 적용하면 우리는 유럽 중심적 관점이 아닌 오직 새로운 세계적인 관점만이 근대 세계의 기원을 적절히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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