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맞장뜨는 환경전문기자 : 박수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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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감수성 지수 100점, 기자 사명감 지수 만점인 SBS 환경전문기자. 32년차 고참 기자로 40대 중반에 부장으로 승진했지만 관리자 자리를 사양하고 현장 기자를 자청해 지난 10년 동안 환경 분야의 현장에서 발로 뛰며 4대강 사업 심층보도에 앞장섰다. 2005년부터 3년간 현장 르포 <물은 생명이다>를 진행했고 녹색언론인상, 한국방송대상 보도기자상, 교보 환경문화상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환경기자클럽 회장으로 장기집권 중이다. |
경제발전을 이룬 뒤에 환경이 심하게 오염되면 그 발전은 과연 의미가 있을까? 후세를 생각하지 않고 우리만 잘살려고 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까? SBS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은 우리 사회에 그런 질문을 던졌다. 매주 한 번씩 3년간 전국을 누비며 대한민국의 환경불감증에 묵직한 돌직구를 날렸던 박수택 기자에겐 늘 ‘환경 파수꾼’이라는 명예로운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SBS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을 오래 진행하셨는데 주로 어떤 내용을 다루셨나요?
지금은 후배 기자가 진행하고 있지만 주제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급격한 산업화 시대에 수자원과 생태환경을 지키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지요.
댐을 예로 들어 볼까요? 전문가들은 수자원 확보 측면에서 댐이 경제적이라고 말하지만 댐으로 인해 그 지역에 안개가 많이 생기면 과일 수확은 줄어들어요. 물의 흐름이 막히면 퇴적량이 감소해서 바닷가의 백사장이 줄어들 수도 있죠. 그럼 나중에 해수욕장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어요. 내륙의 댐이 바다의 백사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한 곳에 집중된 대형 댐보다는 지역마다 분산된 저수지가 필요합니다.
에너지도 마찬가지예요. 집중형인 원자력을 선택하면 밀양 송전탑 문제처럼 고위험이 발생하지요. 원자력이 정말로 깨끗하고 안전하다면 전기 수요가 많은 서울의 한강이나 대도시에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게 논리에 맞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얘기는 어느 누구도 하지 않죠. 이런 모순을 짚어 주는 것이 언론이에요. 그걸 설득력 있는 말과 글로 널리 퍼뜨리는 게 기자의 역할이고요.
<물은 생명이다>를 진행하면서 뿌듯했던 일과 힘들었던 일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내가 취재했던 내용이 여론화되어 개선되는 것이 가장 보람 있는 일이죠. 충남 서천군 장항을 아시나요? 그 지역 제련소에서 나오는 폐기물로 오염된 갯벌을 살리긴커녕 그 소중한 갯벌을 매립해서 산업단지를 건설한다는 터무니없는 계획이 발표된 적이 있어요. 그 문제를 방송으로 내보낸 뒤 보존 여론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결국 매립이 취소되었고 갯벌을 지킬 수 있었죠. 지금은 서천 국립생태원을 개장하여 갯벌 보존과 지역 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습니다.
힘들었던 점은 개발 측과의 갈등이겠죠. 태안반도 위에 가로림만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천연기념물인 물범이 다녀갈 정도로 소중한 곳인데 바다의 입구를 막아 초대형 조력발전소를 만든다는 계획을 듣고 즉시 취재에 나섰지요. 흔히 조력발전이 친환경에너지라고 생각하지만 해양생태계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고, 경제성도 생각보다 높지 않거든요. 선진국에서도 1970년대 이후엔 대규모 조력발전소는 거의 건설하지 않고 있어요.
아직까지도 가로림만은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개발 측에선 물범이 대체 서식지로 이동하면 된다고 하지만, 물범의 언어로 표지판을 만들기 전에는 그들은 계속해서 원래 자리로 돌아올 것입니다.
보람이 큰 만큼 어려움도 많을 것 같아요. 그런데 환경전문기자는 어떻게 되신 거예요?
2003년에 SBS에서 부장으로 승진했어요. 부장이라고 하면 기자의 꽃이죠. 취재의 방향도 정하고 후배 기자의 길도 제시하고…. 1984년 연합뉴스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MBC 기자로 옮겼는데 동기들끼리 약속을 했어요. 끝까지 현장에 남아서 취재를 하자고요. 모름지기 기자라면 현장에서 뛰는 것이 최고이며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부장으로 승진하자마자 보도 책임자를 찾아갔어요. 관리자가 아닌 현장에서 뛰는 기자로 남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그러자 내가 원하는 환경 분야로 부서를 옮겨 주고 지원도 해 줬습니다. 2004년 2월부터 환경부 출입기자로 뛰었고 2010년부터는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어요.
환경 분야를 원했다고 하셨는데 어떤 계기로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생태감수성은 어릴 때 형성되는데요. 나 역시도 소년 시절부터 환경에 대한 관심이 자라고 있었나 봐요. 우리 집은 원래 서울 마포구에 있었는데 새 도로가 나면서 중학교 때 영등포구 신길동으로 이사했어요. 그 동네에는 소주 공장이 있어서 매일 공장폐수가 마을 하천으로 흘러드는 거예요. 또 여름 집중호우 때에는 안양천이 범람해 수재민이 되기도 했어 요. 그 당시 영등포 지역은 비가 오면 진등포, 날이 개면 먼지포라 불릴 만큼 환경오염 피해가 극심했지요. 그래도 그때의 서울 밤하늘은 은하수가 보일 만큼 맑고 낭만적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어느 수업에서 선생님이 개발의 환상을 장밋빛으로 설명했어요. 나는 선생님께 당돌한 질문을 했죠. “쇠를 씹어 먹고 기름을 마시며 살 수는 없지 않나요?” 선생님은 뭐라고 대답하셨을까요? “외화를 벌어서 그걸로 식량을 사면 된다”고 했어요. 그 당시에는 중화학공업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었거든요. 농촌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왔고, 도시의 공업이 커지니 대기와 수질오염이 심해질 수밖에 없었지요.
국민소득이 높아진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공기와 물을 사서 마시는 시대가 정상은 아니잖아요? 대체 누가 자연을 사고팔 수 있겠어요?
4대강 사업에 대해 계속 심층보도하셨는데요. 유독 4대강 사업 비판에 앞장선 이유가 있으신가요?
한반도의 큰 강들을 죄다 틀어막아 ‘녹색성장’을 한다는 게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봤어요. 사업의 효과(홍수와 가뭄 예방, 수자원 확보, 수변레저산업 육성)는 불투명한 반면 예상되는 부작용(생태계 파괴)은 너무 도 확실했으니까요.
4대강 사업은 원래 이명박 대통령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에서 시작됐어요. 반대 여론이 워낙 강해서 취임식 때 공개적으로 취소 발표를 했는데, 사실은 그때 이미 사업계획이 다 나와 있었어요. 대운하가 아닌 4대강 정비로 슬쩍 바뀌긴 했지만요. 그 계획이 담긴 문서가 공개되면서 온 나라가 시끄러워진 거고요.
높은 분들은 아마 내가 눈엣가시였을 거예요.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면서 토를 달았으니까요.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고 사실을 알리는 게 기자의 본분이에요. 또한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하천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가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다른 말로 하면 ‘지속가능한 사회’가 되도록 끊임없이 관찰하고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게 언론의 사명이니까요.
저희들 중엔 기자를 꿈꾸는 친구들이 많은데요. 유능한 기자가 되려면 어떤 능력이 필요한가요?
기자는 흩어진 정보들을 모으는 정보의 소매상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모으기만 해서는 안 되고, 그 분야의 지식이 충분해야만 올바른 뉴스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기자는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해요. 지식 못지않게 중요한 건 전달 능력이에요.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시를 지으면 우물가 노인들에게 먼저 들려주고, 그들이 이해할 만한 내용일 때 비로소 세상에 발표했답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써야 좋은 글이 된다고 믿었던 거죠. 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비판이라는 언론의 기능에 충실하려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보도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청소년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신다면요?
원자력 문제, 밀양 송전탑, 비정규직 청소노동자 같은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알고 있나요?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드는 첫걸음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관심입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고, 궁금한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실천하세요. 다른 건 몰라도 환경을 지키기 위한 실천에는 나이가 따로 없습니다.
* 인터뷰 및 정리 : 서울 숭문중학교 방성한, 홍인기, 이호욱, 우성원, 정민석 / 서울 숭문고등학교 김태완 (지도 교사 신경준)
녹색 교육에 앞장서는 환생교 대표 선생님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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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고등학교 생물 교사. ‘환생교(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창립 첫 해인 1995년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20년째 왕성한 활동을 이어 오고 있다. 2010년부터 2014년 봄까지 환생교 대표를 맡았다. 교사모임 활동하랴, 교내 환경동아리 지도하랴, 교과 수업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녹색교육에 대한 남다른 신념으로 고단함을 견디며 매일매일을 48시간처럼 살아가는 에너자이저 선생님이다. |
턱수염을 기르고 개량한복을 입은 선생님을 상상했다. 이름부터 뭔가 종교단체 이미지를 풍기는 ‘환생교’의 대표는 당연히 ‘자연인(?)’에 가까운 모습일 테니까. 하지만 선생님은 자전거를 탄 현대인의 모습으로, 그리고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따뜻한 미소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자전거면 충분하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서.
‘환생교’라는 이름이 왠지 신비스럽게 느껴져요. 어떤 단체인가요?
다들 그렇게 얘기해요. 이상한 종교단체 아니냐고. 농담 삼아 나를 ‘교주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요.(웃음) 전교조 알죠? 1989년에 교사들이 참교육을 고민하며 만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교조 교사들 중 환경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만든 게 환생교인데, 처음엔 ‘환경을 생각하는 교사 모임’이었어요. 그런데 10년 쯤 지난 뒤에 “생각만 해서 되겠나? 지켜야지”라는 얘기가 나오면서 ‘환경과 생명을 지키는 전국 교사 모임’으로 이름이 바뀌었지요.
선생님은 어떤 계기로 환생교에 참여하게 되셨어요?
교단에 처음 섰을 때부터 환경교육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환생교가 생기자마자 가입했지요. 양심 있는 교사라면 당연히 환경교육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사실 지금은 환경문제가 우리 삶 전체에 퍼져 있어서 뭐 하나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운전을 속 편하게 할 수 있나, 에어컨을 마음대로 켤 수 있나. 환경을 지키면서 산다는 게 굉장히 불편해요. 그래서 도망가려고도 생각해 봤는데, 도망은 못 가고 계속하고 있네요.(웃음)
‘새만금 바닷길 걷기’를 2003년부터 하고 계신데 어떤 의미가 있나요?
‘새만금 살리기 삼보일배’ 운동이 끝난 뒤 여러 단체들이 다양한 운동을 펼쳤어요. 환생교에서도 계화도(새만금 살리기 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전북 부안의 어촌 마을) 주민들과 함께 새만금 바닷길 걷기를 시작했지요.
새만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하구갯벌로 수많은 생명들을 품어 기르는 곳이었어요. 백합조개, 노랑조개, 동죽, 가리맛조개, 큰구슬우렁이(골뱅이)들이 끝없이 나오던 곳이었고 갯지렁이, 농게, 칠게, 망둥어, 숭어, 새우, 꽃게가 지천이었지요. 우리나라에서 실뱀장어가 가장 많이 잡히는 곳이었고 도요새가 가장 많이 찾아오는 곳이었어요. 그야말로 최고의 생태계였죠. 그런 갯벌이 간척 사업으로 사라지고 있었어요.
계화도 주민들은 갯벌을 살리기 위해 일주일 동안 새만금을 걷는 행사를 그전부터 몇 차례 진행하고 있던 터였어요. 힘들고 괴로운 마음을 갯벌에서 치유받고 새롭게 싸울 힘을 얻는 좋은 행사였다고 하더군요. 우리도 같이 해 보자며 시작했는데, 이젠 환생교의 대표적 활동 중 하나가 되었네요.
10년 넘게 새만금을 찾으면서 해마다 느끼는 기분도 달라질 것 같아요.
점점 힘들어요. 몸은 편한데 마음이 힘들어요. 처음에 갯벌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발이 푹푹 빠졌고, 하루 두 번씩 물이 차오를 때는 그나마도 걷질 못했죠. 그럴 땐 갯벌 바깥으로 빙 돌아서 걸어야 하는데 수풀이 우거져 전진하기가 어려웠어요. 하지만 지금은 걷는 게 너무 쉬워요. 갯벌이 바짝 말라 버려서 쉽게 걸을 수 있거든요.
그럴수록 마음은 점점 힘들어지죠. 예전에는 갯벌에 붉은 칠면초와 퉁퉁마디 같은 식물들도 많고, 한 발짝 걸으면 농게와 말뚝망둥어가 혼비백산해서 달아나고, 그밖에도 온갖 생물들로 가득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풀만 무성하고 농게는 한 마리도 안 보이더군요. 그 많던 도요새들도 모두 떠났어요. 예전에는 수만 마리가 떼 지어 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멋진 풍경에 감탄했었는데, 이제는 어디에서도 그런 걸 볼 수 없어요. 거대한 방조제로 바다를 막아 버린 새만금의 비극을 말라 버린 갯벌이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는 거지요.
10년이나 걸었으면 이제 그만하고 싶은 마음도 들 텐데, 새만금 바닷길 걷기를 꾸준히 이어 오는 원동력은 뭔가요?
매년 걷기가 끝나면 부안의 해창 갯벌에서 고사를 지내요. 해창은 새만금 운동의 상징적 장소인데, ‘새만금대장군’과 ‘갯벌여장군’ 장승들이 수십 개씩 서 있는 일종의 성지였어요. 하지만 이젠 돌보는 사람이 없으니 장승들은 죄다 쓰러지고 황량한 땅으로 변해 버렸죠. 지난여름에도 그곳에서 고사를 지내며 용왕님께 축문을 올렸는데, “아무도 안 와도 저희는 오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오겠습니다. 저희가 힘들어서 못 오면 저희 제자들과 자녀가 올 것입니다”라는 대목에서 우리 모두 울컥했어요. 그 다짐대로, 새만금이 되살아날 때까지 우린 끝까지 새만금을 걸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방조제를 터서 바닷물을 들이면 갯벌이 다시 살아날 수 있거든요.
환생교에선 천성산 경부고속철도 터널 반대 운동에 적극 동참하며 ‘도룡뇽 생존권’을 주장했잖아요. 그런데 터널이 뚫린 뒤 오히려 도롱뇽이 더 잘 살고 있다는 기사를 봤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그 기사는 제한된 정보만 갖고 개발론자 입장에서 쓴 거예요. 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의 결과는 그렇게 단기간에 드러나지 않아요. 장기간의 모니터링을 통해 변화를 파악해야 하는데, 정부나 건설업체에선 공사 전이건 공사 후건 그런 노력은 거의 하질 않지요.
재벌들 입장에서는 대규모 개발 공사를 많이 하면 자기들이 돈을 버니까 좋죠. 그래서 환경문제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업을 벌입니다. 자기들이 망친 곳이 나중에 복원돼도 나쁠 게 없어요. 복원 공사 역시 자기들이 할 거니까요. 망가뜨려도 좋고 복원해도 좋다는 식이죠.
우리나라는 건설로 발전한 나라입니다. 1970년대에 한국 건설업체들이 중동의 사막에서 도시를 개발하고 항구를 만들었어요. 1979년 오일쇼크 이후 중동에서 할 일이 없어지자 새만금 같은 간척 사업을 시작한 거예요. 고속철도의 경우, 서울에서 부산까지 원래 노선대로 가면 되는데 굳이 천성산을 10km가 넘게 뚫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철도 터널을 만들었어요. 왜? 돈이 되니까요.
도롱뇽 소송은 그 건설로 인해 피해를 받은 생물들을 대표합니다. 한국 최초로 인간이 아닌 동물이 원고가 된 소송이었죠.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그런 소송들이 있었어요. 예를 들면, 바위틈에 사는 ‘우는 토끼’라는 동물이 있어요. 서식지를 개발한다고 하자 환경단체가 그 토끼를 원고로 내세워 소송을 했고 재판에서 이겼지요.
천성산 터널 반대 시위 때문에 2조 원의 손해를 봤다는 말은 굉장히 과장된 거예요. 거의 날조 수준이거든요. 그러니까 언론 보도를 그대로 믿지 말고 비판적으로 잘 가려서 받아들여야 해요. 정부, 기업, 환경단체, 주민들의 입장이 저마다 다르니까요. 물론 진실은 하나뿐이지만.
마지막으로, 학교에서의 환경교육이 중요한 이유를 설명해 주시겠어요?
지금 같은 생태 위기 시대에 살 만한 세상을 만들려면 특별한 삶의 태도와 비전이 필요합니다. 어려서부터 학생들이 그런 걸 배우고 희망을 공유한다면 세상이 조금씩 바뀌면서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겠죠. 그 막중한 임무를 가진 곳이 바로 학교입니다.
환생교에서는 환경교육을 ‘녹색 교육’이라고 불러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녹색 세상을 만드는 게 녹색 교육의 목표지요.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그런 녹색 이념들이 교육과정 속에 녹아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교에 환경 과목이 있고 좋은 선생님이 있으면 효과적이고 집중적인 교육이 가능한데, 그런 학교들이 많지 않아서 안타까워요.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지치지 않고, 교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에요.
* 인터뷰 및 정리 : 한국교원대 부설 미호중학교 이래은, 민미선, 김미래, 여윤민 (지도 교사 육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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