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프랑스에서는 과학 저술을 ‘통속 저술’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그 의미는 전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이다. 미국에서는 ‘대중 저술’이라고 하며,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을 과학 저술가라고 부른다. 나처럼 현역 과학자로 활동하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연구가 가진 장점과 아름다움을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나누기를 좋아하면 역시 과학 저술가로 불린다.
프랑스에서(그리고 유럽 전역에서) 통속 저술은 인문학의 가장 높은 전통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동물을 벗 삼았던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부터 당시 교회와 대학의 공식 언어였던 라틴어 대신 이탈리아어로 교수와 학생의 대화 형식을 띤 두 편의 대작을 썼던 갈릴레이에 이르기까지 유서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연유로 (그리고 정말 속 좁은 이유로) 비과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저술에 “조악한 저질”, “단순화”, “효과를 노린 왜곡”, “인기 영합”, “요란하기만 한 과장” 등 온갖 비하가 따라붙곤 한다. 미국에서 발간되는 책들 중 상당수가 이런 낮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는 주장을 애써 부인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설령 대다수가 형편없고 자기 잇속을 차리는 서적들이라 하더라도 대중 저술이라는 장르 자체를 무효로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아무리 ‘싸구려 연애’ 소설들이 범람했어도 위대한 소설가들이 다룬 사랑이라는 주제 자체가 배척된 적이 있었는가.
내가 대중 저술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영역으로 치부하고 왜곡하는 세태를 개탄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런 식의 딱지 붙이기는 자신들의 활동을 이처럼 다양하고 포괄적인 분야로 확장하려고 시도하는 과학자들(특히 젊은 과학자들)에게 지나친 직업적 부담을 준다. 둘째, 이러한 태도는 지적 자극을 갈망하는 수백만 미국인들의 지성을 장려하기는커녕 모욕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 과학 저술가들이 보통 사람들이 평범하고 무지하다는 식의 잘못된 가정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 이웃들을 모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탁월함을 짓밟는 처사일 것이다. ‘명민하고 지적인’ 보통 사람은 결코 신화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수백만에 이른다. 물론 미국인 전체에 비하면 낮은 비율이지만, 그들이 행사하는 영향력의 측면에서는 단순한 인구 비율을 넘어 절대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나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피부로 느껴왔다. 이 에세이들을 써온 지난 20년 동안 나는 비전문가들에게서 수천 통에 달하는 편지를 받았다. 특히 80대와 90대의 나이 든 독자들이 보내온 글은, 그들이 평생 쌓아온 지식에 새로운 지식을 더하고 자연의 풍부함을 파악하기 위해 여전히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 모두 영광스러운 지적 전통인 알기 쉬운 과학을 되살리는 작업에 매진할 것을 맹세해야 한다. 그 규칙은 간단하다. 절대 개념적 풍부함을 손상시키지 않을 것. 모호하거나 모르는 부분을 건너뛰지 않을 것. 물론 전문용어를 쓰지 않되, 그렇다고 개념을 생략하지 않을 것(개념적 복잡성이 일상 영어로 전달될 수 있도록). 현재 미국에서 이런 양식의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따라서 우리의 일차적인 임무는 그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고 누가 아닌지 식별해내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프란체스코와 갈릴레이의 인문학적 전통을 꿋꿋이 주장해나가야 하며, 핵심 요약이나 연출 사진과 같은 작금의 설득 이데올로기에, 즉 미국의 또 하나의 낡은 전통(반지성주의의 어두운 면, 파시즘의 전조가 될 수 있는 사려 없는 감성주의에 대한 일말의 호소)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인문주의적 자연학의 계보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흐름이 있다. 앞서의 논의를 기반으로 나는 그것을 프란체스코 계보와 갈릴레이 계보라고 부를 것이다. 프란체스코적인 글쓰기는 자연의 시詩, 즉 단어와 구절을 신중히 선택해서 생물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 계보는 프란체스코에서 시작되어 소로의 『월든』, 영국의 구릉지에 대해 썼던 W. H. 허드슨, 그리고 우리 세대의 로렌 아이즐리[1907∼1977, 미국의 자연학자이자 작가. 미국 서부에서 초기 후빙기 이래 인간의 자취를 시적 언어로 기록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계승자로 불리기도 한다. 『광대한 여행』, 『시간의 창공』 등의 저서가 있다.―옮긴이]까지 이어진다. 갈릴레이적인 글쓰기는 자연의 지적 수수께끼,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한 탐색을 좋아한다. 이 계보에 속한 저자들은 마음으로 느끼는 아름다움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인과적 이해와 통합이라는 강력한 주제에서 더 큰 기쁨을 얻는다. 갈릴레이적(합리주의적) 계보의 뿌리는 그 명칭의 유래보다 오래되었다. 오징어를 해부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 천구를 회전시킨 갈릴레이, 우리가 자연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역전시킨 T. H. 헉슬리, 그리고 우리 세대의 어리석음을 분석했던 P. B. 메더워로 이어진다.
나는 훌륭한 프란체스코적인 저작들을 좋아하지만 나 자신은 열정적이고 완고하고 순수한 갈릴레이적 계보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나는 프란체스코적 흐름에서 보자면 당혹스러울 만큼 형편없는 실패자일 것이다. 시적인 저작은 모든 장르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다. 그 이유는 흔히 통상적인 화려한 산문의 가장 우스꽝스러운 형태만큼이나 실패가 너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17번 에세이에 인용한 제임스 조이스의 패러디를 보라). 모름지기 자신의 본분을 지켜서 자기에게 맞는 양식을 고수해야 하는 법이다. 둘째, 워즈워스가 옳았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다. 내 어린 시절의 ‘초원의 빛’[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에 나오는 표현. “한때엔 그리도 찬란한 빛으로서 /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져가는 / 돌이킬 길 없는 초원의 빛이여 / 꽃의 영광이여…….”―옮긴이]은 뉴욕의 소음과 빌딩 숲이었다. 어른이 된 후 나는 시가지를 산보하면서 즐거움을 느꼈다. 나는 숲 속의 소풍보다는 어스름 무렵 퀴리날레 언덕에서 나보나 광장까지, 에든버러의 새벽녘 조지 왕조풍 뉴타운에서 중세풍의 올드타운까지 걸으면서 인간 행동과 건축 구조의 놀라운 다양성에 경탄했다. 그렇다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무감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나의 감정적 즐거움은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 작고 우연적인 진화의 가치가 빚어낸, 있을 법하지 않지만 이따금 탄생한 경이로운 작품들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이런 작품 중에서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벌인 투쟁의 역사만큼 고상한 것은 아직 없었다. 자연은 진기한 진화적 발명품으로 태어난 늦둥이 포유류의 뒤늦은 지혜를 크게 배려하기 힘들 만큼 방대한 시간적·공간적 범위에 걸친 장엄한 실체다. 설령 그 피조물이 지구 상의 약 40억 년에 달하는 생명의 역사상 최초로 자신의 산물과 진화를 되돌아보는 회귀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나는 일차적으로 자연이 이처럼 신기한 성찰을 할 수 있는 최초의 생물에게 제공한 퍼즐과 지적 즐거움 때문에 자연을 사랑한다.
프란체스코주의자들은 자연과의 시적 합일을 추구하지만, 우리 갈릴레이 합리주의자들 역시 통일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연이 정신을 창조하고, 이제 다시 정신이 생산의 근원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면서 은공을 갚는 것이다.
이 책은 내가 매달 ‘이러한 생명관’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에세이를 모아서 펴낸 다섯 번째 책이다(나머지 네 권은 『다윈 이후Ever Since Darwin』, 『판다의 엄지The Panda’s Thumb』, 『닭의 이빨과 말의 발가락Hen’s Teeth and Horse’s Toes』, 『플라밍고의 미소The Flamingo’s Smile』다). 지난 18년 동안 《내추럴 히스토리》에 기고한 글은 거의 200편에 가깝다. 이 책에서 다루어진 주제들은 친숙한 느낌을 줄지 모르지만(약간은 새로운 부분도 있을 것이다), 소재들은 대부분 새로운 것들이다(신은 자신의 처소를 세부적인 것들 사이에 두지 않았다).
자화자찬이라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을 감수하면서, 나는 이 책이 다섯 권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건방진 주장을 하고자 한다. 나는 매달 글을 쓰면서 과거보다 더 나은 저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이따금 『다윈 이후』를 모두 폐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선별과 선택의 권한을 더 많이 허용했다. (앞선 네 권은 형편없는 에세이 한두 편을 제외하고 3년 동안 쓴 글을 남김없이 끌어모아 책으로 발간했다. 반면 이 책은 6년 동안 쓴 60편 중에서 최고, 또는 가장 일관된 35편을 추려낸 것이다.)
여기 실린 에세이들은 나의 지속적인 관심인 진화와 셀 수 없이 많은 교훈적인 자연의 기묘함(위를 알 품는 주머니로 활용하는 개구리, 키위의 거대한 알, 그리고 하나의 염색체를 가진 개미 등)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네 번째 책을 낸 이후 6년 동안의 구체적인 경과 과정에 대한 기록도 담고 있다. 나는 (1925년 스코프스 재판 이래로) 창조론에 맞선 60년 동안의 투쟁이 1987년 유명한 연방 대법원 판결에서 승리로 끝난 사건(더 자세한 내용은 ‘스코프스 대 스캘리아’라는 제목으로 묶은 에세이들을 참조하라), 프랑스혁명 200주년(공포정치의 가장 유명한 희생자였던 라부아지에를 다룬 에세이), 그리고 가장 위대한 기술적 승리인 보이저호가 천왕성과 해왕성에 근접해서 촬영한 사진(34번과 35번 에세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비탄과 실패, 즉 과학 교육이 처한 딱한 상황에 대해서도, 명확한 목적을 드러내거나 추상화하거나 정면 돌파하는 식이 아니라 늘 하던 버릇처럼 샛길을 통해 몰래 일반성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다루었고(폭스테리어, 판박이처럼 서로 베끼는 교과서의 내용, 그리고 공룡 열풍을 다룬 에세이), 처음 그 글을 쓴 시점과 이 책이 발간되는 사이에 위 속에 알을 품는 개구리가 멸종했다는 슬픈 에필로그도 기록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 관심 때문에 덜 급박하고 심지어 모호하기까지 한 주제들을 다루었다는 점을 솔직히 고백한다. 조롱거리가 되었거나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일부 사례에 국한되어 오류를 바로잡으면서, 마치 그런 오류가 오늘날에도 의미 있고 교훈을 주는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했다. 따라서 홍학이 붉은 이유가 해 질 녘에 포식자에게서 숨기 위해서라는 애벗 세이어의 이론, 훗날 과학적 인종주의자들이 활용한 척도를 수립했던 피터르 캄퍼르의 실제 의도(예술을 위한 기준), 그리고 존 스코프스가 진화를 가르치는 데 이용한 교과서에 들어 있는 인종주의적 오류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의 칭송할 만한 측면, 1860년에 있었던 헉슬리-윌버포스 논쟁의 비현실적인 영웅담 이면의 숨은 이야기 등을 다루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은 N. S. 셰일러와 윌리엄 제임스에 대한 21번 에세이다. (반면 최악의 에세이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특히 그 글들이 내 마음의 쓰레기통 속에서 갈기갈기 찢긴 후로는 말이다. 그래서 그 글들은 이 책에 포함되지 않았다.) 최소한 21번 에세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 즉 작고 진기한 주제에서 시작해 나중에 가지를 쳐서 연관성을 늘리면서 밖으로 뻗어나가는 양식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나는 거의 20년 전에 서랍에서 셰일러가 아가시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 언젠가는 그 편지를 써먹을 날이 올 것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무엇이 적절한 맥락일지에 대해서는 감도 잡지 못했다. 셰일러의 새 전기가 나오면서 나는 그와 아가시의 관계를 탐색하기 시작했고, 그의 전문적인 논문들을 읽으면서 그가 얼마나 무비판적인 충성을 (평생 동안) 바쳤는지 깨달았다. 내 지도 학생 중 한 명이 내게 윌리엄 제임스가 하버드 대학생 시절에 아가시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여행인 브라질 항해를 함께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나는 셰일러와 제임스가 친한 동료이면서 지적으로 호적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들 모두 아가시와 결부되었다는 완전한 관계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에서 무언가 흥미로운 점이 출현할 것인가? 이번에도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었다. 제임스는 처음부터 아가시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바로 지적인 영역에서(생명의 역사에서 우연성 대 설계) 훗날 저명한 교수가 된 두 사람은 불화를 빚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제임스가 셰일러에게 보낸 정말 놀라운 편지를 발견했다. 그 편지는 통상적인(제임스와 셰일러가 논쟁을 벌이던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까지도) 일반적 오해, 즉 사람의 진화가 있을 법하지 않다는 사실이야말로 인류 기원이 신성하다는 증거라는 오류에 대해 지금껏 내가 읽은 것 중에서 가장 간결하고 통찰력 있는 반박을 담고 있었다. 제임스의 문헌은, 그리고 그 가능성의 보편적인 성격에 대한 그의 뛰어난 진술은, 100년 이상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던 노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현재에 대해 가지는 시의적절성의 절정을 제공해준다. 게다가 제임스의 주장 덕분에 나는 셰일러의 소심한 노트의 잠재적 희생자인 박물관 수위 엘리 그랜트 씨의 딜레마를 풀 수 있었다. 따라서 그 에세이는 출발이라는 작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제임스의 위대한 일반성으로 끝맺는다. 그것은 제임스의 탁월함이라는 실체 없는 추상보다 (내 생각에) 만족스러운 종결이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세 번째 행운 덕분에, 나는 2년 후 지미 카터로부터 당시 내가 썼던 마지막 책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Wonderful Life』에서 제기한 인간 진화가 있을 법하지 않고 우연적이라는 견해에 대해 신학적 대안을 제기하는 매혹적인 편지를 받았다. 셰일러에 비해 설득력 있고 미묘했지만 그의 논변은 같은 논리를 따르고 있었고, 제임스의 반박을 넘어서지 못했다. 따라서 나는 대통령의 포고로 셰일러의 전통주의 대 제임스의 탐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입증한 에필로그를 쓴 셈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박식가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내가 장인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자명한 세부 사항들을 두루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만, 모두 진화적 변화와 역사의 본성이라는 공통 주제를 예증하기 위해 선택된 것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처럼 초점을 좁힌 덕분에 온갖 이질적인 주제들을 통합하고 거기에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조지 캐닝의 궁둥이에 박힌 총알은 진화를 규정하는 동일한 역사적 우연성을 논하는 수단이 된다. 내가 속해 있던 전시(全市) 고등학교 합창단의 30회 동창회에서 받은 향수에 대한 내 감미롭고 짧은 이야기는 우수함의 본성에 대한 일반적인 진술(중요한 분열을 해결하는 데 실패하면서 받은 달콤 쌉싸름함)이다. 조 디마지오의 타격 경향에 대한 에세이는 역사적 순차에서 나타나는 확률과 패턴에 대한 연구며, 야구의 기원에 대한 또 다른 글은 모든 대상이나 제도의 기원에 대한 근원의 이야기로서 창조론 대 진화론의 주제를 탐색한다. 그리고 32번 에세이는 내가 암과 벌이고 있는 한판 승부에 대해 처음 쓴 것으로 개인적인 소회의 고백이라기보다는 인구 집단에서 나타나는 변이의 성격(진화생물학의 중심 주제)에 대한 일반적인 통계적 주장이다.
만신창이가 된 우리 행성에 대한 환경론적 우려의 관점에서 본 프란체스코적 계보와 갈릴레이적 계보에 대한 마지막 생각은, 새로운 천 년에 대한 논의다(물론 인간의 예측이다. 수십억 년을 다루는 자연의 입장에서는 가소롭겠지만). 프란체스코주의자들은 직접적인 교섭으로 자연의 영광을 보증한다. 그러나 자연은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 아마도 이러한 무관심, 즉 아무것도 배려하지 않은 수십억 년의(우리가 뒤늦게 출현하기 이전의) 세월이라는 위엄이야말로 자연의 진정한 영광일 것이다. 오마르 하이얌의 오래된 4행시는 이러한 근본적인 진리를(비록 그가 지구에 대한 은유로 동방의 자기 숙소를 낡아빠졌다기보다는 웅대하게 묘사했더라면 좋았을 테지만) 진즉에 깨닫고 있었다.
생각해보라, 낮과 밤이 번갈아 오갈 뿐인
이 낡아빠진 대상隊商의 숙소에,
한때 술탄들의 화려한 행렬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예정된 시간 동안 머물다 그들의 길을 떠나갔음을.
자연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넓이다. 자연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때문에 있는 것도 아니며, 감히 우리가 핵무기로 위협할(하잘것없는 우리 자신을 쉽게 파괴할 수 있듯이) 수 없는 지속력을 가진다.
먼저 우리를 혼란에 빠뜨렸고, 환경 운동가들이 그들의 운동(우리의 운동이라고 말해야겠지만)을 정의하면서 피하려 애썼던 오만이, ‘녹색’ 운동에서 흔히 제기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교의 속에 전혀 의심받지 않는(따라서 위험할 수 있는) 형식으로 스며든다. (1) 우리는 인간의 잘못된 행동으로 항구적으로 파멸하기 쉬운 연약한 행성에서 살고 있다. (2) 인류는 이 행성을 구하기 위해 이러한 연약함을 돌보는 청지기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는 그 정도로 강해야 한다! (이 문장을 소망을 담은 문학적 문장이 아니라 힘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을 비웃으면서 나의 뉴욕 억양으로 읽어보라.) 우리가 가진 정신적·기술적 마술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수백만 년이라는 행성의 시간 척도에서 지구 역사를 궤도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가 가진 힘 중에서 그동안 지구가 종종 겪고 극복해왔던 조건이나 파국에 비견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온실효과 모델에서 예측하는 최악의 지구온난화 시나리오에서조차 지구는 현생 인류가 태어나기 이전의 행복하고 번성했던 시대에 비하면 훨씬 서늘하다. 백악기 후기의 대멸종 사태를 촉발시켰을 것으로 추측되는 외계의 소행성 충돌로 인한 충격은 지구 상의 모든 핵무기를 폭발시킨 것의 1만 배 이상에 달하는 강도였다. 그리고 해양 종의 약 50퍼센트를 절멸시킨 이 멸종 사태는 전체 생물 종의 95퍼센트가량을 사라지게 만들었을 약 2억 2,500만 년 전의 페름기 멸종에 비하면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지구는 사람의 상상을 넘어서는 이러한 충격에서도 회복했고, 그 결과 흥미로운 진화적 새로움을 낳았다(공룡의 멸종에 뒤이어 인류가 출현한 사건을 비롯해서 포유류의 지배 가능성을 생각해보라). 그러나 복원과 재안정화는 인간이 아닌 행성 차원의 시간 척도에서, 즉 사건이 일어난 후 수백만 년의 척도로 일어났다. 행성의 역사에서는 자연스러운 이 시간 척도는 우리 종과 현재 우리를 떠받치고 있는 이 행성이 처한 상황에 대한, 우리로서는 정당한, 편협한 우려와 걸맞지 않는다. 우리가 엄청난 파괴를 행할 힘을 가지고 있는 시간은 행성으로서는 찰나(우리에게 천 년 단위)에 불과한 셈이다(나는 페름기 대멸종이, 살아남지 못한 20종 중 19종에게는 지극히 불쾌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결코 박테리아를 멸종시킬 수 없다(그들은 지구 탄생 직후부터 존재한 토대 생물modal organism이며, 태양이 폭발할 때까지도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나는 과연 우리가 곤충 전체를 항구적으로 파멸시킬 수 있을지조차 의문스럽다(물론 국지적으로 곤충의 개체군이나 종을 파괴할 정도의 힘은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허약한 자신을 절멸시킬 수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은유적으로 표현하자면, 복원력이 뛰어난 우리 지구는 흥미롭지만 위험스러운 실험이 궁극적으로 패배했다는 데 안도의 한숨을 내쉴지도 모른다. 지구온난화가 우려스러운 이유는 (항구나 무역항처럼 해수면 높이에 건설되는 경우가 많은) 우리 도시들이 물에 잠기고 농업 패턴이 바뀌어서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핵전쟁은 수십억 인구에게 피해와 죽음이라는 재난을 초래하고 수백만의 미래 세대에게 유전적인 불구를 남겨준다.
행성 자체의 척도에서 볼 때도 지구는 결코 허약하지 않다. 우리 행성의 역사를 1년에 비유하자면, 마지막 몇 초간 뒤늦게 태어난 가엾은 인류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 무엇도 관리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의 환경 운동만큼 중요하고 시의적절한 정치적 움직임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저지르고 있는 어리석음에서 우리 자신을 (그리고 우리의 이웃 종들을) 구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환경 윤리에 대한 숱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중 많은 제안은 칸트적인 지상명령의 추상적 위엄을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훨씬 지저분하고 실질적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장 유용하고 오래된 도덕 원칙, 거의 모든 문화에서 한두 가지 형태로 발전되었던 교훈이다. 그런 것들은 상호 존중에 기초한 안정성의 교의로서 자기 이익을 위해 적절하게 호소력을 가진다. 지금까지 이 황금률 이상을 발전시킨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우리 행성과 맺은 이러한 계약을 실행에 옮기고 우리가 대접받고 싶은 것처럼 지구를 소중히 여기겠다고 서약한다면, 지구는 우리를 측은하게 여기고 우리가 이럭저럭 헤쳐 나갈 수 있게 허용해줄 것이다. 일부 독자들에게는 이런 소박한 목표가 냉소적이거나 속 좁은 생각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화생물학자에게 인내는 궁극적인 보상이다. 그리고 인간의 지력은, 그 진화적 기원과 무관한 여러 가지 이유로, 가장 매력적인 것을 찾아내고 가장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최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흥미로운 실험이 최소한 이 행성의 1, 2초 동안 더 지속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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