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강형준
당신은 진보가 근대의 신화라고 주장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정치, 사회, 인권, 기술 등에서 실제로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스티븐 핑커는 2011년 저서 『우리 본성의 더 좋은 천사들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2011)에서 인간 역사 전체로 볼 때 폭력은 실제로 확연히 감소해 왔음을 증명하려고 했다. 진보에 장단점이 있다고 해서 진보를 그저 ‘신화’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레이
진보 개념을 비판하면, 누구나 진보가 불가피하고, 느리지만 계속되며, “장단점이 있다”는 등의 반응을 보인다. 나 역시 수백 번은 아닐지라도 수십 차례 정도 그런 식의 반론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런 반론을 펴는 이들은 문명의 성과들이 축적될 수 있다는 근대적 시각과 축적될 수 없다는 고대의 시각을 내가 구분하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진보나 개선이 점진적이고 추가적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얻으면 그 다음에 또 다른 것들을 얻어 덧붙여진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고대 사상가들이 알고 있었듯이 인간 세상은 그렇게 생겨 먹지 않았다. 고문 금지라든가 대규모 전쟁 반대 등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문명의 획득물들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으며, 또 정기적으로 사라진다. 기술에 의해 인간의 힘이 증가될 수 있는 것처럼 학문에서의 지식 발전은 축적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이 발전한다고 해서 인간의 합리성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며 인간의 힘이 증가된다고 지혜가 진척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내 말이 단지 유토피아주의에 반대하는 주장인 것은 아니다. 문명의 점진적 개선이라는 것은 유토피아만큼이나 신화에 불과하다.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윤리나 정치에 관해서 역사는 순환적이라는 점, 즉 문명은 흥했다가 망하고, 한 세대가 획득해 낸 것들을 다음 세대가 잃어버리곤 한다는 점을 모두가 이해하고 있었다. 오늘날 내가 이야기하는 것 역시 이와 동일한 시각이다. 만약 내 비판자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다.
문강형준
조르쥬 소렐이 주장하듯, 신화나 허구는 역사에서뿐 아니라 삶에서도 불가피한 것이다. 진보가 신화라고 해도, 우리가 그 신화와 함께 살 수도, 혹은 그것을 미래의 지침으로 사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신화가 단지 환상일 뿐인가? 보존할 가치가 있는 좋은 신화도 있지 않을까?
그레이
모든 신화의 가치가 동일하지는 않다. 나치 인종주의의 신화들은 독을 품고 있었으며 극도로 해로운 것이었다. 오늘날 퍼져 있는 진보의 신화 역시 해롭다. 물론 그것의 실제 모습은 [나치 인종주의에 비하면] 단지 우스꽝스럽게 나타날 때가 잦지만 말이다. 최고의 신화들은 인간 경험의 지속적 실상에 가장 가까운 것들이다. 가령 세계 전역의 종교가 그런 신화 중 하나이고, 그런 것들은 보존할 가치가 있다.
문강형준
16세기 말 유럽에는 천년왕국주의라 불렸던 거대한 종교적-혁명적 운동이 있었다.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잘못된 예언에 바탕을 둔 묵시록적 운동이었다. 하지만 임박할 묵시록을 믿고 그 이후의 유토피아적 미래를 꿈꾸었기 때문에 천년왕국운동은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요구할 수 있었다. 『추악한 동맹』에서 당신은 “유토피아는 집단적 구원의 꿈이다. 그러나 그 꿈에서 깨어났을 때 발견하는 것은 악몽뿐”이라고 쓰고 있다. 유토피아 기획은 왜 해로운가? 유토피아적 사상을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동력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레이
지금껏 존재했던 모든 유토피아 사상가들은 유토피아가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동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유토피아들을 추구했던 결과는 대개 끔찍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유토피아적 비전을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이유는 그 비전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이 살 수 없는 세상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과거 소비에트 연방은 끔찍했지만, 레닌이 만들려고 했던 유토피아의 모습에 비하면 현저히 나았다. 인간의 조건이 만들어 낸 행복한 측면들 중 하나는 그런 모든 유토피아들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문강형준
진보, 인간주의, 유토피아를 비판하는 급진적 사상가인 당신은 또한 저명한 현실주의 정치철학자이기도 하다. 많은 최근 저서들에서, 그중 특히 『추악한 동맹』과 『이단Heresies』(2004)에서 당신은 끝없는 갈등으로 점철된 우리의 현실을 다루는 방식으로서의 현실주의로부터 우리가 배울 점이 많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현실주의란 무엇인가? 오늘날 이상주의 대신 왜 현실주의가 필요한가?
그레이
현실주의는 서로 충돌하는 악 중에서 뭔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정치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런 생각은 고대에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마키아벨리 같은 사상가들이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 지도자들이 이런 정치를 이해할 수 있다거나 이런 정치를 실행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다. 한때 자명했던 현실주의 관점을 오늘날에는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서구가 다른 나라들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모습만 봐도 명백하다. 폭정이라는 악을 무너뜨리면 대개 그 악과 동일하거나 그보다 더한 무질서만이 생겨난다. 이는 오늘날 담론에서 결코 논의되지 않는 여러 사실들 중 하나다. 이런 상황에서 현실주의가 광범위하게 수용된다고 믿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비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문강형준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환상』에서 당신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결국 비참만을 가져올 최신 유토피아 기획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으며, 심지어 금융 위기까지 예측했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당신은 열렬한 대처주의 지식인이었다. 대처식 신자유주의에 등을 돌리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날 자본주의의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레이
공산주의의 몰락(나는 이 역시 예견했었다)과 더불어 세계가 바뀌었고, 그래서 나도 세계를 보는 내 시각을 바꿨을 뿐이다. 과거에 그나마 불완전하지만 유용한 경제적 조직형태였던 자본주의는 또 하나의 세속 종교가 되어버렸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어떻게 잘못될 수 있을지에 대해 묻는다면 자본주의는 현재 [자본주의에] 주기적으로 닥치는 위기 중 하나를 겪고 있다고 말하겠다. 그 결과를 상세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어떤 하나의 경제 모델이 보편적 승리를 거두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과거에 자본주의에는 많은 형태들이 존재했으며,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자본주의의 진정한 대안이 등장할 수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런 대안은 없다.
문강형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와 최근 낸 책 『동물들의 침묵』 사이에는 강력한 연관성이 있다. 진보, 인간주의, 계몽주의 같은 전작의 주제가 이 책에서 다시 신선하게 반복된다. 어조 역시 바뀐 것 같다. 전작에서 당신의 목소리가 급진적이고 직설적이었다면, 이 책에서는 좀 더 명상적이고 사색적이 되었다. 이 두 책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레이
독자들이 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내 관점으로 누군가를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그저 세상에서 우리[인간]의 위치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뿐이다. 그런 점에서 두 책은 유사하다.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이래로 내 모든 책은 특정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오늘날의 관점에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지 않을까 의심하는 사람들, 그렇다면 그 문제는 무엇일까 궁금해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 외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내 조언은 간단하다. 당신의 세계관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내 의견 때문에 당신이 불편하다면, 내 책을 읽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문강형준
『동물들의 침묵』에는 자유주의에 대한 인상적인 경구가 등장한다. “자유주의적인 삶의 방식이 갖는 매력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자유를 포기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데에 있다.”(73쪽) 자유주의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레이
대부분의 인간이 자유를 필요로 한다고 상정하지 않는 한 자유주의에 문제는 없다.
문강형준
허구와 현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좋은 허구가 좋고 나쁜 허구가 나쁜 이유는 무엇인가?
그레이
문학에 있어나 다른 영역에서나 좋은 허구는 현실에 충실하다.
문강형준
프로이트에 대한 긍정적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이 책에서 당신이 강조하려고 하는 핵심이 바로 삶을 보는 프로이트의 관점에 있는 것 같았다.
그레이
내가 볼 때 프로이트는 행복에의 추구가 특별히 흥미로운 삶의 방식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문강형준
행복과 더불어, 자아실현이라는 관념 역시 가장 파괴적인 현대의 허구라고 당신은 지적한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소위 자기계발에 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꾸준히 올라 있다.
그레이
만약 한국인들이 자아실현에 헌신한다면, 한국은 곧 또 하나의 미국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많은 한국인들이 원하는 게 그것이라면, 그들을 낙담시키거나 설득하는 게 내 몫은 아니다.
문강형준
『동물들의 침묵』 마지막 부분에서 당신은 “관조는 세상을 바꾸거나 이해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세상을 그저 그대로 두려는 노력”이라고 말한다.(229쪽) 그러나 복잡한 세속에서 사는 보통 사람들이 “세상을 그저 그대로 두”면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레이
나는 어떤 삶의 방식이 더 좋다고 옹호하지 않는다. 그저 행동하는 삶이 유일한 삶의 방식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뿐이다.
문강형준
불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바디우, 지젝, 네그리 같은 급진적 좌파 철학자들이 최근 인기를 누리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오늘날 좌파 철학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외면하는 자유, 열정, 정의의 문제에 우리가 다시 관심을 가지도록 한다.
그레이
급진적 좌파들은 우리 시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매체 오락물media cabare의 일부이다. 정치적으로는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문강형준
제이슨 바커의 다큐멘터리 <맑스 재장전Marx: Reloaded>(2011)에 출연했지만 마르크스에 대해 그리 혹독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가 재장전되고 있는 분위기에게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레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불안정성을 사람들에게 환기시키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그는 다른 모든 경제 시스템 역시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문강형준
당신은 시와 소설에서부터 정치학, 철학,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범주의 책을 읽는 열렬한 독서가다. <뉴욕 리뷰 오브 북스>, <런던 리뷰 오브 북스>, <뉴 스테이츠먼> 등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서평가이기도 하다. 만약 독자에게 책 한 권만을 추천해야 한다면, 무슨 책을, 어떤 이유로 추천하겠는가.
그레이
단 한 권을 추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만약 그래야만 한다면 지아코모 레오파디Giacomo Leopardi의 『지발도네Zibaldone』를 추천하고 싶다. 몇 달 전에야 영어 완역본으로 출간된 이 책은 근대의 희망에 대한 심오한 근대적 비판이다.*
* 19세기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철학자, 문헌학자인 지아코모 레오파디(1798~1837)의 노트를 모은 『지발도네』는 그의 사후에 이탈리아에서 출간되었으며, 최초의 영어 완역본은 버밍엄대학 출판부에서 2013년에 발간되었다. 니체, 매튜 아놀드, 멜빌, 하디, 벤야민, 베케트 등은 레오파디의 열렬한 애독자로 알려져 있다. 책에 대한 존 그레이의 서평은 <뉴 스테이츠먼>(2013년 9월)에 실려 있다. "Barbarism of Reason: John Gray on the Notebooks of Leopardi," New Statesman (September 26, 2013).
http://www.newstatesman.com/books/2013/09/barbarism-rea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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