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거듭거듭 읽기 위하여
볼테르는 사람들이 책을 너무 적게 읽을 뿐 아니라, 배우기 위해 책을 읽는 사람들 대부분이 잘못된 독서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19세기의 한 작가는 말했다.
많이들 언급하나 기준이 부족함이
우리 사람의 운명이며,
많이들 언급하나 독서가 부족함이
우리 책의 운명이다.
책을 읽을 줄 안다는 건 기술이 있다는 말로, 책을 읽기 위한 기술, 즉 독서의 기술이라는 것이 있다. 앞 글을 쓴 생트 뵈브는 또한 말한다. “비평가란 다름 아닌 책 읽는 법을 아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책 읽기를 가르친다.”
그렇다면 이 기술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당혹스러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기술은 사용하려는 목적에 따라 정의되니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를 자문해 보자. 배움을 위해서일까? 작품을 판단하기 위해? 아니면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배움이 목적이라면 손에 펜을 쥐고서 매우 천천히 책에서 얻은 가르침과 이해하지 못한 내용 모두를 적어 가며 읽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천천히 적은 내용을 되짚으며 읽어야 한다. 이 작업은 상당히 중요하며 진득함을 요구하지만, 실제 책을 읽는 매 순간 조금씩 무언가를 배운다는 느낌 외에는 다른 어떤 즐거움도 주지 않는다. 작품을 판단하고자 비평적 독서를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때도 마찬가지로 매우 느리게 읽어야 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독특한 발견과 새로운 생각, 작가의 의도나 계획, 작가가 자기 생각이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 생각을 이야기에 담아내는 방법, 문체와 언어 등을 적어 가며 천천히 읽어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대화록’을 만들어 저자의 생각과 취향을 자신과 견주고, 저자의 생각이나 취향을 당시나 요즘과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 기록을 바탕으로 작가에게서 얻은 종합적인 사상과 여러 개별적 생각을 정리하고 그 둘 사이의 논리적이거나 개연적인 연결점을 찾을 수만 있다면, 남달리 뛰어나지는 않더라도 단단한 글을 쓸 수 있다.
책 읽는 즐거움을 도외시한 비평적 독서는, 생트 뵈브의 말마따나 무미건조로 점철된 특별한 종류의 즐거움만을 제공할 따름이다. 극작가 사르케가 생의 마지막 시기에 했던 말도 설득력이 있다. “책을 읽고 나서 무언가 말할 거리를 찾아야 하는 독서는 정말 진력이 다 나더군. 더는 책을 읽는다고 볼 수도 없어. 책에 자신을 내던지는 독서를 해야 하는데,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이야. 작가의 품 안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의 독서지.” 그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다. 그러면 비평가는 왜 필요할까? 비평가는 하나의 관점을 지니고서 작가를 읽도록 도와준다. 비평가의 글은 작가에게 들어가는 데 매우 유용한 길잡이가 된다. 작가의 작품을 읽었는지 아닌지에 따라 비평가는 독자에게 작품 전체의 흐름을 이해시키거나 새로운 방식에 따라 거듭하여 읽기를, 다시 생각해 보기를 권유한다. 아직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 점을 생각해 보기’를, 이미 책을 읽었다면 ‘이 점에 관해 생각해 보았는지’를 묻는다. 정치철학자 보날드는 세상이 세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중 하나가 중재자 역할을 한다고 봤다. 그의 방식을 따르면 책 읽기에는 세 가지 축이 있다. 작가와 독자 그리고 중재자인 비평가.
다시 말하지만 비평가는 비평을 통해서 책을 읽고 비평을 통한 책 읽기, 즉 비평적 독서를 가르치는 사람인데, 나는 이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즐거움만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하는가? 바이올린을 배운다는 것은 연주법을 배우고 연주를 통해 더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 같은 방식의 책 읽기를 배우고 싶지 않은가? 지금부터 나는 전혀 다른 목적과 전혀 다른 관점을 지닌 한 가지 기술에 바치는 한 권의 책을 시작하고자 한다.
느리게 읽기
책 읽는 방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우선 책을 천천히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뒤로도 계속 천천히, 자신이 마지막으로 읽게 될 소중한 책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천천히 책을 읽어야만 한다. 그리고 책에서 배움을 구하거나 비평할 때와 마찬가지로 즐거움을 위해서라도 책은 매우 천천히 읽어 나가야 한다. 플로베르는 감탄을 금치 않는다. “정말이지 17세기의 사람들이란. 라틴어를 알다니! 천천히 읽는다니!” 직접 글을 쓰려고 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책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책에서 얻은 사상이 그저 자신의 만들어 낸 생각이 아니라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를 자문하며 천천히 책을 읽어야 한다. ‘이것이 맞을까?’ 독자는 계속해서 이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져 보아야 한다.
조금 유별나기는 해도 문헌학자들은 이 세계에서 가능한 최상의 감정을 느끼려는 일종의 집착을 보인다. 우리도 이러한 집착을 우리의 원칙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텍스트가 정확할까? ego(나) 대신에 ergo(그리고)가, extemplo(즉각적으로) 대신에 ex templo(사원에서부터)가 와야 하지는 않을까, 그럼 뜻이 달라지는데.’ 이러한 집착은 매우 훌륭한 습관이다. 천천히 책을 읽고, 대상을 봤을 때 처음으로 파악한 의미를 경계하며, 무턱대고 책에 빠져들지 않으면서도 책을 읽을 때 나태함에 젖지 않게 해 준다. 일례로 철학자 쿠쟁은 파스칼이 밀가루진드기를 언급한 부분을 ‘가장 작은 심연abîme의 내부’로 읽고서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나 원래 책에는 “가장 작은 물질atome의 내부”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적혀 있었다. 낭만적인 열기에 취한 쿠쟁은 ‘심연의 내부’가 실제로 존재 가능한지는 생각도 못했다. 문학 작품을 읽을 때라도 이러한 나태함을 보여서는 안 된다.조급함도 금물이다. 조급함은 나태함의 또 다른 모습이다. 프랑스어의 옛 표현 중에는 ‘손가락으로 읽어 넘긴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훑어본다는 의미로, 이미 빤하다는 판단 아래 눈보다도 손가락이 더 바삐 움직이는 상황을 말한다. 예컨대 누가 이렇게 말한다고 치자. “벨 씨는 손가락으로 곧잘 읽는데, 읽는다기보다는 항상 책을 훑다가 중요한 부분이나 흥미로운 대목을 잘 짚어 내지요.” 벨과 같은 사상 수집가들에게 어울릴 이 방법을 너무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다만 이는 책 읽기의 모든 즐거움을 박탈하고, 그 자리에 사냥의 즐거움을 대신 채워 넣는다. 사냥꾼이 아닌 딜레탕트 독자를 지향한다면 그 반대를 자신의 방법으로 삼아야 한다. 손가락으로 읽어 넘겨도 안 되겠으며, 사선으로 읽어 내리는 독특한 읽기 방식도 피해야겠다. 첫인상을 경계하는 매우 신중한 태도로 책을 읽어야 한다.
천천히 읽는 게 불가능한, 느린 독서를 할 수 없는 책이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한 책은 존재하는데, 바로 우리가 읽어야 할 필요가 조금도 없는 책들이다. 느린 독서의 첫 번째 장점이 여기에 있다. 느린 독서는 애초에 읽어야 할 책과 읽어서는 안 될 책을 구분해 준다. 천천히 읽기는 제일 우선하는 원칙으로 모든 독서에 적용된다. 그것은 독서 기술의 본질과도 같다.
그 밖에 다른 원칙이 있을까? 물론 있지만 모든 책에 구분 없이 적용할 수는 없다. ‘천천히 읽기’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것도 보편적 독서의 기술이 될 수 없고, 다만 다양한 작품에 따른 서로 다른 독서의 기술들이 있을 뿐이다. 이제부터 차례차례 이러한 독서의 기술들을 하나씩 이야기해 보자.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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