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만드는 문
- 알민(Hossein Javaherynia)
자신을 컬러로 표현해주세요.
진홍색, 행복해지고 열심히 하게 하는 색. 하늘색, 마음이 편안해지는 색. 파란색, 오후 바다의 색. 밤이 시작되는 하늘색. 검정색, 나를 편안하게 하고 나에게 어울리는 색, 초콜릿색, 중요한 사람을 만날 때 입는 양복의 색.
모국에서는 어떻게 지냈었나요?
일찍이 부모님께서 헤어지셔서 어렸을 때부터 새엄마와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의류회사를 하셨는데 집에 잘 안 계셨고 항상 회사에 나가 계셨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립하고 싶어서 학교가 끝나면 신문도 팔고 아이스크림도 팔아서 형, 동생과 함께 용돈으로 썼습니다. 15세에 아버지는 어머니와 다시 재결합하셨지만 아버지 도움은 받기 싫었습니다. 이란에서의 기억은 별로 좋은 게 없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아버지와는 연락도 하지 않습니다. 이젠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한국으로 오게 된 여정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한국이란 나라를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란 사람들 대부분은 일본으로 일하러 많이 갔는데 언젠가부터 일본 비자를 받기 어려워져서 가까운 나라인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일본으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비자를 받을 수 없어서 한국으로 온 것입니다. 형은 아버지의 봉제공장에서 기술자였기 때문에 저보다 먼저 한국에 기술자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란에서 문제가 생겨서 형의 도움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는데 형이 영국에 있었다면 영국으로 갔을 겁니다. 한국이란 나라를 몰랐고 난민이란 말도 몰랐고, <난민법>에 대한 것도 몰랐습니다. 1997년에 한국에 들어올 때 비자를 받기 힘들었는데, 비밀경찰들에게 쫓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컴퓨터 시스템이 없어서 걸리지 않고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형과 함께 지내다가 IMF 경제 위기 이후 형은 다시 이란으로 돌아갔습니다. 한국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일한 곳은 안양에 있는 냄비공장이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난민 인정을 받고 나서도 힘들지만 우선 난민 신청을 하고 6개월 동안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난민들은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 기간 동안 일을 하면 불법으로 취업했다고 추방당하게 됩니다. 난민 인정도 받아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생존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이란에서는 다른 나라에 가서 난민 신청을 하면 이란을 배신하는 사람이 됩니다. 1989년에 이와 관련해서 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저는 특히 국제이란난민연합IFIR, International Federation of Iranian Refugee 대표를 맡고 있는데 이란 대사관에서도 이 단체를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란으로 돌아가면 신분이 위험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란 대사관에서 반정부 시위하는 영상이 있으니 그것을 찾아서 관련 증거물로 채택해 달라고 했는데 출입국관리소에서는 못 찾았다는 말만 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 증거가 될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을 채택해주지 않았습니다. 모국에 있는 엄마와 통화하면서도 이란 비밀경찰이 세 번이나 집으로 찾아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게다가 종교도 바꾼 터라 그것만으로도 난민 인정의 이유가 될 수 있는데, 제가 종교적 이유를 이용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한국과 이란과의 경제적 관계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어떤 나라도 이란으로 달러를 보내지 못합니다. 이란에서 기름을 사는 일도 아마 못할 겁니다. 이란이 핵 보유국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과 이란은 경제적 관계, 즉 한국은 이란에서 기름을 사고, 이란은 한국에서 물을 사가지만 달러가 오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국가 간의 관계와 상관없이 난민 신청자에게 신변에 위험이 있으면 난민으로 인정해줘야 합니다. 난민지원이 잘된다고 생각해서 이란 사람들이 저에게 한국으로 오고 싶다고 연락을 하는데 저는 오지 말라고, 나도 아직 못 받았으니 다른 나라로 가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에서 만난, 난민들을 위해서 더 좋은 일도 포기하고 도와주는 김성인 사무국장, 김종철 변호사, 정신영 변호사, 이일 변호사, 고은지 활동가에게 감사합니다.
현재 화성보호소에 계시다가 잠시 치료차 나오게 되셨다고 들었는데 화성보호소는 어떤 곳인가요?
화성보호소에는 불법 중국어선 어민들도 있는데 그들은 굉장히 위험하고 난폭한 사람들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보호소에서 범죄자들을 같이 생활하게 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외국인보호소가 출국을 앞둔 외국인들을 보호하는 곳이 아니라 외국인 범죄자 감옥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5명 정도의 난민들이 보호소에 머물고 있습니다. 창문도 없는 작은 방에서 18명이 한 방을 쓰고 감시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서 지내게 됩니다. 3개월간 병원 치료를 목적으로 운 좋게 나와 있는 거라 다시 들어가야 하고, 재판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에 오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1986년에 비밀단체에서 반정부운동을 했고, 1994년에 데모를 하다가 쫓기게 되면서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단체에서 일하는 것이 왜 중요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테헤란에서 조직된 그룹인데 밤에 사람 없을 때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벽에 반정부 메시지를 페인트로 쓰고 도망가거나, 전단지를 만들어 뿌리는 활동을 했습니다. 사람들한테 알려야 한다는 책임의식 같은 게 있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 스마트폰이 있으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다 알게 되지만 그 당시는 데모하다 죽더라도 아무도 몰랐습니다.
공부도 많이 했고 의사가 되려는 꿈도 있었는데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반정부운동을 해야만 했던 이유를 찾는다면 무엇인가요?
정부의 거짓말을 알리는 것이 몹시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사촌이 먼저 그 그룹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책을 보고 공부를 많이 하게 되면서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 누구든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아 알려야 합니다.
이란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자유도 없고 정치운동가가 잡혀가는 일도 빈번하게 있었습니다. 이란과 이라크 전쟁 때 사담 후세인이 나가겠다고 전쟁을 끝내자고 했는데 루홀라 호메이니가 “끝까지 가야 한다, 이라크는 우리 영토다”라고 하면서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어린 학생들부터 청년들이 계속 전쟁에 참가해야 했고 사상자가 계속 생겨났습니다. 국민을 선동하기 위해서 젊은 사람들을 계속 희생시킨 것입니다. 총 쏘는 법을 배우지도 못한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내보냈고 저도 그렇게 전쟁에 참가했습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단체를 알게 되었고, 반정부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호메이니는 전쟁이 끝나고 3년이 지난 1989년도에는 전쟁으로 3년간 잡혀 있던 3만 명을 재판도 하지 않고 집단 처형했습니다. 그런 사실들을 알려주기 위해 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했습니다. 1994년엔 데모하다가 잡혀간 적도 두 번이나 있습니다. 체포되어서 3개월간 고문도 받았고, 그때 코를 다쳐서 아직까지 한쪽으로는 숨을 쉴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상황을 컬러로 표현한다면 어떤 색을 고르시겠어요?
빨간색입니다.
난민 신청과 동시에 구금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요?
이만큼 한국에 오래 살면서 한국 사람들이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난민 인정 과정이 이렇게 어렵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란에 문제가 있어서 돌아갈 수 없다’라고 말해도 듣지 않습니다. 법무부 사람들은 아무래도 나라를 생각해야 하니까 그렇겠지요? 그렇다고 해도 마음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법무부 사람들이 왜 알민 씨를 싫어한다고 생각하세요?
이란어로 “이란으로 돌아가면 신변이 위험하다”라고 난민 신청 서류에 썼는데, 인정할 수 없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지금 재판에서 그 서류를 증거로 쓰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출입국관리소의 잘못이 드러나게 되니까 강제출국을 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유엔난민기구에 직접 연결해주기도 했지만 5일 안에 나가라고만 합니다. 5일이라는 시간은 방법을 찾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입니다.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월세방 보증금을 빼서 말레이시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시간입니다. 월급도 아직 8백만 원이나 못 받아서 출입국관리소에서 사장님과 통화를 했는데, 다음에 준다는 말만 하고 20만 원을 줬습니다. 이런 일들로 시간을 보내면서 유엔난민기구에 시간을 더 달라고 요청했고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정리해서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출입국관리소에서는 5일 안에 나가라고만 했고, 결국 목동 출입국관리소에 위치한 보호소에서 일주일간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화성보호소로 가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의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과거에는 이란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서 국제사회에 이란의 현재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이란 사람들에서부터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난민 인정을 받아 한국에 머물게 되거나, 거절되어 이란으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이란에 찾아올 변화를 위해 일할 것입니다.
돌아갈 사람들의 피난처
- 이호택 / 국제난민지원단체 피난처 대표
언덕을 한참 올라와야 볼 수 있는 피난처의 ‘라이트 하우스Light House’가 인상적입니다. 이 공간은 언제부터, 어떻게 사용하게 되었나요?
2013년 2월에 처음 왔습니다. 라이트 하우스는 ‘빛으로 세상을 비춰달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난민들의 숙소로 사용하는 곳이자 스태프들의 사무공간이기도 합니다. 공간 가운데에 커뮤니티 기능을 하는 공간이 있어서 밤에는 휴게실과 거실로 사용됩니다. 피난처는 다음 숙소로 옮겨가기 전, 단기가 머무는 숙소 개념이라고 보면 됩니다.
국내에서는 쉼터를 제공하는 난민지원단체가 많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어디엔가, 우리사회 한 곳에 피난처가 있어야 한다’가 피난처의 모토입니다. 최후의 순간에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그 일이 바로 우리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피난처가 유일한 쉼터 제공 센터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외에도 ‘코람데오’라는 출판사에서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숙소가 있습니다.
프리드쇼프 난센의 ‘난센여권’이 당시에 어떤 의미가 있었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만약 선생님께서 난센이라면 지금 서울에서 어떤 여권을 어떻게 만들고 싶은지 궁금합니다.
난민들은 여권이 없어서 모국으로 돌아가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현재 체류하는 나라에서는 몰아내려고 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받아주지 않으니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것입니다. 여권은 한 개인이 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그 나라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책임져달라는 내용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난민들은 여권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국가가 난민을 보호하지 않는 상황에서 국제사회가 책임을 지겠다고 합의한 여권이 필요합니다. <난센여권>은 난민들을 위한 탈출구이자 희망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희망카드’를 누가 발행할 수 있을까요?
난민들의 상황을 공감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책임지려는 시민들과 단체들이 희망카드로서 여권을 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는 자국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난민들이 안정적으로 체류할 수 있도록 피난처의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그들의 삶을 보장해줘야 합니다. 문제는 국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이 경우 피난처가 시민의 힘으로 그 역할을 대신하려 합니다. 실제로 말레이시아에 10만 명 가량의 버마 난민들이 있습니다. 버마는 영향력이 없어 난민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들을 다시 미얀마로 추방시키고 있습니다. 버마 난민들은 단체를 만들어 신분증 같은 회원증을 발행하고 있는데, 이것이 그들에게 소속감은 물론 심리적 안정감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경찰 심문에도 <난센여권>을 제시해 신원을 증명하고 ‘소속이 있음’을 인정받게 하면 좋겠습니다. 피난처에서는 증명서를 발급하진 않지만, 경우에 따라 난민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해서 해결방법이 마땅치 않은 이를 위해 편지를 써줍니다. 난민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사유와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 연락할 수 있는 연락처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민사회가 보증하고 개입하는 어떤 문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단체나 시민사회,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인사들이 문서의 발행 주체가 되면 더 좋겠지요. 난민신청자를 위한 여권, 인도적 체류자를 위한 여권, 난민 인정이 거절됐지만 모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여권, 시민사회가 난민을 만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하는 여권 등 다양한 여권이 발행되는 것도 필요합니다. 모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어떤 사유를 여권에 포함시킨다면 모든 곳에서 통용할 수 없더라도 미약하나마 난민을 보호하는 하나의 보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Door. 1 당신의 문, 과거 : 난민 지원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된 계기와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소외된 외국인 노동자들을 돌보는 자원봉사활동에서 난민을 처음 만났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원봉사활동이 제게 하나의 탈출구이자, 다른 사람에게도 피난처가 된 것 같습니다. 당시 외국인 노동자들은 지금의 난민과 마찬가지로 인권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외국인 노동자가 난민과 다른 점은 추방되더라도 돌아갈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후 탈북자들을 만나면서 난민의 존재를 생각하게 되었고, 탈북자를 비롯한 외국인 난민을 돕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쌓여 우리사회에 피난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1999년 6월부터 본격적으로 난민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000년, 이라크 쿠르드족 난민들을 만났습니다. 난민 인정을 받지 못했던 그들은 당시 이라크를 지배하던 사담 후세인이 있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게 피난처라고 생각했습니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급기야 추방당해 한국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이들을 직접 찾아 가서 인터뷰를 하고, 방송 등에 출연해서 피해 사례들을 조사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중 탈북자들을 만났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탈북자에 대한 관심이 드문 상황 속에서 그들이 처한 심각한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한국에 알리고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서 다양한 방법으로 국경지대를 답사하고 탈출방법을 만들었습니다. 몽골, 베트남을 통해 탈출시키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유명인사가 된 욤비 토나도 처음에는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저는 욤비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애정을 가지고 친분을 나누다가 2005경 그가 일하는 공장을 찾았습니다. 그날,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에게 “욤비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자 가장 멋진 사람”이라고 소개했더니 저를 한심하게 쳐다보면서 그를 가리켜 일도 못하고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장 입장에서는 일을 잘 못하는 그를 쓸모없게 여겼던 거죠. 그래서 욤비를 데리고 나와 피난처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욤비는 피난처와의 만남이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이자 감동적인 일”이었다고 지금도 이야기합니다. 저나 욤비에게 이전까지 예상할 수 없었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어딘가에 피난처가 있다는 믿음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도전하다보면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길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Door 2. 당신의 문, 현재: 피난처라는 공간을 하나의 ‘문’으로 간주할 때 이 문은 어떤 사람들에게 열려 있나요? 이 문에 들어서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고 무엇을 만나게 되나요?
아무리 피난처에 머문다 하더라도 경제적 지원과 따뜻한 관심이 없다면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보통 난민들은 이곳에 3개월 정도 머물다가 새로운 길을 모색합니다. 1년 이상 머무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곳에 오래 머무는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관계가 나빠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여전히 버려졌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봉사를 하는 우리에게도 부담스런 부분입니다. 그래서 난민과 스태프들이 한 공간에서 소통하며 지내는 지금의 공간을 시작했습니다. 스태프들이 일하는 공간과 숙소를 열린 공간으로 사용하고, 강당은 난민들의 커뮤니티 활동이 이뤄지게 했습니다.
피난처의 현재의 문을 ‘열린 공간, 열린 문’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가끔 이웃들이 방문을 하는데, 난민들은 자신들이 이웃에게 받아들여졌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동네 편의점에서 세 명의 난민과 세 명의 이웃이 함께 맥주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서로를 전혀 모르는 이웃이 자신들에게 관심을 나타내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돈도 없는 난민들이 술값까지 냈다고 합니다. 난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바로 공감인 거죠.
그래서인지 피난처와 영종도 난민지원센터는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룹니다. 쉼터의 난민들이 마을에서 이웃들과 일상을 누리는 것이 중요한데, 영종도 난민지원센터는 일상적인 삶과 거리를 둔 격리된 수용시설이라는 의견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리사회가 난민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처음부터 잘 디자인해서 차근차근 풀었다면 좋았겠지만, 국가는 난민을 수용하고 배치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장기 체류 시설이 아니라 난민 심사 기간 동안이라도 거주할 수 있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한국에서의 생활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영종도 난민지원센터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Door 3. 당신의 문, 미래: 가까운 미래에 어떤 ‘문’을 만들고 싶은가요? 앞으로 열게 될 ‘문’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현재 난민은 우울하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본국에서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전쟁 등으로 인한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난민의 삶을 영위하게 되었지만, 그들도 우리처럼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하나의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이곳에서 피난생활을 하는 가운데 무언가를 준비해서 언젠가 돌아갈 본국에서 자신의 소명을 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미래를 꿈꾸게 돕는 것입니다. 아울러 패배의식에 빠진 그들에게 귀한 존재라는 인식을 불러일으켜주는 겁니다. 앞으로도 그들이 어떤 적성을 갖고 있는지, 미래의 꿈은 무엇인지, 그들이 무엇을 잘하는지 등을 파악해 각자에게 맞는 일자리를 창출하는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욤비에 관한 이야기야말로 난민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시민들에게 난민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알리는 것도 우리가 할 일입니다. 난민이란 곧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난민에게도 ‘한국에 머물 생각만 하지마라, 당신들은 돌아갈 사람들이다’라고 말합니다.
‘난민’이라는 단어가 어려운 사람이나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갖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단어를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 ‘국제 자유 이주민’이라는 개념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국제사회에서 쓰는 ‘refugee’는 어떨까요? ‘불쌍하니까 도와주자’가 아니라 ‘인재를 만들고 투자하자’는 개념으로 후원해야 할 것입니다.
난민과 함께하면서 삶이 변화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삶과 사회적 역할에 있어 어떤 점이 달라졌나요?
난민을 만나면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보람과 미래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꿈은 제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었고, 삶이 아름다워지자 매력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매일매일 내 안에서 새로운 기운이 역동하는 걸 느낍니다. 피난처는 직장이라기보다 꿈을 나누는 곳입니다. 난민에게도 제가 느끼는 소중한 부분을 함께하자고 늘 말합니다.
난민은 돕는 일을 하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나의 색깔로 표현한다면 무엇일까요?
연두빛의 새싹색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싹트네 싹트네~ 내 마음에 소망이 싹트네’라는 가사의 노래가 있습니다. 난민의 황량한 속마음에서 싹이 트는 거죠. 이 싹은 난민에게만 자라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도 자라납니다. 우리가 그들을 모른 척하고 배척하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것을 지키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나누고 우리 안의 선한 동기가 밖으로 표현될 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나 혼자서는 안 되는 일들이 다른 사람과 함께할 때 새로운 새싹으로 올라오듯이 자기 것을 나눈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 다른 가치를 배척할수록 오히려 더 우울해지고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이어질 인터뷰에 추천해 주실 분이 있으신지요?
저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사람인 욤비 토나를 추천합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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