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내
가시내라는 말은 대부분의 한국어 사전에 올라 있지 않다. 그러나 가시내의 뜻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두 다 알다시피 가시내는 계집애의 전라도 사투리다. 그리고 아마 그 말의 얕은 뿌리는 아내나 계집붙이를 뜻했던 중세 한국어 갓 또는 가시에 박혀 있을 것이다. 아내의 어머니 즉 장모를 속되게 이르는 가시어미나, 아내의 아버지 즉 장인을 속되게 이르는 가시아비, 또 지어미와 지아비 즉 부부를 속되게 이르는 가시버시라는 현대어에 갓 또는 가시라는 중세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중세의 흔적을 몸뚱어리에 새기고 있는 그 현대어들이 속된 느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언어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멸찬 문명이 뒷배를 보고 있는 중국어 옆에서 가늘고 질긴 목숨을 이어왔던 어떤 변두리 언어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일 것이다.
아주 소박한 민간 어원의 수준에서라면 갓인 아이 즉 계집붙이에 속하는 아이라고 분석할 수 있을 가시내도, 그것의 표준어인 계집애처럼, 어떤 맥락에서는 약간 속된 울림을 지닌다. 서로 스스럼없는 사이에나 쓸 수 있는 말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그 속됨의 정도는, 내 언어 감각으로는, 계집애의 경우보다 약하다. 그것은 전라도 것이 서울 것보다 윗자리에 앉아 있는 아주 희귀한 경우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다시피, 전라도는 속됨과 천스러움의 상징이다. 모든 더러움과 상스러움과 너절함과 잡스러움과 능갈맞음과 간악무도함이 전라도라는 쓰레기통에, 차라리 똥통에 처박혀 있다. 좀 멋부려 얘기하면 전라도라는 판도라의 상자에 담겨 있다. 게다가 그 상자 속엔 희망도 없다.
그곳은 문기文氣의 땅이 아니라 색기色氣의 땅이다. 그곳은 추로鄒魯의 향鄕이 아니다. 질박質朴과 숭문崇文과 신의信義의 향이 아니다. 그곳은 배덕背德과 사음邪淫과 황잡荒雜의 향이다. 오사리잡놈과 불여우의 땅이며, 불상놈, 판상놈, 초친놈, 건설방, 걸레부정, 단거리서방의 땅이며, 일패·이패·삼패의 덥추와 더벅머리와 논다니와 계명워리와 달첩의 땅이다. 놈팡이와 갈보와 뚜쟁이와 거사의 땅이다. 온갖 개잡년들, 개잡놈들의 땅이다.
전라도를 예향藝鄕이라고 치켜세우는 외지 사람들의 말투에서 나는 광대나 사당이나 은근짜나 통지기년을 짐짓 이해의 눈길로 바라보는 여염집 선남선녀의 덜떨어진 도덕적 우월감을 읽는다: “예藝란 곧 음淫이다, 음音이란 곧 음淫이다.” 그걸 납득하기 위해서 공자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 내가 따르는 어느 소설가가 내게 가르쳐주기를, 몰리에르 시대의 연극배우들은 대체로 직업적 창녀였단다. 배우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그때와는 견줄 수 없을 만큼 높아진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손보기와 감탕질은 그들 생업의 본질적 부분이다.
예술이란 곧 잡년·잡놈들의 너절한 기예다, 라고 굳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전라도를 예향이라고 치켜세우는 외지 사람들의 말투에서 예술이란 곧 잡년·잡놈들의 기예다, 라는 함축이 읽힌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라도 사람으로 반생을 살아온 내가 지니고 있는 지나친 자의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전라도에서 9천 킬로미터를 떨어져 살면서도 훌훌 떨쳐낼 수 없는 그 자의식.
전라도 음식의 맛깔스러움을 얘기하는 외지 사람들의 말투에서도 나는 그 맛깔스러움을 전라도적 성정의 비루함으로 이어나갈 채비를 차리고 있는 해묵은 <특질고特質攷>의 억양법을 읽는다. 배은과 변덕과 시치미의 상징으로서의 그 맛깔스러움. 그것 역시, 전라도 사람으로 살아온 내가 떨쳐버릴 수 없는 자의식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삶이 다하는 날까지 내 사지에 끈끈하게 들러붙어 있을 그 자의식.
지난날, 전라도를 아랫녘이라고 불렀던 것은 여러모로 마땅한 바가 있다. 바로 그곳이야말로 허튼 계집의 땅이고, 노는 계집의 땅이며, 화냥년의 땅이니까. 요컨대 모든 아랫녘 장수들의 땅이니까. 전라도말 가시내는, 그러니까, 계집붙이 가운데 그런 천한 것들의 이름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묘하다. 그런데도, 적어도 내 느낌으로는, 가시내라는 말에는 계집애라는 말 정도의 천기賤氣도 없으니 말이다.
계집애라는 말에서 내가 말 많고 되바라진 서울 까투리의 이미지를 얻는 데 견주어, 가시내라는 말은 내게 어떤 새침데기의 이미지를 준다. 그때의 새침데기는, 새침데기 골로 빠진다는 속담이 가리키는, 겉으로는 새치름하되 속은 엉뚱한, 그러니까 맹랑한 계집애가 아니다. 그때의 새침데기는 수줍음 속에 수억 년의 처녀를 간직하고 있는 알짜배기 요조숙녀다. 그러니까, 가시내라는 전라도말에는, 내 느낌으로는, 계집애라는 서울말에보다 더 풋풋한 기운이, 더 싱그러운 풋기운이 배어 있다. 되바라진 가시내도 없지는 않겠지만 가시내의 사랑은 대체로 풋사랑이다.
가시내의 풋사랑, 벼락같은 정겨움을 뒷맛으로 남기는 사랑, 산뜻한 감칠맛의 사랑, 어색한 입맞춤의 뒷맛이 혀에 감기듯 남아 있는 그런 풋풋한 사랑, 그러나 동시에 갑이별이 예정돼 있는 사랑, 한때는 청순가련했을 흑산도 은근짜들의 그 까마득한 첫사랑, 세상 모든 논다니들의 아득한 풋사랑, 마침내는 판도라의 사랑, 내 누이의 비련悲戀
가시리
지은이와 지은 연대가 알려지지 않은 고려 시대의 속요. 후렴구를 제쳐놓은 전문全文은 모두 다 알다시피 이렇다.
이 노래의 제목이기도 한 첫 행의 첫 낱말 가시리는 그 뒤에 이어지는 가시리잇고의 생략형이다. 그러므로, 가시렵니까 또는 가시겠습니까의 뜻이다. 이 노래를 현대어로 옮기면 모두 다 알다시피 이렇다.
가시렵니까 가시렵니까
버리고 가시렵니까
나더러는 어찌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렵니까
붙잡아 둘 일이지만
시틋하면 아니 올세라
설운 님 보내옵나니
가시자마자 돌아서 오소서
무애 양주동의 호들갑스러운 찬탄이 아니더라도 〈가시리〉는 한국 문학사가 낳은 가장 절절하고 빼어난 연애시 가운데 하나다. 빼어난 연애시들이 대개 이별의 시이듯이, 〈가시리〉도 이별의 노래다. 통속적인 해석에 따르면 이 시의 화자話者는 여자다. 이 노래에서 도드라지는 애소哀訴와 원망과 설움과 체념 따위의 정조情調가 여성적 정서라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해석일 것이다. 전투적인 여성해방운동가들에겐 이 시의 패배주의가 혐오스러울지도 모른다. 그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마디하자면, 나는 이 시의 화자가 남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애소와 원망과 설움과 체념 따위의 정조는 딱히 여성적인 정서라기보다는 차라리 사랑의 정서다. 연애란 그런 것이다.
각성바지
어머니는 같으나 아버지는 각각 다른 형제. 즉 이부異父형제. 물론 여기서 형제라는 말이 성적性的 표지의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형제라는 말은 성적으로 중성이라는 말이다. 그 형제란 자매일 수도 있고 오누이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각성받이라고 쓰지 않고 각성바지라고 쓰는 것이 묘하다. 각성바지의 바지는 분명히 동사 받다에서 나왔을 테니 하는 말이다. 개가해온 아내가 데리고 들어온 자식을 뜻하는 덤받이의 받이나, 버려진 것을 거두어 기른 아이를 뜻하는 개구멍받이의 받이가 그렇듯. 물론, 한글맞춤법을 정한 학자님들께서 어련히 이것저것 다 따져보았을까만.
각성바지를 각아비자식이라고도 한다. 각성바지는 자기들 어머니의 해방 문서다. 그것은 아스라한 삼첩 ·쥐라·백악의 화석이자 새로운 모계사회의 징후다. 그것은 나부끼는 깃발이다. 청마의 잘 알려진 시구를 훔치자면,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해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본문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