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이 바꿔나가는 삶의 지평이란
우리는 늘 번역된 글을 읽습니다. 그런데 모든 해석 예술 중에서 유독 번역만이 은연중에 해를 끼치는, 파괴적인 질문을 받고 이에 방어해야 합니다. 번역은 가능한가, 가능할 수 있는가, 가능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배우가 연기를 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든가, 음악가가 악보를 해석한다는 게 가능한가라고 질문할 생각이 드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번역은 물론 가능한 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번역가가 한 문학작품을 다른 언어로 다시 쓰는 일도 가능합니다. 그 일을 잘 할 수 있냐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 동료 번역가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다른 반대 의견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랄하고 비열한 비평가들조차 간혹 괜찮은 번역서들이 나온다는 사실을 이따금 마지못해 시인합니다. 학문 연구에 합당한 분야로서의 세계문학이라는 개념 그 자체는 번역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번역은 보편적 개화 문명이라는 개념의 형성에 중추적이고 현저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게다가 유럽 르네상스를 특징짓다시피 했는데 이것은 적은 성과가 아닙니다. 누구든 학교 다닐 때 한 번쯤은 공부했을 “부활”은 기독교권의 유럽에서 오랜 세월 자취를 감추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이 라틴어로 번역되고, 이것들이 다시 각국의 일상어로 번역됨으로서 시작되었습니다. 15세기 말엽, 16세기, 17세기의 시인들은 으레 고전을 번역하고 개작했으며 이탈리아어 작품들에 대해서도 같은 작업을 했습니다. 스페인의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나 프라이 루이스 데 레온** 등이 그런 일을 한 시인들입니다. 이들이 번역한 호라티우스나 베르길리우스나 페트라르카의 작품들은 그들의 창작 시집에 당연한 것으로서 포함되었습니다.
* 스페인 톨레도 태생의 시인. 명문가 군인 출신이기도 한 그는 활기찬 분위기의 시 세계를 표방했던 이전 시인들과 달리, 자신의 비극적인 사랑이 담긴 시를 써서 유명해졌다. 참신하면서도 섬세한 시어를 구사한 그는 페트라르카 등의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장식한 시인들의 작품을 심층 연구해 이를 스페인의 서정시 양식으로 전용했다는 큰 의의를 지닌 인물이다.
** 스페인 쿠앵카 현 벨몬테 태생의 시인. 아우구스티누스회 수사이자 신학자였으며 스페인 르네상스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이다. 살라망카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그는 대학에 있는 동안 고전과 성서문학 번역일로 널리 알려졌다. 한때 그의 《아가》서에 대한 스페인어 번역과 해설이 이단으로 간주되어 옥살이를 치루기도 했다. 스페인 산문의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인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하여』를 쓴 장본인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진지한 독자로 인식한다면 번역은 그 인식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교양 있는 남녀라면 읽고 공부할 번역물이 없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현재 지구상에 현존하는 언어의 수는 줄잡아 6,000개 정도입니다. 그중 대략 1,000개만이 글로 기록된다고 가정해보죠. 최고의 천부적 어학자라도 1,000개의 언어로 쓰인 복잡한 문학 원문을 다 읽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주 드물지만 10개 국어만 잘 읽을 줄 알아도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 경외감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아주 놀라운 위업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번역이 없다면 그렇게 많은 언어를 할 줄 아는 천재라도 다른 990개 언어로 쓰인 작품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언어에 재능이 있는 사람의 경우가 그러하거늘 번역물이 없어질 경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영향을 받을지 상상해보십시오. 번역은 다른 사회, 다른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문학을 통해 탐구하는 능력을 키워줍니다. 낯선 것을 익숙한 것으로 바꾸어 그것을 음미할 수 있게 해줍니다. 잠시나마 우리 자신의 삶, 우리 자신의 편견과 착각을 벗어나 다른 삶을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세계에, 우리의 의식에, 폭과 깊이를 더해줍니다.
번역은 독자층을 크게 확대시켜주므로 작가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는 가급적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게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 번역은 독자의 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여주어 더욱 많은 독자가 저자의 작품에 감동받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작가의 언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의 수가 한정되어 있을 경우 번역은 독자의 수를 늘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작가의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의 수가 몇 백만 명이라도 감명받을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작가와 같은 언어의 사용자 수가 한정적일 경우 번역은 독자의 수를 늘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작가와 같은 언어의 사용자 수가 몇 백만 명이라도 그중 결정적인 수가 글을 모르거나 책을 살 수 없을 만치 가난할 경우에도 번역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학과 관련해서 현재 미국은 터무니없는 여러 얄궂은 상황에 처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영어권 시장은 작가들과 에이전트들이 탐내는 시장임에도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영어권 나라에서 출간되는 번역서의 수는 다른 나라들, 이를테면 서유럽 선진 공업국 및 중남미와 비교해볼 때 처참할 정도로 적습니다. 영어는 통상, 기술, 외교 분야의 국제 공용어입니다. 게다가 식자율이 높고 경제적 수준이 책을 사서 볼 만한 지역의 사람들에게서 영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보입니다. 한편 책을 사는 사람들의 수가 꾸준히 줄고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몇 해 전인가, 필립 로스는 책을 사는 미국인의 수를 4,000명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말하기를, 책을 한 권 내서 그들과 도서관에 팔고 나면 기본적으로 그게 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낙관적인 기분일 때는 그게 로스 특유의 빈정거림이라고 치부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노벨상에 관한 양날을 가진 유언비어들 중 하나는 자신의 작품이 영어로 번역되지 않은 작가는 노벨상 심사 대상이 된다는 것조차 꿈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어는 노벨상 심사위원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언어라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념이 퍼져 있기는 영화와 같은 다른 매체에서 책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영어로 번역되지 않은 책은 광범위하게 배급되는 영화로 만들어질 가능성조차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번역은 다른 방식으로도 창작하는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그것은 아마도 독자층의 증가만큼 뚜렷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며 창작 결과에 큰 영향을 주는 방식일 것입니다. 경제적인 보상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든 그런 문제를 초월하는 방식입니다. 앞서 인용한 글에서 발터 벤야민이 말했듯이 언어는 문학 번역을 통해 영향을 받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하며, 서로 결합되기도 합니다. 번역된 외래의 문학 형식과 통찰이 없었다면, 순수한 단일 언어권 밖에서 들어온 문학의 실질적인 의의와 그 무게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영향과 변형과 결합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도착어”라는 흉한 말로 불리는 언어에, 즉 원문에 대한 번역이 이루어지는 언어에 번역 문학은 활기를 불어 넣는 포괄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1964년 로버트 블라이는 「놀라운 네루다The Task of the Translator」라는 제목의 수필에서 이 문제를 단도직입적으로 논합니다.
우리는 현대의 상상을 단속적 상상과 결부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단속적이란, 전진하는가 싶으면 멈추어 뒤돌아보고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네루다의 시에서 상상은 치솟는 상상적 에너지의 흐름으로 시 전체를 하나로 꿰면서 줄기차게 앞으로 나아간다. (……) 그는 만물의 표면 아래에 운행하는 새로운 종류의 피조물이다.
그는 지표 아래 운행하며 사물을 바닥으로부터 통하여 안다. (이야말로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이다.) 그런 까닭에 만물의 이름을 몰라 난처해하는 일이 없다. 그에 비하면 미국의 시인들은 표면에 표류하는 맹인이나 다름없다. 나무에서 나무로, 집에서 집으로 옮겨가며 하나하나 한참 더듬어본 다음 “집이다”라고 소리쳐 부른다. 우리는 이미 그게 집인 줄 아는데 말이다.
번역을 통해서 가능한 종류의 예술적 발견이 주는 영향은 그 어떤 언어나 문학에서든 언어와 문학의 건강과 활력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각 국가가 지니고 있는 “민족 문학”의 역사가 작가들끼리의 지극히 중요한 연결점을 배제하는 듯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민족 문학”이란 모국과 외국의 차이에 기초한, 편협하고 제한적인 개념입니다. 물론 특정 분야나 상황하에서는 유효하고 유용한 구별이지만 책의 경우 그 구별은 번역으로 없어집니다. 우리는 바벨탑 건설로 인한 천벌의 영향력을 부인하고 부정하며 또는 적어도 천벌로 인한 최악의 분열적 영향을 극복하려 힘씁니다. 번역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언어로 쓰인 문학을 일관되고 통일된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번역을 통해 언어와 언어의 차이를, 각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인생 경험과 인식의 다양함을 찬미합니다. 저는 이것이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순이기는커녕 문학과 번역, 둘 다를 포괄적으로 끌어안는 행위의 표현입니다.
번역으로 말미암는 언어 간의 생산적인 교환이 많은데 그중 한 예를 들자면, 윌리엄 포크너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사이의 연속적 관계입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젊어서 포크너의 소설이라면 없어서 못 읽을 정도로 좋아해서 그의 스페인어 번역본들은 물론 그 외의 다른 언어로 글을 쓴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했습니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영어권 저자로 포크너를 자주 언급했습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나눈 긴 대화에서 포크너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빌 클린턴은 『백년 동안의 고독One Hundred Years of Solitude』이 과거 50년 동안 출간된 소설 중 최고의 명작이며 그것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1995년 여름 마사스 비니어드에 있는 윌리엄 스타이런의 집에서 벌어진 만찬석상에서 카를로스 푸엔테스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은 『압살롬, 압살롬Absalom, Absalom』이라고 하자, 클린턴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소리와 분노The Sound and the Fury』에 나오는 벤지의 독백 일부를 암송했습니다. 자서전 『진술을 위한 생존Living to Tell the Tale』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고향 집을 팔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아라카타카에 다니러 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책에서 그가 포크너의 『팔월의 빛Light in August』을 읽는 게 그 여행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처럼 작용합니다. “나는 그때 이미 그 소설가의 솜씨를 배우는 데 필요한 모든 책들을 번역본으로 빌려서 읽었다. [……] 윌리엄 포크너는 나를 가르치는 가장 충실한 수호천사였다.”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우연히 운 좋게 손에 넣은 책들을 [……] 읽기 위해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그 책들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오랜 동안 출간이 중지되었다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새로 출간된 번역본들로서 오븐에서 금방 구워낸 따끈따끈한 빵과 같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운 좋게도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외에도 D. H. 로런스와 올더스 헉슬리, 그레이엄 그린과 길버트 체스터턴, 윌리엄 아이리시와 캐서린 맨스필드 등 많은 작가를 발견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Ulysses』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내 안에 존재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실재계에 대한 발견이었을 뿐 아니라 내 글에서 언어를 해방시키고 시간과 구조를 다루는 데 귀중한 기술적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카프카를 처음 읽었을 때 받은 영향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나는 두 번 다시 예전처럼 평온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책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The Metamorphosis』이었다. 보르헤스의 잘못된 번역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로사다 출판사에서 출간한 그 번역본은 첫 줄부터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그 첫 줄은 오늘날 세계 문학의 가장 위대한 문학적 장치에 속한다.” 그는 그 번역을 일컬어 “잘못된 번역”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보르헤스에게서 무엇을 배웠는지 말하면서, 저자는 무엇이든 그것을 쓰기만 그게 정말이 되기 때문이라서 그런 말을 했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이 훌륭한 소설가는 이 짧은 구절을 통해 젊은 소설가가 소설 작법을 배운 경험의 폭과 생생함을 우리 마음속에 불러일으켜 기억에 남게 합니다. 그것은 문학 번역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었던 일종의 입문이었습니다. 번역서들은 그가 읽은 다른 책들과 더불어 그가 작가로 자라나는 데 결정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멀리 있는 현명한 선생의 역할을 한 작가들의 문하생이 되어 공부하도록 해준 것이지요.
언젠가 누군가 포크너를 일컬어 영어로 글을 쓰는 중남미 작가 중 가장 유명하다고 했습니다. 단순한 재담에 그치는 말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포크너는 세르반테스의 확장적인 문체를 이어받아 영어로 옮긴 것처럼 보입니다. 세르반테스의 문체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그 이후의 모든 스페인어 작가에게 심오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르반테스는 현대 소설의 형식과 형태의 창시자입니다. 소설가의 언어가 무엇이냐를 떠나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장르의 변혁을 일으킨 것입니다. 유럽 소설의 발전, 특히 18세기 영국 소설의 발전과 헨리 필딩의 중대한 저작은 스페인에서 출간되고 나서 거의 곧바로 영어로 번역된 『돈키호테』를 모델로 해서 출발했습니다. 1611년에 출간된 토마스 셸턴의 영어 번역은 1605년에 첫 선을 보인 세르반테스 소설의 1부가 외국어로 번역된 최초의 사례입니다. 셰익스피어가 『돈키호테』의 1부에 나오는 삽화의 주인공인 카르데니오의 모험을 바탕으로 희곡을 쓰려고 했다는, 아니 실제로 희곡은 썼지만 불행히도 분실되었다는 추측이 있는데, 이것은 셸턴의 번역이 영국에서 출간되어 성공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각별한 흥미를 자아냅니다. 세르반테스는 셸턴의 번역부터 시작해서 오랜 역사를 거치며 소설의 성장과 소설가들의 작법에, 그리고 물론 포크너의 작법에, 다각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포크너가 20세기 중엽 중남미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현대 영어권 작가였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과장되고 감명적이며 장식적인 문체와 세르반테스 풍의 울림이 어우러진 그의 작품들은 스페인어 독자들에게 친밀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중남미 소설의 발전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학 붐이라고 일컬어지는 현상에, 그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데 더욱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그런 문체보다는 땅에 대한, 그리고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신화적이고 거시 역사적이며 다세대적인 통찰력입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뿐 아니라 카를로스 푸엔테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를 비롯한 많은 현대의 중남미 소설가들이 포크너에게 진 빚은 대단히 큽니다. (세르반테스에게 진 빚이 큰 것은 물론입니다.) 이런 윤택한 문학 교류는 세르반테스와 포크너를 위시한 많은 작가의 작품들이 번역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영어로 쓰인 현대 소설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문체가 준 영향은 많은 유명 작가들에게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몇 사람만 예로 들자면 토니 모리슨, 살만 루슈디, 돈 드릴로, 마이클 셰이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아마도 번역본을 통해서였겠지요. 포크너가 중남미에 미친 영향이 의심할 여지없이 대부분 번역본의 형태로 이루어졌듯 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조이스에게서 자유를 발견하고 조이스와 포크너 두 작가에게서 구성과 기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이 자유, 구성, 기법이 이 콜롬비아 작가가 쓴 작품의 번역본을 통해 신세대 영어권 소설가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이들 주요 저자들이 번역서들을 접할 수 없었다면, 이들로 하여금 단일한 언어와 단일한 문학 전통의 한계를 뛰어넘어 필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해준 그 발견의 혁신적 과정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번역에는 문체, 기교, 구성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주는 강력한 파급력이 있습니다. 단일 민족이나 단일 언어의 전통에는 없을 수 있는 문학 세계로 들어가게 해주는 것입니다. 영향을 받는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으로 유해한 우려를 초월해서 작가들은 서로에게서 기예를 배웁니다. 화가나 음악가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직접 사사받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정규 과정(창작 과정, 화실 수업, 음악 학교 교습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경우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술가는 다른 데서 스승을 찾을 수 있습니다. 초보 작가들이 더 많은 곳에서 더 많은 책을 볼 수 있을수록 창조적 영향이 흐를 가능성은 그만큼 더 커지며, 문학적 상상력에 불을 붙이는 불꽃은 그만큼 더욱 뿌리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번역은 여러 언어를 서로 교배시켜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독보적이며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번역 없이는 작가들의 범세계적 공동체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괴테는 한 나라의 문학이 다른 나라의 문학에서 받을 수 있는 영향과 기여를 차단할 경우, 스스로 고갈되어 결국 자체적 자원의 질이 떨어지게 마련이라고 믿었습니다. 문학뿐 아니라 언어 자체도 다른 언어와 서로 관계를 맺을 때 풍성해집니다. 한 언어에 주입되는 새로운 표현 수단이 가져오는 결과는 어휘의 확장, 연상 잠재력, 구성상의 실험입니다. 다시 말해서, 번역으로 넓혀지는 시야는 한 언어를 쓰는 사람이나 그 언어로 쓰인 글을 읽는 사람, 그 언어로 글을 쓰는 작가에서 그치지 않고 그 언어 자체의 본질에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한 언어가 새로운 구성 요소와 외국어의 표현 방식을 주입받고, 교배를 통한 융합을 포용하면 할수록 표현 수단으로서의 그 언어는 더욱 확대되고 더욱 효과적이 되며 더욱 유연해집니다. 무지한 정부나 배타적인 사회운동 단체가 신화적인 언어의 “순수성”을 날조한 다음, 국가 영토 내에서 다른 언어의 사용을 금함으로써 그 순수성을 조장하려 애쓰는 모습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그들이 보호하고자 하는 언어는 새롭고 생소한 표현 수단과 소통 수단을 접하지 못하고 결국은 지쳐서 서서히 약해져 빈곤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여러 문화와 언어를 관통하는 흐름이 불가항력적이며 불가피한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