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책과 종교개혁
책을 사보는 고객층이 늘어가고 고대의 작품들과 그 번역본이 양산되며 새로운 문학 장르가 구축되는 한편, 한쪽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종교서와 교훈서가 제작되었다. 16세기에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본받아』, 『황금 전설』 같은 책의 출간이 이어졌고, 성인들의 생애를 다룬 작품이나 교훈성이 강한 카토 이야기 등이 계속해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구원의 거울』이나 적그리스도의 생애를 다룬 이야기들의 인기 역시 마찬가지로 여전했다. 헨리 수소, 게르손Gerson, 니더의 작품들도 꾸준한 인기를 보였고, 이전 세기에 그토록 인기가 높았던 감성적 신학 작품들도 여전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새로운 설교사의 글이 덧붙여진 설교집 또한 계속해서 사람들의 손을 떠나지 않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성 베르나르 등을 중심으로 한 교부들의 저서도 계속 읽혔다. 오컴, 피에르 드 라 팔뤼Pierre de la Palud, 기욤 뒤랑, 둔스 스코투스, 뷔리당 등과 같은 유명 스콜라 철학자들의 기념비적인 저서들도 지속적으로 출간되었고, 장 메르Jean Mair, 타르타레투스Tartaretus, 브리코Bricot 등 좀더 최근 작가들의 저서도 나왔다. 이들 저서는 1520년까지 파리에서 앞다투어 출간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에라스무스, 르페브르 등의 영향으로 새로운 종교문학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렇듯 16세기 초에도 여전히 종교서의 출간이 이어졌으며, 어쩌면 15세기보다 더 많은 양이 인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에서도 살펴봤듯이, 이 시기에는 인쇄물의 양이 계속해서 늘어가는 가운데 전체 출판물에서 종교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 줄어들었다. 결국 종교서는 비종교서의 상황과는 달리 이전 세기보다 더 넓은 독자층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물론 르페브르의 저서와 그 번역본, 사도 바울의 서신집, 에라스무스의 저서 등은 여전히 찾는 사람이 많았다. 재판본의 수만 보더라도 이 같은 책들이 얼마나 폭넓게 배포되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1520년 무렵까지 종교서의 독자층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으며, 종교계에 몸담은 문인들과 인문주의자들만이 종교서를 찾아봤다.
그런데 1517년 독일에서 종교문제가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오르며 뜨겁게 달궈지자 상황이 곧 달라진다. 오늘날 언론 홍보전이라고 부르는 양상도 처음으로 등장했으며, 여론을 장악하고 이를 자극하려는 사람들에게 인쇄산업이 어떤 가능성을 부여해줄 수 있는지도 드러났다.
물론 종교개혁의 태동과 확산에 있어 책의 역할을 과장되게 해석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심지어 선전활동에 치중한 설교자의 역할도 지나칠 정도로 크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이 책에서는 종교개혁이 인쇄술 발명의 결과로 나타난 사건이라는 우스운 주장을 펴지 않을 생각이다. 아마 책 한 권만으로는 그 누구도 결코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책에 사람을 설득시키는 힘은 없더라도, 책이라는 것은 어쨌든 사람이 갖고 있는 신념을 눈에 보이는 실체로 보여주고, 특정 사상이 반영되어 있는 책을 소유함으로써 그 사람의 생각은 물리적으로 구체화된다. 책은 이미 확신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논거를 제공해주는 도구로 활용되고, 이들이 스스로의 확신과 신념을 더욱 심화시키고 구체화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아울러 이들이 논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주는 요소들도 제공한다. 그뿐만 아니라 책에는 망설이던 사람들까지도 함께 엮어 가담시켜주는 힘이 있다. 아마 이 모든 이유 때문에 16세기 신교의 발전에 있어 책이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 아닐까? 신교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구교 사회에는 여러 이교들이 존재했다. 가톨릭교회는 이 같은 이단 종교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고, 이들과의 싸움에서 언제나 승리해온 입장이었다. 적어도 서방세계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후스파 같은 당시의 일부 이단 세력이 인쇄술이라는 막강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그동안 프랑스의 중세와 고대를 연구해온 사학자 앙리 오제와 더불어 고민을 나눠볼 수 있을 듯하다. 신교는 로마 가톨릭을 공격하는 입장이었고, 이에 뒤이어 자신들의 새로운 교리를 전파해야 했으며 신교의 바탕이 되는 경전의 내용을 자국어로 기술해 사람들 각자의 손에 쥐어주어야 한다는 당위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루터와 칼뱅은 인쇄기라는 새로운 기계를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오제가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신교 관련서의 속표지 삽화에서, 종교개혁 세력이 대중에게 구원의 명약을 나눠줄 수 있는 이 기계를, 귀한 와인을 뽑아내는 압착기에 비교한 것도 괜한 일은 아니었다.”
인쇄술이 종교개혁의 발전에서 이 같은 역할을 맡기 위한 환경은 이미 진작부터 조성되어 있었다. 목판인쇄공들이 활약하던 시기부터 종교화가 대량으로 유포되었고, 앞에서도 살펴봤듯이 간단한 종교서, 특히 기도서의 보급이 대거 이루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성서도 널리 확산되었고, 특히 통속어로 쓰인 성서의 보급도 종종 이루어졌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이미 고지高地독일어로 쓰인 성서의 판본만 열아홉 개였고, 르페브르 데타플의 번역본이 나오기 이전에 프랑스어로 번역된 구약성서는 (완간본이 아닌 부분 발췌본이기는 했어도) 24개의 판본이 존재했다. 한편에서는 인쇄술이 성서연구를 좀더 수월하게 해주며 이에 불길을 붙여주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인쇄기가 좀더 폭넓은 대중을 상대로 한 벽보와 유인물을 양산했다. 그 당시 만들어졌던 선전홍보물은 사실 오늘날 신문과 잡지의 전신이다. 현재 이에 대한 연구는 쉽지 않은 상황인데, 이런 종류의 유인물이 제대로 보관되어 있는 경우도 별로 없고, 더군다나 그 중요성도 과소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인쇄술을 이용해 제작된 벽보와 격문은 알다시피 인쇄된 책보다 그 역사가 더 길다. 이 같은 선전물은 대개 당시의 주요 이슈와 현안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동시에 15세기부터는 각종 홍보물이 늘어났는데, 이를 통해 혜성이 지나갔다는 소식을 알리거나 축일에 대해 기술하고, 어떤 군주가 한 도시에 엄숙하게 입성했다는 내용을 전하며, 전투에서의 상황을 보고했다. 이 같은 유인물 덕분에 프랑스 사람들은 이탈리아에서 거둔 왕의 업적에 대해 알게 되고 군대의 승리 소식을 접했으며, 독일에서는 황제가 선출되는 급박한 전개과정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 종교개혁 시기에 발행된 수많은 ‘비방・풍자성 내용의 소책자Flugschriften'가 배포되기 위한 사전 준비는 이미 끝마쳐진 상태였다.
일반인들이 종교개혁가의 활동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이들이 지속시키는 종교적 논란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되었던 것도, 그리고 신교의 세력이 어느 정도로 확장되었으며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들은 무엇인지 알게 되었던 것도 대개는 이런 종류의 유인물을 통해서였다. 가령 오늘날의 포스터에 해당하는 벽보의 역할을 떠올려보면, 그 당시 인쇄술이 어떤 작용을 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사실 종교개혁과 관련해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 발단이 되었던 것은 바로 벽보였다. 루터가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반박하려 했을 때, 그는 한 번 들으면 그때뿐인 말로 하는 설교가 아니라 벽보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시작한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아우구스티누스 성당 정문에다 면죄부 판매에 대한 반박문을 벽보로 붙이고, 반박문의 내용은 독일어로 간략하게 요약되어 벽보 형태로 인쇄된 뒤 독일 전역으로 배포되었고, 불과 2주 만에 그 내용이 도처에 알려졌다. 몇 년 후인 1521년에 루터가 보름스 의회의 청문회에 소환되어 황제군의 뒤를 따라 독일을 지날 때, 그의 책을 불태우라는 카를 5세의 칙령이 도시마다 벽보로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루터는 마음이 동요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반인들이 금서나 불온서적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도 바로 그러한 벽보를 통해서였다. 그에 따라 이 사실을 안 군중은 서둘러 이를 입수하려 노력했다. 이렇게 발행금지 처분을 받으면 때로 벽보의 형태로 이에 대한 반격이 이루어졌다. 1524~1525년 프랑스 모Meaux에서는 실로 벽보 전쟁이 벌어진다. 브리소네Bricnnet 추기경을 루터파라고 비난하는 내용이 담긴 종이가 도심 벽에 나붙었고, 이에 브리소네는 1524년 성당의 벽과 도시로 들어오는 관문에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선처를 베풀어주었다는 내용의 칙서를 붙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교황의 칙서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교황을 적그리스도라며 비난하는 내용의 벽보를 바꿔 붙인다. 곧이어 1528년 1월 13일에는 클레멘스 7세의 칙서를 가장한 벽보가 성당 벽에 붙으며 교황에 대한 최고의 모욕이 가해진다. 이 거짓 칙서에 따르면 교황이 사람들에게 루터의 책을 읽고 또 읽도록 지시・허용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의 작은 소동은 1534년의 저 유명한 ‘격문 사건’으로 이어지는데, 피에르 드 뱅글이 스위스 뇌샤텔에서 인쇄한 미사 반대 벽보가 나붙은 것이다. 심지어 왕의 침전 문 앞까지 벽보가 걸릴 정도였다. 이 같은 도발에 대해 어떤 탄압이 가해졌으며, 인쇄술과 관련해 프랑수아 1세가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익히 알려져 있다(검열과 단속이 강화되고 인쇄업자와 출판업자들이 화형에 처해진 것이다).
이 모든 벽보는 그 당시 종교개혁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가늠하게 해주는 가시적 지표가 된다. 벽보는 벽에도 붙었고, 성당 입구와 집 대문에도 붙었으며, 교황을 모욕하거나 미사에 반대하는 내용인 경우에는 밤에 불법으로 비밀리에 붙여놓기도 했고, 이단을 막기 위한 조치를 알리기 위한 정식 공문으로 벽보가 붙기도 했다. 불온서적을 비난하는 공문도 있었고, 금서조치를 해제하는 공문도 있었다. 이 같은 벽보를 읽으면서 대중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대충 짐작하며 관망했다. 하지만 뒤로는 막대한 양의 ‘불온’서적과 이단서가 유포되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이 같은 책들이 어떻게 확산되었는지 알아보자.
루터는 면죄부에 대한 자신의 반박문을 사람들이 그토록 환영할 줄 몰랐다. 이런 글에 목말라하는 대중을 보면서 루터는 사람들이 저마다 쉬쉬하며 키워오던 그 욕구를 공개적으로 표출시켜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신호탄, 단 한 명의 선구자를 독일 지역 모두가 기다려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쏘아 올려진 신호탄을 전국으로 확산시켜주는 역할을 맡은 게 바로 인쇄술이었다. 학자들에게만 자신의 글이 읽히는 게 싫었던 울리히 폰 후텐은 자신의 대화집 『제1의 열기Febris prima』와 『제2의 열기Febris secunda』(1519~1520)를 독일어로 번역 출간하고, 루터는 자신을 공격하는 신학자들에게는 라틴어로 응하면서도, 『독일의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1520)이라는 공개서한 같은 글은 독일어로 기술해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읽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설교집과 교화서, 논쟁집 또한 자국의 언어로 여러 편을 제작한다. 비텐베르크의 인쇄기에서는 가볍고 쉽게 들춰볼 수 있는 책들이 활판인쇄술을 이용한 깔끔한 판본으로 제작되어 나왔으며, 이 책들은 독일 전역에서 다시 인쇄되곤 했다. 이제 누구나 분명하게 읽어낼 수 있는 책 제목은 독일식의 테두리 장식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책표지에 삽입되었고, 책이 만들어진 날짜와 출판업자의 주소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라는 중요한 이름만큼은 책머리에 꼭 들어갔다. 대개는 루터의 판화 초상화가 함께 실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보고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 독일 전역에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른다. 기습적으로 뿌려지는 비방적 성격의 소책자들도 점차 많아졌는데, 1520~1530년 기간 동안 배포된 이 같은 소책자의 수는 약 630개 정도로 집계되었다. 게다가 인쇄술뿐만 아니라 삽화나 희화적 그림까지 모든 수단과 방법이 다 동원되었다. 교황과 사제를 조롱하기 위해 ‘얼간이 교황’이라는 의미로 교황을 당나귀에 빗대었고, 사제들은 게으르고 멍청한 사람을 가리키는 송아지에 비유되었다. 『미치광이 루터교도Von dem großen Lutherischen Narren』를 쓴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무르너Murner는 그 이름이 거세하지 않은 수코양이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고양이 두상을 한 사제로 표현되었다. 이와 동시에 독일어 인쇄본의 비중도 계속 증가했다. 마그데부르크, 로스토크, 함부르크, 비텐베르크, 쾰른 등지에서 저지독일어로 인쇄된 도서 종수는 1501~1510년 사이에 70권, 1511~1520년 사이에 98권 수준이었으나, 이어 1521년과 1530년 사이에는 284권으로 늘어났고, 그중 232권이 교회와 종교 관련 내용이었으며, 1531년과 1540년 사이에는 종교 관련서 180권을 포함해 총 244권이 출간되었다. 특히 이 책들 가운데 루터의 저서가 많았는데, 1518년에서 1535년 사이에 판매된 독일어책 가운데 3분의 1 이상은 루터의 저서였다. 그 가운데 몇몇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는데, 설교집 『면죄부와 신의 은총Eyn Sermon von dem Ablas und Gnade』 같은 경우 1518년과 1520년 사이에 스무 차례 이상 재인쇄에 들어갔고, 1519년에 발간된 또 다른 설교집 『예수의 성스러운 고난에 관하여Von der Betrachtung Heiligen Leidens Christi』는 알려진 판본만 20여 개 정도다. 1519년 5월 24일자로 쓰인 베아투스 레나누스의 편지에 따르면, 루터의 『신학서Thelogie』와 『주기도문 해설Eyn kurtze form das Pater noster zu versteen unnd zu betten』은 책을 ‘사갔다’라는 표현보다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집어갔다’고 말하는 게 더 나을 정도였다고 한다. 루터의 유명한 공개서한 『독일의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은 1520년 8월 18일에 발표되었으나, 그달 25일부터 이미 재인쇄에 들어가야 했다. 불과 3주 만에 4,000부가 뿌려졌으며, 2년간 열세 차례 재출간되었다. 『기독교인의 자유에 관하여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는 1526년 이전에 나온 것만 18개 판본이 집계되었다. 1522년 한 해 동안 나온 루터의 유명한 세 저서와 관련한 수치를 보더라도 사람들이 얼마나 루터의 책을 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죄를 사하는 법에 관하여Von Menschenlehre zu Meiden』는 12개 판본이 집계되었으며, 『결혼에 관한 서Ain Sermon von dem Ehelichen stand』 판본이 11개, 기도서 『침대에서 읽는 작은 책Betbuhlein』 판본이 25개였으며, 1545년까지 나온 것만 해도 이 정도였다.
이제 독일 지역 인쇄기는 대부분 종교개혁서 편찬에 투입된다. 그 시대의 여러 자산가들과 마찬가지로 인쇄업자들도 대개는 기존의 교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들은 인문주의자나 교양인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해오면서 새로운 사상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대개 가톨릭 책자의 발행은 꺼리는 반면, 후텐이나 루터, 멜란히톤의 저서를 내는 데는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 이들이 어떤 신념을 갖고 그와 같이 행동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호기심에서 그와 같이 움직인 것은 사실이다. 이 시기 모든 것은 루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루터에 반대하는 이들이 아무리 루터를 공격해봤자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르너가 쓴 『미치광이 루터교도』의 반응도 별로 신통치 않았고, 에라스무스의 저서처럼 그때까지만 해도 다들 벌떼같이 달려들던 인기도서의 판매 역시 점차 줄어들었다. 반대로 루터 같은 경우는 인쇄업자들에게 있어 소위 ‘돈이 되는 작가’였다. 비텐베르크의 인쇄업자 멜키오어 로터와 한스 루프트는 이 도시에서 가장 돈 많고 추앙받는 인사였다. 한스 루프트는 시장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스트라스부르의 크노블로흐 같은 경우는 가톨릭 기관에도 어느 정도 너그러운 입장이었으나, 이제는 인쇄소를 아예 루터 선전물 전문 작업소로 탈바꿈시킨다. 괴체Goetze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독일 인쇄소 70여 곳 가운데 최소 45군데가 루터의 저서를 작업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비텐베르크는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인쇄소가 루터의 저서를 뽑아냈고, 스트라스부르에서는 여덟 곳 가운데 여섯 개 인쇄소가 루터의 책을 인쇄했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루터의 저서를 내는 곳이 아홉 개 인쇄소인 데 반해 가톨릭 관련 도서를 내는 곳은 세 군데뿐이었다. 세속 정부가 여전히 구교에 충실한 도시에서조차 몇 가지 주의사항만 지키면 별다른 제약 없이 통상적으로 종교개혁서가 출간될 수 있었다. 프랑스 아그노에서 작업하던 세처는 멜란히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의 저서를 출간하고, 루터의 저서나 부겐하겐Bugenhagen, 브렌츠Brenz, 요한 아그리콜라Johann Agricola, 우르바누스 레지우스Urbanus Rhegius 등의 소책자도 인쇄했다. 상서국에서는 1524년과 1526년 두 차례만 미온적이고 소극적으로 대처했을 뿐 별다른 조치를 가하지 않았고, 그는 라틴어로 책을 출간해 수출까지 하게 된다. 심지어 세처는 그 가운데 몇 권에 라틴어로 그럴 듯하게 서문까지 집어넣으며 로마 교회를 빗대어 ‘적그리스도의 유대교회당’을 규탄한다. 1531년 그가 재침례파(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으며 자각적인 신앙고백을 중시하는 신교의 한 종파;옮긴이)의 비방문을 독일어로 출간했을 때야 비로소 가톨릭 당국은 그의 책을 압수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세처는 1537년에 다시 미셸 세르베가 쓴 『삼위일체론의 오류De Trinitatis erroribus』를 보란 듯이 출간한다.
물론 어디에서나 이렇게 관대한 것은 아니었다. 1527년 뉘른베르크의 한스 굴덴룬트Hans Guldenrund는 교황권에 반하는 저서를 출간한 혐의로 기소되고, 특히 작센 지방의 게오르게스 선제후는 자기 지역 안에서 순종하지 않는 인쇄업자는 용인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결과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여러 인쇄업자들이 라이프치히를 버리고 떠났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가톨릭 관련서만 출간이 허용되는 이곳에서는 돈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콥 타너Jacob Thanner가 끝까지 라이프치히에 남아 있다가 결국 빚 때문에 감옥신세를 져야 했던 것도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면 이보다 약빨랐던 볼프강 스퇴켈Wolfgang Stokel은 선제후가 다스리는 지역을 벗어나서 인쇄소를 차리고, 그 덕에 스퇴켈은 루터의 저서를 인쇄하며 사업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서적행상들은 루터의 저서가 금지된 지역으로 이 책들을 유입시키는 일을 맡았고 시골 지역에도 루터의 종교개혁서를 유포했다. 그런데 종교개혁 세력이 장악한 지역에서 신교 당국은 보름스 의회에서의 결정을 그 나름대로 준수하게 만들었으며, 대개는 가톨릭 당국보다 더 여기에 공을 들였다. 처음에야 보름스 의회가 루터와 대척점에 서 있었지만, 의회에서 내려지는 결정들은 사실 명예훼손이나 중상모략이 우려되는 비방문의 출간만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교 당국은 구교의 소책자를 인쇄하는 업자들을 단속한다. 아우크스부르크의 지그문트 그림Sigmund Grim은 1526년 요한 폰 에크Johann von Eck의 『미사 제의Missa est sacrificium』를 출간한 혐의로 체포되고, 스트라스부르에서 유일하게 구교 편을 고수하고 있던 그뤼닝거는 에크, 에라스무스, 무르너 등의 저서를 계속해서 꿋꿋이 인쇄하다 1522년에 결국 『미치광이 루터교도』를 전부 압수당한다. 독일 전역에서 구교에 대해 적대적인 저서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구교를 옹호하는 입장의 책들은 정말 드물게 출간되었다. 브레슬라우의 아담 디온Adam Dyon, 마그데부르크의 한스 나프스Hans Knapps, 마인츠의 요한 쇠퍼 등 일부 인쇄업자들은 1522년까지 구교와 신교 양측 모두의 책을 동시에 출간했다. 이어 1526~1528년경, 게오르게스 작센공을 중심으로 라이프치히에서 가톨릭의 반격이 시작되고, 스위스의 프리부르에서도 신교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진다. 특히 로마 가톨릭의 오랜 보루인 잉골슈타트에서는 아우크스부르크 출신 인쇄업자 알렉산더 폰 바이센호른Alexander von Weissenhorn이 에크, 코클라에우스Cochlaeus와 대학의 신학자들과 만나 이들의 저서를 출간해주었고, 무르너는 1526년 루체른에 자신이 직접 인쇄소를 차리고 자신의 저서를 출간한다. 이외에도 종교개혁과 무관하게 일을 하던 인쇄업자들은 통상 당대의 현안과 별 관련이 없는 학술서와 신학서 등을 인쇄하는 수준에 만족하며 살아갔다.
풍자문이나 비방문을 담은 소책자와 종교개혁서는 서적행상들의 활약에 따라 지방 소도시로까지 퍼져나갔다. 인쇄술이 농민 봉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인쇄업자들 사이에서는 정치적・종교적 극단주의를 바탕으로 몇몇 과격한 투사들도 생겨난 듯하다. 가령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실반 오트마르Silvan Otmar의 교정사로 일하던 헤처Hetzer 같은 인물은 이 지역 침례교파의 수뇌부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직접 비방문까지 몇 개 집필할 정도였다. 스트라스부르와 로텐부르크에서 인쇄업자로 일하던 콘라트 케르너Conrad Kerner는 로텐부르크에서 이런저런 분란을 일으키다가 소요 선동자로 찍혀 무거운 벌금형에 처한다. 뉘른베르크에서는 재침례교파에 속했던 한 유명 인쇄업자가 1527년 화형에 처해진다. 따라서 칼슈타트Carlstadt로 대표되는 급진 종교개혁파와 재침례교파 그리고 이어 농민들은 신념에 따라서, 혹은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인쇄업자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나면서 루터의 종교개혁도 결정적인 전환기를 맞이한다. 이제 소책자의 발행은 점차 줄어들었고, 루터 본인도 논란이 될 만한 책은 전보다 더 적게 출간했다. 하지만 루터가 번역작업을 계속 이어가던 성서만큼은 엄청난 성공을 누렸다. 비텐베르크에서 멜키오어 로터가 인쇄한 신약성서는 세 개의 인쇄기를 전력 가동해 1522년 9월에 초판이 나오는데,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에도 몇 주 만에 초판이 다 소진되었다. 1522년과 1524년 사이의 2년간 비텐베르크에서는 열네 차례 신약성서의 재인쇄가 이루어지고 아우크스부르크, 바젤, 스트라스부르, 라이프치히 같은 다른 지역에서는 66회나 재인쇄에 들어갔다. 바젤의 아담 페트리 혼자서만 일곱 차례를 인쇄할 정도였다. 신교와 대척점에 서 있던 코클레우스는 “모든 사람이 이 번역본을 읽고, 그 내용을 달달 외울 정도다”라며 개탄한다. 1523년 처음 출간된 구약성서 번역도 비슷한 성공을 거둔다. 이제 누구나 손에 성서를 들고 다녔고, 종교문제가 대두되며 사람들의 열기가 더해져서 심지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조차도 주위에 더 똑똑한 친구들에게 성서의 내용을 설명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따라서 츠빙글리Zwingli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농민전쟁 시기 농민들의 집은 저마다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의 낭독회가 열리는 학교로 둔갑했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해서 지속된다. 멜란히톤과 그 친구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던 루터는 구약성서를 한 권씩 차례로 출간하고, 그의 신약성서는 1519년에서 1535년 사이에 고지독일어 번역본이 87권, 저지독일어 번역본이 19권 출간되었다. 루터가 구약성서를 부분별로 나누어 작업한 번역본은 곧 재인쇄에 들어가고, 뉘른베르크의 프리드리히 페이푸스Friedrich Peypus, 취리히의 프로샤우어Froschauer, 보름스의 페터 쇠퍼 등 다른 업자들이 이를 무단으로 복제한다. 1522년에서 1546년까지의 시기를 통틀어보면, 전체 혹은 부분 번역본이 모두 430여 개에 달했고, 그 가운데 일부 판본은 이례적으로 높은 간행 부수를 기록했다. 예를 들어 한스 헤르고트Hans Hergot 같은 경우, 1526년에 저자명 표기 없이 신약성서 위조본을 펴냈는데, 이때 그는 주저 없이 3,000부나 인쇄한다. 전례 없이 높은 발행 부수였다. 그리고 이 같은 기세는 16세기 후반에도 거의 사그라지지 않는다. 1546년에서 1580년 사이, 한스 루프트가 구약성서를 서른일곱 차례나 재출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니 1534년과 1574년 사이, 한스 루프트 혼자서만 성서를 10만 부나 판매했다던 크렐리우스Crellius의 말도 과장된 것은 아니었다. 같은 시기 프랑크푸르트에서도 부분 번역본을 제외한 성서 완역판만 24개 본이 출간된다. 따라서 전체 판매량을 집계해보면, 16세기 초반 동안 100만 부가 팔렸을 것으로 추정되며, 16세기 후반에는 판매량이 더 높았을 것이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봐도 이 정도면 그야말로 이례적인 성공에 해당한다. 성서 번역본은 루터의 저서 가운데 일부에 불과했고, 여기에 루터의 설교집이나 『독일의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 같은 논란서, 교리문답서를 더해줘야 하는데, 좀더 간편하게 들고 다니며 쉽게 읽을 수 있는 교리문답서 같은 경우는 더더욱 인기가 높았다. 따라서 루터의 저서들과 함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며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문학 장르가 처음으로 구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누구든 자국어로 성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할 것, 이는 루터가 인쇄 분야에 요구한 일 중 하나였다. 그리고 동시에 이는 프랑스 ‘성서학자’들이 추구하는 한 가지 목표이기도 했다. 개혁 성향의 브리소네 주교는 자신이 있던 도시 모Meaux로 르페브르 데타플을 불러들이고, 이에 데타플은 1521년부터 학업을 중단하고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성서의 번역작업을 시도한다. 이에 1523년부터 시몽 드 콜린을 통해 신약성서의 복음서, 사도서한, 사도행전 등이 나왔으며, 1524년 무렵에는 시편이 나왔고, 끝으로 1525년에는 『1년 52주 예배를 위한 사도서한과 사도행전EIres et Eangiles pour les cinquante-deux semaines de l'an』이 출간되었다. 기독교의 가장 기초적이고 대중적인 진리를 주지시키기 위한 교화서였다. 이로써 8절 판형과 16절 판형이라는 좀더 작은 판형에 담긴 성서는 프랑스에서 만인의 손에 쥐어질 수 있게 되었으며, 시기적으로 보면 거의 독일만큼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성서의 보급화였다. 1524년 여름, 브리소네는 설교보다 더 친근한 분위기로 공개 강독회를 주최한다. 매일 아침 한 시간씩 연사가 사람들 앞에서 성서의 글귀를 해석하는 식이었다. 좀더 학식이 높은 사람을 위해 시편을 해석하기도 한다. 첫 시도가 성공적으로 이어지자 이 같은 대중 강독회가 점차 확산된다. 네 명의 ‘낭독 수도사’가 주요 도시를 돌아다니며 성경을 읽어주고, 주교는 소양이 뛰어난 신자들의 교육을 완성시키고자 프랑스어로 된 복음서를 직접 배포시키고 복음서로 성무일과를 보도록 조언한다. 주교의 교육방식에 고무된 수제자 중 하나는 자신이 직접 인쇄소를 차리기로 마음먹고 인쇄에 필요한 기자재를 마련한다.
브리소네 주교의 이 같은 활동이 가져온 결과는 익히 알려져 있다. 모와 그 주변 지역에서 직조공이나 방직공 등 미천한 신분에 속하던 사람들이 복음서를 터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 쓰인 방식은 무리를 이루어 함께 성서를 읽고 해석하며 찬송가를 부르는 것으로, 이는 훗날 위그노 종교개혁 세력에게로 이어진다. 그렇게 하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까지도 좀더 쉽게 성서의 교리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든 독일에서든 개혁 교회의 시작은 이러했다. 종교적 분위기가 고조되며 종교에 대한 열기가 점점 더 심해지고, 이에 따라 르페브르의 번역본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확산된다. 곧이어 그의 번역본은 모와 파리에서뿐 아니라 리옹, 노르망디, 샹파뉴 지방으로까지 퍼져가고, 프로방스 지방과 도피네 알프스와 피에몬테 알프스의 발도파(피에르 발도Pierre Valdo가 창시한 성서 중심의 기독교 종파;옮긴이) 집에서까지 그의 번역본을 사용한 흔적이 발견된다. 이와 더불어 파리에서는 프랑스어로 된 기도집도 인쇄되기 시작한다.
이와 동시에 프랑스로도 루터의 저서가 유입된다. 그 당시 유럽에서는 이미 국제적으로 도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루터의 저서가 어떻게 그토록 빨리 프랑스로 흘러들어갔는지는 쉽게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파리와 리옹의 서적상들은 프랑크푸르트박람회 같은 곳에서 비텐베르크나 라이프치히 서적상들을 만났을 테고, 독일에서 그토록 시끌벅적했던 문제작 몇 권에 대해 이들이 아무런 이야기도 전하지 않았을 리 없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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