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배반당한 사람들
나라와 정부를 믿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끌려가 죽었다. 그렇지 않고 도망간 사람들은 살았다. 한국전쟁에서 대량학살은 체계적인 과정을 통해 발생했지만, 피해자의 고통과 아픔을 직접적으로 느껴야 했던 것은 국가의 최고위층이 아니라 방아쇠를 당긴 병사들이었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자는 밀실에서 죽음을 결정하는,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위정자들이지 피해자와 대면해서 총구를 겨누는 실행자들이 아니다.
1950년 6월 말 강영애는 새벽녘 집으로 찾아온 경찰에게 손이 묶인 채 청주경찰서로 끌려갔다.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의 국민보도연맹원이었던 그녀는 10여 일 정도 유치장에 구금된 7월 10일경 저녁 무렵, 경찰 트럭에 실려 남일면 쌍수리 야산으로 갔다. 경찰은 트럭에서 사람들이 줄줄이 내리자마자 이들을 꿇어 앉혀 놓고 총을 쏘았다. 강영애는 온몸에 여덟 발의 총탄을 맞았지만 살아났고 같이 있던 남편은 “이렇게 같이 죽게 된 것도 다행”이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죽었다.
군과 경찰은 국민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을 개전 직후부터 9월 중순경까지 전국에서 검속하고 살해했다. 이들에 대한 연행과 살해는 한강 이남 지역에서 전쟁 발발과 동시에 이루어졌지만 군경이 후퇴하는 시점이나 인민군 점령 여부에 따라 지역별 규모와 양상에는 차이가 있었다. 북한이 곧바로 남침해 전황이 급속히 악화되었던 지역에서 군경은 연행한 이들을 후퇴 직전에 총살했다. 전선으로부터 비교적 여유가 있었던 지역에서 군경은 이들을 며칠씩 구금했다가 형식적인 분류를 거친 후 집단살해했고, 일부에서는 경찰이 구금자들을 풀어 주거나 도망가게 내버려 두기도 했다.
1949년 4월 20일 좌익 관련자들의 사상 전향을 목적으로 만든 국민보도연맹은 중앙본부 결성을 시작으로 1950년 6월 전쟁 직전까지 전국에서 지방 조직을 갖춘 관변 단체였다. 사상검사 오제도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이 조직은 1948년 8월 정부 수립과 여순사건 그리고 국가보안법 제정과 같은 일련의 정치·사회 변동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결성되었다. 회원 모집과 관리는 일선 경찰서에서 맡았고 국민보도연맹원은 요시찰인으로서 감시 대상이었다. 국민보도연맹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고 사상 전향을 책임진 것은 검찰청 소속의 사상검사들이었다. 회원은 농촌이나 시골로 갈수록 사상이나 이념과 무관한 사람들이 할당에 의해 채워졌다. 30만여 명으로 알려진 국민보도연맹원은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에서 가장 먼저 ‘내부의 적’으로 둔갑되어 죽음으로 내몰렸다.
1951년 2월 초순 국군은 경남 거창군 신원면 일대 6개 리 마을에서 주민 719명을 학살했다. 당시 아홉 살이던 서종호는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남동생 둘, 여동생을 잃고 할머니와 살아남았다. 부모형제의 사랑도 모르고 고아나 다름없이 살아온 그는 그때를 생각하면 항상 목이 메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국민보도연맹의 사상검사로서 활동한 선우종원은 거창사건이 일어났을 때 장면 총리의 비서실장으로 있었다. 그는 사건이 전시 국회에서 정치 쟁점이 될 무렵 김종원이 총리에게 보고하러 가지고 온 자료 중에서 사진을 보았다. 신원초등학교 마당에서 군인들이 사람을 쏴 죽이는 장면과 죽은 엄마 옆에서 아이가 울고 있는 현장 사진이었다.
거창사건은 11사단9연대의 작전명령과 국회의 현지 조사, 이에 대한 군의 위장 공비 공격, 피의자에 대한 군사재판과 사면복권 등으로 볼 때 전쟁기 민간인 학살 사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다. 희생자들은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들처럼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주민들이 전체 사망자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그들은 전투를 실행하거나 무력을 조직할 능력이 없는 비전투원들이었다. 희생자는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간주되는 집단이나 또 그런 구성원이 포함된 특정 집단이 아니었고, 단지 작전지역 내에 거주하던 산간벽촌 마을 사람들이었다.
국민보도연맹원과 마찬가지로 군경이 죽이려고 한 민간인은 대부분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이었다. 학살의 희생자는 전선에 영향을 미치는 세력이나 집단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더구나 경찰에게 이들은 자신들과 함께 살던 주민이었고 대면하는 이웃이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이렇게 상호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이 한국전쟁이라는 내전 시기에 벌어진 학살의 성격이었다. 이는 가해자의 심리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웃을 죽이기 위해서는 먼저 명령이 있었고 나중에 논리가 필요했다. ‘공산주의자’나 ‘좌익’으로 의심스러우면 ‘적’으로 치환되기 십상이었다. 논리의 비약은 전선과는 무관한 후방에서 확대되어 말단 지역으로 갈수록 맹위를 떨쳤다.
오늘날 국민국가 체제는 그 구성원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국가의 권위에 따르기를 원한다. 전쟁이나 체제 갈등, 분단과 같은 예외적인 상태에서 국가의 권위는 군인이나 경찰과 같은 무장 집단에게 절대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첨예한 갈등이나 긴장 상태에서는 누구나 지휘관의 살해 명령을 수행하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전쟁 수행과 전쟁범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고 정의와 인간성에 대한 국가와 개인의 윤리 관념이 불분명하면 누구든지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있다. 누구에게나 가해자가 될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동시에 가해자가 되지 않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인간의 본성은 어떤 환경 속에서 사악해질 수도, 절제될 수도 있고 또한 거부되어지기도 한다.
집단살해 현장에서 피해자의 가슴팍을 겨눈 총탄은 개인의 총에서 발사되었지만 누구의 총구에서 나왔는지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해자는 일말의 죄책감을 덜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살해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위장된다. 가혹한 폭력은 개별적으로도 나타나지만 집단을 통해서 더욱 부추겨질 수 있다. 주위 동료들의 압박은 집단이 하는 일에 따르도록 강제하고 이를 거부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한국전쟁의 사례를 볼 때 피해자의 인간성은 ‘좌익’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부인되고, 가해자가 갖는 심리적 익명성은 개인의 살해 책임을 희석시켜 집단 면죄로 이어졌다. 가해자에게 이 과정이 심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방아쇤를 당긴 자신의 책임과 이를 명령한 상급자의 책임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내전 상황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인간적 거리는 일반저긍로 아주 가깝다. 살해를 실행하는 동기의 이면에는 자기 정당화가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군인과 경찰이 자기 신념에 따라 명령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반공주의가 특별히 중요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의 군대와 경찰이 후퇴를 거듭하는 동안 이 대열 속에 있던 사람들은 명령을 따르는 관료의 일원일 뿐이었따. 군인과 경찰이 도덕적 감정을 제어하고 학살을 수행하게 되는 것은 희생자에 대한 이데올로기나 증오, 두려움이 아니라 지휘관의 명령과 동료 집단의 압력에 복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신이 통제된 민간인들로부터 하등의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내부의 적’이라는 규정은 살해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최고위층의 책상 위에서 나온 것이자 사후에 합리화된 것일 뿐이다.
학살과 공동체
대량학살과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는 국가권력의 의도적인 행위에 의해 발생한다. 가해자의 인권침해 행위는 군대와 경찰과 같은 국가기구가 억압적이고 조직적인 체계에 의해 뒷받침될 때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물론 가해자가 저지르는 살해는 상관의 명령이나 전시와 같은 조건을 필요로 한다. 이런 환경에서 살인은 상대방 또는 적에게 명백한 잘못을 씌움으로써 좀 더 손쉽게 이루어진다.
한국에서 ‘좌익’은 사상의 문제라기보다는 잘못되거나 나쁜 것에 관한 상징이다. 정부 수립 전후부터 정치적 반대자는 ‘좌익’이라는, 한마디로 구분할 수 있었고 이렇게 분류되면 폭력을 가하는 것이 쉬워졌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최악의 상태가 도래할 것임을 알리는 ‘경고’였다. 국민보도연맹원은 당연히 ‘좌익’이었고 이는 ‘악의 상징’을 의미하게 되었다. 요시찰인도 마찬가지였다. 개전 초기 3일간의 시간은 국민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요시찰인을 살해한 것은 비단 구김ㄴ보도연맹원이 인민군에 협조할 것이라는 ‘예단’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보다는 ‘좌익’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이승만 정권의 이념적 성격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사상 전향은 이런 발사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거창사건에서도 군의 작전은 정치체제의 행정이 미치는 경계를 중심으로 ‘적’과 ‘우리’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수복하지 못한 적성 지대의 주민은 ‘네 편’으로 설정되었다. 일단 상대편으로 규정되면 군경의 토벌작전은 민간인과 적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는다. 내전과 같은 전투 과정에서는 전선의 이동에 따라 필연적으로 정치체의 경계도 달라진다. 따라서 통치권력은 그 정치 공동체 구성원들의 위임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선의 이동, 전투의 결과에 따라 형성되었을 뿐이다.
한국전쟁에서 집단학살로 죽은 민간인은 1960년 전국피학살자유족회에서 집계한 회원 현황에 따르면 114만 명 정도였다. 유족에는 국민보도연맹 희생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여러 형태의 피학살 유족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국피학살자유족회 회원 현황이 어떻게 집계되었는지 자세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이 수치가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유족들이 회원 수를 부풀리거나 피해를 과장했다고 볼 이유 또한 없다. 불행하게도 현재 전체 피해 규모를 추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자료와 증언, 조사가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밝혀지지 않은 채 지난 것을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다. 국가 행정 체계가 오랜 세월의 무게를 걷어 낼 수 있을지는 아무도 가늠하지 못하는 일이다.
한국에서 ‘정치 사상범’이라는 낙인은 죽음으로도 벗어 버릴 수 없었다. 피학살 유족들에게 오랜 세월 가해진 정치적 차별과 사회적 소회는 이들에게 좌절감과 사회적 박탈, 차별과 피해의식을 갖게끔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무원이나 교사로 임용될 때 기관에서 실시하는 신원조회에서 불이익을 받고는 그것이 전쟁 때 있었던 일과 관련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해방 공간과 분단 정부 수립과정에서 만들어진, ‘좌익’에 대한 정치적 증오와 이데올로기적 낙인은 전쟁 시기 학살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피해자들은 그 사실로 인해 각종 불이익을 당해도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못했다.
2010년 이후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해 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이 대법원의 소멸시효 배척 결정으로 손해배상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이는 60여 년 동안 이어진 국가의 범죄를 일면 단죄하는 법적 조치였다. 그러나 이행기 정의라는 과거청산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 국가배상은 피해자 개인 수준에서 이뤄지고 가해자 책임은 여전히 원칙적인 담론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소멸시효 배제 문제에 대한 논의와 협의 또한 큰 진전이 없다. 궁극적으로 국제인권규약의 국내 적용이 의제가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감안하면, 소멸시효 부분은 당분간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하는 손해배상청구 소송 과정에 국한될 가능성이 크다.
이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많은 희생자와 그 가족이 자신들의 불명예를 씻고 마음의 상처를 회복할 수 있었다. 국가의 사회, 이웃으로부터 버림받은 느낌, 권리를 박탈당한 채 견뎌야 했던 수모, 자기 존재를 부정당해 온 공동체로부터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부모와 형제자매를 잃은 모진 시간 속에서 겪어야 했던 삶의 질곡을 모두 보상받을 수는 없지만,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생긴 것만은 분명하다. 이는 피해자뿐만 아니라 정치 공동체의 성원으로 살아가는 다른 시민들에게도 국가와 개인의 권리관계를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국가 폭력의 피해자들은 동료 시민들로 하여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게 해준 사람들이다. 국가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보통의 노력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고 주권이 구성원인 시민에게 있다면 이는 시대를 넘어서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과제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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