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흙에서 자라고 꽃처럼 피어나는 우리말 이야기
국어사전을 펼치면 수없이 많은 낱말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옛사람은 누구나 국어사전 없이 어버이한테서 말을 물려받았고,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자라고 나면, 스스로 어버이 되어 새로운 아이 낳아 다시 말을 물려주었어요. 옛사람은 국어사전도 없었지만, 학교도 없었고, 책도 없었어요. 그런데 한두 해 아니고, 백 해나 이백 해도 아닌, 또 천 해나 이천 해도 아닌, 만 해 십만 해 백만 해를 아우르면서 말을 빚고 말을 나누며 말을 이었어요.
국어학자는 옛 책을 들추어 말밑을 살피곤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국어학자도 ‘쑥’이나 ‘마늘’ 같은 낱말을 언제부터 썼는지 몰라요. 말밑뿐 아니라 말뿌리조차 밝히지 못해요. 그런데 단군 옛이야기에 쑥과 마늘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쑥이나 마늘 같은 낱말은, 아무리 짧아도 오천 해 가까이 묵은 낱말인 셈이에요.
이렇게 따지면, ‘풀’이나 ‘꽃’이라는 낱말은, ‘사람’과 ‘바람’이라는 낱말은, ‘해’나 ‘달’이라는 낱말은, 얼마나 오래되고 깊으며 얼마나 너른 낱말일까요. ‘어깨동무’나 ‘길동무’ 같은 자리에도 쓰고 ‘소꿉동무’나 ‘얘기동무’ 같은 자리에도 쓰는 ‘동무’라는 낱말도 얼마나 오래되며 깊으며 너른 낱말일까요.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이라고 하는 책은 바로 이러한 우리말을 찾아보려는 실타래를 푸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우리말이나 국어학에 밝은 어른 한 사람이 온갖 지식과 정보를 그러모아서 착착착 가르쳐 주는 책은 아니에요. 우리말이나 국어학에 밝은 어른뿐 아니라, 이제 막 우리말을 하나둘 배우는 어린이들도 함께 어깨동무를 하면서 우리말 뿌리와 결과 너비를 살피자는 책입니다. 푸름이도 같이 손을 맞잡고 우리말 품과 사랑을 헤아리자는 책입니다. 어버이와 교사도 나란히 두레를 하고 품앗이를 하면서 우리말 무늬와 빛깔을 살찌우고 북돋우자는 책입니다.
모든 사람은 숲에서 태어났고, 숲에서 착하게 살아갑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피면, 99퍼센트라고도 할 만큼 거의 모든 사람이 서울이나 도시에서 살고, 시골에서 흙을 만지거나 시골에 남아 숲에 깃드는 사람은 1퍼센트가 될락 말락 할 만합니다. 그나마 시골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몽땅 도시에 있는 큰 학교나 회사나 공장으로 떠나요.
이런 흐름에서 도시 문명과 사회를 들려주는 우리말 이야기가 아닌, 숲을 밝히고 숲을 생각하는 우리말 이야기라 한다면, 외려 더 어렵거나 힘들다고 여길 수도 있으리라 느껴요. 그렇지만 이 글을 써서 예쁜 벗님과 나누고 싶은 시골 아저씨는 즐겁게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밥을 먹고 국을 마셔요. 밥은 아스팔트에 심어서 거두지 못해요. 국이 될 물과 푸성귀는 시멘트에 심어서 가꾸지 못해요. 벼도 보리도 밀도 흙땅에 씨앗을 내려 자라요. 냇물과 골짝물 또한 흙바닥에서 흐를 때에 가장 정갈하며 시원한 1급수가 돼요. 이 나라 사람 100퍼센트가 도시에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숲이 없다면 도시사람은 모두 굶습니다.
참말 100퍼센트가 도시에서 일하고 집을 얻어 지내더라도, 시골 흙 일구며 아끼고 사랑하는 딱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밥을 먹든 빵을 먹든 할 수 있어요. 시골 흙일꾼 없이 포도주스나 감귤주스를 마실 수 없어요. 시골 흙일꾼이 있기에 딸기를 먹고 수박을 먹어요.
한 사람으로 기쁘게 태어나 살아가는 흐름을 ‘말’에 바탕을 두어 생각해 보자는 뜻에서 이 책을 썼습니다. 그냥 태어난 말이 없고, 모두 깊은 사랑을 받아 태어난 말인 줄, 이 책을 읽는 모든 분들이 찬찬히 헤아려 주기를 바랍니다. 좋은 마음이 되어 좋은 생각을 빛내는 좋은 삶 일구기를 빌어요.
전남 고흥 동백마을에서
최종규
01
꽃처럼 피어날 말
꽃망울·꽃몽우리·꽃봉오리
아이가 묻지요. “이 꽃 뭐야?” 그러면 나는 “무슨 꽃일까?” 하고 되묻습니다. “무슨 꽃인데?” 하고 다시 물으면, “무슨 꽃이라고 생각해? 어떤 꽃이라고 느끼니? 스스로 느끼는 대로 이름을 불러 봐.” 하고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조금 기다리면, “음, 꽃잎이 노랗네. 꽃잎이 작네.” 하고 말하지요. 아이가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하는 이야기를 기다리면서, “그러면 그렇게 본 대로 이름을 붙이면 되겠구나.” 하고 한마디 곁들입니다.
꽃은 핍니다. 피고 나면 집니다. 피기에 집니다. 꽃이 피는 모습은 꽃잎이 벌어지는 모습입니다. 꽃잎은 동그스름하게 뭉친 채 있다가, 천천히 잎사귀를 벌리면서 활짝 벌어집니다. 어느 꽃은 봉오리를 쪼개듯 벌리면서 안쪽에서 수술과 암술이 살살 돋습니다. 꽃이 피면 수술과 암술 사이를 살며시 건드리며 꽃가루를 실어 나르는 벌과 나비와 벌레가 찾아듭니다. 벌과 나비, 여기에 벌레까지, 꽃가루를 옮겨 주면서 ‘꽃가루받이’를 하지요. 꽃가루받이를 하면,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는 꽃송이는 곧 꽃잎을 닫아요.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을 적에는, 암꽃은 일찍 지고 수꽃은 퍽 오래도록 꽃잎을 벌려요. 우리 집 마당에서 자라는 수세미오이꽃을 들여다보니, 수세미오이 암꽃은 고작 하루 만에 지면서 열매를 맺으려 하고, 수꽃은 보름이나 스무날까지도 노랗고 커다란 꽃잎을 벌리더군요.
꽃은 새벽에 천천히 꽃잎을 벌리고, 저녁에 천천히 꽃잎을 닫습니다. 저녁에도 꽃잎을 안 닫는 꽃이 있어요. 그러나 거의 모든 꽃은 저녁에는 잠을 잡니다. 새벽에 따사로운 햇살 기운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요. 그러고 보면, 벌과 나비와 벌레도 밤에 잠을 자요. 새벽에 일어나지요. 어느 벌레는 깊은 밤에도 잠들지 않고 노래를 들려주는데, 새벽 내내 노래를 부르고 나면 벌레도 지쳐 까무룩 잠이 듭니다.
우리들도 잠을 자고, 풀과 나무도 잠을 잡니다. 벌레와 새 모두 잠을 자요. 그러니 밤은 깜깜해야 밤이고, 낮은 환해야 낮이에요.
꽃은 햇볕을 먹으며 씩씩하게 자랍니다. 꽃은 빗물을 마시고 흙을 머금습니다. 꽃이 핀 다음 꽃가루받이를 해야 씨앗이 자랄 수 있고, 씨앗을 내놓아 이듬해에 새롭게 피어나려면 열매를 맺어야 해요.
사람은 어떤 꽃으로 필까요. 사람은 어떤 꽃가루받이를 하고, 어떤 모습으로 꽃이 지면서 씨앗을 품에 안고, 씨앗을 건사하는 열매를 내놓을까요. 예쁜 벗들은 저마다 어떤 꽃이고, 어떤 꽃가루받이이며, 어떤 씨앗이요, 어떤 열매인지 생각해 보기를 빌어요. 하얀 꽃일 수 있고, 노란 꽃일 수 있어요. 빨간 꽃일 수 있고, 보랏빛 꽃이나 푸른빛 꽃일 수 있어요. 씨앗도 풀과 나무마다 모양과 빛과 무늬와 결이 다 달라요. 다 다른 예쁜 벗님들은 다 다른 씨앗을 가슴에 품겠지요. 가슴에 품은 다 다른 예쁜 씨앗은 다 다른 열매로 무르익으면서 온누리를 따사롭게 비추고 환하게 밝히겠지요.
그나저나 예쁜 벗들은 어떤 낱말을 쓸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한동안 몇 가지 낱말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면서 잘못 쓴 적이 있어요. ‘꽃봉오리’와 ‘멧봉우리’처럼 적어야 올바른데, 그만 ‘꽃봉우리’라고 쓰거나 ‘멧봉오리’처럼 쓴 적이 있어요.
‘꽃몽우리’라는 낱말을 쓸 적에도 곁에서 찬찬히 이끌어 준 사람은 아직 없어요. ‘몽우리’로 적어야 맞는지 ‘몽오리’로 적어야 맞는지 알려 주지 못하더군요.
말뿌리를 살피면, 옛날 사람들은 ‘멧봉우리’와 ‘멧봉오리’를 함께 썼다고 해요. 이와 달리 꽃을 가리킬 적에는 ‘꽃봉오리’라고만 썼다고 해요. 1940년대를 지나고 1960년대를 거치며 표준말에서 멧자락을 가리킬 때에는 ‘봉우리’로 적고, 꽃을 가리킬 적에는 ‘봉오리’로 적는 틀이 굳어졌다고 합니다. ‘몽우리’와 ‘몽오리’도 표준말을 살피며 ‘몽우리’로만 적기로 했대요. 아직 ‘-우리’와 ‘-오리’가 어떤 뜻을 나타내는지 밝히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 집 두 아이는 나하고 옆지기가 꽃봉오리·꽃몽우리·꽃망울을 어떻게 느끼며 살아가는가 하는 이야기를 물려받아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나는 아이들한테 ‘국어사전 말풀이’로 말을 가르치지 않아요. 가만히 마음소리에 귀를 기울인 다음, 마음으로 느끼는 이야기로 말을 들려줍니다.
꽃을 생각하는 동안 내 마음속에 어여쁜 꽃말이 자랍니다. 꽃을 헤아리면서 내 가슴속에 즐거운 꽃그림이 태어납니다. 꽃을 이야기하니 어느새 내 꿈속에 즐거운 이야기 한 자락이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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