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만평으로 읽는 대한제국 사람들의 목소리
대한제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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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의 편집진은 대한제국 성립을 단군 이래 최대의 기념비적 사건으로 칭송했다. 《독립신문》 1897년 10월 16일자 논설 첫머리에는 “조선 국명이 변하여 대한국이 되었으니, 지금부터는 조선 인민이 대한국 인민이 된 줄로 아시오”라는 문장이 보통보다 세 배 정도 더 큰 활자로 편집되어 게재되었다. 조선 인민에서 대한(제)국 인민으로의 전환이 저잣거리에까지 전달되었다. 《독립신문》의 관계자들은 덧붙여 애정 어린 충고도 잊지 않았다. 말로만 황제의 나라이면 곤란하다는 얘기였다. 진정 대한제국이 서구 열강과 같은 제국이 되려면 피땀을 바쳐 개화계몽사업에 매진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대한제국 인민은 이제 조선과 왕의 인민이 아니라 제국과 황제의 인민이니 이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한다는 충고 또한 빠뜨리지 않았다. 그렇다면《독립신문》이 주장하는 “걸맞은” 행동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문명인 되기’였다.
문명과 야만 사이
《독립신문》은 창간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대한제국 인민에게 문명인이 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명인이 된다는 것은 구시대적 삶의 태도와 방식을 모조리 바꾸는 것이었다. 1896년 11월 14일자 《독립신문》의 논설은 ‘문명인 되기’의 절박함을 철저하게 ‘문명과 야만’이라는 위계적 관점에서 주장한 글이다. 1896년 현장의 목소리를 요즘 문체로 바꿔 다시 보도하면 이렇다.
지금의 조선은 혼자 사는 나라가 아니라 세계 각국 사람들과 함께 사는 나라다. 그들과 교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려면 대강 외국 풍속을 알아야 야만적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중략) 교제하는 데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첫째 점잖게 보여야 하고, 둘째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 (중략) 그 외 조선 사람이 사소한 예법과 풍속을 아는 것이 좋을 듯하기에 우리가 오늘 대강 기록한다. 외국 부인을 만날 때에는 그 예를 사나이보다 더 공경하게 하고 부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며, 음담패설과 더러운 물건을 이야기하지 않고, 대소변 같은 말은 당초에 옮기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 집에 갈 때에는 파나 마늘이나 냄새나는 음식을 먹고 가서는 안 되며, 더러운 옷이나 냄새나는 몸으로 가서도 안 된다. 다른 사람에게 내 살을 내보이는 것 또한 큰 실례다. 남 앞에서 트림, 하품, 재채기하는 것도 실례요, 어쩔 수 없이 재채기할 경우에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아무쪼록 소리가 덜 나도록 한 후 상대편에게 용서해달라 말하는 것이 예의다. 다른 사람 앞으로 지나갈 때에는 용서해달라 한 후 지나가고 다른 사람의 부인과 인사할 때에는 부인이 손을 먼저 내밀어 흔들자고 하면 부인의 손을 공경하여 붙잡고 한 번이나 두 번 잠깐 흔드는 것이 옳다. 부인이 손을 내밀지 않았을 때 내 손을 먼저 내미는 것은 실례다. (중략) 남 보는데 코 후비기, 이 쑤시기, 귀 후비기, 머리와 몸 긁기, 음식 먹을 때 소리 내서 입맛 다시기, 먹을 때 소리 내서 마시기는 모두 실례다. 무슨 음식이든지 손가락으로 집어먹지 말고 칼(나이프)과 수저를 소리 나게 상이나 접시 위에 놓지 말며, 음식 먹을 때에는 아예 부정한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의 집에를 가든지 명함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중략) 급한 일이 없으면 다른 사람 집을 방문할 때에는 항상 오후 2시 이후에 가는 것이 예의다. (중략) 우리가 알 일이 무수히 많으나 오늘은 다 말할 수 없으니 후일에 다시 더 기록하겠다.
1883년 10월 31일 《한성순보》 창간호에 실린 지구도해. 《한성순보》는 지구도해와 지구전도를 실어 중화중심주의 세계관의 변동을 이미지로 보여주었다. |
‘문명인 되기’는 곧 문명의 매너를 숙지하는 일이었다. 서구 사람의 예법이 문명의 상징이 되자 조선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야만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철저하게 계몽·개혁되어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조선’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독립신문》을 비롯한 신문은 근대화 프로젝트의 당위성을 저잣거리 인민에게 널리 알리는 소셜 메신저였다. 물론 무지몽매한 인민도 많았다.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당시 신문 읽기의 관행은 홀로 묵독하는 것이 아니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글을 모르는 이에게 신문을 읽어줬다. 한 장의 신문은 여러 사람이 돌려가며 읽었다. 이때의 신문은 인터넷처럼 빛의 속도는 아니었지만, 시대의 중요한 이슈를 수많은 조선 인민에게 전달하고 그 이슈를 공론화하는 소셜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해갔다.
바야흐로 대한제국은 근대 계몽·개혁 시대로 돌입했다. 일본과 중국의 영향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복병을 만났다. 러시아였다. 앞서 말했지만 아관파천은 일본 제국과 그 추종 세력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정치적 결단이었다. 아관파천을 단행하고 대한제국이 들어서자 일본 제국 대신 러시아 세력이 대한제국 국정을 간섭해 들어왔다. 러시아에 연줄을 댄 일부 대한제국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았다.
이 무렵 대한제국의 계몽 지식인로 자임하던 계층은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협성회와 《협성회회보》, 《매일신문》 등의 편집진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대한제국 인민의 문명화였다. 서구 문명국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대한제국 인민의 삶 속으로 이식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대한제국 인민의 몸에 밴 구시대적 삶의 습속을 모조리 갈아엎고자 했다.
대한제국 시기 계몽 지식인들, 1908년.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한성순보》 창간에 참여했던 작성주이다. 계몽 지식인들은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받아들여 대한제국 근대화와 문명화를 이뤄내야 한다고 주창했다. |
그들이 바라던 대한제국 사람들의 삶이란 이런 것이었다. 사서삼경을 외는 서당 교육이 아니라 세계 지리와 과학을 가르치는 신식 학교 교육을 받아야 한다. 중국의 대명률보다 서구의 만국공법을 따라야 한다. 농업보다 공업에 힘을 쏟아야 한다. 게으름을 박멸하고 시간의 귀중함을 알아 근면 성실해야 한다. 음식은 날것이 아니라 익혀 먹어야 한다. 상투와 한복보다 단발하고 양복을 즐겨 입어야 한다. 조혼은 마땅히 폐지해야 하며 적정한 연령이 되면 본인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결혼해야 한다. 노름과 음주가무는 패가망신의 근본이니 금욕적 생활을 해야 한다. 한의사는 무식한 돌팔이이니 서구 의술을 배우고 따라야 한다.
이처럼 ‘야만의 조선인’에서 ‘문명의 대한제국 인민’으로 거듭나기 위해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이 바뀌어야 했다. 이러한 시민 사회 계몽 지식인의 목표는 정부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개혁만이, 계몽만이, 근대화만이 험난한 제국주의 시대를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대한제국 정부가 제도적 측면에서 근대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면, 시민단체는 대한제국이 시행하는 제도의 효용성을 인민에게 설파했다.
정부와 시민단체가 대한제국 인민에게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전방위로 압박을 가했지만, 인민의 삶이 하루아침에 변하지는 않았다. 한자를 폐지하고 한글을 사용하라 명령하자 반발하는 유생이 넘쳐났고, 위생 규칙이 제정되어 장발과 똥 같은 오물 처리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자 거세게 저항하는 인민이 늘어났다. 하지만 정부와 계몽 지식인은 대한제국 근대화와 문명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희생쯤으로 여기며 인민의 의견을 묵살했다. 근대화·문명화라는 목표 앞에 정부와 시민단체는 공생관계였다. 그러나 1898년이 되자 정부와 시민단체의 신뢰 프로세스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1898년, 문명의 대전환
아관파천은 대한제국 성립의 계기가 되었지만, 러시아의 대한제국 이권 침략의 빌미가 되었다. 또한 ‘친일파’가 아닌 ‘친러파’가 국정을 장악했다. 러시아의 한러은행 설립, 절영도 조차租借요구, 재정권과 군사권 개입, 친러파 관료의 부정부패 등으로 정부와 시민단체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러시아가 대한제국 정책에 관여하면서 이권을 챙기려 하자 시민단체와 인민은 대한제국의 자주권이 강탈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빠졌다. 세계만방에 자주독립 국가 성립을 선언한 대한제국 선포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한 셈이었다.
급기야 1898년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대한제국 국정개혁을 요구하는 대중 집회가 열렸다. 만민공동회였다. 대한제국 인민은 만민공동회에 모여 연일 시국 규탄 집회를 벌였고, 정부와 인민이 함께 모여 국정을 논의하는 관민공동회로 이어졌다. 마침내 대한제국 정부는 러시아와의 거리두기를 결정하였으며, 정치 체제의 전면개혁도 약속했다.
관민공동회에서 시민단체는 입헌군주제를 정부 측에 요구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중추원 신관제新官制를 공포했는데 기득권이던 보수파의 흑색선전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보수파는 시민단체가 의회를 설립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을 대통령으로,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하는 공화제共和制를 수립하려 한다는 전단을 뿌렸다. 이에 진노한 고종은 공권력을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해산시켰으며, 곧 독립협회도 무력화했다. 보수파가 원한 것은 자신들의 이익 보존일 뿐, 인민의 삶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인민이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는 것은 더더욱 바라지 않았다. 결국 만민공동회는 실패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그러나 1898년은 대한제국 시기 중 가장 중요한 해이자 문명의 역사적 분기점이었다. 그것은 정부나 기득권층의 입장이 아니라 평범한 인민의 입장에서 귀중한 전환점이었다. 대한제국 인민은 더 이상 왕의 ‘신민’ 혹은 ‘백성’인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근대적 의미에서의 정치적 아이덴티티를 획득해갔다. 자신을 떳떳한 주체로서의 국가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해갔으며, 자유와 평등, 의회 민주주의 같은 정치적 감수성을 키워나갔다. 또한 오랫동안 절대 진리이자 숭고한 이념이었던 주자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세속적 진리인 객관적 합리성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가 공권력에 무참하게 제압당한 후 한동안 대한제국은 황제전권시대였다. 국정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전보다 잦아들었고, 시민단체의 활동도 뜸해졌다. 친러적 성향이 강한 수구파 정부가 국정을 장악했다. 한편 이러한 정세를 주시하고 있던 일본 제국은 한반도에서 러시아를 몰아내고 대한제국을 자신의 수중에 넣기 위해 치밀한 전략을 세운다. 바로 러시아와의 전쟁(1904∼1905년)이었다. 일본 제국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했다. 일본의 승리는 오랫동안 이어져온 ‘중화’의 붕괴를 의미했으며,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막을 내렸음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러일전쟁을 통해 일본 제국은 동아시아를 넘어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힘을 과시했다. 러일전쟁 종식 후 일본 제국은 대한제국의 치안권과 외교권을 강탈했고, 대한제국은 서서히 반식민지로 전락해갔다.
혼돈 속 다채로운 삶과 욕망의 무늬
1905년 대한제국이 당면한 위기는 더 이상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이 아니라 일본 제국의 대대적 침략행위에 있었다. 문명과 야만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 제국 역시 서구 문명의 수혜자였다.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의 대결구도에서 중요한 것은 ‘민족’이었다. 1905년을 기점으로 대한제국에는 애국심을 기반으로 한 민족주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1905년 이전의 근대화 프로젝트나 개화계몽사상이 서구 제국주의 열강을 따라잡으려는 욕망의 산물이었다면, 1905년 이후 등장한 운동의 요체는 일본 제국을 적으로 상정하는 ‘애국계몽’이었다. 교육, 문화, 산업 등 모든 분야에 어김없이 ‘애국’이라는 방점이 콕 찍혔다.
통감부 지배하의 대한제국 일상은 그야말로 혼돈과 파열음으로 가득했다. 일본 제국의 통치 정책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일상에서 추진한 그들의 정책은 많은 부분 근대 초기 대한제국 계몽 지식인이 주장하던 문명화 혹은 근대화 프로젝트와 닮아 있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일본 제국 역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문명화 과정을 답습했고, 이를 일본식으로 변용하여 대한제국을 통치하려 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개항 이후 대한제국 계몽 지식인을 주축으로 추진되었던 위생개혁은 통감부 시대에 실시된 것과 비슷하다. 전자를 문명화를 위한 것으로, 후자를 대한제국 식민지화 정책의 일환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00여 년 전 혼돈과 격랑의 시대를 살아간 대한제국 사람들. 역사책에 씌어지지 않았을지라도, 기억되지 않았을지라도 그곳에 지금의 우리와 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
이처럼 1905년 이후 대한제국은 서구 문명을 기반으로 한 장기 지속적 근대화 프로젝트와 일본 제국 버전의 대한제국 식민지 근대화 프로젝트 그리고 대한제국 자주독립을 위한 애국계몽 프로젝트가 뒤섞여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를 살았던 수많은 대한제국 인민의 일상 역시 희뿌연 먼지 속을 떠도는 것과 같았다. 정치와 일상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대한제국 인민의 삶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대가 암울하다 해서 모두 애국자가 된 것은 아니요, 일제를 당연시해 협력자가 된 것도 아니었다. 나 한 몸 잘살기 위해 기회주의자의 길을 택한 것도 아니요, 권력자의 다툼쯤으로 여기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살아간 것 또한 아니었다.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의 대한제국 인민은 정치와 일상을 따로 또 같이 살아냈다. 그러면서 다채로운 삶과 욕망의 무늬를 짜나갔다. 한 몸으로 두 삶, 아니 여러 겹의 삶을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조선과 대한제국, 서구와 일본, 주자학적 세계관과 근대적 세계관이 뚜렷한 경계를 짓지 못한 채 대한제국의 나날은 흘러갔으며 마침내 종말의 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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