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4일 화요일
오전에 MBC TV와 파주북소리에 대해 간단하게 인터뷰했다. 오전 11시부터 프레스센터에서 파주북소리 기자간담회 했다. 기자들 많이 오지 않았다.
오후에 청와대·문화부 사람들과 대통령 방문을 위한 현장답사 및 점검회의 했다. 빛축제 평가를 겸한 현장답사하고 저녁식사 같이 했다.
김명호 교수와 통화했다.
9월 25일 수요일
아침에 네오프린텍 신장섭 회장 전화해왔다. 오전 11시부터 파주북소리 집행위원회 했다. 28일 개막행사와 주요행사 점검했다.
오후에 청와대와 문화부 사람들 다시 왔다. 최종 코스 확정했다.
‘도서관 이야기’ 원고 18매 썼다. 「지혜의 숲: 24시간 열린 종이 책 도서관을 만들면서」라고 제목 붙였다.
“종이책이 푸대접받고 있다. 인간이 창출한 가장 탁월한 미디어인 종이책이 버려지고 있다. 한 시대의 정신을 담아내는 종이책, 새로운 시대를 견인해내는 사상과 이론, 그 사상과 이론을 조직해내는 종이책의 위상이 왜 흔들리고 있는가.
학자·연구자·지식인·저술가들이 평생을 읽고 연구한 장서들을 학문과 연구의 전당인 대학 도서관도 수용하지 않고 있다. 장 서란 연구자들의 생애의 소중한 축적물이자 그 정신세계다. 장서는 학생들이나 후학들에겐 참으로 문화적이고 교육적인 세계일 것이다. 한 시대를 총체적으로 성찰하는 문화적 자산인 것이다. 이 장서의 가치가 무의미해지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출판사가 서점으로 내보낸 책들이 독자들의 손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반품’되고 있다. 이 반품된 책들은 작두로 파쇄되거나 물속에 처넣어 그 존재를 소멸시키게 된다. 수입된 외서들이 또 다른 방법에 의해 ‘잔인하게’ 소멸되기도 한다. 때로는 불에 태 워져서 없어지는 운명을 감내하기도 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있었고, 나치에 의해 수많은 책들이 ‘화형’당하는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 현 시대에, 책이 당하는 운명 또는 고통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종이책이 아니라 전자책을 읽으면 된다고. 그러나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종이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전자책도 읽지 못한다고. 전자책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책의 연장선상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종이책 없이 전자책은 없다. 종이책을 기능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전자책일 뿐이다.
왜 책을 읽는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책을 읽고, 또 읽어야 한다. 지식과 정보를 공급받을 뿐 아니라 정의로운 공동체, 도덕적인 국가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그 성원들은 독서해야 한다. 책은 읽어도 되고, 읽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이 독서다. 인간답게 사는데, 독서는 옵션이 아니라 절대조건이다. 독서를 일상의 삶으로 삼아 형성되는 건강한 정신과 사상과 감성이 나라와 사회와 민족공동체를 창조적이고 건강하게 만든다.
종이책을 푸대접하고, 종이책을 내버리는 일은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현대인들의 교만이다. 책 없이도, 독서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현대인들, 돈과 물질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자본주의형 인간들의 벌거벗은 행태를, 오늘 우리는 종이책을 푸대접하고 함부로 내다버리는 물질적 욕망의 슬픈 풍경에서 새삼 확인하는 것이다.
종이책을 보호·보존하는 새로운 정신운동·문화운동이 요구 된다. 인간의 삶에 가장 본원적인 가치를 갖고 있는 종이책을 읽고, 종이책을 보호·보존하는 생명운동이 이 시대에 절실해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둘 있다. 그 하나는 인구의 노령화현상이다. 어린 생명들의 웃음소리와 책 읽는 소리가 아름다운 이 강산에서 잦아들고 있다. 이 국가사회와 민족 공동체를 다이내믹하게 하는 젊음을 잃어가고 있다.
다른 하나는 젊은이들의 지력저하 현상이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의 손에 책이 없다. 책을 읽지 못하게 하는 여러 조건이 있지만, 그 가장 큰 조건은 지나친 경쟁을 불러오는 입시 위주의 공교국과 스마트폰의 과잉사용 또는 기계만능주의다. 경쟁을 부추기는 공교육의 문제점들이란 어제오늘 이야기된 바가 아니다. 또한 스마트폰의 기능주의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의식 부재로부터 빚어지는 비독서·반독서로 젊은이들의 이성적·감성적 지력은 날로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정부가 주요 정책으로 삼고 있는 창조사회와 문화 융성은 어렵게 된다.
스마트폰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수단과 목적을 심각하게 전도시키는 국가정책·사회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 청소년들의 심각한 일탈현상은 바로 창조적 지혜를 키워 내는 독서교육의 부재와 생각 없는 경쟁교육·물질주의교육으로 부터 빚어진다는 것을 모두들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런데 왜 개선되지 않을까.
독서란 습관이다. 청소년 시절부터 책 읽기 교육을 지속적으로 함으로써, 그 청소년들은 반듯한 품성으로 성장할 것이고, 건강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 여기저기서 주장되고 있는 인문정신·인문학도 청소년 시절부터 독서하는 교육을 하지 않으면 당초부터 불가능하다.
우리 젊은이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당장에 무슨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책을 읽지 않는 교육이 지속 되고, 스마트폰 같은 것에만 의존하면서 20년, 30년 가면 우리 국가사회와 민족공동체의 지혜와 역량은 심각한 위기에 부닥칠 것이다. 아니 도덕적이고 정의로우며 민주적인 국가사회와 민족 공동체의 영위란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 파주출판도시에 ‘지혜의 숲’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마구 버려지고 있는 책들을 소장해서, 24시간 문을 열어놓는 도서관이다. 파주출판도시의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1층과 지식 연수원 지지향 호텔에 우리 사회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도서관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우선 출판사들로부터 책을 기증받고 있다. 원로 연구자들과 학자들이 생애를 통해 읽고 연구한 책들을 기증받고 있다. 이들 책으로 종이책의 전당을 구현하자는 것이다. 종이책으로 만드는 지혜와 지식의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거대한 종이책의 성이다. 도서관의 이름을 우리는 ‘지혜의 숲’이라고 붙였다. 건축가들과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을 시작했다. 19세기 영국의 토털아티스트 윌리엄 모리스가 말하지 않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책이라고.
한 권의 책도 아름답지만 수많은 책들이 쌓인 모습은 또 얼마 나 아름다운가. 우리는 ‘지혜의 숲’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것이라고 믿고 있다. 100만 권의 책을 소장하게 될 ‘지혜의 숲’ 은 기증한 출판사와 장서가의 이름을 의미 있게 소개하는 표지판을 붙여 기증자들의 정신을 기릴 것이다.
우리는 ‘지혜의 숲’을 24시간 문 열어놓기로 했다. 세상의 젊은이들이 맘껏 책 읽게 하자는 것이다. 24시간 문 열어놓는 도서관이 지금까지 왜 없었을까. ‘지혜의 숲’이 이걸 하자는 것이다.
책 읽는 젊은이들이 우리의 희망이다. 아니 젊은이들은 책을 읽으려 한다. 어른들과 국가사회의 잘못된 가치와 제도가 젊은이들의 독서를 방해할 뿐이다.
24시간 문 열어놓는 ‘지혜의 숲’에서는 물론 독서와 연관되는 문화·예술 프로그램 들이 당연히 기획되어야 한다. 아시아의 지식축제 파주북소리 등 다양한 독서운동이 펼쳐지고 있는 파주출판도시는 지금 이렇게 책과 독서를 위해 한창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12월 24일 화요일
책 만들자고 출판사를 등록한 지 만 37년이 되었다. 오전 9시 30분에 직원들과 창립 37주년을 생각하는 작은 파티 했다. 어느새 37년이라니. 바쁘게 달려온 세월이다.
“우리 독자들이 오늘 우리 사회를 이끄는 중추가 되고 있다.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우리 독자들이 있어서 우리는 행복하다. 그러기에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고 한 권의 책을 만들어야 한다.”
나의 37년 한길사의 37년을 맞으면서,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플까. 왜 이렇게 슬퍼질까. 왜 이렇게 간절해질까.
나의 37년 세월은 결코 잊힐 수 없는 기억들로 살아 있다. 엄청난 사건들이다. 역사다. 정신이고 사상이다. 열정이고 우정이다. 로망이고 희망이다. 고뇌의 세월이자 고단한 역정이다.
내 정신과 영혼의 버팀이 되었던 많은 저자들이 저세상으로 갔다. 그 청정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온다. 가슴을 때린다. 아프다. 슬픔으로 아늑하다. 시대를 진동시킨 정신과 사상, 이론과 실천의 현인들을 회상하면 간절해진다. 목이 멘다. 눈물이 쏟아진다.
출판을 시작하면서, 매일처럼 만나면서, 책들 이야기하고 이 민족의 현대사와 그 정신을 역설하던 송건호 선생은 어느 날 내게 얇은 봉투를 건네주셨다.
“아이들 과자라도 사다줘요.”
내는 책마다 판금되던 우리 출판사의 사정을 선생은 알았을 것이다. 그땐 선생도 ‘실직’ 상태였다. 가녀린 체구의 선생은 그러나 진실에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고단한 시대상황에 부대끼면서 언론인 송건호는 역사의 길을 포효하는 웅변가로 되어갔다.
우리가 책을 내는 바람에 박정희 유신권력을 더 자극했고, 결국은 ‘필화’로 감옥행을 걸어야 했던 리영희 선생. 결코 불의와 타협 하지 않았다. 비수 같은 말과 글로 시대를 일깨워 세우던 선생은 그러나 로맨티스트였다. 어느 날 나는 선생과 저 장안평으로 가서 밤새 술 마시고 노래 불렀다. 뇌출혈로 쓰러졌지만, 불편한 몸으로 『대화』 원고를 1년이 넘도록 한 줄 한 줄 다듬는 준엄한 원칙주의자였다. 선생의 생애를 되돌아보는 ‘대화’를 기획한 것은 한 출 판인으로서의 보람이지만, 선생의 생애를 생각하면 할수록 그립고 슬퍼진다. 단재상 시상행사에 나오셔서 ‘청년정신’을 휘호해주기도 했다. 선생이야말로 이 민족공동체의 ‘청년정신’이었다. 선생의 ‘청년정신’은 나와 한길사의 ‘청년정신’이 되었다.
내 청소년 시절부터의 정신과 사상의 근원이자 상징이었던 함석헌 선생님을 책으로 모실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는 경이로움이었다. 저 1980년대에 선생님을 뵙고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선생님의 책을 만들 수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
내 가슴의 중심에 언제나 자리 잡고 있는 함석헌 선생님, 그 이름만 들어도 나는 감격한다. 선생님의 글과 말씀, 선생님의 정신과 사상도 슬픔이었다. 이 민족의 역사를 슬픔의 역사라고 말씀했다. 그러나 그 ‘슬픔’으로 슬픔을 이겨낸다는 이 민족의 역사를 말씀 하셨다.
『혼불』의 최명희. 1980년에 만나 1990년대 말 전 10권으로 펴내 는 『혼불』은 그의 요절로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이 되었다. 그의 강연은 경이롭다는 말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문장과 말은 혼의 울림이었다. 그의 연설은 장내를 장엄하고 아름답게 만 들었다. 너무 장엄하고 아름다워서 슬플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혼불』 전 10권을 완간하면서 나는 여러 지인들과 함께 ‘작가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그의 탁월한 문학적 성취를 함께 누리려고 했지만, 우리들의 모임은 그의 죽음을 추도하는 행사를 하게 되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최명희. 그러나 나는 때로는 윽박 질러가면서 『혼불』을 10권까지 쓰게 한 기억을 한 출판인으로서의 긍지와 보람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슬픔의 작가에게 홀려서 나는 그렇게 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혼불』을 내고 나는 그와의 아주 긴 대화를 녹음했다. 그러나 그 와의 느닷없는 사별로 그것을 정리하지 못하고 말았다. 온몸과 온 마음으로 쓴 『혼불』 10권을 끝내자, 그에게 손으로 만든 아주 비싼 이탈리아제 만년필을 선물했다. 그때 그 만년필은 지금 어디에 있 을까. 글과 말솜씨 못지않게 뛰어난 그의 글씨에 매료되어 나는 만년필을 선물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다시 새 작품들을 쓰라고 한 것이었다. 그는 작품을 구상한 두꺼운 노트 여러 권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나와의 약속을 뒤로 남기고는 홀연히 떠나고 말았다. 이 어찌 슬픔이 아니겠는가.
최명희와 함께 보낸 슬프고도 아름다운 세월! 그의 죽음이 너무 나 빨리 다가왔기에 ‘작가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와의 사랑을 누리기는커녕 해마다 그를 추억하는 슬픔을 공유하는 모임이 되고 말았으니.
함석헌·송건호·리영희·최명희뿐인가. 『민족경제론』의 박현채 선생, 젊은 제자들을 한없이 키워낸 사회학자 김진균 교수, 민중신 학자 안병무·서남동 선생은 출판을 시작하면서부터 말씀을 들었다. 그런 현인들이 있어서 이 민족의 현대사는 건강하고, 그 정신사는 풍요로운 것이다. 고난을 마다하지 않은 삶을 살았기에 아름답고 슬픈 것이었다.
이오덕 선생. 1980년과 1990년대에 선생과의 숱한 만남을 통해 나는 선생에게 우리말 우리 글에 대해 써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아동문학가이기도 했지만 선생은 우리말 우리 글 운동가였다. 인권변호사 조용환 변호사도 언젠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 글 바로 쓰기』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못지않게 중요한 책이라고. 이오덕 선생은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우리 말글의 정신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윤이상 선생. 세계가 연주하고 연구하는 그의 음악이 왜 그의 조국에서는 금기시되는가. 나는 선생의 위대한 음악을 소개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날아갔다. 선생과의 만남은 감동적이었고 선생은 나를 만나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나는 선생과의 긴 인터뷰를 해서 선생의 예술과 정신을 소개한 것을 큰 보람으로 갖고 있다.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조국에는 오지 못하고 일본에 와서 입원해야만 했던 선생은, 배를 타고 고향 통영 이 보이는 그 앞바다까지 왔다. 이 어찌 슬픔의 기억, 슬픔의 역사가 아닌가.
“수구초심이라고 하지 않았소. 나는 정말 내 고향에 가고 싶소.” 그날 인터뷰에서 울부짖는 심정으로 이야기하는 걸 나는 들을 수 있었다. 고향을 못 가고 부모를 찾지 못하게 하는 이 전쟁과 분단시대에 살아야 하는 우리들의 삶은 고단을 넘어 비극이다. 그러나 이 같은 비극과 슬픔이 아름다운 예술, 창조적인 사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쳐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던 저 1980년대에 나는 신채호 선생의 삶과 정신, 그 사상과 이론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1936년 뤼순 감옥의 차디찬 감방에서 순국하는 위대한 역사가 신채호 선생을 생각하면 목이 멨다. 그리하여 ‘단재상’을 제정하여 우리 민족사를 새롭게 탐험해내고, 이 민족공동체의 진리와 진실을 연구해내는 연구자·문예가 들에게 주어왔는데, 역대 단재상의 수상자들은 이 민족의 슬픔과 비극을 넘어서는 탐구와 실천을 해낸 시대의 지성들이었다.
지금은 세상에 계시지 않는 어머니는 간혹 고향집을 찾아가는 우리들에게 늘 눈물을 보이셨다. 그 어머니를 헤이리에 집을 짓고 나서 한번 모시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헤이리에 오시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못 오신 것이 아니라 내가 모시지 못했다. 근검절약하고 부지런한 아버지와 함께 농사 지어 기울어진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워 우리 7남매 공부시킨 여장부였지만, 나이가 드시면서 어머니는 눈물이 많으셨다. 책 만드느라고 바쁘다면서 자주 뵙지 못했다. 가슴을 치면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책 만들기 37년을 맞으면서 사실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자주 뵙지 못 했다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
아버지 돌아가시고는 혼자 계시던 어머니. 그 적막강산과 고절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진다. 어머니!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내려앉는다.
내 사무실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 사진을 다시 보았다. 1987년 낙동강 역사기행 때 일행 50여 명을 데리고 고향집에 가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점심을 먹고 떠나면서 사진가 황헌만 형이 찍은 사진이다. 그때 어머니는 역사기행 일행들에게 “우리 아들 잘 봐주이소” 했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을 먹을 수 없어서 더욱 슬프다.
그러나 슬픔 없이 그 무엇이 가능하겠는가. 역사는 슬픔을 딛고 일어서고, 인생은 고뇌와 고난을 통해 기쁨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 슬픔과 고단한 세월 속에서 나는 책을 만들고 있다. 고단한 상황에서 그 고단한 상황을 뚫을 수 있는 한 권의 감동적인 책을 나는 만들 수 있다. 그것이 늘 고맙고 고맙다.
시대정신을 일깨우는 삶을 실천해 보인 현인들, 그들의 책을 만드는 과정은 온몸으로 일하는 것이었다. 나는 37년 동안 온몸으로 일하는 삶을 통해 책을 만들 수 있어서, 내 온몸과 온 마음은 건강하지 않은가.
나는 늘 책 만드는 현장, 그 일터에 있었다. 일하는 현장에 있고 싶다. 삶의 현장에서 세상의 모든 사상과 역사의 정신이 비롯된다는 것을 나는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체험한다. 민족사의 위대한 정신과 사상은, 민족사의 현장이자 일터인 국토와 산하에 있겠다는 신념 같은 것을, 나는 저자와 독자와 함께 국토를 답사하는 ‘한길 역사기행’을 통해서 인식하게 되었다. 현장은 아름다웠다. 현장에 서 있어야 한다! 모든 진보적인 정신과 사상과 이론은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에서 창출된다!
나는 예술마을 헤이리를 구상하고 건설할 때도 나는 현장에 건설위원회 사무실을 만들었다. 그 현장에서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발상과 실천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 삶의 역사를 아름답게 일으켜 세우는 지혜와 신념은 그 일터와 현장에서 창출되는 것이다.
농사일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농사일터와 농사현장에 계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농작물과 늘 함께 계셨다. 그것이 가장 건강한 농사의 지혜라는 생각을 오늘 나는 다시 하게 된다.
나는 책 만드는 일터에 있어야 한다! 책 만들기 37년이 나에게 다시 가르쳐주는 정신, 슬픔과 고난을 뚫어내는 삶의 현장 그 지혜!
서울에 나갔다. 미국대사관 자리에 호텔이 아니라 ‘책의 전당’을 세우자고 의논했다. 한상완·김민웅·안찬수·박은주·김언호가 참석했다. 한옥으로 짓는 걸 연구하자 했다. 우리의 것을 담아낼 뿐 아니라 세계와 호흡하는 책의 전당.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도서관을 지어, 책 읽는 대한민국의 근원이 되게 하고, 세계문명을 종합해내는 책의 공간이 되게 하자고 했다. ‘문화한국’의 상징이 되게 해야 한다!
2주 후에 만나 구체적으로 의논하기로 했다. 가능하면 서둘러 의견을 내고 이것을 위한 담론 계속 진행시키자 했다.
권오춘 씨와 통화했다. ‘지혜의 숲’ 이야기했다. 박성훈 회장과 통화하고 ‘지혜의 숲’ 이야기했다. 최재천 의원 전화 시도했지만, 회의한다는 문자만 받았다.
창포에서 오래된 책방들 사진 촬영했다. 18~19세기의 유럽과 중국과 일본의 책방 들을 그린 판화와 그림 들이다. 한길책박물관 에서 전시해보는 걸 연구하고 있다. 책을 찾아나서는 인간들의 행렬이다.
고등학교 동창 이삼균 군과 이상우 군 통화했다. 졸업 50주년 행사 때 나도 참가하겠다고 했다. 어찌 벌써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50년이 된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50년의 세월이 오늘의 나를 존재시켰겠지.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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