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데
많은 돈이
들지 않는
삶의 구조 만들기
2012년 10월 말, 금융당국과 금융연구원은 한국은행과 통계청이 실시한 가계금융조사를 토대로 ‘가계부채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를 발표했다. 그 결과 가계부채의 심각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2011년을 기준으로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480만 3000가구 중 12퍼센트인 56만 9000가구의 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이 60퍼센트를 초과했다. DSR은 배우자 및 자녀를 포함한 전체 가계 구성원의 세전 소득 가운데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카드대출 등 금융권 부채의 원리금을 상환하는 데 들어간 돈의 비율이다. 이 비율이 60퍼센트를 넘으면 사실상 생활 과정이 만성 적자에 시달리기 쉽다.
집 한 채를 사느라 빚을 내는 바람에 오히려 생활고를 겪는 것이 ‘하우스 푸어’인데, 약 57만 가구가 준準깡통주택을 소유한 채 실제로는 힘겹게 산다는 얘기다. 지역별로는 수도권(33만 9000가구)이 가장 많았다. 게다가 10만 가구 정도는 현재의 집값이 대출받은 돈보다 낮아 집을 팔아도 빚을 못 갚는 이른바 ‘깡통주택’ 소유자다. 이 10만 가구의 총부채만 해도 무려 47조 원을 넘는다.
일례로 40대 중반의 A씨는 2008년에 은행에서 주택담보대출로 2억 3000만 원을 빌려 서울 마포에 중소형 아파트를 장만했다. 당시 6억 원대였던 아파트 가격은 현재 5억 원 초반대로 떨어졌다. “시세차익을 염두에 두고 투자했는데, 그간 나간 은행이자를 포함해 1억 2000만 원 정도 손해를 봤다”며 “생활비가 부족해 신용대출로 메운다”고 할 정도다. 또 다른 경우도 있다. 50대 중반의 B씨는 2009년에 서울 도봉구에 작은 연립주택 한 채를 샀다. 그간 모은 돈 3000만 원에 7000만 원 대출을 끼고 1억 원으로 마련한 집이었다. 그런데 올해 남편이 명퇴한 뒤에는 이자 내기도 버겁다. 김씨는 “1억 원짜리 집이 5000만 원까지 떨어졌으니 이젠 팔아도 빚을 다 못 갚는다”며 “집을 내놓아도 보러 오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한다.
앞으로 경기가 더 나빠질 경우 부실도 눈덩이처럼 늘어날 것이다. 집값이 내리거나 소득이 주는 경우가 문제다. 집값이 20퍼센트 하락하면 깡통주택은 현재보다 4만 6000가구 는다. 가계소득이 20퍼센트 줄어도 3만 5000가구가 새로 깡통주택이 된다. 집값과 소득이 함께 20퍼센트씩 줄어들면 깡통주택은 9만 6000가구나 늘어난다. 현재의 거의 두 배 수준이다. 이 경우 금융권의 부실도 현재 10조 7000억 원에서 17조 9000억 원으로 커진다. 한국이 가진 총 부채(가계, 기업, 금융권, 정부)는 국내총생산GDP의 314퍼센트 수준으로, 최근 재정 위기로 곤란을 겪은 이탈리아와 같은 수준이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거품경제 붕괴도 초를 다투고 있다고 한다.
이 지점에서 몇 가지를 따져보자. 첫째, 왜 사람들은 무리해서 빚을 내어 집을 샀을까? 그것은 당연히 시세차익이 있을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 월급을 모아봐야 부자 되기는 힘들고 또 어느 이웃이 부동산 투자를 잘해서 큰돈 벌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나도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주거용이던 아파트가 투기용으로 변질되었다. “저 산과 들과 강과 바위는 모두 우리의 형제자매들”이라고 외쳤던 북미 인디언 시애틀 추장(1854년의 편지)의 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겐 모두 사라지고, 땅은 한갓 ‘부동산’에 불과하며 ‘한탕주의 돈벌이’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천문학적인 빚을 내서라도 집 한 채 장만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고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는 법. 고용은 불안정해지고 실업자가 급증했으며 ‘경제 대통령’이 통치하는 기간조차 경제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시장 할머니들조차 등을 다 돌려버렸다. 물가는 오르되, 부동산 시장은 포화 상태에서 ‘빈 집’이 급증했다. 소득은 줄고 집값이 폭락하니, 무리해서 집을 샀던 사람들은 한숨만 푹푹 쉰다. 부동산 가격이 올라갈 줄만 알았지 내려갈 줄은 상상도 못한 어리석음 탓이다. 한 마디로 ‘탐욕’이 세상을 망친 셈이다.
둘째, 집이나 땅을 주거나 살림살이의 관점이 아니라 투기나 돈벌이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 기본적으로 우리는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의 말처럼 토지, 노동, 화폐 등은 상품화하지 말아야 한다. 중국이나 싱가포르 같은 나라는 집을 짓더라도 토지 자체는 사유화를 못하게 하고 건물만 사적 소유나 매매가 가능하게 한다. 독일 같은 경우는 토지와 건물의 사적 소유 및 매매는 가능하게 하되, 자가 주택의 경우 세금을 많이 매기기 때문에 굳이 집을 살 필요가 없다. 더구나 월세로 사는 사람들의 권리를 철저히 보호하고 있어, 한국과 같은 ‘집 없는 이’의 서러움도 없다. 그러니 사람들의 마음에도 집에 투기하고픈 심리가 없다. 불행하게도 미국이나 캐나다 등 한국 교포가 많이 사는 동네에서는 한국인들 사이에 투기 열풍이 불면서 집값도 치솟는다고 한다. 제발 사람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짓은 해외 수출하지 않았으면 한다.
셋째, ‘하우스 푸어’ 외에도 ‘워킹 푸어’나 ‘에듀 푸어’도 증가하는 추세다. ‘워킹 푸어’는 일하는데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사람들이다. 대개 비정규직 또는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는 사람들이다. 요즘은 청년 알바생들도 가세했다. 정규직이라도 중소 영세기업 소속이면 워킹 푸어가 되기 쉽다. 이주노동자들 또한 대개 워킹 푸어들이다.
‘에듀 푸어’는 자식 교육을 위해 빚을 내거나 ‘알바’라도 뛰어야 하는 경우다. 사교육비, 대학 등록금, 영미권으로의 해외 유학 등이 돈을 많이 들게 하는 요인이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소득을 증가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출을 줄이는 것이다. 후자는 주거, 교육, 의료, 노후 문제를 사회 공공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 재원은 당연히 세금인데, 상후하박 식의 누진제를 실시하고 탈세와 누세를 철저히 포착해 낭비성 지출을 없애면 충분하다. 살아가는 데 그렇게 돈이 많이 들지 않는 삶의 구조를 만들면 개별 가구는 풍요롭게 살 여유가 생긴다.
반면 전자의 소득 증대 방식은 갈수록 일중독과 소비중독을 조장한다. 생활물가는 계속 오르고 벌고 벌어도 끝이 없다. 소득이 늘어봐야 ‘말짱 도루묵’이다.
이제부터라도 거품 경제, 투기 경제, 중독 경제의 길을 청산하고 내실 경제, 생활 경제, 만족 경제를 일궈야 한다. 돈벌이가 아니라 살림살이, 그것도 행복한 살림살이가 우리 인생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돈벌이는 그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나부터,
그리고 더불어 심는 생명의 나무
이 책을 한창 마감할 무렵인 2014년 2월, 주목할 만한 세 가지 판결이 나왔다. 쌍용차 부당해고 판결, 강기훈 씨 유서대필 무죄 판결, 그리고 영화 <변호인>의 배경이기도 한 부림사건 국가보안법 무죄 판결이 바로 그것이다.
첫째는 2월 7일의 ‘쌍용자동차 부당해고’ 판결이다. 2009년 쌍용차에서 있었던 2646명에 대한 해고 통지, 그에 이은 77일간의 공장 점거 투쟁과 폭력 진압, 지금까지 6년째 계속되는 부당해고 철회 투쟁, 그간 좌절감과 억울함에 죽어간 24명의 삶, 그리고 끝내 해고된 165명 중 153명이 제기한 소송…. 1심 법원 판결과는 달리 2심의 고등법원은 정당한 해고의 요건에 중대한 결격 사유가 있다고 보았다.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를 입증한 자료가 부실했다는 점, 그리고 ‘해고 회피 노력’을 충분히 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핵심이었다. 물론 이번 판결은 법리상 원고 당사자 153명에만 해당하나, 내용상 애초의 정리해고 정책 자체에 해당한다. 따라서 죽어간 24명의 생명, 노동자와 가족, 시민이 합세한 77일간의 투쟁, 노동자 150여 명에 씌워진 1인당 평균 3200만 원씩 총 47억 원의 배상 판결, 그간의 구속이나 수배로 인한 스트레스와 우울증… 이 모든 것들이 처음부터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이 판결이 2009년 당시에 바로 나왔더라면 그간의 어마어마한 사회적 비용은 하나도 치를 필요가 없었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반갑다. 하지만 다른 편으로, 대한민국 사법부는 ‘병 주고 약 주는’ 이중성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본이 사고를 치면 법정이 뒷북을 친다. 이것이 5000만 대한민국 국민을 ‘경제적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경제 및 노동 현실이다. 실질적 경제민주화의 필요성이다.
두 번째는 2월 13일, ‘한국의 드레퓌스’로 불린 강기훈 씨가 ‘유서대필 사건’ 재심에서 무려 23년 만에 누명을 벗은 판결이다. 그는 1991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간부이던 고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신 작성해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옥고를 치렀고 현재 간암 투병 중이다. 누명은 억울함을 낳고 억울함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낳으며 이 스트레스가 암을 낳았다. 정치와 사법이 사람을 죽인다. 23년 만에 진실이 밝혀졌지만 강씨 입장에서는 청춘, 아니 인생을 다 바친 세월이었다. 강씨는 ‘사법부의 자기고백’을 바랐지만 재판부는 사법부의 과거 판결에 대해 어떤 사과의 말도 않았다. 국가가, 정치와 사법이 이래도 되는 것인가? 언론과 경찰은 어떠한가? 국과수의 전문가들은 또 어떤가? 이것이 우리의 정치 및 사회 현실이다. 참다운 민주주의, 그리고 철학 있는 전문가가 절실한 까닭이다.
세 번째는 같은 2월 13일, 영화 <변호인>의 소재가 된 ‘부림사건’ 관련자 5인이 재심에서 자그마치 33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은 것이다. 부림사건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이후 지식인들의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신군부가 조작한 대표적 공안 사건이다. 이들이 학생운동이나 현실비판적인 학습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검찰이 불법 구금과 자백 강요를 통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단죄한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무려 33년의 세월이 흘렀다. 마침내 진실이 밝혀졌다. 진실이 영원히 묻히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만, 그래도 참 안타깝다. 사법고시 시험을 위해 골방에서 5년 내지 10년을 외롭고 힘들게 보낸 시간들을 기억하는 법률가라면 한 사람의 인권이나 인생이 무참히 짓밟히는 일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수성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상사 앞에서, 선배 앞에서, 강자 앞에서 꼼짝 못하는 게 우리의 사회문화, 조직문화, 정신문화의 현실이다. 출세와 성공을 위해선 복종과 아부를 해야 하는 반면, 비판이나 저항을 하는 경우엔 생존조차 어렵거나 배제와 탄압의 공포에 시달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건강한 사회, 건강한 시민이 형성되기는 어렵다.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 민주적인 문화가 절실한 이유다.
한편 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뉴스를 기억한다. 그것은 이명박 정부(2008~2012년) 내내 논란이 되었던 ‘4대강 사업’에 관한 것이다. 처음엔 ‘한반도 대운하’를 한다고 했다가 나중엔 ‘4대강 사업’을 한다며 국민의 혈세 22조 3000억 원을 강물에 쏟아 부었던 일이다. 이명박 정부 당시에 감사원 감사도 있었고 1심, 2심 재판도 있었다. 관련 전문가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전국적 저항을 하기도 했다. 여론이 좋지 않아도 막무가내였다. 1, 2심 재판부는 거짓말이나 조작된 자료를 제시한 찬성 측 전문가나 관료들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국가 기관의 대형 사업을 냉정하게 감사해야 할 감사원조차 “아무 문제없다”며 정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2013년 1월, 박근혜 정부 출범을 앞두고 감사원은 말을 바꾸었다. “4대강 사업은 처음부터 대운하를 염두에 둔 사업이었고, 설계에서 시공, 관리, 유지보수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총체적 부실’이었다.” 그 뒤 이런저런 ‘역류와 외풍’에 시달리던 양건 감사원장이 2013년 8월 말 사퇴했다. 헌법이 보장한 4년의 임기를 한참 남긴 상태였다.
사실 4대강 사업이란 처음부터 ‘대국민 사기극’이란 말이 어울리는 일이었다. 22조 원이 넘는 세금을 건설 자본들에게 거저 넘겨주는 일이었다. 당시 건설 자본은 대규모 아파트 사업의 거품이 터진 이후 위기에 빠져 있었다. 감사원 발표처럼 잘못된 사업도 문제지만, 그 와중에 대형건설사 11개 업체의 임원 22명은 입찰가격 담합 등으로 기소되었다. 2014년 2월 6일, 그들은 ‘솜방망이 처벌’이긴 하지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자연 환경을 대하는 태도다. 서문에 말한 ‘아름다운 섬마을’도 바로 이런 시각 때문에 처참히 망가졌다.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둔,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 창출이 절실하다.
그래서 이 사업을 처음부터 문제 삼으며 국민 소송단을 이끌었던 김영희 변호사는 2013년 10월 <오마이뉴스> 대담에서 “4대강 사업 재판을 하면서 (찬성 측) 전문가가 많이 나왔다. 그분들은 교활하게 법원을 속였다. 예를 들어 수질오염 측정 지점이 어디 어디 있는데 4대강 사업 이후에 경과가 좋다는 식으로 그럴듯하게 거짓말을 하니까 재판부도 믿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또 “정부가 (4대강 사업) 홍보를 하면서 물그릇을 키우면 수질이 좋아진다고 했는데 4조 원을 들여서 BOD 95퍼센트를 줄였다고 하고, 인은 90퍼센트를 줄였다고 했다. 정부의 말대로라면 물이 깨끗해져야 하는데 4대강 사업 이후 녹조가 창궐하고 수질이 급격히 나빠졌다”며 “4대강 사업 소송에서 거짓말을 한 전문가들도 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정부 관계자들과 함께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김정욱 명예교수도 “제일 많이 하천이 파괴된 경우가 미국 플로리다였는데, 플로리다는 잘못을 인정하고 복원 중이다. 미국이 자연 복원을 위해 헐어버린 댐만 해도 700개가 넘는다. 유럽도 물 관리 지침을 만들어 재자연화에 힘쓴다. 이렇게 외국은 콘크리트 보를 허물고 재자연화에 돌입했다”면서 “우리도 재자연화를 위해 수문을 열고, 모래는 채우는 식으로 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 ‘4대강 사업’ 문제는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중인데, 사업의 타당성이나 절차적 정당성이 핵심 쟁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리 문제와는 별개로 사업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와 비슷한 ‘4대강 진상규명위원회’ 특별법이 필요하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4대강 사업만이 아니라 ‘삼천리금수강산’을 돈벌이 경제를 위해 ‘삼천리 오염강산’으로 만들어가는 기득권층과 그 공범자들을 철저히 단죄해야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은 많은 재산이 아니라 살기 좋은 사회가 아닌가?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우리가 친일 잔재를 철저히 청산하지 못한 결과, 오늘날 정치나 경제만이 아니라 경찰과 사법, 사회와 문화, 교육과 종교가 ‘물신주의’ 또는 ‘속물근성’에 사로잡혀 건강하지 못한 모습으로 재생산된다. 그렇다. 물신주의와 속물근성에 토대한 강자 동일시와 눈치 보기, 바로 이런 것들이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갑갑한 현실의 뿌리이며, 온갖 짜증과 불안, 스트레스와 폭력을 낳는 구조적 원인이다. ‘나 홀로’ 행복하게 살아보고자 아무리 몸부림쳐도 결국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다. 이제부터라도 이러한 사회적 질곡과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토론해 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열린 대화가 필수적이다. 나부터 고민하고 실천하되 나만의 독선을 버리고 겸손한 자세로 손을 내밀어야 한다. 잘못된 구조와 관행을 타파하여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만들자는 데 동의하는 한, 모든 이들과 소통하고 연대할 필요가 있다.
소통과 연대의 방식이나 실천은 다양하다. 나는 ‘나부터’ 시작하는 소통과 연대의 실천을 ‘생명의 나무’ 한 그루 심기 운동이라 본다. 우선은 사회 전반의 흐름에 대해 일상적 관심을 갖는 일이다. 무관심이나 냉소주의는 공공의 적이다. 한편, 기득권층의 물신주의를 대변하는 보수 성향 언론에만 귀와 눈을 열지 말고 진보 성향의 언론에 귀와 눈을 더 많이 열어야 한다. 전자는 신경을 꺼도 잘 보이지만, 후자는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 나온 여러 판결들에서 보듯, 작은 사건에도 주목해야 하지만 큰 흐름도 같이 보아야 한다. 돈보다 삶이 중요하듯, 돈벌이보다 살림살이가 행복한 방향으로 가는지 차분히 읽어야 한다. 친구나 이웃을 만나 차를 한 잔 하면서 그런 일들을 화제로 삼아 생각을 나누고 같이 성장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풀뿌리 차원에서 작은 모임을 만들고 참여하는 것도 ‘생명의 나무’를 키우는 일이다. 무리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관심사나 역량에 걸맞게 하면 된다. 동화책 모임도 좋고 인문학 강좌도 좋다. 도서관 모임도 좋고 각종 시민사회 단체NGO 회원으로 참여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각자 존재 자체의 소중함과 더불어 좋은 관계의 소중함을 배워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 배움의 과정은 각자가 은연중에 품고 있는 내부의 상처를 인지하고 드러내며 상호 치유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건강하고 활기 넘치는 주체로 거듭나는 길이기도 하다. 삶의 재미와 의미가 융합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좀 더 나아가 보다 창의적이고 대안적인 실천 운동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밥상살림, 농업살림, 교육살림, 자연살림, 정치살림, 경제살림, 문화살림, 정신살림 등의 방향을 갖는 것이면 된다. 노동조합도 좋고 협동조합도 좋다. 정치조직도 좋고 경제조직도 좋다. 극소수만을 위한 성공과 출세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생명과 평화, 자유와 평등, 정의와 진실의 패러다임이면 그 무슨 실천 운동이건 좋다. 표면에서는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심층에서는 마치 지하수처럼 모두 다 통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자본과 권력의 지배구조에 우리 자신이 이미 한 다리 또는 두 다리가 빠져 있는 걸 발견한다. 그 순간 우리는 매우 불편하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뭔가 바꾸어보자, ‘나부터라도’ 진짜 다르게 살겠다, 대안적인 삶이나 세상은 가능하다, 고 꿈꾸기 시작하면 희망의 불꽃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한 불편한 진실과 대면하기를 회피한 채, ‘아무리 해도 별 소용없다’는 식으로 현재 삶의 방식을 정당화하며 오로지 기존 질서 안에서의 성공과 출세 욕망을 고수하는 한, 희망의 불꽃은 영원히 사그라질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 자신도 세상의 근본적 변화라는 거시적 전망에는 비관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고 포기한 채 아무것도 않는다면 그 비관적 전망은 더 빨리 현실이 될 것이다. 그래서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생명의 나무’ 한 그루를 야무지게 심고 가꾸는 마음으로 살아가련다. 다행스럽게도 이미 많은 이들이 알게 모르게 그렇게 살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라. 제법 보인다. 행복한 생명의 나무를 심는 사람들, 사람들… 고마운 일이다. 같이 웃어도 좋고, 같이 울어도 좋다. 서로 손잡아 주며 어깨동무를 하자. ‘나부터’ 시작하면서도 ‘더불어’ 심는다면 언젠가 멋진 ‘생명의 숲’이 우거질 것이다. 우리 세대에 완성되지 않아도 좋다. 자손들이 이어가면 된다. 손을 털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생명은 이어진다. 천천히 가더라도 더불어 행복하게 가면 된다. 그 사이에 희망의 길 또한 넓어지리라. 그렇게 세상은 변한다. 당신도 믿는가?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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