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톱니와 맞물리지 않는
기주와 마지막으로 만난 건 지표가 회사를 옮기기 한 해 전 겨울이었다.
그날 지표는 모처럼 마음이 한가했다. 입찰서류를 마친 건 새벽 2시였다. 작성할 땐 미처 몰랐던 실수들이, 짝지인 여직원이 타이핑하고 나면 확대경을 들이댄 것처럼 눈에 들어왔다. 그날따라 수정할 사항이 많아서, 통째로 다시 타이핑하게 해야 했다. 이거, 아무래도 다시 쳐야 할 것 같은데. 지표가 말할 때마다 짝지의 얼굴은 점점 얇아지고 노래지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오케이 놓고 나니 2시, 집에 들어가 눈만 붙이고 나왔는데 몸도 마음도 날아갈 것 같았다. 오랜만에 여기저기 안부 전화를 걸었다. 의례적인 안부전화였는데, 기주가 표 나게 반겼다. 오늘 술 한잔할 수 있어? 지표도 마감을 자축하고 싶던 참이라 기주의 회사 근처로 가기로 했다. 회사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마지못한 듯 파슬파슬 내리던 눈발이 종로를 지나는 사이 문득 기세를 돋웠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약속장소에 이르는 짧은 동안에도 머리와 어깨에 제법 하얗게 쌓일 정도였다.
“너희 결혼한 지 몇 년 되었지? 그것밖에 안 되었어? 되게 오래된 일 같은데. ”
술잔이 몇 차례 비워진 뒤, 문득 기주가 물었다.
“그렇지? 남인 너도 그러는데 정작 결혼해서 사는 나는 어떻겠냐. 십 년도 더 산 것 같다야. ”
“엄살은, 해주는 밥 먹고 다녀서 얼굴에 윤기가 잘잘 흐르는구먼. 그런데…… 만일 결혼 십 주년이라면, 경미 씨한테 무슨 선물 해주고 싶어질 것 같아?”
“글쎄, 아직 생각해본 적 없어서. ”
“그럼 그동안 결혼기념일엔 어떤 선물 했니?”
“그거야 뭐, 남들 다 하는 거. 꽃이나 케이크 같은 거? 잊고 지났다가 된통 바가지 긁힌 적도 있고. 한번 건너뛴 걸 두고두고 우려먹더라. 어떻게 된 게 유효기간도 없어요. ”
“긁혀도 싸지, 뭐. 여자들이 그런 걸 얼마나 챙기는데. ”
“그런데 결혼기념일 선물은 왜? 결혼도 하기 전에 받고 싶은 선물 있어? 너무 비싼 거 아니면 내가 해줄게. 네 결혼에 부조하기 기다리다간 머리 셀 것 같으니. ”
“악담을 해라, 악담을. 그냥, 오늘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져서. ”
“무슨 일이 있었는데?”
“오늘 점심 먹고 쉬고 있는데, 사진 팀 사람이 나한테 와서 묻더라. 수줍은지 곰만 한 덩치가 몸까지 꼬면서. 결혼기념일이 얼마 안 남았는데, 그것도 십 주년인데, 자기 아내한테 아주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대. 아내가 감동해서 눈물 흘린 만한 선물을 좀 추천해달라는 거야. ”
“그 친구도 어지간히 센스 없다. 물을 사람이 없어서 결혼기념일 선물을 너 같은 노처녀한테 묻냐. 그런 감각으로 사진은 어떻게 찍는대?”
“사진은 사진부에서 그중 나아요. 어쨌거나 열심히 머리를 쥐어짰지. 그 친구, 고등학교 때 동갑내기와 연애해서 애부터 만들고 스무 살에 결혼했거든. 부모님 집에서 살림 차리고, 그 친구는 학교 다니고 아내는 부모 모시고. 지금까지 부모랑 같이 산대. ”
“그래, 생각한 결론이 뭐였어? 나도 알아둬야겠다. 십주년에 바가지 긁히지 않으려면. ”
“알아두긴. 나 오늘 사무실에서 완전히 이상한 사람 취급당했다?”
“그러니까 더 궁금해진다. 뭐였는데? 설마 마누라한테 남자친구 만들어주라는 건 아니었겠고. ”
“그런 건 요즘 여자들, 남편 도움 없이도 다들 알아서 한다네. 그래서 우리처럼 혼자인 사람들이 아우성치잖아. 있는 것들이 더한다고. 그런 데서까지 빈익빈 부익부라니, 살맛 안 나지. 어쨌든, 내가 생각한 선물이 뭐였냐면, 여행이었어. ”
“여행? 고작 생각해낸 게 그거였어? 그러니 쫑코 먹지. 요즘 좀 산다 하면 다들 유럽으로 미국으로 여행하는 판인데. ”
“그게 그냥 여행이 아니라 부인 혼자 휴가 보내라는 거였거든. ”
“결혼 십 주년 기념으로 부인 혼자?”
“너도 놀라는구나. ”
그럴 줄 알았어, 가볍게 콧방귀를 뀐 기주의 입에서 말이 줄줄줄 흐른다.
“생각해봐. 한 여자가 스무 살에 결혼했어. 그 푸른 나이에 결혼이라니. 어쨌든 시부모 모시고 살림만 하면서 십 년을 보냈어. 이십 대를 마누라에 며느리에 애엄마로 고스란히 보낸 거잖아. 집이 일터인 곳에서 스물네 시간 상시대기, 그걸 십 년 했다고 쳐봐. 혼자 있고 싶지 않겠어? 개인연구실 있는 대학교수들도 안식년 있는데, 안식년은 못 줄망정. ”
“듣고 보니 그럴 법도 하다만…… 그래도 여자 혼자 해외여행은 좀 그렇지 않겠어?”
“혼자 가는데 해외는 무리지. 제주도 정도면 어떨까 했어. 항공권 끊고, 호텔 예약해놓고, 그리고 부인 등 떠미는 남편, 폼 나지 않니?”
“폼 날진 모르지만, 나라도 그건 쉽진 않을 것 같다. 우리 애들 엄마는 좋아할 것 같다만. ”
“그래도 넌 부인이 좋아할지 모른다는 생각까진 하는구나. 그 정도만 되어도 양호한 거지. 그 친구, 싫으면 말지, 사무실 안에 소문까지 퍼뜨렸어. 결혼 십 주년 기념 선물로 아내 혼자 여행 보내라 했다고. 사무실 사람들, 빙글거리면서 다들 한마디씩 하더라. 내가 왜 결혼을 못 했는지 오늘에야 알았다고 이기죽이기죽. 심심하던 참에 아주 신이 났어요. ”
“그래서 그렇게 기운 빠졌던 거야? 정기주, 많이 소심해졌다?”
“그냥 좀 맥이 풀렸어. 결혼 안 한 여자 후배까지, 선배는 그러니까 시집을 못 가지, 하는데. 우리 분야가 그래도 다른 쪽보단 좀 열려 있달까, 앞서 간달까,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더란 거지. 허방 디딘 기분이야. ”
기주는 손바닥 위 얹은 술잔에 시선을 준다. 술잔을 천천히 돌리며, 말을 잇는다.
“세상의 톱니와 내 톱니가 맞물리지 않는다는 게 선명해질 때가 있잖아. 가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도 그럭저럭 굴러가긴 했는데 한순간 꼼짝 안 하는 때. 모터를 꺼버리자니 해야 할 일이 남았고, 억지로 가동시키자니 치명적인 고장이 날 것 같고. 이제 어쩐담, 싶어지는 때. ”
“왜 그러십니까? 여태 씩씩하게 잘 살아왔으면서. 또 아냐, 볼트 하나만 조이거나 늦추면 제대로 돌아갈지. ”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 않네. 우리가 꽤 괜찮은 자기계발서를 기획하고 있었어. 그런데 다른 데에서 거의 비슷한 성격의 책이 먼저 나와버렸어. 날짜 맞춰 내야 할 다른 책 때문에 좀 미뤄두었거든. 진행 다 된 걸 안 낼 수 없고. 결국 뒷북 친 격이 되어버린 거야. 내 인생이 꼭 그 짝 날 것 같아. ”
기주의 말 뒤편엔 늘 침묵이 작은 동굴처럼 고여 있었다. 그 동굴이, 기주의 말에서 울림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그 동굴이 메워지기라도 한 듯, 그날 기주의 말은 퍼석거렸다. 기주도 나이가 든 거라고 생각했다. 기주가 지친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그날 이후, 지표는 석 주간의 해외 출장 준비에 바빴고, 출장을 다녀온 지 얼마 뒤 회사를 옮겼다. 새로운 회사에서 어느 정도 낯을 익힌 뒤 기주에게 전화했더니, 다른 사람이 나왔다. 퇴사하셨습니다. 다른 연락처는 없었다.
아무 일 없이 사는 게 행복
“그땐 좀 황당했어. 일하는데 갑자기 펑, 소리가 나는 거야. 놀라서 무슨 일인가 하고 복도로 나갔는데, 복도 창으로 커다란 불기둥이 보이더라. 내가 있던 데가 육 층이었는데.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부터 들던데? 사무실 문 앞에 서서 보니 제일 중요한 게 컴퓨터 같더라. 얼른 코드 잡아 빼 들고 나섰어. 무겁긴,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 느낌도 없었어. 건물 밖으로 나오긴 했는데,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보고는 있는데, 도무지 현실감이 없는 거야. 온천지에 나 혼자 뿐이라는 느낌. 그냥 누구와 말이라도 나눌 수 있었으면 싶었어. 그런데 글쎄, 눈앞에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 서 있는 거야. 나도 그쪽도, 알긴 아는 얼굴인데 누구지, 그야말로 기연가미연가하면서. 그런데 그쪽에서 혹시, 하면서 너를 아냐고 묻더라. 얼마나 반갑던지. ”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기주는 어깨를 움칠한다. 그 전날 꿈부터 그날 그 시각에 이르기까지, 나중에 복기해보았지만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그냥 여느 날과 다름없는 날이었다. 그즈음 한 출판사의 하청을 받아 도시 생활을 접고 시골로 내려간 사람들의 삶을 담은 책을 만들고 있었다. 경제적인 이유로, 건강이 안 좋은 아이 때문에, 덜 벌고 덜 쓰는 자발적인 가난을 택하느라, 아이가 콘크리트 숲이 아닌 자연 속에서 자라도록, 연로한 부모님 곁에 머물기 위해, 각각 시골을 택한 이유는 달랐지만 그곳에서 정착하기까지 겪는 일들은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비슷한 데가 있었다. 수세식이 아닌 화장실, 가축 분뇨와 퇴비 냄새, 그리고 도시에서와 달리 개인을 주장하기 힘들다는 점, ‘저러다 곧 떠나겠지’ 하는 토박이들의 눈길 등등. 후배도 기주도 『월든』을 좋아했고 언젠가는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 책을 만들면서, 그 꿈에 숨어 있던 복병들이 하나 둘 실체를 드러내는 걸 보며 이따금 한숨을 쉬기도 했다. 저마다의 이야기는 재미있고 실제적인 정보도 유용했지만, 마감이 닥쳐오자 빨리 마쳐야 할 일감이라는 의미가 더 커졌다. 마감 무렵이면 그러하듯, 자꾸만 몸이 처졌다. 잠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쐴까, 하면서 현관으로 나가다가 전화를 받았다. 대학로에서의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려고 전철역으로 향한다는 후배의 전화였다. 그 바람에 나가려던 생각을 접었다.
“그때 후배가 전화하지 않았더라면, 나가서 바람 쐰다고 근처를 걷고 있었다면, 싶더라니까. 후배 말로는 조상이 돌보신 거래. 난 후배 덕으로 살아났다고 생각하고 있고. ”
“정말 안 다쳤기 다행이다. 사람이 열 명도 넘게 죽었으니 큰 사고인데. 그 후배, 네가 잘 모셔야겠다. 그런데 전에 강북 어디선가 살았던 것 같은데 시내로는 언제 이사했냐? 이렇게 가까운 데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좀 만날걸. ”
“이사한 건 아냐. 집은 그대로이고, 후배랑 오피스텔을 같이 쓰거든. 그 마포 출판사 기억나니? 거기 내가 나오며 그 자리에 들어간 후배가 오피스텔을 얻었어. 거기서 같이 출판 기획하고 있잖아. ”
“맞다, 언젠가, 나도 회사 옮기고 그러느라 바빴다가 오랜만에 전화했더니 너 퇴사했다고 하더라. 다른 회사로 옮겼으면 연락처 알려줄 법도 한데 모른다고 해서 혹시 연락도 없이 결혼했나 했지. ”
“결혼, 하마터면 그것도 할 뻔했지. ”
“그랬어? 누구야, 너한테 결혼할 마음이 들게 한 남자가?”
“남자가 그런 거라기보다는…… 그때 내가 좀 지쳤었나 봐. 누가 월급만 받아다 주면, 살림이나 하면서 살면 더 바랄 것 없겠다 싶었으니까. 집에서 시집가라고 들볶이는 것도 싫고. 그래서 만나기 시 작했는데……”
“연애? 못 본 사이에 별일 많았네. 웬만하면 연애하던 사람이랑 잘해보지 그랬냐. ”
기주는 웃는다. 그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다가 속으로 자신에게 묻는다. 정말 좋았을까?
이상했다. 일 때문에 찾아간 곳에서 그 사람을 처음 만났다. 파티션에서 나오는 그 사람을 보는 순간 기주는 한지를 떠올렸다. 얇게 떠내서 볕에 잘 말린 한지 같은 느낌. 그렇게 맑은 느낌을 주는 남자를 본 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남자는 좀 심하게 진지했다. 그냥 소소한 물음인데도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농담 같은 건 할 줄 모르는 사람이구나, 사회생활하기 참 힘들었겠다, 싶었다.
누군가를 마음에 품기 시작하면 기주는 노트부터 장만했다. 그리고 거기에 수직으로 홀로 섰다가 그 사람에게 기우는 제 마음의 기울기를, 그 사람의 말이나 사소한 동작을, 거기에서 어떤 기미를 읽으려 하는 제 마음을 낱낱이 쓰곤 했다. 걸핏하면 사랑에 빠지는 건 어쩌면 자기를 맞대면하는 일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은 결국, 평소에 흘려 넘기던 제 존재의 바닥을 샅샅이 들여다보는 일이었으니. 그 사랑이 때로 노트 한 권이 넘는 경우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제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면, 노트가 아닌 컴퓨터에 기록하게 될 것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힘, 그게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노인이든, 그런 마음이 없으면 일상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자신이 약하다는 걸 기주는 알고 있었다. 여자치고 대범하게 보이는 기주의 안쪽에서 하늘거리는 그런 여림은 지표조차 알지 못하는 기주만의 비밀이었다.
“그 사람도 나도, 결혼해서 같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어. 저도 나도, 남들처럼 부대끼면서 아옹다옹 살기엔 뭔가 조금씩 어긋난 데가 있는 사람들. 그래서 더 말이 잘 통했을 거야. 한동안 즐거웠는데, 비슷한 부분이 너무 많으니까 나중엔 거울로 제 못생긴 얼굴 들여다보듯 지겨워지는 거야. 그래도 같이 살아보려 했어. 그런데, 같이 살게 되면 내가 그 사람을 지독하게 외롭게 만들 것 같았어. 나도 마찬가지고. 혼자인 것보다 더 외로워질 거라면 뭣 하러 결혼해? 그래서 땡!”
말하는 순간 기주는 깨닫는다. 어쩌면, 아주 많은 부부들이 혼자일 때보다 더 외로운 걸 견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어쩌면 지표도 그럴 수 있다는 걸. 그래도,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덜어지니까, 자신과 맞대면하는 힘겨움을 피할 수 있으니까 결혼하는 게 아닐까. 전엔 왜 이 생각이 안 든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다 기주는 말문을 돌린다.
“그건 그렇고, 넌 왜 회사 옮겼니? 난 네가 그 회사를 떠날 거란 생각은 못 해봤거든. ”
“그게……, 해외 지사로 발령 날 예정이었는데, 썩 마음에 드는 곳이 아니라서. 혼자 가자니 그렇고, 같이 가자니 애들 어린 데다 애들 엄마 반대도 심했고. 워낙 일이 빡세서 나날이 체력 떨어지는 게 훤히 보였고. ”
“하긴, 너 바쁜 거 보면서, 일 고되게 시킨다는 생각은 했지만. 결혼한 여자들, 해외 나가면 수당 두둑해 돈 모아 온다고 좋아한다던데 경미 씬 안 그랬어? 해외 어느 쪽이었는데?”
“동남아인데, 워낙 가난하고 치안도 불안하고 그래서 겁났나 봐. 애들 키우기도 그렇고. ”
“동남아? 요즘 거기로 한국 사람들 여행도 많이 간다며? 전에 나랑 같은 회사에 다니던 사람도, 정 안 되면 거기 가서 관광 가이드 하면서 살겠다던데. 너 그리로 갔더라면 정말 못 볼 뻔했다. ”
“그러게, 살다 보니 이렇게 또 만나게 되네. ”
“참, 너 전에 형태 이야기 했지? 나도 형태 만났다?”
“형태? 걘 미국에 있을 텐데?”
“잠깐 들어왔다더라. 고향에 갔다가 우리 오빠한데 소식 들었다면서 어느 날 회사로 전화했더라. 나 회사 그만두기 직전에. ”
“무슨 일로?”
“뜬금없이 한번 보자고 해서 그러자 했거든. 걔네 집하고 우리 집하고 어른들끼리 알고 지내니까. 고향 내려갔다 오빠에게 내 연락처 물어봤나 봐. 어쨌든 회사 근처로 왔는데 남자 동창애 하나도 데리고 왔더라. 이름은 들었는데 또 잊어먹었다. 얼굴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던데. 아무튼, 찾아온 손님이라 같이 밥 먹고 술 마시고 그랬어. 다음다음 날인가 미국으로 돌아갈 거라던데. ”
“다른 별말은 없고?”
“응, 너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 부탁 받으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그런 말은 없더라. 친하지도 않았던 애가 찾아오니 조금 이상하긴 했어. 얘가 외국에서 좀 외로웠나 싶고. 아, 나중에 동창 모임 하자던데? 그런데 꼭 토를 붙여요. 정문당 사거리 안쪽에서 사는 아이들만 모이자는 거야. 사람 참 안 변한다 싶어서 웃었어. ”
기주가 피식 웃는다. 지표도 실소한다. 역전에서 인쇄소인 정문당 사거리까지, 그곳은 읍내의 번화가였다. 학교의 육성회 임원들은 대개 그 지역에 상점을 갖고 있었다. 학예회 때 무대에 오르는 애들도, 정체불명인 선행상을 주로 받는 애들도 다 그 구역 안에 상점을 갖고 있는 집 아이들이었다. 형태 같은 애가 보기에, 그 구역 밖의 애들은 동남아 사람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몇 해 전 여름, 주가가 왕창 폭락해서 주식에 투자했던 사람들이 다 술을 푸던 때, 그때 잠깐 형태가 떠올랐다. 형태에게 빌려준 돈은 주식에 투자하려던 거였다. 그때 투자했더라면 지금쯤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조금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그게 아닐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는 게 속편했다.
“그럼, 사람이 어디 변하냐. 너도 나도 그대로인걸. 벌써 이렇게 됐네. 그만 들어가봐야겠다. 만나서 반가웠다. 이제 종종 연락하고 지내자. 너 전자우편 사용하지? 여기 주소 적어줄래? JKJ? 이거 네 이니셜이잖아. 너답다. 내건 여기, 명함에 있어. 다음엔 술 한잔하고. ”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물을 한 잔 더 청해서 마신 것뿐인데 만난 지 세 시간이 흘렀다. 기주와 술을 입에도 대지 않고 이렇게 오래 이야기를 나눈 건 처음인 듯하다. 기주가 몸을 일으키며 말한다.
“그러게, 자주 보자. 그 일 겪고 나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아무 일 없이 살아가는 것만도 행복이라고. ”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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