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마당
문단으로부터의 리포트
첫사랑
안녕하세요?
저는 전남 함평에서 1959년 초봄에 태어났습니다. 이미자의 〈열아홉 순정〉과 동갑입니다. 그 해 신춘문예로 신동엽 시인이 등장해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하고도 나이가 같습니다. 이것들이 50주년 행사를 한 게 언제입니까? 1985년 시로 등단하여 1988년 평론을, 1996년 소설을 함께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골 태생이고, 가방 끈도 짧으며, 탐구열도 보잘 것 없어요. 제게서 심오하거나 현란한 표현이 나올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필기 같은 거 하지 말고 그저 편안하게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프롤로그에 속하는데, 작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피력하는 자리라 여기시면 되겠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왜 문학을 하려고 마음먹게 되었을까, 혹은 인간은 언제 문학에 욕심을 내기 시작할까, 아마도 이런 지점을 초심이라 할 텐데, 저의 그곳을 짚어보는 게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문학을 꿈꾸게 된 동기가 상당히 한심합니다. 20년 전에 첫 시집을 내면서 후기에 썼는데요, 어렸을 때 말더듬이 아주 심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그래서 말이 꼭 필요한 지점, 누구와 싸우거나 억울한 일이 생겼을 때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었어요. 신체 조건도 열악한 편이라 상대를 주먹다짐으로 꺾어놓을 수도 없습니다. 말의 능력도 떨어지고 기운도 모자라니 뭔가 다른 것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요. 돌이켜보면 하늘이 이를 가엾게 여겼음이 틀림없어요. 이 목숨을 시골이긴 하나 장터 한복판에 떨어뜨려 준 덕에 천지가 온통 글자로 넘쳐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려서 청소할 때마다 귀찮은 상표 딱지 같은 것을 보면서 상당히 빨리 글자를 깨우쳤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소개가 가능합니다. 말을 못해서 글을 먼저 익힌 사람!
사실, 글자를 아는 것만으로 문학을 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글자가 아니라 말씀에 새겨진 문학을 구비문학이라 하고, 인류가 가꿔 온 문학의 역사가 경이로울 만큼 풍요로운 구변口辯 문화에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문자의 빈곤으로 문학이 가난하거나 반대로 문자를 잘 다룬다고 문학을 잘 하거나 한다고는 보지 않아요. 하지만 말을 더듬기 때문에 글자의 은밀한 운동 능력을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큰형님이 군대에 갔는데, 그로 인해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어요. 가사 노동도 크게 늘고 첫 아들이라 걱정도 커서 그랬는지, 몇 날을 끙끙 앓아서 제 가슴도 굉장히 아팠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백설이 분분히 내리는 날에……”로 시작되는 이상한 편지를, 글씨를 쓸 줄 모르는 ‘글자 맹盲’ 어머니하고, 글에 담을 내용을 모르는 ‘문학 맹’인 저하고 둘이서 합작하여 큰형님 부대의 중대장님께 보냈습니다.
심란하지요? 헌데 그게 아닙니다. 제가 쓴 편지가 가고 보름쯤 후에 큰형님이 특별휴가를 나왔어요. 중대장님께서, 너는 동생의 편지를 받고 보내는 거니 집에 가서 얼마나 건강한지를 보여드리고 와라, 이랬답니다. 깜짝 놀랐어요. 제가 이곳에서 제 마음을 정성껏 글자에 담아서 전달을 하면 그것이 나의 상상력이 미칠 수 없는 머나먼 어떤 곳에 가서 내가 원하는 무슨 일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엄청난 사실을 처음 확인했을 때 그 위대한 문학적 기적이 얼마나 전율스러웠는지요? 그 후로 저는 속수무책일 때마다 글이라는 무기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례가 중학교 수학여행인데요. 산골 동네에서 바깥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한 촌놈들에게 수학여행이란 정말 얼마나 가고 싶은 꿈입니까? 집안 동태를 아무리 살펴도 그런 한가한 여행을 보내줄 형편이 안 됐어요. 버스 한 대에 남학생과 여학생이 오붓하게 타서 2박3일 동안 도道의 경계를 몇 개씩 넘어 다닐 생각을 하니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 날 며칠을 연구하고 궁리하다가 비상수단을 사용하게 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우스운지, 서울에 돈 벌러 간 누나 두 분(다 이십대 초반이었어요)의 애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훗날 틀어지지 않고 결혼했기에 망정이지 얼마나 망측한 풍경입니까? 한 통은 큰매형님께, 또 한 통은 작은 매형님께 담뿍 진정을 담아 올렸더니, 두 분이서 경비와 용돈, 그리고 너무 촌스럽게 다니지 말라고 옷가지를 살 돈까지 보내주었습니다. 꽤 많은 이웃들이 그렇듯이 저희 가족들도 가난했을 때 외로웠던 기억들을 못 잊어서인지 서로에 대한 따뜻함보다 서운함을 더 많이 감추어두고 사는 편입니다. 그런 가족사회에서 저는 다복하게도 그런 서운함을 초월한 영토를 확보했는데, 두 매형에 의하면 제가 그 편지를 쓸 때 억눌러 참던 손끝의 떨림이 얼마나 생생히 전해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잊히지 않고 오래 오래 남아있었는지 마음으로부터 이 처남이 버려지지 않았다고 설명을 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저는 최초의 문학적 자의식, 즉 표현에 대한 관심을 지니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이것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 소개해 올릴까 합니다. 어떻게 보면 모든 개인의 역사 안에 인류의 발자취가 함축되는 느낌이 드는데, 문학에 대한 저의 관심도 인류문학사의 흐름을 일견 반영하면서 변화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문학, 혹은 예술, 혹은 미의식에 대해서 확보한 최초의 틀은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저희 동네가 장터라고 했지요? 그 면소재지에서 근대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 학교를 빼고는 단 한 곳밖에 없었습니다. 이발소! 장터 외곽 언덕의 이발소에 가면 대형 유리거울(이게 근대적 자아를 부추기는 연장이었다고 말하면 지나칠까요?)이 있고, 또 기계로 된 마술의자가 있죠. 핸들을 어떻게 돌리면 등받이가 뒤로 눕혀지고 반대쪽으로 돌리면 다시 일어서며, 또 어느 쪽을 밟아대면 키가 작아지거나 높아지는, 그런 의자에서 키를 한껏 높이고도 모자라서 널빤지를 깔고 앉게 하여 이발사가 머리를 깎습니다. 이때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도구가 바리캉이라 하는기계인데, 날이 무뎌서 노상 쥐어뜯겼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머리카락이 물려서 아얏 소리 지를 때 바로 정면에 푸시킨의 「삶」이라는 시가 그려진 액자가 있었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겨우 글자를 터득할 나이에 그게 무슨 뜻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헌데, 거기에서 어떤 느낌이 옵니다. 문자도 울림을 가져서 마치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와서 내 마음에 닿으면, 그게 기뻐하라, 슬퍼하라, 이런 의미로 다가오는 게 아님에도 마음과 마찰되면서 어떤 뜻을 만들어 냅니다. 이발소에서 빛나던 두 점의 액자(또 하나는 워즈워드의 「초원의 빛」인데)야말로 제게 문학을 가르친 최초의 텍스트였던 거죠. 나란히 걷는 두 남녀의 발자국 네 개가 눈밭 위에서 소실점을 향하여 작아지다가 소멸해버리는,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그림과 함께 사라져가는 시의 독자가 되었던 기억은 참으로 아련한 것입니다.
하여튼 이것들로 인해서 저의 문학에 대한 최초의 관념은, 문학 혹은 예술은 뭔가 막연히 꿈같고 아련하며 어딘가 가슴을 시리게 하는 것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뭔가 실용적이거나 계몽적인 게 아니라 그저 감상의 영역에만 속하는, 생산적인 활동보다는 소비와 휴식, 나아가 종교적 상태에까지 빠지게 하는, 세속을 벗어나는 도구라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표현본능, 유희본능 같은 것이 예술의 근본 동력이라고 알게 모르게 믿었던 것 같습니다. 문학에 대한 저의 이 같은 생각은 제가 고등학생이 되어서 문예반 활동에 푹 빠질 때까지, 그리하여 시를 열심히 쓰고 바야흐로 신춘문예에 투고하는 버릇을 들일 때까지 계속 저의 문학관을 지배해왔습니다. 그래서 더러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지만 마냥 꿈 같이, 강가에서 새벽에 자욱이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삶의 풍경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게 만드는 풍경을 쓰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같은 생각을 송두리째 뒤엎는 사건이 밀려옵니다. 과연 인간에게 스물한 살, 스물두 살…… 이런 나이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위험한지요? 저는 하필 그 나이에 광주에서 ‘1980년 5월’이라 부르는 격류에 쓸려갑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아찔합니다. 저는 농협 근무도 잠깐 했고, 도회의 술집에서도 일을 했으며, 학교생활보다는 고독한 글쓰기에 정신이 더 팔렸던 만큼 다른 학생들보다 먼저 세속화되고, 저잣거리의 난폭함도 먼저 접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생들이 시위하는 풍경은 굉장히 철없어 보이는 행위였어요. 저 친구들은 뭐가 그리 마뜩찮아서 저러누, 저 친구들이 국회의원하면 세상이 좋아질라구, 저 친구들이 지도자가 되면 뭐가 도대체 얼마만큼 달라져서 이 난리를 치느냐, 이런 심사인데다, 나아가 문학은 뭔가 정치적인 것 경제적인 것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보다 영원한 가치를 꿈꾼다, 고로 나는 폭력보다 평화가 좋다, 생각했던 거지요.
자, 이런 상태에서 1980년 5월 18일 오전 열시에 기상하여 광주 계림동 헌책방 골목을 찾았습니다. 그 시절, 헌책방에 가면 《현대문학》이나 《사상계》 과월호를 권당 오십 원에 살 수 있었거든요. 그날도 그런 책들을 구하느라 거리에 나선 건데, 그곳에서 최초로 ‘1980년 오월의 시위대’를 만났습니다. 대부분 전남대생들이었고, 반대쪽에서 군인들이 뛰쳐나오는데, 제 기억에는 그때 이미 공수부대가 왔어요. 거리는 전쟁터가 되어서 학생들은 쫓기고 군인들은 쫓는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저는 평화주의자니까 상관없다, 이것이 문학의 길이다, 이렇게 생각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해서 태연하게 걸었는데 제 앞에서 할아버지가 푹 쓰러지는 거예요. 이거 뭔가 상황이 이상하다, 뭔가 내 생각과 세상의 진실이 다른가보다 하는 직감이 와서 저도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광주 시위대의 일부가 된 것이죠.
이 사건은 저의 문학적 태도에 굉장히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문예반 시절에 수업도 빼먹고 당시 YWCA에 초청을 받아 온 소설가 최인훈, 시인 서정주 선생의 강연을 들으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 서정주 시인은 신라 향가의 한 대목 “길 쓸 별 바래고……”라는 구절 이야기로 전체를 채웠습니다. 최인훈 선생이 택한 주제는 “문학은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였는데, 거리에서 쓰러져가는 거지에게 문학은 무엇인가, 거기에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물론 답은 “없다”였습니다. 문학은 거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하다, 여기서 왜 중요하다고 했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하여튼 문학이 무기력하다고 했던 말에 다들 쓸쓸한 반응을 보였던 것만 생각나는데, 쫓기는 시위대 속에서 저에게는 그것이 큰 고민거리가 되었습니다. 문학은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맡는지, 상식과 진실이 일치되지 않을 때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것이 당시 제가 떠안은 지상의 질문이었습니다.
그 무렵에 많이 읽힌 김학준 지음 『러시아혁명사』를 펼치면,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속표지의 앞장, 증정사를 넣는 자리에 좀 이상한 문구가 있었습니다.
“참다운 지식인은 정치 밖에 서 있을 수 없다.”
뭔가 중요한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인이 자기 혼자서 평화주의자라고 외쳐도, 가령 바그다드에 미군폭격기가 포탄을 떨어뜨리면 그곳에 사는 사람은 평화주의자이거나 말거나 아이거나 어른이거나 남자거나 여자거나 피해를 입습니다. 5.18 현장에서 제가 느낀 게 이것 “정치 바깥에 서 있을 수 없다”였습니다. 김정환 시인이 썼던 표현인데,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가 아니라 일상이다”라는 말을 뼈 속까지 느꼈다고나 할까요? 어떤 지역이 분쟁 지대가 되면 평화가 붕괴된 공동체의 모든 인간은 야만적인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임산부의 뱃속에 들어있는 아이도 정치적 야만의 포로가 됩니다. 이때 문학이란 무엇인가, 세상은 왜 문학을 키우는가, 작가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런 것들이 저의 문학청년 시절을 뿌리째 흔들어댄 것입니다.
이때 고민을 푸는 실마리로 사용된 것이 로버트 카파의 전쟁 사진들이었습니다.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라는 책도 있습니다만, 그가 제2차 세계대전을 고발했던 사진들을 보면, 저걸 찍을 시간에가서 구출하면 죽지 않을 것 같은 장면들이 많습니다. 그 시간에 셔터를 눌렀다고 보면, 공과 사를 구분하기에 따라서 윤리적으로 상당히 문제가 있어 보일 수 있습니다. 허나 그가 사진을 찍는 대신에 쓰러져 가는 사람을 부축했다면 몇 사람을 살렸을 테지만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바는 미미했을 겁니다. 그의 치열한 앵글은 전쟁의 참화를 고발했고, 그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대전쟁은 잘 일어나지 않을 뿐더러 일어나도 수없이 많은 세계 시민의 성토와 감시를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518 현장에서, 카파는 쓰러져 가는 소수를 살리는 일에 열정을 쏟은 게 아니라 전쟁이라는, 인간 사회의 뿌리 깊은 패악의 근원을 없애는 일에 도전했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래서 글을 쓰는 자는 자기 공동체의 미래와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문학이고, 그것이 작가의 존재 의의이다,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계몽성의 발견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문학의 계몽적 가치를 발견한 후에 저는 나날이 변했습니다. 그전까지 막연히 꿈과 아름다움을 공작하는 세속 외적 행위로서의 문학은 제게서 폐지되어야 했습니다. 이게 결과적으로 잘된 일인지 못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어쨌든 저는 문학의 계몽적 가치에 사로잡혔던 시기에 데뷔하여 아홉 권 정도의 책을 모두 그 속에서 출간했습니다. 즉 ‘운동권 문학을 하는 사람’이 된 겁니다. 그런데 더 살아보니 절대적 가치라고 여겼던 것도 뒤집히는 시간이 왔습니다.
세계에 대한 명명자로서의 작가
제가 마흔 살이 되는 해에 썼던 소설의 제목이 「그 이발소에 두고 온 시」인데요, 생의 어떤 굽이에서 생산적인 회의에 빠지는 것을 긍정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 자아의지에 도취하여, 나는 지금 매우 훌륭한 지점에 도달했고, 이제 문턱만 넘으면 천국이 내 것이 된다, 여길 때 사실은 지옥의 문 앞에 서 있고, 정반대로, 내 앞은 온통 천 길 낭떠러지뿐이어서 더 이상 재생의 여지가 없구나, 싶을 때 사실은 천국의 문턱 앞에 놓이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적절한 비유는 아닙니다만 어렸을 때 자전거를 배우면서 안장에 오르지 못하고 수없이 넘어지고 무릎이 깨지다 못해, 아, 나는 천부적으로 자전거에 오르는 재능이 없는가 보다 하면서 포기하던 밤이 생각납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나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다 그렇게 생각한 다음날 자전거 안장에 올랐습니다. 어떤 일을 성취했다고 생각할 때 위기를 맞고, 절망한 연후에 성취를 얻는 그런 상황들을 돌이켜보면서, 때로는 신념이 인간을 얼마나 어리석게 하는가, 그로 인해 삶은 얼마나 황폐해 지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은 흔들리면서, 뼈아프게 후회하면서, 자기 성찰의 낯 뜨거운 시간들을 견디면서 조금씩 완성되어 간다는 생각을 하면서 저는 슬그머니 계몽주의로부터 독립해 나왔습니다. 자기 시대를 껴안고 공동체와 더불어 뒹굴고 이웃과 연대하는 노래를 앞장서 부르는 것이 굉장히 뜨겁고 아름다운 가치이지만, 그것을 절대화, 혹은 신념화 하다 보면 생산적 회의를 놓쳐버리는,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문학에 대한 생각 또한 바뀌게 됩니다.
이제 문학은 존재의 저 뒤쪽 어디에 있는 것들을 명명하는 것이고, 작가는 무슨 가치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세계의 무엇을 명명하는 자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명명命名이란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입니다. 고은 시인의 말씀 중에 들었던 건데, 이름名에는 저녁 석夕자 밑에 입 구口자가 놓여 있습니다. 이름은 환하고 밝은 상태에서는 별로 사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눈짓, 손짓, 발짓 따위로 통하는 곳에서는 없어도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해가 기울고 저녁이 되면 동네 아이들의 목청이 높아집니다.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로 마을 어귀가 가득 차지요. 이렇게 어두울 때, 명백히 존재하는 것이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을 때, 김춘수의 시에 “처음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내가 꽃이라 불러주니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하는 것처럼 누군가의 명명에 의해서 의미를 되찾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는데요, 어머니가 제게 자주 하시는 말씀이, “너는 날 때부터 효자였어야.”입니다. 제가 태어난 때가 하필 일 년중 가장 고약하고 재미없는 날씨들이 이어지는 때입니다. 겨울도 아닌 것이 눈발을 뿌리고, 그 아래 보리밭은 파릇파릇 숨을 쉬는데, 그 매섭고 앙칼진 날씨에 보리밭을 매는 게 얼마나 손이 시리고 배가 고프던지, 그날은 딱 한 시간만 먼저 끝나고 돌아가면 원이 없겠다,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달게 참겠다, 싶었답니다. 오후가 되자 그게 한층 간절해지는데, 이상하게 별로 아프지도 않게 산기産氣가 찾아왔답니다. 그래서 만삭의 배를 가리키며 기척이 느껴진다 하니까 다들 등을 떠밀어서 쫓기듯이 일찍 들어왔대요. 염치가 없어서 저녁상을 차려놓고 혼자서 아랫목을 차지하고 누워 있다가 시어머니가 돌아왔을 때 감쪽같이 저를 낳았다는 겁니다. “세상에 나오면서 배도 안 아프게 했어야.” 이 말이 생각날 때마다 축복받은 느낌이어서 우주에게 얼마나 고마워지는지요. 하여튼 천방지축의 망아지처럼 고약한 날씨를 제대로 골라서 태어난 덕분에 어머니에게 두고두고 효자 소리를 들었습니다.
자, 이 날씨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봄볕에 그을리면 보던 님도 몰라본다” 하는 속담이 왜 있는가 하면 바람은 차고 햇볕은 포근합니다. 자연과 거리두기를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지겨운 날씨, 모든 계절의 미덕을 하나도 갖지 못한 이 앙칼진 추위야말로 계절 중에서 가장 짜증이 나는 것인데, 누군가 이를 꽃샘추위라고 명명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마술을 경험하게 됩니다. 한국인이 알고 있는 날씨 용어 중 가장 예쁜 이름을 갖게 된, 이 네 글자로 인하여 얄미운 날씨가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단번에 역전됩니다. 생물의 기나긴 여정 속에서, 자연과 천체의 운행 속에서 이 앙칼진 날씨가 구원처럼 놓여 있음을 알게 되지요. 겨울이 아무리 싫어도 꽃샘추위를 맞아야 벗어날 수 있고, 봄이 아무리 그리워도 꽃샘추위를 건너야 만날 수 있습니다. 이거 근사하잖아요? 이게 바로 명명의 힘이 아닌가 합니다.
밀란 쿤데라가 했던 말입니다만, 인간은 사춘기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사춘기를 맞고 어른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어른이 되며 늙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채 늙음을 맞습니다. 존재의 저 뒤쪽에 가득 찬 삶의 동작 요소들이 우리들의 운명을 매 순간 새롭게 결정짓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다 알고 삽니까?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대단한 것들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삐끗해서 자동차 사고를 피하거나 기분이 너무 좋아서 빨리 걸었다가 재앙을 입거나 하는 것들이 이루 셀 수 없이 많이 모이고 모여서 한 인간의 생애를 구성합니다. 삶이라는 것은 이렇게 수없이 많은 찰나와 찰나들의 연쇄작용이어서 오늘 우리가 왜 이 자리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자면, 그러게 운명이었다, 하는 말밖에는 들이밀 것이 없게 됩니다. 위대한 의학자와 훌륭한 사회학자와 또 최고의 실력을 가진 수학자들이 모여서 인간에게 작동되는 현상들을 모아다가 통계와 수치와 각종 분석틀을 활용하여 가령 젊었을 때 고생한 사람이 늙어서 잘 산다, 혹은 그 때문에 뒤틀려서 악한 사람이 된다, 식의 공식을 만들어 본들 그것이 지상의 몇 사람이나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단언하건대 60억 인구 중에 단 한 명도 공식에 적용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의 저 뒤쪽 어디에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것들이 놓여 있다가 누군가 꽃이라 불러주니 그것이 우리 앞에 돌아와 꽃이 되는 현상을 발견하고 문학의 이름으로 그러한 일을 나누게 된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럼 이제 훌륭한 명명자가 되기 위하여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공부가 필요하다면 범위가 어떻게 되는지 하는 것을 이야기할 차례가 된 것 같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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