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도끼의 시
예전의 독기가 없어 편해 보인다고들 하지만
날카로운 턱선이 목살에 묻혀버린
이 흐리멍덩이 어쩐지 쓸쓸하다
가만히 정지해 있다 단숨에 급소를 낚아채는 매부리처럼
불타는 쇠번개 소리 짝, 허공을 두쪽으로 가르면
갓 뜬 회처럼 파들파들 긴장하던 공기들, 저미는 날에 묻어나던 생기들
애인이었던 여자를 아내로 삼고부터
아무래도 내생은 좀 심심해진 것 같다
꿈을 업으로 삼게 된 자의 비애란 자신을 여행할 수 없다는 것,
닦아도 닦아도 녹이 슨다는 것
녹을 품고 어떻게 녹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녹스는 순간들을 도끼눈을 뜬 채 바라볼 수 있을까
혼자 있을 때면 이얍, 어깨 위로 그 옛날 천둥 기합소리가 저절로
터져나오기도 하는 것인데, 피시식
알아서 눈치껏 소리 죽인 기합에는 맥이 빠져 있기 마련이다
한번이라도 꽉 짜인 살과 살 사이의 틈에 제 몸을 끼워맞추고
누군가를 단숨에 관통해본 자들은 알리라
나무는 저를 짜갠 도끼날에 향을 묻힌다
도끼는 갈고 갈아도 지워지지 않는 목향을 그리워하며 기꺼이 흙이 된다
뒤꿈치 굳은살 같은 날들 먼지 비듬이라도 날리면
온몸이 근질거려 번쩍 공중으로 들어올려지고 싶은 도끼
네 숨소리를 훔쳐듣는다
담장을 허무는 대신 나는 담장을 수리하겠다
탱자 울타리 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어보아라
가시와 가시 사이에서 새들은 노래를 한다
심드렁해진 나와 너 사이엔 저런 경계라도 좀 있어야겠다
담쟁이넝쿨을 좋아하는 너를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대로보단 골목길을 어슬렁이길 좋아하는 나의
소심한 산책을 위해서라도
맞댄 등을 절벽으로 삼아보면 어떨까
어린 날 새 학년이 되어 만난 여자 짝꿍 책상 위에 금을 그어놓고
실랑이를 벌이던 악동으로라도 돌아가볼까
결혼 십년째 여전히 곰팡내 나는 나를 신랑이라고 부르는 아내여,
식장을 걷던 날의 두근거림을 간직하고 싶은 나의 신부여
기교는 슬프다 기교가 무너진 자리에 남는 고독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말을 섞고 몸을 섞고 숨결을 나누지만
너의 눈 속으로 들어간 지 너무도 오래되었구나
어쩌면 나는 네가 아닌 한에서만 겨우 너,
한밤에 아파트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누군가의 울음소리처럼
뻣뻣한 금 앞까지 바짝 다가앉아 네 숨소리를 훔쳐듣는다
전라도 하와이
나는 전라도 하와이다. 중학교 때 훔쳐본 아버지의 일기장
맨 첫장 첫줄은 이렇게 시작한다.
멀쩡한 성과 이름을 두고
고향을 떠나 멀리 부산 바다까지 흘러들어온 아버지를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어이, 전라도 하와이,
까까머리 소년에게 이 별명은 수수께끼였다.
태평양 어딘가에 있다는 섬이 어떻게 전라도와 이어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는데, 아버지는 어느날 내 허락도 없이
아들의 본적을 바꾸어버렸다.
그때서야 비로소 섬이 천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가.
느이 할아버지는 일제 때 탄광으로 징용을 갔어도
일본말을 할 줄 알아 편하게 살았단다,
전라도와 하와이 사이에서 아버지는 틈만 나면
영어 단어장을 끼고 살게 했다.
차라리 아들만이라도 하와이 쪽에 가까웠으면 하고.
전라도 하와이, 세상에 없는 섬
이 땅에만 있는 섬
아버지는 하와이였다.
아름다운 하와이 땅은 밟아보지도 못하고
평생을 전라도 하와이로 살다 가셨다.
공연한 일들이 좀 있어야겠다
내게도 공연한 일들이 좀 있어야겠다
일정표에 정색을 하고 붉은색으로 표를 해놓은 일들 말고
가령,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에 모종대를 손보는 노파처럼
곧 헝클어지고 말 텃밭일망정
흙무더기를 뿌리 쪽으로 끌어다 다독거리는 일
장맛비 잠시 그친 뒤, 비가 오면 다시 어질러질 텐데
젖은 바닥에 붙어 잘 쓸리지도 않는 은행잎을 쓸어담느라 비질을 하는 일
치우고 나면 쌓이고, 치우고 나면 쌓이는 눈에 굽은 허리가 안쓰러워
어르신, 청소부에게 그냥 맡기세요 했더니
멀거니 쳐다보곤 하던 일을 마저 하던 그 고요한 눈빛처럼
별 뜻도 없이 고집스레, 내 눈엔 공연한 일들에 노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이 쓸모없는 일들 앞에서 자꾸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세상에는 값지고 훌륭한 일도 많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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