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불타는 곳에서는 결국 인간도 태워지고 만다
지금껏 나와 친하게 지낸 사람들의 특징을 가만히 따져 보니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해 태연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중에는, “내 장례식에는 말이야…”라며 죽음을 마치 하나의 이벤트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도 이들이 세상에서 좀 더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게 된 이유는, 죽음 따위야 뭐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태도 덕분일 것이다.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세상에서 이들의 발목을 잡을 일도 별로 없을 듯하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가 못해 마치 불문율인 듯 죽음에 대해서라면 감히 말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이생에서의 쾌락과 사치를 광적으로 추구하곤 하는데, 사실 그 배후에도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체하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기 위한 거짓과 허세가 늘어 갔고, 그 도피가 화려해질수록 죽음은 무언가 저 멀리 형이상학적인 세상의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마치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죽음에 대한 공포는 완전히 추방되지가 않는다. 아무리 인류가 지적인 발전을 이루더라도, 기술의 진보를 거듭하더라도 이 공포는 또다시 슬그머니 머리를 들고야 만다. 그러니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올해가 인류의 마지막일는지도 모른다는 가설들이나 여름철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지구 멸망을 다룬 재난 영화들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공포를 해결하지 못한 채로 발전해 온 문명은 오히려 인간을 오만하게 만들고 말았다는 점이다. 자기가 신적인 존재라고 착각하게 된 인간에게 죽음은 그만큼이나 이질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자신이 신이 아님을 깨닫는 것은 충격이었고 분노였다. 이 분노 때문에 거꾸로 전쟁을 일으키고 책을 불태우고 야만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심판의 도구로 불을 선택한 것에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 물론 불이 효율적이라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전시 효과가 대단해서였다. 불에 활활 타오르는 책들만큼 지옥의 무시무시한 광경을 더 실감나게 은유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책을 불태우는 인간들은 그렇게 스스로가 심판자라는 착각에 빠져 신의 놀음이라는 광기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
불은 일찍이 계몽의 아버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전해 준 것으로, 애초에 신이 아닌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던 힘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손에 불을 쥔 뒤로 세상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문명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해 나갔고, 도구와 무기와 건축물과 더불어 지적 능력도 향상되었다. 비로소 인간이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영장으로 등극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 불을 가지고 그토록 애써 쌓아올린 문명을 파괴하는 데에 사용하기도 했다. 파괴하는 데에도 불만큼이나 효과적인 도구가 없었던 것이다.
한때 헤겔이 강의했던 훔볼트대학 앞에서 또다시 야만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던 지식인들을 생각해 본다. 1933년 5월 10일 밤, 이곳에서는 대대적인 분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독일 제3제국의 선전장관이었던 괴벨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 대학 학생들은 2만 5천 권에 이르는 책들을 쌓아 놓고 그 위에 불을 지폈다. 그 불길 속으로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토마스 만, 브레히트, 슈테반 츠바이크의 책들이 던져지는 순간, 학생들이 “인간 영혼의 고상함을 위하여!”라고 외쳤다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사실은 당연했다.
그날 이후 많은 작가가 서둘러 독일을 떠나야 했다. 자신의 책이 불에 태워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프로이트는, 그나마 자기를 불태우지 않았으니 중세에 견주어 약간 진보한 셈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생각 또한 어긋나고 말았다. 그날 밤의 분서 사건은 그 뒤에 이어질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예고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책을 불태운 사건에 뒤이어 사람마저 불태우고 만 충격을 경험한 이들은 이제 기술에 대한, 인간 이성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졌다.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의 학살 이후에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시간은 흘렀고, 사람들은 또다시 시를 쓰고 읽고, 책을 쓰고 읽고 있다. 비록 죽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삶은 비참하리만큼 아름답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기술의 진보보다도 진보적인 성과이다. 같은 운명에 처한 인간에 대한 연민과 그 연민의 대상을 넓혀 나갈 수 있는 능력, 죽음을 분노가 아닌 너그러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함. 그것이 한번쯤 죽음 앞에서 처절한 고민을 거쳤던, 내 친근한 친구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자유였다.
이제 전쟁의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대학생들은 여느 젊은이들처럼 발랄하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우리는 그날 불속으로 던져졌던 책을 아직까지도 읽고 있다. 여든 해 전 야만적인 분서 사건이 있었던 훔볼트대학 도서관 앞 광장에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글이 새겨져 있다. “책이 불태워지는 곳에서는 언젠가 인간도 불태워지게 된다.”
영원히 책을 소유하는 법
사람이 평생 읽을 수 있는 책 분량에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읽을 수 있는 책보다 더 많은 책을 소유하려는 사람의 심리는 대체 무엇일까? 일단 가지고 있다 보면 언젠가는 읽게 되겠지, 지금 당장은 바빠서 읽지 못하지만 시간이 나면 읽어야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책을 소유하는 것이 곧 시간을 소유한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책을 모으는 것은 시간을 끌어모으는 것과도 같고, 많은 책은 곧 많은 시간이요, 무한한 시간은 영원한 삶이라는 등식들은 책을 통해서 죽음을 피해 보려는 저항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욕심을 지나치게 부리다가 도리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블라르Antoine Marie Henri Boulard. 18세기 프랑스 사람으로 변호사이자 언어학자이기도 한 그는 유난스러운 수집광으로 유명했다. 그는 아침마다 1미터 길이의 지팡이를 들고 집을 나섰고, 그 높이만큼의 책을 사들이지 않고는 되돌아오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곧 그의 집은 발 디딜 틈 없이 책으로 가득 차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는 오로지 책을 보관할 용도로 집 다섯 채를 더 구입했다. 그 집들 또한 이내 높이높이 쌓아 올린 책들로 가득 채워져서, 그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은 책더미를 건드리지 않도록 몹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한 번의 실수로 책무덤에 파묻힐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그의 수집병을 참다못한 부인이 한마디 했다. 이제 책을 더 사면 쫓아내 버릴 거야! 하지만 부인의 말은 그의 병을 오히려 악화시키고 말았다. 더는 책을 살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는 신경쇠약과 더불어 온몸이 고열로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에 놀란 부인은 남편에게 다시 책을 사도록 허락해 주었지만, 결국 그것이 더 큰 화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며칠 뒤, 블라르는 책을 잔뜩 사들고는 마차를 잡지 못해 땀을 뻘뻘 흘리며 집으로 왔는데, 이 일로 늑막염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결국, 그가 죽은 뒤 무려 80만 권이나 되는 그의 책들이 한꺼번에 시장으로 도로 밀려나오는 바람에, 그 뒤 5년 동안 책값이 급격히 떨어지는 일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그가 하도 열정적으로 책을 사 모으는 바람에 정작 그 어떤 책도 읽어 볼 시간이 없었다는 점이다.
책을 영원히 소유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던 사람으로는 프랑스의 극작가인 장 라신Jean Racine(1639-1699)이 있었다. 그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화가 있다. 그는 한때 엄격하기로 유명한 얀센 파 수도원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곳은 어찌나 규율이 엄격했던지 학생들이 읽는 책을 일일이 검사하곤 했다. 그러던 중 라신은 우연히 「테아게네스와 카리클로의 에티오피아 모험」이라는 책을 손에 넣게 되었고, 그 소설에 흠뻑 빠져 며칠 동안 품에 두고 읽었다. 그런데 우연히 그 책이 수도원 성직자의 눈에 띄게 되자, 라신은 이 일로 인해 곤혹을 겪게 된다.
성직자는 노발대발하며 그 책을 불 속으로 내던져 버리고 라신을 징계했지만, 그런 일을 겪고도 라신은 또다시 같은 책을 구해서 몰래 읽었다. 하지만 두 번째 책도 얼마 가지 못해 발각되어 곧장 불 속으로 향했다. 그러자 오기가 생긴 나머지 라신은 또다시 같은 책을 구했는데, 이번에는 책 내용을 아예 통째로 외워 버렸다. 그러고서 자진하여 성직자를 찾아가 그에게 책을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이 책도 앞의 두 책과 마찬가지로 태우시지요.”
끝없는 다시 읽기
한동안 잊고 있다가도 문득 내가 고전을 꺼내어 다시 들춰 보게 되는 이유는 이전에 그 말이 혹시 이러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하고 새삼 떠오를 때이다. 그럴 때면, 이상하게도 분명 처음 읽는 책이 아닌데도 마치 처음 읽는 것 같은 낯선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분명 같은 책을 읽고 있는데 누군가는 나와 완전히 다른 의미로 해석할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나는 과연 내가 읽은 책에 대해서도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을지 난감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고전이 이토록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읽고 또 읽게 만드는 숨겨진 힘이 있어서가 아닐까.
이러한 일은 한 개인에게서도 일어나지만, 시대적인 사건이 되기도 한다. 과거에 한 남자가 어떤 책을 그때까지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다르게 읽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그의 ‘다르게 읽기’는 결국 세상을 영영 뒤집어 놓아 버리는 혁명의 시초가 되었다.
마르틴 루터가 성직자의 길을 걷던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기독교는 종교성보다도 정치 체제를 온존시키기 위한 수단이라는 성격이 더 강했다. 그러다 보니, 성직자들조차도 성서나 신학서를 읽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심지어는 글을 모르는 사람이 성직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는 걸 보니 아마 읽을 필요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 시절 성직의 길을 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귀족 출신이었다. 하지만 루터는 애초에 성직자가 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어느 날 그가 여행을 하던 중 푹풍우를 만났고, 이 일로 죽을 지경에 이르자 그는 목숨만 살려 준다면 자신의 삶을 신에게 바치겠다고 성 안나에게 기도를 했던 것이 그 계기였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성직자와는 달리 루터는 별다른 선입견 없이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는 충격에 빠졌다. 아무리 읽어 보아도 자신이 믿고 따르던, 그리고 온 사회가 신봉하던 교리는 성경에 없었기 때문이다. 성경 그 어디에서도 교황을 섬기라는 명령은 찾을 수가 없었다. 교회의 권력을 옹호하는 말도 없었으며, 성직자는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없었다. 면죄부 이야기가 있을 리는 더더욱 만무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교회의 제도는 모세의 율법과 예수의 가르침과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 읽은 것일까? 아니면 세상이 잘못된 것일까? 혼란이 찾아오기 시작하자, 그는 밤이고 낮이고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거의 광인으로 비칠 만큼 치열하게 성경을 읽어 내려갔고, 결국 그러던 끝에 그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그 결론이란, 잘못된 것은 성경이 아니라 교회라는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그의 신념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교황이라고 한들 어쩔 수가 없었다.
“성경의 증언이나 명백한 이유를 가지고 따르게 하지 못한다면, 나는 계속 내가 든 성구를 따르겠다. 나의 양심은 신의 말에 사로잡혀 있다. 왜냐하면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나는 주장을 철회할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는 것은, 확실하기는 해도 득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나, 여기에 선다. 나로서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책이 신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경이라는 책 한 권을 놓고 보더라도 누군가는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읽었겠지만, 또 루터 같은 사람은 그 권력을 타파할 힘을 같은 책에서 찾아냈다는 점도 그렇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가 “나도 성경을 읽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검은 것으로 읽은 것을 사람들은 희다고 말하고, 내가 희다고 읽은 것을 사람들은 검다고 말한다”고 말한 것도 마찬가지 발견이다.
같은 책을 두고 히틀러는 민족주의의 사상을 키웠고, 셰익스피어는 예술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러니 어쩌면 책은 독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다르게 비추는, 그 어떤 것보다도 정확한 거울인지도 모르겠다. 이전에 읽었던 책을 전혀 다른 느낌으로 읽게 될 때, 나는 문득 내가 변했음을 깨닫는다. 책이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순간, 나는 생각하게 된다. 혹시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처음부터 미래를 품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지금도 저 책들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독자가 아니라 새롭게 읽을 수 있는 독자를.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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