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곤궁함
세상에서 처신할 때는 약삭빠르고, 친구를 사귐에는 건성으로 사귀며, 내뱉는 말은 밀랍처럼 번지르르하고, 시문詩文은 남을 흉내 내기만 한다. 기물과 의복, 음식 같은 것들은 이상야릇하여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심한 경우는 천지의 조화에도 솜씨가 미진한 것이 있다고 여겨서 조화옹과 공교함을 다투려고 하니, 극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형세는 서투름拙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니, 한 번 서투르게拙 되면 온갖 공교함이 그치게 되어 마음도 몸도 편안하게 된다.
내 친구 신申 처사處士(서원西原 신혜길申惠吉)는 겸謙괘로 처신하여 손巽괘로 들어가고 간艮괘로 멈춰서 둔遯괘로 숨은 자이니, 이것이 실로 처사가 천명을 좇아 마음의 안정을 얻은 징표다.
아! 재빠른 것은 해로움을 사게 되고, 지혜는 걱정을 사게 된다. 그러므로 원숭이는 화살을 맞고 앵무새는 갇히게 된다. 또, 까치의 둥지에 비둘기가 살고 벌꿀을 사람들이 달게 여기니 마땅히 선택할 바를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들으니 처사의 선조 졸재선생拙齋先生(신식申湜, 1551~1623)은 곧 신씨申氏 집안의 태산泰山으로 우러를 만한 사람이다. 처사는 자신의 거처가 졸재선생께 제사 지내는 곳에서 가깝기 때문에 경졸당景拙堂이라 이름 지어서 그 일치하는 뜻을 추구했다. 여러 군자들 중에 만약에 대단한 재주와 기이한 말을 자부하여 소박하게 침묵하는 것을 불안하게 여기는 사람은 이 당 앞을 지나지 말지어다.
行己則輥, 交友則面, 言辭則蠟, 詩文則贋. 以至於器用服食, 新異奇妙, 不可名狀. 甚者, 病天地造化之或未盡工, 欲與之爭巧, 極矣. 其勢不得不受之以拙, 一拙而百巧息, 心逸而身泰. 吾友申處士, 以之謙牧而巽入, 艮止而遯藏者, 實處士, 立命符也. 噫! 捷賈害, 彗賈憂. 故山狙射, 隴鳥鎖. 且鵲巢鳩居, 蜂蜜人甘, 宜知所擇矣. 吾聞之, 拙齋先生, 卽申氏之泰山, 所當仰止者. 而處士之居, 近其俎豆之所, 故名堂曰 “景拙” 以求其相契. 諸君子, 如有負駿才琦辯, 不安於朴素靜黙者, 請無過此堂. _ 景拙堂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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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환은 「보졸헌기保拙軒記」라는 글을 쓴 바 있다. 「보졸헌기」가 서투름을 지킨다保拙는 의미였다면, 이 글(「경졸당기」)은 한 발 더 나아가 서투름을 경모한다景拙는 의미다.
처신이나 교제, 말이나 시문 어느 것 하나 진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겉보기에는 매우 세련되어 보이지만, 정작 깊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한마디로 말하면 약삭빠르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호사에 대한 집착은 조물주와 다툴 정도로 심한 지경에 이른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교巧가 극치에 이르면 돌연 졸拙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이르게 된다. 교졸巧拙에 대한 혜환의 인식은 여기에서 빛을 발한다. 세상에서는 교巧만을 높은 가치로 떠받들고 있지만, 졸拙한 것이 진정한 몸과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그렇다면 졸拙이 꼭 손해를 보는 것만은 아니다. 일체의 가치에 대한 전복은 그의 글쓰기에서 자주 구사되는 방법이다.
이 글의 주인공인 신혜길에 대해서는 『주역』을 인용해 설명했는데, 처신을 겸손하게 하였고 어떤 일에든 겸손하여 남들에게 잘 받아들여졌으며, 멈출 때를 알아 멈추었고, 물러나 숨어 살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결국 세속의 잇속과는 상관없이 졸拙함을 실천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세속의 관점에서 그의 삶은 별 볼 일 없을 수도 있지만, 혜환이 보는 그의 삶은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환치된다.
세상에는 약삭빠른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서 그런 사람들이 우직한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지만 정작 그 약삭빠름이 제 발목을 잡게 마련이다. 졸拙하다고 해서 반드시 손해만 있는 것도 아니다. 역설적으로 졸拙함은 교巧함이 되고, 교巧함은 졸拙함이 된다. 똑똑한 척하는 헛똑똑이가 될 것인가? 아니면 아둔해 보이지만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인가?
바로 이 사람
‘차거此居’는 이 사람이 이곳에 산다는 말이다. 이곳은 바로 이 나라 이 고을 이 마을이고, 이 사람은 나이가 젊으나 식견이 높으며 고문古文을 좋아하는 기이한 선비이다. 만약 그를 찾고 싶으면 마땅히 이 기문記文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쇠 신발이 다 닳도록 대지를 두루 다니더라도 결국 찾지 못할 것이다.
此居, 此人居此所也. 此所卽此國此州此里, 此人年少識高, 耆古文, 奇士也. 如欲求之, 當於此記, 不然, 雖穿盡鐵鞋, 踏遍大地, 終亦不得也. _ 此居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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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환의 산문은 매우 짧다. 이 글은 그중에서도 특히 더 짧은 편에 속하는데, 7언 율시보다도 짧은 53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짧은 글에 차此가 무려 9번이나 등장한다. 어려운 글자도 없고, 어려운 구두句讀도 없다. 이 글에서 작가는 이 사람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는다. 불친절하지만 이 사람에 대한 궁금증은 더해만 간다. 이 사람이 어디에 사는지 알 수 없다. 아니, 알 필요도 없다. 사는 곳에 대한 확인은 관계망의 시발始發일 뿐, 이 사람에 대한 이해에는 도리어 방해가 된다. 이 사람은 다만 나이가 젊고 고문을 좋아하는 기이한 선비일 뿐이다. 단지 그뿐이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 쓸데없이 이 사람에 대해 이리저리 기웃대며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혜환은 이 사람에 대해서 다 말했다.
내 집에 세 들어 사는 나
나와 남을 놓고 보면, 나는 친하고 남은 소원하다. 나와 사물을 놓고 보면 나는 귀하고 사물은 천하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도리어 친한 것이 소원한 것의 명령을 듣고, 귀한 것이 천한 것에게 부려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욕망이 그 밝음을 가리고, 습관이 참됨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이에 온갖 감정과 여러 행동이 모두 남들을 따라만 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한다. 심한 경우에는 말하고 웃는 것이나 얼굴 표정까지도 저들의 노리갯감으로 바치며, 정신과 사고와 땀구멍과 뼈마디 하나도 나에게 속한 것이 없게 되니, 부끄러운 일이다.
내 친구 이李 처사는 예스러운 모습과 마음을 가졌으며 자신과 상대방을 구별하지 않고 겉치레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마음에는 지키는 것이 있어서 평생 남에게 구해 본 적도 없고 좋아하는 사물도 없었다. 오직 부자父子가 서로를 지기知己로 삼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부지런히 일하여 제 힘으로 먹고 살 따름이었다. 처사는 손수 심은 나무가 수백에서 천 그루에 이르는데, 그 뿌리·줄기·가지·잎은 한 치 한 자를 모두 아침저녁으로 물주고 북돋아서 기른 것이다. 나무가 다 자라서 봄이면 꽃을 얻고 여름이면 그늘을 얻으며 가을이면 열매를 얻으니, 처사의 즐거움을 알 만하다. 처사가 또 동산에서 목재를 가져다 작은 암자 한 채를 짓고 편액을 아암我菴(나의 집)이라고 달았으니, 사람이 날마다 하는 행위가 모두 나에게 연유한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저 일체의 영화·권세·부귀·공명은 나의 천륜이 단란하게 즐김과 본업에 갖은 힘을 다 쓰는 것과 견주어 외적인 것으로 여겼다. 단지 외적인 것으로 여길 뿐만이 아니었으니, 처사는 선택할 바를 안 것이다. 훗날 내가 처사를 찾아가 아암 앞의 늙은 나무 밑에 함께 앉게 되면 마땅히 다시 “남과 나는 평등하며 만물은 하나의 몸이다”라는 뜻을 이야기 나눌 것이다.
我對人, 我親而人疎, 我對物, 我貴而物賤. 世反以親者聽於疎者, 貴者役於賤者何? 欲蔽其明, 習汨其眞也. 於是有好惡喜怒·行止俯仰, 皆有所隨而不能自主者. 甚或言笑面貌, 以供彼之玩戱, 而精神意思, 毛孔骨節, 無一屬我者, 可恥也已. 吾友李處士, 古貌古心, 不設畦畛, 不修邊幅. 而中有守, 平生未嘗干人, 於物亦無所好. 惟父子相爲知己, 慰勉勤勞, 自食其力而已. 處士手所種樹, 數百千株, 其根幹枝葉, 寸寸尺尺, 皆朝朝暮暮, 灌培長養者也. 樹成, 春得其花, 夏得其陰, 秋得其實, 而處士樂可知也. 處士又取材於園, 結一小菴顔之曰我, 示人之日用事爲皆由己也. 彼一切榮華勢利富貴功名, 以較我之天倫團歡戮力本業外之. 不啻外也, 處士知所擇矣. 他日我訪處士, 共坐菴前老樹之下, 當更講人我平等, 萬物一體之旨矣. _ 我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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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我菴’. 도발적이다. 내 집이라니 그럼 제 집이 아닌 집도 있던가. 너무도 익숙하게 자신이 주인이라고 믿었던 집에 대한 고정관념을 단숨에 허물어 보인다. 내가 내 집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집의 주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물음을 함께 던져 준다.
그는 나와 남에 대해 말했다. 나는 나와 가장 친하고 귀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남에게 보이기 위한 나, 남과 같아지기 위한 나만 존재한다. 그도 아니면 남들과는 무작정 달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자신을 그르친다. 이탁오李卓吾는 “나이 오십 이전에 나는 정말 한 마리 개와 같았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자 나도 따라 짖어댄 것일 뿐, 왜 그렇게 짖어댔는지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벙어리처럼 아무 말 없이 웃을 뿐이었다”라 말했다. 나라고 믿는 것은 내가 아닐 수도 있으며, 내가 믿고 싶은 나에 불과할 때도 있다. 그렇게 자신도 모른 채 남들에 기대 한평생을 산다. 그런 의미에서 참다운 나를 찾는 일, 나답게 사는 일이야말로 어떤 일보다 중요하다.
아암의 주인인 이 처사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나무나 기르면서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남을 꺾어 보겠다는 생각이나 남같이 되어 보겠다는 마음도 없었다. 무엇인가 푹 빠질 만큼 좋아하는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시답지 않은 삶일 수도 있지만, 혜환은 그의 삶을 긍정한다. 인간이 불행한 것은 자신이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없는 것만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영화, 권세, 부귀, 공명은 내가 주인이 되기 보다, 남들이 기리는 나에 무게중심이 가 있다. 천륜에 즐거워하며, 내 일에 힘을 쓰는 것은 일견 대단해 보이지는 않지만 나다운 삶이다.
마지막으로 ‘남과 나는 평등하다’와 ‘만물은 하나의 몸이다’라는 화두를 제시한다. 사실 두 개의 말처럼 보이지만 만물일체라는 한마디로 귀결된다. 나와 너를 분별하는 마음에서 번뇌와 다툼이 생긴다. 그러니 모든 것이 하나나 다를 바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호승심好勝心이 사라진다. 또, 자연스레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동지애마저 싹튼다. 분별과 구별이 사라진 곳에서 나 자신을 찾을 길이 나타나며, 모든 것이 나에 대한 문제로 돌아온다. 나답게 살면 그뿐이다. 누가 기림을 주건 헐뜯건 다만 그들이 보는 나일 뿐이다. 내가 한평생 내 삶이라 믿은 것들이 고작 남들의 삶과 한 치도 다를 바 없다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았던 것일까? 살지 않았던 것일까?
가짜가 판치는 세상
호랑이는 깊은 산속에 살아서 사람들이 쉽게 보기 어렵다. 옛날 책에서 대개 말하기를 “호랑이의 씩씩하고 괴이함이 악귀와도 같다”고 했고, 여러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건장하고 걸출한 사나운 호랑이의 모습만 부각시킨다. 나는 ‘세상에 어떻게 이처럼 울부짖는 기이한 동물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생각했다.
신유년(혜환 34세 때) 광주廣州에서는 사나운 호랑이 때문에 골치를 앓아 관에서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하여 상을 주었다. 사냥꾼 아무개가 연거푸 호랑이 여러 마리를 죽이자, 형님인 죽파공竹坡公(이광휴)이 그 소식을 듣고는 후한 값을 치르고 황화방皇華坊(현재의 정동井洞) 집으로 가져오게 했다. 죽은 호랑이를 몇 리도 채 옮기기 전에 거리는 이미 인파로 가득차서 뿌연 먼지가 천지를 뒤덮었다. 호랑이가 이르자 문 쪽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모두 소름이 끼쳐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렇게 해서 마당에 누워 있는 죽은 호랑이를 마음껏 보게 되었다. 그런데 큰 이빨과 갈고리 같은 발톱은 대개 맹금猛禽류와 같았으나 이전에 그림이나 책에서 보고 들은 것만은 못했다. 여기에서 어질고 뛰어난 인물로 책에 실려 있긴 하나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사람 중에서 이 호랑이와 같은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듣기로 어떤 재상의 집에 보관된 <새끼 밴 호랑이 그림乳虎圖>은 진晉나라와 당唐나라 연간의 물건이라 전해진다. 그 그림의 괴이하고 사나움은 지금 세속에서 그리는 것에 못 미치는 것 같지만, 개들이 그림을 보자마자 벌벌 떨며 도망가고 숨는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그림으로 시험해 보면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저 가축들도 속일 수 없는 것이거늘, 사람이 도리어 진짜와 가짜에 현혹되어 헛되이 떠들기만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虎宅深山, 人罕覩也. 古書中多言, 其雄詭如鬼厲, 及看諸丹靑家所畵者, 極其健特虎鷙之狀. 余意世安有如是虓然異物也. 歲辛酉, 廣州患虎暴, 官募能捕者賞. 有獵戶某, 連斃數虎. 家兄竹坡公聞, 厚遺焉, 使致之皇華坊第. 虎未至數里, 巷術已塞, 塵颺天也. 乃門坐客, 皆竦然色動. 乃尸於庭, 縱觀焉, 鉅齒鉤爪, 盖猛禽也, 然不至如前所見聞於畵若書者也. 是知有載籍來賢豪人物, 未經目見, 類是虎者多矣. 曾聞某宰家蓄一乳虎圖, 傳爲晉唐間物. 其殊怪猛惡, 若弗及今俗所描者, 而諸犬見之, 輒駭怖走竄. 試以它圖, 則不然云. 彼畜物亦不可欺, 人反有眩眞贋而徒呶呶者, 何哉? _ 虎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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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또는 실제적 거리가 멀수록 그 대상은 신비화된다. 흔히 보지 못하는 것은 무섭고 신비롭다. 사람들은 대부분 책이나 그림 등을 통해 보는 것을 쉽게 믿는다. 실제보다 더 꾸며지고 부풀려진 이미지가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머릿속에 자리잡기도 하는 것이다. 실제가 어떤지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보려 하지도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호랑이를 실제로 보는 경우는 드물었던 모양이다. 형인 이광휴李廣休(1693~1761)가 값을 치르고 가져온 죽은 호랑이를 직접 보았더니 이빨이나 발톱 등은 자기 예상과 다름이 없었지만, 그저 맹금류일 뿐 상상했던 무시무시한 괴수의 모습은 아니어서 맥이 빠졌다고 토로하면서, 어질고 뛰어난 인물들도 이와 다름없음을 말하고 있다. 명성이 뛰어난 사람들을 직접 만나 보면 명불허전인 경우도 있지만, 아무런 실력이나 내공도 없이 대가의 반열에 무임승차한 경우도 적지 않다.
사납지는 않지만 실물에 가까운 호랑이 그림을 개에게 보여 주었더니 놀라서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끝에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가짜는 오히려 더 진짜 같고, 진짜는 오히려 가짜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짜만이 가진 진실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는다.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한다. 불의가 정의를 누르기도 하고, 소인이 군자를 핍박하기도 한다.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 대한 답답함이 이 글에 드러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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