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구 포이동: 강남의 유령마을
철거 지역에 가보면 어디나 어르신들이 많다.
자식이 어린 젊은 사람들은 싸우다가도 먹고살기 위해 일자리를 따라 떠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이 드신 분들은 다르다. 갈 곳도 없고 받아주는 곳도 없기 때문에 그곳에 계실 수밖에 없다. 지도에 남아 있지 않는 유령마을인 강남 포이동도 그렇다. 그곳에 계신 어르신들의 안위가 늘 걱정이다.
혹시 망태 할아버지를 기억하시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뒤에 큰 망태를 걸치고 사시사철 벙거지 모자를 눌러쓴 채 반쯤 술에 취해 나타나던 할아버지들을 흔히 망태 할아버지라고 불렀지요.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집게로 폐지를 주워 담아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들 중 일부가 생계의 터전을 일군 곳이 바로 강남구 포이동 266번지입니다. 원래 이곳은 포이동이 아닌 ‘개포동 1266번지’로 불렸다고 합니다.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는데 서울특별시가 확장되고 행정 구역이 여러 차례 바뀌면서 1975년에 강남구가 분리되고, 포이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지요. 처음에 이 마을은 대개 망태 할아버지, 넝마주이라고 불리던 사람들로 꾸려졌습니다. 자발적으로 모였던 건 아니고요. 정부가 거리에서 고물과 폐지를 주워 담아 내다팔던 사람들에게 ‘자활근로대’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당시 전기는 물론 수도조차 없는 허허벌판 황무지나 다름없는 포이동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던 것입니다. 이곳으로 이주했던 주민들은 시간이 지나면 점유권을 주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그저 폐품과 재활용품 수집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부의 약속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고 그곳에서 살아가던 사람들 중 일부는 지금도 우리 주변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포이동을 찾았던 건 2005년 4월이었습니다.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아서 수소문을 해가며 강남구 양재천을 끼고 마을버스에 몸을 싣고도 10분을 더 달려 국민은행 앞에 내렸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24시간 편의점을 끼고 골목 안으로 천천히 들어서는데 철거 지역은 보이지 않고 대신 빌라들이 죽 늘어 서 있었습니다. 빌라의 열려진 대문 사이로 보이는 잘 가꾸어진 나무들이며 벤치 등의 조경 시설에 잠시 넋을 잃었습니다. 이 골목을 지나자 커다랗게 고물상이라고 쓰인 간판이 나오고 폐지들과 고철들이 쌓여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포크레인이 씩씩거리며 폐지들을 쌓아 올리는 사이로 몇 발자국 더 들어서니 마침내 붉은 글씨로 철거민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과 낡은 집들이 하나둘씩 보입니다. 포이동 유령마을에 도착한 것입니다. 입구에는 낯선 이방인을 경계라도 하듯 커다란 강아지 한 마리가 컹컹 짓어댑니다. 작은 화단에 심어놓은 파나 나물 같은 것들이 봄을 맞아 한참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집들도 다 야트막해 창틀 너머에는 책상 위 공책과 주전부리들이 보입니다. 사람 사는 온기가 가득한 이곳은 그런데도 대한민국 공식 주소로는 등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포이동 건너편에 자리한 타워팰리스와 포이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판자집. |
차라리 없는 사람처럼 살아라
온 국민이 축제에 빠져 있던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전두환 정부는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서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노점상과 철거민을 단속하고 철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강남의 포이동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국가의 어두운 치부이고 국제적인 망신거리라는 이유로 주민들을 마을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게 감시를 했습니다. 이때부터 포이동에는 다양한 우여곡절이 시작됐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피해를 낳았던 사건은 2011년 6월 12일에 있었던 큰 화재 사건이었습니다. 한 초등학생의 불장난으로 화재가 시작돼 마을 전체로 불이 번져 96가구 중 75가구가 전소되었던 것입니다. 천만다행으로 다친 사람들은 없었으나 소방서의 늑장 대처로 조기에 불길을 잡지 못해 화재가 크게 번졌던 것입니다. 이 화재로 포이동 주민들의 삶은 더욱 더 벼랑 끝으로 내몰렸습니다. 가장 큰 문제가 거주 공간을 잃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민들이 당장 거주할 공간을 임시로 짓고 무더운 여름은 겨우겨우 버텨 나갔습니다. 그러나 8월 12일 새벽 4시 반 경, 서울 강남구청은 용역업체 직원 100여명을 동원해 임시 건물 일부를 기습 철거합니다. 철거 이유는 가건물을 세우고, 그곳에서 주거지를 이뤘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임시 건물 3개동이 허물어졌고 5개동은 파손됐으며 철거에 항의하던 주민 3명은 부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후송되기에 이릅니다.
포이동에서 바라보는 건너편 하늘은 ‘타워팰리스’가 하늘 높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서울에서도 가장 부자들만 모여 산다는 타워팰리스가 그들만의 철옹성처럼 하늘 높이 솟아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한때 허허벌판이었던 이곳이 서울의 가장 비싼 노른자 땅 강남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게다가 아름다운 양재천이 굽이쳐 흐르고 있으니 조망권이 좋다는 말도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오래전 황무지였던 이곳을 개척하면서 살아왔던 사람들의 삶은 주변의 변화와 무색하게 달라진 게 없습니다. 주변의 땅값이 하루가 다르게 천문학적으로 뛰기 시작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삶의 처지는 그대로입니다. 마치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백인들에게 밀려 나듯이 포이동의 원주민들은 현재까지도 배제되거나 소외되고 있는 것입니다.
2011년, 장맛비가 퍼붓던 날 포이동을 다시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 날 양재천은 폭우로 불어난 물이 흙탕물을 만들며 거세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마을의 절반은 화재로 숯덩이가 된 채 방치되어 있었고요. 이곳이 철거촌이라는 것을 알리는 깃발이 망루위에 걸린 채 쓸쓸하게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집을 잃은 주민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잠자리와 공동의 식사를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말이 공동 생활이지 한여름 좁은 마을회관에 숙식을 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 날은 모처럼 마을문화제를 준비하며 주민들이 들떠 있었습니다. 간간이 비가 내리는데도 무대가 세워지고 음향과 앰프가 들어오고 한쪽에서는 국밥이 펄펄 끓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저는 포이동의 미래는 어떠할지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포이동에 살다가 집을 잃은 사람들 중 대다수는 연세가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이다. 그들은 병들고 지친 몸을 이끌고 부당함과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또한 포이동 마을회관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 식사와 주거를 해결하실 수 있도록 했다. |
불법점유 변상금이 1억
2012년 4월 20일 포이동 공대위에서 상황실장을 맡았던 신희철 씨(남, 39세)에게 다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서울시에서 포이동 일대에 대한 공영개발 계획안을 담은 재건마을 정비방안을 발표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언론에서도 포이동의 문제가 마치 해결될 것처럼 보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신 씨에 따르면 “서울시가 임대주택에 주민들을 재정착하게 해준다지만 사실상 임대주택 보증금을 낼 여력이 없는 주민들에게는 현실성 없는 계획”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포이동 재건마을 정비방안’은 겉만 번지르르할 뿐 과거에 내놓은 정책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서울시 방침도 사실은 사전에 주민들과 논의하고 의견을 묻는 방식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결정된 사안이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강남구가 부과하고 있는 불법점유 변상금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했습니다. 불범점유 문제는 오래된 달동네들이 안고 있는 공통 현안이기도 합니다. 포이동에도 1990년부터 ‘토지변상금’이 부과되기 시작했는데, 불법점유자라는 이름으로 과세를 하다보니 어떤 주민은 무려 1억이라는 토지변상금을 물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포이동의 주민들 중에는 변상금을 납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임대주택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있는데도 명확한 해결책 없이 공영개발 계획안을 추진한다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2005년 봄에 만났던 포이동의 한 청소년. |
“4월이 되면 양재천 주변으로 갖은 꽃들이 피어났어요.
우리는 봄철이 되면 나물 걱정은 안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물이 하도 맑아서 빨래를 하거나 동네 사람들이 모여 물고기를 잡아먹었습니다. 여름밤 이곳은 그야말로 칠흑 같은 밤이 된답니다. 우리는 가족들과 함께 멱을 감기도 했어요. 사람들은 우리 보고 게으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건너편 빌라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 때문에 집값이 떨어진다고 동냥아치라고 놀리거나, 때로는 옥상에서 돌을 던져 아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이들을 설득시키려고 노력을 했어요. 여론이 나빠지거나 민원이 들어가면 어쨌든 저희에게도 불리하니까 참고 살 수밖에 없었지요. 저희도 어엿한 이곳의 주민입니다. 몇 십 년을 살아온 주민이지요.”
포이동 주민들의 입장은 과거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아무리 주변의 땅값이 뛰었다 해도, 애초부터 살던 주민들이 재정착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가 맞춰져야 하지 않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지 거주민과의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대화와 소통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대책은 늘 발표됐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것들은 당사자들을 위한다기보다 그저 시민들에게 보여주기 식의 선심 정책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제시한 대책을 거부하면, 집단 이기주의 세력으로 몰아 부치거나 매도하기 일쑤였습니다. 포수가 총만 들고 폼만 잡으면 다가 아닙니다. 제대로 사냥을 할 수 있어야 포수인 것입니다. 시장이 되었든 구청장이 되었든 이러한 현안들을 처리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시스템을 만들고 집행을 내와야 합니다. 포이동에 대한 제대로 된 정책을 다시 한 번 촉구합니다.
포이동 개발을 둘러싸고 아직도 잡음이 많다. 누가 이들의 아픔에 귀 기울일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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