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의 정치
나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는 편이다. 동물의 외양이 강렬한 시각적 쾌락을 주는 데다, 습성을 가만히 관찰하면 뭔가 배우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점도다리가 팔랑팔랑 헤엄치는 모습이 내게는 꽃보다 열 배 아름답다. 장어가 필리핀 근처 심해에서 태어나 아시아 각지 해안으로 수만 리를 헤엄쳐가는 모습도 만리장성보다 감동적이다. 작은 체구, 단순성, 절실함, 거기에서 비롯되는 지독한 창의성. 횟집에서 한 접시의 단백질로 환원되는 이 작은 생명체에 그런 서사가 있다는 사실의 각성은 감동과 지적 호기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강한 호기심을 느낀 동물들 중에는 사마귀, 거미, 연가시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시각적 쾌락을 줄 만큼 아름답지 않다. 당장 보기에 징그럽고, SF영화에서처럼 크기가 갑자기 커진다면 끔찍할 존재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내 주목을 끈 것은 특이한 생존 방식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육식성이다. 그러나 먹이를 얻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사마귀는 한자어로 당랑螳螂인데 메뚜기 같은 작은 곤충을 잡아먹고 산다. 그런데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이 유래될 만큼 사마귀는 겁이 없다. 큰 적을 만나면 튀고 보는 보편적 자연의 생존 전략을 위반한다. 도망가라고 조물주가 날개까지 달아주었지만 좀처럼 내빼지 않는다. 대신 낫처럼 생긴 앞발을 들고 전투태세를 취한다. 수레 앞에서 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광경이 당랑거철이다. 사마귀에게 전투는 숙명이다. 일체의 노동을 거부한 대가로 패배가 예정된 싸움에서도 물러서지 못한다. 여기에 감동받은 중국인들은 ‘당랑권’이라는 권법을 만들기도 했다. 공격밖에 모르는 호전적 곤충 사마귀가 적과 대면하는 전략은 딱 한 가지, ‘위협’밖에 없다. 인간 캐릭터로 치면 ‘조폭’을 닮았다.
거미는 이보다 지혜롭다. 적과의 물리적 충돌을 피하면서 거미줄에 걸려 공격 능력을 상실한 적만 상대한다. 부상당할 염려가 없다. 먹이 섭취 방식도 한결 문명화돼 있다. 즉석 처리도 하지만 거미줄로 말아 한동안 저장하고 육즙만 빨아먹는다. 거미가 적과 대면하는 핵심 전략은 상대가 투명한 거미줄에 걸리도록 하는 것, 즉 ‘기만’이다. 거미는 적의 거센 저항에 직면할 위험을 겪지 않지만, 그 대가로 몸을 축내 허공에 거미줄을 치는 노고와 하염없는 기다림을 감내해야 한다. 용기 대신 간지奸智와 인내가 필요하다. 거미에 대응하는 범죄자는 ‘사기꾼’이다.
연가시는 한술 더 뜬다. 지렁이를 닮은 이 원시적 생명체는 공격 무기와 방어 무기 모두 없다. 무방비 상태이다. 그런데 둘 다 필요 없는 고도의 생존 전략을 구사한다. 연가시는 좁쌀 크기의 유충 상태에서 사마귀 같은 곤충의 체내로 들어가 기생한다. 그곳에서 숙주가 애써 먹이를 잡아 씹고 소화시켜 체내로 보내는 영양분을 가로챈다. 식습관이 가장 문명화돼 있다. 성체가 되면 번식을 위해 수중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숙주의 뇌에 화학물질을 분비해 물로 뛰어들게 한 다음 몸을 뚫고 나온다. 숙주는 사망한다. 연가시는 먹고 번식하는 과정에서 그 어떤 노동도 하지 않고 다만 소비할 뿐이다. 이 얼마나 효율적인 생존 방식인가. 연가시가 적과 대면하는 전략은 ‘조종’이다. 그런데 이 조종은 숙주가 물을 갈망하는 상태, 외부에 있는 어떤 대상에 강력하게 유혹당하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즉 연가시의 조종은 숙주의 눈앞에 갈망의 대상을 배치하는 유혹의 형태로 연출된다. 연가시는 ‘꽃뱀’의 영업 방식과 흡사하다.
만약 이 셋 중에 하나의 적을 선택해 싸워야 한다면? 이 셋 중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면? 연가시가 되어 사마귀를 적으로 두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가장 용맹한 전사를 노예처럼 부리는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니까. 세 곤충의 습성을 인간세계의 지배의 문법에 비유하면 사마귀는 위협의 정치, 거미는 기만의 정치, 연가시는 유혹의 정치에 해당한다. 위협의 정치는 물리적 폭력으로 피지배자를 제압하는 전근대적 통치 방식이다. 교통통신과 매체의 미발달로 이데올로기적 통치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폭력의 스펙터클을 조성해 권력에 대한 공포를 직접적으로 각인시키는 지배의 방식이다. 반역자나 범죄자를 참혹하게 공개 처형하고 훼손된 시신을 전시한 광경을 떠올려보라. 순응을 불러오겠지만 욕망은 오그라들지 않을까?
이런 지배 방식은 근대 산업사회에서는 생산력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근대의 권력은 산업 노동의 의욕을 고취하는 통제, 즉 ‘생산하는 억압’의 필요성에 직면한다. 권력은 공장 노동에 적합한 ‘온순한 신체’를 생산하는 임무를 떠맡고, 규율이 수단이 된다. 푸코의 규율사회는 전 시대의 지배 수단이었던 물리적 폭력이 언어적 금지와 강제의 형태로 전환된 사회이다. 이 금지와 강제의 언어가 도덕, 윤리, 법 등의 규범으로 내면화할 때, 생산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명령이라는 의식을 못할 때 규율사회의 복종적 주체가 탄생한다. 이 때문에 규율사회의 지배의 관건은 권력이 부과한 규율을 자연스러운 규범으로 믿게 만드는 기만의 기술에 달려 있다. 이 지점에서 ‘기만의 정치’가 탄생한다.
규율사회의 언어적 금지와 강제는 생산력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한계를 드러낸다. 규율은 자발성을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노동 의욕을 끌어올리기 어렵고, 현상 유지를 위해 막대한 관리 비용이 든다. 그래서 강제와 금지 대신 자발성이 생산성 향상을 위한 대체연료로 주입된다. “열심히 하라”는 규율사회의 명령은 “열심히 하지 않아도 좋으니 잘하면 된다”는 통보로 바뀐다. 이제 노동 의욕을 유지해야 하는 책임은 권력에서 개인으로 넘어간다. 개인은 스스로 규율을 부과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 강박적 주체는 규율의 부과가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자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확신할 때 안정적으로 재생산된다.
이 지점에서 ‘기만의 정치’는 ‘유혹의 정치’로 진화한다. 백화점 진열장에 전시된 명품백은 가난한 여대생에게 말한다. “방학 동안 알바를 서너 개 하면 나를 가질 수 있다.” TV에 출연한 몸짱 아줌마는 식스팩 복근을 내밀며 주부들에게 외친다. “윗몸일으키기를 매일 500개씩 하면 당신도 몸짱이 될 수 있다.” 벤츠 광고에 등장한 팔등신 미녀는 속삭인다. “이 차를 사면 당신도 나랑 잘 수 있다.” 박지성과 김연아는 시청자 앞에서 강연한다. “맨몸 하나로도 뼈를 깎는 노력을 하면 나처럼 될 수 있다.” 유혹은 언제나 ‘If–Then’의 형태를 취한다. 조건절의 요구만 충족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그 내용을 채우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다. 그러니 “자, 선택하라. 술에 찌든 주폭이 되어 민폐나 끼치고 살 것인지, 핫식스와 일주일에 6일을 황소처럼 일하고 주목받는 승자가 될 것인지.”
《피로사회Mudigkeitsgesellschaft》의 저자 한병철은 현대사회는 권력 작동의 패러다임이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이행했다고 단언한다. 성과사회는 ‘온순한 신체’ 대신 ‘욕망하는 신체’, ‘복종적 주체’ 대신 ‘자발적 주체’를 생산한다. ‘성과주체’는 자유롭다는 확신하에 끊임없이 성과를 위해 스스로를 착취하는 존재이다. ‘성과주체’의 자기 착취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면 성과가 약속하는 장밋빛 미래를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돈, 권력, 명성, 건강, 성적 매력 등의 소유 대상을 스펙터클하게 배치하는 것이 일차적 유혹이라면, 행복, 자유, 사랑, 사회적 인정, 배려, 봉사 같은 가치를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것이 이차적 유혹이다. 이런 식으로 성과와 보상 체계를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고정시켜, 정형화된 판타지를 생산하는 권력 작동 방식이 ‘유혹의 정치’이다.
유혹당한 ‘성과주체’는 사랑 → 성적 매력 → 몸짱 → 피트니스 클럽 → 입회비 → 성과라는 경로를 통해 언제나 성과로 귀환한다. 그는 스타일을 현실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다른 방식의 사랑을 상상하지 못한다. 자유를 상상할 때조차 그는 성과로 돌아온다. “출퇴근에서 벗어나 해외여행을 다니며 하고 싶은 걸 하려면 역시 돈이 있어야 한다. 더 벌어야 한다.” 성과주체는 꿈꾸는 삶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성과로 설정된 스타일 속에 감금돼 있다. 시선은 언제나 더 세련된 스타일과 유능한 자신만을 향한다. 그는 외부와의 소통을 철저히 단절한 나르시시즘적 개인이다. 동지도 적도, 주체도 타자도, 소통도 적대도 없는 자기증식의 세계 속에서 산다. 이 때문에 외부 현실이 전하는 어떤 메시지도 스타일로 사물화한다. 그는 일당 10불을 받는 스리랑카 어린이들이 만든 1000불짜리 유기농 직물을 친환경적이고 인간적이라는 이유로 기꺼이 소비한다.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며 값비싼 채식을 하고 삼겹살 먹는 육체노동자를 야만적이라 비난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볼거리로 여기는 세계의 영원한 관광객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분노하지 않고 짜증낸다. 분노는 적을 향하지만 짜증은 자신의 무능을 향한다. 적대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을 창조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능력에 대한 강박과 무능에 대한 자각으로 지친다. 이 상태가 우울이다. 모든 것이 열려 있는데 능력이 모자라다는 자각이 드는 순간 우울증이 찾아온다. 허무Nihil가 성취의 방법은 알지만 동기부여가 안 되는 상태라면, 우울은 동기부여가 과도해 방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다. 허무가 규율사회의 소수 탈주자가 겪었던 마음 사태라면, 우울은 피로사회의 다수가 직면하는 심리적 현실이다(하루 43명에 이르는 OECD 최고 자살률, 절망 살인, 야동과 성폭행의 만연, 힐링 열풍 등이 분주한 성과사회 한국의 우울한 증상들이다).
‘유혹의 정치’는 고용 없는 자본주의의 지배 형태다. ‘유혹의 정치’가 궁극적으로 욕망하는 것은 ‘지배 없는 착취’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지배 비용조차 필요 없는 가장 저렴한 착취.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뒤집어 말하면 우리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유혹자를 물리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답변은 ‘예스’다. 그에 따르면 “유혹은 이야기에서 의미를 제거하는 것이자 이야기를 진실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유혹에 대한 처방으로 해석을 내놓았다. 해석만이 가상(스타일)에 의해 제거된 의미와 진실(메시지)을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의 기저에는 유혹을 기만의 결과로 보는 사태 인식이 깔려 있다. 즉 속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유혹에서 깨어난다는 전제이다. 이런 생각은 “이데올로기의 허위를 깨달으면 그들이 움직이리라”는 좌파들의 오랜 믿음을 공유한다.
하지만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는 이런 생각을 조롱한다. 유혹된 존재는 이야기의 의미와 진실(“당신은 정치적으로 속고 있다”)을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 ‘냉소적 주체’라고 진단한다. 해석의 메시지가 전달되어도 정치적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기만이 아니라 유혹 그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을 깔고 있다. 즉 유혹된 존재는 유혹자의 기만에 속은 것이 아니라 동의했다는 뜻이다. 여기에 대한 슬라보이 지제크Slavoj zizek의 견해는 “동의의 형태로 기만당했다”이다. 지제크는 대중이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것은 단순히 속아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제시하는 판타지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가능성을 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유혹이 기만의 결과가 아니라 어떤 형태든 동의의 결과라면 해석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동의를 철회시키려면 새로이 향유할 스타일을 제공해야 한다. 이는 해석이 아니라 반反유혹이다. 즉 이데올로기적 판타지와 전혀 다른 삶의 스타일로 유혹해야 한다. 성과주체는 지금 당신은 속고 있다고 해봐야 움직이지 않고,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 향유되는 모습을 봐야 동의를 철회하기 때문이다. 재산을 노린 팜파탈의 치명적 매력에 유혹된 남성을 상상해보라. 그는 돈을 노린다는 사실을 모르고 숭고한 사랑의 판타지에 빠진다. 나중에 누군가 이 사실을 귀띔해주었을 때 남성은 관계를 접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여인을 통해 얻던 쾌락이 사라진다. 그는 이 사실을 애써 부인하려 할 것이고, 그녀가 고백을 한다 해도 피해를 감수하며 관계를 유지하려 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그의 쾌락을 해치지 않고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은 여인의 기만을 폭로하는 동시에 더 매력적인 착한 여성을 시켜 유혹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혹의 정치’에 저항하는 주체는 ‘애인을 두고 나쁜 팜파탈과 경합하는 착한 팜파탈’이어야 한다. 즉 유혹하는 시스템의 기만과 싸우는 정치적 주체이고, 유혹을 뿌리치는 윤리적 주체이며, 동시에 반유혹의 스타일을 진정으로 향유하는 미적 주체여야 한다.
물론 모든 개인이 이런 완벽한 주체가 되기는 어렵다. 유혹된 성과사회에서 이러한 개인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실천의 관건은 어떤 전략을 통해 소수의 윤리—정치적 개인을 ‘유혹의 정치’에 맞서는 다수의 정치적 주체로 정립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적의 계보학’과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진리사건과 충실성의 주체’ 개념은 이 질문에 맞춤한 통찰을 제공한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시스템에 침투하는 적은 늑대 → 쥐 → 해충 → 바이러스 네 단계로 출현한다. 늑대는 외부에 있는 가시적 적으로서 물리적 힘으로 침투한다. 외부 침략이나 집단적 폭동 및 시위 형태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요새를 짓고 울타리를 둘러 접근을 차단하면 된다. 쥐는 지하에서 활동하는 보이지 않는 적이다. 먹이를 치우거나 쥐덫을 놓는 등의 위생학적 조치로 물리칠 수 있다. 선전 선동을 일삼는 지하조직과 같다. 해충은 양식을 위협하는 다수의 작은 적이다. 물리적 수단으로 퇴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살충제의 위험성에 인체를 노출시켜야 한다. 피아의 경계를 흐리는 적이다. 네티즌들의 정치적 담론 행위가 여기에 해당한다. 검열과 단속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시비를 불러오면서 사이버공간 전체를 경색시켜 시스템을 손상한다. 최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바이러스는 시스템 내부의 심장부를 파고드는 보이지 않는 적이며, 마땅한 치료제도 없다. 물리치기도 쉽지 않고 시스템을 현저하게 파괴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적이다. 내부 고발 사이트 위키리크스의 설립자인 줄리안 어샌지Julian Assange나 미 국가안보국NSA의 불법 개인정보 수집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J. Snowden, 삼성 비리를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 같은 인물이다.
여기서 늑대는 ‘위협의 정치’, 쥐와 해충은 ‘기만의 정치’, 바이러스는 ‘유혹의 정치’에 침투하는 적이다. 신자유주의는 ‘유혹’이 중심이 되지만, ‘기만’과 ‘위협’이 보완되는 시스템이다. 비유하면 꽃뱀이 주연하고 사기꾼이 연출하고 조폭이 돈을 댄 영화와 같다. 역할 분담이 매우 이상적인 드림팀이다. 그만큼 상대하기 쉽지 않다. 늑대로 출현하면 조폭만 만나고, 바이러스로 출현하면 꽃뱀만 만나게 된다. 시스템 전체를 상대하려면 바이러스에서 해충과 쥐로, 다시 늑대 무리로 변신해 침투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적 사건’이 발생한다. 위키리크스에 실린 내부 고발 문서가 아랍의 민주화 운동에 촉매 역할을 한 과정은 권력자와 정권의 비리 폭로 → 인터넷상 공론화 → 해당사회에서의 공론화와 시위 → 물리적 충돌 과정을 거쳤다. 정치적 주체가 바이러스에서 늑대로 모습을 바꾼 것이다. 내부 고발자의 폭로가 거대한 정치적 시위로 확산되는 과정을 바디우식으로 보면 ‘진리사건’(역사가 어디로 가야 올바른지 대중에게 각성시키는 사건)에 ‘충실성의 주체’(진리사건에 헌신하는 개인)들이 형성되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디우는 다양한 진리사건(예컨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 헌신하는 충실성의 주체(예컨대 평생 포교 활동을 펼친 사도 바울)에 의해서만 역사가 발전한다고 본다.
바디우의 관점을 빌리면 바이러스적 적의 형태로 출현한 진리사건에 헌신하는 충실성의 주체들로부터 ‘유혹의 정치’에 대한 저항이 시작될 수 있다. 이 윤리—정치적 주체들의 충실성이 유혹된 존재의 동의를 허물어가며 바이러스에서 해충으로, 해충에서 쥐로, 쥐에서 늑대로 변신할 때 시스템을 해체하는 정치적 사건이 도래할 수 있다. 바이러스는 네트워크를 통해 증식과 변이를 거듭해 늑대 무리로 진화할 수 있다. 그 방식은 정치적 구호 아래 깃발을 꽂고 유혹된 주체들의 ‘우리’를 구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유혹을 떨쳐버린 ‘나’가 복수의 ‘나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나들’로 모인 윤리—정치적 주체는 어떤 인간인가? 혹은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가? 윤리와 정치가 분열된 사회, 스타일이 현실을 대체한 성과사회에서 그들은 매우 기이한 모습으로 출현한다.
그는 전사와 천사의 차이를 모른다. 그에게 가장 깊은 사랑은 존재가 스스로 탄환이 되어 적의 심장에 가 박히는 것이다. 그에게 가장 치열한 전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자고 평생을 이웃에게 속삭이고 다니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
그는 짜증내지 않고 분노한다. 그는 위선과 위악의 차이를 모른다. 둘 다 가면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위선의 반대말은 외설이다. 외설이야말로 진실에 가장 근접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법정에서 판사에게 욕을 하고 감옥으로 사라져버린 꽃뱀은 정치범에 해당된다. 그는 기도할 때도 “주여 저 X자식을 용서하소서”라는 문장을 애용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은 〈피에타〉를 연출한 김기덕이다. (슬라보이 지제크)
그는 앉은뱅이에서 도적으로, 도적에서 반란군으로 1인 3역을 한다. 성적 취향도 특이해 팜파탈을 보면 살의를, 성녀를 보면 성욕을 느끼는 나쁜 남자다. (김기덕)
피로사회의 성과주체는 모든 행동이 가능한 듯 착각하지만 사실 어떤 사유도 불가능한 존재다. 윤리—정치적 주체는 지금 당장 아무런 성취도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 어떤 행동도 가능한 창의적 존재다. 삶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건 후자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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