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고요
젊은 여교사가 수업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인지,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강원도의 작고 낮은 마을에서 그처럼 커다랗게 울려 퍼지는 소음이란 분명 예외적인 일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렇게 마지막 골목을 돌아설 때, 여교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웃 주민들이 하필 그녀의 집 앞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뭐라고 묻기도 전에 이웃 하나가 대답했다.
“우리도 모르겠어요. 막 두들겨봐도 대답이 없네요.”
여교사는 황급히 열쇠를 꺼내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리는 굳게 닫힌 안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 순간 마주친 광경을 젊은 여교사는 평생 잊지 못한다. 낡은 흑백텔레비전 앞에 막 여섯 살이 된 그녀의 둘째 아이가 앉아 있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로, 볼륨을 끝까지 올린 스피커에 귀를 바짝 붙이고서, 자신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려 끙끙대고 있었다.
아이는 그날 귀가 멀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억을 못한다. 귀가 먼 직후부터 조금씩 청력을 되찾게 되기까지, 소리를 듣는 일에 다시 적응을 하기까지 대략 두 해 동안의 기억이 깨끗하게 지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은 나의 시련이 아니라 부모의 시련이었다.
당시 원주에서 영험하다고 소문난 문창모이비인후과가 나를 초진했다. 의사는 겁에 질려 있는 작은 귀머거리를 이리저리 관찰하더니 묵묵히 약을 지어 주었다. 그 하얀 봉투에 든 약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아마 젤리빈이나 콩사탕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배만 부르고 전혀 차도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 상태로 40여 일이 지났다. 갑작스런 적막 속에 갇힌 나는 다친 짐승이 그러하듯 급격히 난폭해졌다. 신경질적으로 텔레비전 볼륨을 올려대고, 수틀리면 손에 잡히는 아무 물건이나 집어던졌다.
여섯 살짜리 아이가 집안의 갑甲 행세를 시작하자 부모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 나이에 귀가 멀어버리면 공부를 하는 것도 어렵고, 꿈을 갖기도 힘들다. 벌써 빠르게 그간의 언어를 잃어가는 중이었다. 아니, 귀가 먼 며칠 사이에 아이의 언어는 순식간에 붕괴되어버렸다. 되는대로 꺽꺽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을 뿐이었다. 훗날 어느 술자리에서 외삼촌이 당시 그 모습을 흉내 낸 적이 있는데, 아주 가관이었다.
절망에 빠진 부모는 온갖 궁리를 다 하였다. 저 헬렌 켈러를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루는 답답한 마음에 의사에게 물어보았다.
“어찌, 치료될 가능성이 좀 있습니까?”
그랬더니 의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고작 40일 병원에 다녀놓고 벌써 낫기를 바라는 거요?”
귀가 먼 건 아들인데 왜 나한테 소리를 질러 이 자식아. 그가 노리는 게 기적 혹은 자연 치유임을 깨달은 아버지는 즉각 나를 이끌고 상경하였다.
서울 세브란스병원의 의사들은 감격스러울 정도로 친절했다. 토요일 오후였음에도 먼 곳에서 왔다며 여러 가지 정교한 테스트를 실시했다. 커다란 유리 돔 안에 나를 집어넣고 밖에서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나는 물론 제대로 답을 못하였다.
검사를 마친 의사들은 논의 끝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처방을 내렸다. 하나는 편도선염에 의한 청력의 상실이고, 또 하나는 청각기관의 물리적 손상이었다. 의사들은 우선 편도선염에 대한 처방으로 약을 조제해 주었다.
“먼 데서 오셨으니 한꺼번에 십오 일치를 지었습니다. 그 후에도 마찬가지면 다시 오세요. 그때는 보청기 처방을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약을 한 보따리 챙겨 병원 문을 나섰다. 그런데 일가족이 모두 함께 왔던 터라, 기왕 서울에 온 김에 창경원이나 구경하자며 놀러갔다. 막내아들이 귀가 먼 와중에도 강원도에서 상경한 우리 가족은 마냥 코끼리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곳에는 코끼리뿐 아니라 호랑이도 있었을 것이다. 기린도, 얼룩말도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한 살 위인 형은 그 이국의 동물들을 보며 몹시 즐거워했을 것이다. 십중팔구 나도 그랬을 것이다. 좋아서 짐승처럼 꺽꺽 날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유년의 기억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오감의 범우주적 공조가 필요하다. 그 감각 중 하나에 구멍이 나버렸기 때문에, 나는 그 시절의 단 한 장면도 기억을 못한다.
세브란스병원의 의사들은 원주의 소리 지르는 무당보다 친절할 뿐 아니라 실력도 뛰어났다. 받아온 약을 일주일쯤 복용했을 때부터 조금씩 청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십오일 분의 약을 다 먹고 나자 경적 소리에 차를 피할 수준으로 회복되었고, 다시 한 달쯤 지나면서는 나를 매우 칭찬하는 이야기 정도는 재깍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의사들의 첫번째 처방이 적중했던 것이다. 그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시로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봉사의 삶을 사는 건 어떨까 고려해보았지만 의대에 못 갔다.
청력이 회복되어가던 터라 특별한 보호가 필요했던 나는 춘천의 외갓집에 맡겨졌다. 싹싹하고 영리한 데다 귀까지 되게 밝은 형은 원주의 부모 곁에 그대로 남았다. 일종의 분리수거였다. 부모의 맞벌이 사정 때문이었지만, 다행히 그 결정은 모든 점에서 최고의 선택이었다. ‘모든 점’이라 했으니 미괄식으로 장점 몇 가지를 나열한 뒤 제일 뒤에 핵심 장점을 넣어야 글의 흐름에 맞겠으나, 따져보면 모든 장점은 네 음절짜리 한 단어로 간결하게 수렴된다.
외할머니는 내게 백 퍼센트의 존재였다. 체온이 필요하면 업어줬고 놀이 상대가 필요하면 놀아줬다. 배가 고프면 석유곤로를 이용해 중국식 계란볶음밥을 만들어 주었고, 잡다한 병에 걸리면 소아과를 찾아 밤하늘 은하수를 훨훨 날아다녔다. 그분의 외손자라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말갈족을 수하에 거느린 것처럼 안심이 되었다. 그건 비단 어린 시절뿐만이 아니라 성인이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여서, 깡패 짓을 하고 다닐 때나 외국의 도시에서 넉살좋게 굴러먹을 때나 마음의 절반은 항상 그분 옆구리에 기대어 있었다. 호의와 적의를 구분하지 못하여 부모 형제를 포함한 세상 모두에게 원수를 만난 양 덤벼들던 내 유년기의 공격성이 오직 그분만을 비껴갔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아마 외할머니는 교감의 천재였던 모양이다. 후에 외할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언어중추를 다쳐 발음이 어눌하게 되었는데, 그걸 드러내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셌던 탓에 외할머니하고만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때 외할머니의 얼굴에 담긴 백 퍼센트의 눈빛과 표정을 보며, 내가 바로 그 맞은편에 조그맣게 앉아 있던 시절이 떠올라 온몸이 저릿저릿해진 적이 있다.
나는 일 년 조금 넘게 외할머니의 품에서 자랐고, 갈아엎었던 대부분의 말을 그때 새로이 배웠다. 그분과의 대화 속에서 그분의 말을 배웠다. 그러니 내 언어 속에는 내가 살아온 시공간보다 외할머니가 살아온 시공간이 훨씬 많이 담겨 있는 셈이다. 내 언어에는 한국동란의 고단함이 담겨 있다. 내 고향 춘천뿐 아니라 외할머니의 고향인 ‘영변의 약산’도 담겨 있다. 내 언어는 외할머니의 품에서 생겨났다.
외할머니는 여러 종교를 옮겨 다니다 말년에 기독교의 한 분파에 정착했는데, 어딘가 지나친 감이 있었다. 그걸 못마땅해하는 나에게 하루는 이렇게 말했다.
“이건 진짜야. 이게 진짜가 아니면, 이게 진짜가 아니라면 할머니는 너무 슬퍼. 너무 억울해.”
나는 그 문장에서 삶을 백 퍼센트로 살아온 이만이 맞닥뜨릴 수 있는 어떤 공허를 보았고, 그래서 다신 외할머니의 신앙생활에 토를 달지 않았다. 2007년 겨울 그분이 떠났을 때, 나는 딱 한 번 내 이성과 신념을 정면으로 거스르면서, 천국이라는 높고 아름다운 곳이 세상 어딘가에 정말로 존재해주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여덟 살이 되면서 춘천에서의 행복했던 시간은 끝났다. 나는 원주로 돌아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소리가 들리긴 들렸지만 여전히 심한 난청이었다. 특히 낮게 점잔 빼는 유형의 목소리에 애를 먹었는데, 후에 알아보니 그처럼 특정한 음파에는 내 귀가 전혀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치료나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상실된 영역이었다. 선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았다 하니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는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나는 말을 완전히 새로 배워야 했던 탓에 남들보다 시작도 많이 늦은 상태였다. 한 살 위인 형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한글을 완전히 터득하고 있었던 데 반해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1학년 때는 전혀, 2학년 때는 거의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지진아였다. 말은 외할머니로부터 배웠지만 문자까지 배우진 못했던 것이다. 스스로 창피한 건 둘째 치고 부모가 모두 선생인지라 상당한 집안 망신이었다. 자연스레 남의 눈을 피해 구석으로 숨어들곤 했다. 그때는 내가 보이지 않는 척 무시하는 게 날 도와주는 길이었다.
하루는 옆 반의 여자아이가 제 어머니를 앞세워 집으로 찾아왔다. 내가 자기 가방에 발을 집어넣어 망가뜨렸다는 것이다. 나는 절대로 그러지 않았다. 더 심한 짓을 했을지는 몰라도, 지질하게 그 애의 가방에 발을 집어넣어 망가뜨리진 않았다. 여자아이는 제 어머니 뒤에 숨어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기만 했다. 당시 내 부모는 모두 그 초등학교의 선생이어서 학부모가 항의하면 일단 들어주어야 할 입장이었다. 몹쓸 모녀가 가방값을 챙겨 의기양양하게 돌아가고 난 뒤 나는 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입에서 터져 나오는 대로 부인했지만 소용없었다. 사실이 분명히 여기 있음에도 그걸 어찌 이해시킬 수 없다는 절망감, 내 논리와 언변의 부족, 특히 내 편의 부재가 너무나 아팠기 때문에 이 사건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한번은 이기호 작가와 대화를 나누다 그가 같은 학교에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동갑내기여서 그 코딱지만 한 교사校舍를 오가며 마주친 적도 몇 번 있었을 것이다. 필경 이기호 작가는 그때부터 책도 잘 읽고 글도 잘 쓰고 나불나불 농담도 잘하고 괜히 까불다 두들겨 맞기도 잘했을 것이다. 나는 그때 어둠 속에 있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그때 나를 둘러싸고 있던 건 정말로 새까만 어둠이었다. 만약 이기호 작가가 당시 원주 태장초등학교의 복도에서 이리저리 꿈틀거리는 새까만 공기덩어리를 보았다면, 그게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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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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