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같이
감옥에서 철창 안에서
새를 길러본 적이 있는 사람이면 알 것이다
날개 없는 인간의 손으로 키워지고 길들여진 새는
어미 새가 되어서도 날 줄은 알되
창밖에 구만리장천이 있는 줄은 모른다는 것을
오늘도 나는 그동안
심심파적으로 길러온 머슴새를
마침 해방의 날이고 해서 밖으로 날려보냈다
그런데 녀석은 담 밑의 키 작은 측백나무에서 안절부절 못하더니
이윽고 땅으로 내려오더니 거기서도
선 채로 두려움에 떨더니
그만 철창 안으로 들어와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 옆에서 겨우 안심하고
내가 잡아준 파리며 거미 새끼를 받아먹으며
기운을 내기도 하고 재롱까지 부리는 것이었다
이런 일을 나는 그동안 육년 동안
몇 번이고 했는지 모른다
창밖에 까치가 와서 우는 설날 아침이나
자유의 높이를 재기라도 하듯 노고지리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봄날의 오후에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새를 내보내고는 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녀석은 철창 안으로 들어와버렸고
내 곁에서 내 좁은 손 안에서 오히려 안심해하고
얄밉게도 재롱까지 피우는 것이었다
바보같이 바보같이 창밖에 구만리장천이 있는 줄도 모르고
이렇게 산단다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
감옥에서는 불도 안 땐다던데 춥지는 않느냐
느그 아부지가 어제 지서에 끌려갔단다
삼년 전에 미국 송아지를 사서
90만원엔가 몇만원에 사서
온 식구들이 자식처럼 키워서
엊그제 장날에 쇠전에 내놓았는데
글쎄 그것을 40만원밖에 부르지 않더란다
그래서 성미가 불같은 느그 아부지가
소 어딘가를 쥐알렸는가본데
그게 그만 탈이 되어 묻어버리기가 뭣해서
그걸 마을 사람들끼리 나눠 먹었는데
그게 밀도살인가 뭔가 하는 죄가 된다면서
느그 아부지는 지서로 끌려가고......
이렇게 산단다 우리는
권양에게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당신의 이름도 당신의 얼굴도 알지 못합니다
내가 다만 아는 것은 당신에 대해서 아는 것은
당신의 성이 권씨라는 것
대학생이라는 것 위장취업잔가 뭔가라는 것
그런 당신이 노동자와 아픔을 나눠 가졌다는 것
바로 그 때문에 당신이
착취계급의 폭압기관에 끌려가 성고문을 당했다는 것 그뿐입니다
그런데 권양 내가 알기로는 이 알량한 자유대한에서
당신이 성고문을 당한 최초의 여성은 아닙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처녀와 아이 밴 어머니들이
착취계급의 고문실에서 육체의 학대와 수모를 당했습니다
벌거벗기를 강요당하고 그것을 거부하면
빨갱이 딸도 부끄러워할 줄 안다며 조롱당하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채 젖가슴을 희롱당하고
수갑을 뒤로 채인 채 고문실의 칠성판에서 능욕당하고
그곳에 봉이 박혀 입을 벌린 채 숨을 거두었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집에 숨어든 유격대원에게
찬밥 한덩이 치마 밑으로 건네줬다 해서 그랬습니다
어떤 소녀는 노동운동하는 오빠의 행적을 대지 않는다 해서 그랬습니다
어떤 처녀는 선두에 서서 자유 만세를 불렀다 해서 그랬습니다
독재를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외쳤다 해서
불의에 저항하고 착취에 반대하여 주먹을 치켜들었다 해서 그랬습니다
질서와 안보의 이름으로 용공과 좌경과 반공의 이름으로
아니 자유민주주의 이름으로 그랬습니다
권양 당신은 이 기막힌 대한민국에서
성고문을 당한 최초의 여성은 아니지만
최초로 성고문을 폭로한 여성입니다
나는 알았습니다 당신을 통해서 용기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자기희생이야말로 모든 용기의 으뜸이라는 것을
나는 또한 당신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착취계급의 재산과 특권을 지켜주고 강화해주는 것은
한줌도 안되는 그들이 수천 수백만의 민중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공장이며 기계며 토지며 은행이며 일체의 생산수단을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신문사며 방송국이며 학교며 교회며 일체의 대중매체와 문화기관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이 경찰과 군대와 재판소와 감옥 등 국가의 폭력기관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는 사람은
체포되고 투옥되어 고문실에서 또는 감옥에서
물고문 전기고문으로 박종철 군처럼 죽거나
권양처럼 성고문으로 치욕과 수모를 당하거나
나처럼 감옥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공포감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시가
나는 나의 시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이나 끌기 위해
최신 유행의 의상 걸치기에 급급해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바라지 않는다 나의 시가
생활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순수의 꽃으로 서가에 꽂혀
호사가의 장식품이 되는 것을
나는 또한 바라지 않는다 자유를 위한 싸움에서
형제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데 나의 시가
한과 슬픔의 넋두리로
설움 깊은 사람 더욱 서럽게 하는 것을
나는 바란다 총검의 그늘에 가위눌린
한낮의 태양 아래서 나의 시가
탄압의 눈을 피해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기를
미처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배부른 자들의 도구가 되어 혹사당하는 이들의 손에 건네져
깊은 밤 노동의 피곤한 눈들에서 빛나기를 한자 한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그들이 나의 시구를 소리 내어 읽을 때마다
뜨거운 어떤 것이 그들의 목젖까지 차올라
각성의 눈물로 흐르기도 하고
누르지 못할 노여움이 그들의 가슴에서 터져
싸움의 주먹을 불끈 쥐게 하기를
나는 또한 바라 마지않는다 나의 시가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노래가 되고
캄캄한 밤의 귓가에서 밝아지기를
사이사이 이랑 사이 고랑을 타고
쟁기질하는 농부의 들녘에서 울려퍼지기를
때로는 나의 시가 탄광의 굴속에 묻혀 있다가
때로는 나의 시가 공장의 굴뚝에 숨어 있다가
때를 만나면 이제야 굴욕의 침묵을 깨고
들고일어서는 봉기의 창끝이 되기를
시인은 모름지기
공원이나 학교나 교회
도시의 네거리 같은 데서
흔해빠진 것이 동상이다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고 나 이날 이때까지
왕이라든가 순교자라든가 선비라든가
또 무슨무슨 장군이라든가 하는 것들의
수염 앞에서
칼 앞에서
책 앞에서
가던 길 멈추고 눈을 내리깐 적 없고
고개 들어 우러러본 적 없다
그들이 잘나고 못나고 해서가 아니다
내가 오만해서도 아니다
시인은 그따위 권위 앞에서
머리를 수그린다거나 허리를 굽혀서는 안되는 것이다
모름지기 시인이 다소곳해야 할 것은
삶인 것이다
파란만장한 삶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돌아와 마을 어귀 같은 데에
늙은 상수리나무로 서 있는
주름살과 상처 자국투성이의 기구한 삶 앞에서
다소곳하게 서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도둑놈의 삶일지라도
그것이 비록 패배한 전사의 삶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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