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필요한 급여를 실시하여 이들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자활을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빈곤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자주 들여다보게 된다. 법안을 읽다 보면 ‘여기엔 이렇게 쓰여 있는데 현장에선 왜 이렇게 운영이 안 될까’ 하며 한숨을 쉬게 된다.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법은 꽤 간단명료하며 빈곤층의 권리를 보장하도록, 그 권리를 다른 사람이 함부로 침해하거나 변경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문제는 이 법만으로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실제 운영에 대해 조금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빈곤사회연대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죽음을 만났다. 본인의 근로능력 때문에 복지 신청이 좌절된 뒤 ‘나 때문에 아들이 받지 못하는 것이 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떠난 장애 아동의 아버지가 있었고, ‘내가 죽으면 부인은 수급권을 달라’며 요양병원에서 투신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쌀 한 포대가 아닌 자립을 원한다’라는 말을 남긴 30대 가장이 있었고, ‘법이 어떻게 사람에게 이럴 수 있냐’라는 편지를 쓴 할머니가 있었다. 전 국민에게 건강하고 문화적인 삶을 권리로서 보장한다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있는 나라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처음에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수급자의 목소리를 통해 들으면 들을수록 왜 그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조금은 이해되기 시작했다.
송파 세 모녀가 세상을 떠난 뒤 대통령은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했거나 관할 구청에서 알았더라면 정부의 긴급복지지원제도를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있는 복지 제도도 활용하지 못하면 사실상 없는 제도나 마찬가지”라며 잘 홍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부와 여당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개정안의 조속한 통과를 바라며 ‘세 모녀 방지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세 모녀는 수급을 신청했더라도 지원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법조문만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빈곤층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비난이 빈곤층을 옥죄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이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고 무기력하다.
우리는 매일같이 빈곤층이 자살한 기사를 읽는다. 빈곤층의 죽음에 대한 보도는 대부분 직접 원인을 찾기 위한 정황 묘사에 그친다. 하지만 가난의 진짜 모습은 오히려 사람들의 인생 곳곳에 종적으로 존재한다. 일자리, 임금, 해고, 질병, 결혼과 이혼, 사기, 월세 등 셀 수 없는 이야기가 남긴 족적 위에 가난의 현재가 놓인다. 이 이야기를 따라잡지 않으면 송파 세 모녀도, 빈곤 문제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된 지 1년이 지난 2001년 12월 최옥란이라는 여성이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장애인이고 기초생활수급자이던 그녀는 ‘최저생계비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라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최옥란 씨는 이듬해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가 남긴 정신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개정을 위한 움직임으로 이어졌고, 그 길 위에서 2004년 빈곤사회연대가 결성되었다. 지금까지 빈곤사회연대는 기초생활보장제도가 가난한 사람들의 마지막 버팀목으로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이 책은 그러한 활동 속에서 만들어졌다. 더 많은 사람들이 빈곤층의 진짜 현실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략)
자살(自殺, Suicide):
행위자가 자신의 죽음을 초래할 의도를 가지고 생명을 끊는 행위
자살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자신의 죽음을 초래할 의도를 가지고 생명을 끊는 행위’라고 나온다. 한국의 자살률은 각종 통계에서 타국의 추종을 불허한다.
세계 자살률 3위. OECD 국가 자살률 1위. 하루 평균 마흔네 명이 자살.
2012년 전체 자살률은 10만 명당 28.9명. 예순다섯 살 이상 노년층의 자살 사망률은 10만 명 중 80명.
자살증가율은 세계 2위로, 2000년 인구 10만 명 당 13.8명으로 2012년까지 109.4퍼센트 증가.
자살증가율 1위인 키프로스의 경우 10만 명 당 자살률이 1.3명에서 4.7명으로 늘어난 것이라 한국의 자살의 특징은 ‘전 연령에 걸쳐 그 수가 많은 데다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죽음을 초래할 의도’를 갖는 기원은 무엇일까?
흔히 빈곤층을 ‘취약 계층’이라고 말한다. 취약 계층이란 선택할 여지가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거리의 턱이 높아 다닐 수 없는 휠체어 장애인, 먹고 싶은 음식이 있어도 돈이 없어 사먹을 수 없는 가난한 이,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아픈 몸으로 운신할 수 없는 환자와 노인 등이 취약 계층이다. 이들에게 죽음은 정말 자신의 의도에 따른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던 때에 마지막으로 떠밀려난 낭떠러지였을까?
약자의 죽음은 정치적이다. 그것은 한 인생의 끝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 한 사회가 무슨 선택을 빼앗아버렸는지에 대해 알려준다. 한겨울 혼자 방에서 잠을 자는데 보일러가 터지고 그 물이 꽁꽁 얼어붙을 때까지 방을 빠져나오지 못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른 장애인에게 과연 삶을 선택할 여지가 있었을까? 가족들이 빚더미에 올라 앉아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치료를 포기하는 환자에게는? 추운 겨울 야윈 몸 하나 뉘일 곳을 못 찾아 거리에서 죽어가는 노숙인에게 정말 선택이 있었을까?
가난한 데다 미래도 없는 사람들과 부유하고 낙천적이며 자신감과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 강철 체력을 갖춘 겁 없는 등반가라도 건널 수 없을 만큼 이미 깊은 심연이 날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그 자체로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_지그문트 바우만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무상급식 논쟁에서 시작해 무상보육을 지나 2012년 대통령선거 때 박근혜 대통령이 내세운 기초연금 공약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는 마치 복지국가 만들기에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듯 보였다. 하지만 복지 논쟁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고 간 자리에 가난한 이들의 자리는 여전히 없었다.
2013년 한 해 동안 1717명이 고독사로 생을 마쳤다. 하루 평균 4.7명이니 다섯 시간마다 한 사람이 외롭게 죽어갔다. 하루 마흔네 명이 자살을 선택하고 이들을 보면 다섯 명 중 한 사람은 경제적 이유로 삶을 포기한다. 삶은 늘 아슬아슬하고 죽음은 너무 가까운 가난한 이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OECD 가입 국가, 경제 대국이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서 심연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빈곤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2007년 이래 빈곤층은 늘어난 반면 기초생활수급자 수는 점점 더 줄어들었으며, 구걸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거나 서울역과 같은 공공 역사에서 노숙인을 강제로 쫓아내는 등 빈민 혐오적인 정책은 관철되어왔다. 빈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과 복지에 기대어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엄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같은 신문의 앞뒤 면에 나란히 실리고 있다. 이 모순된 주장의 줄다리기는 정작 가난한 이들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가난은 운명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번개처럼 죽음에 사로잡혀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꾸준히 실패하고 다시 도전했지만 실패하는 현실이 반복될 때 절망은 천천히 나타난다. 어느 순간 더 이상 도전할 일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들은 죽음을 떠올린다. 사람은 결코 쉽게 죽지 않는다. 송파 세 모녀를 기억하고 잊지 않을 때 우리는 다시 이러한 비극을 맞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송파 세 모녀를 기억하기 위한 첫 시작점은 가난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 이들과 빈곤에 빠져 절망하는 사람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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