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어주던 남자
배움의 사건으로서의 책 읽기
1. 책을 고른다는 것
이번 강연이 아니어도 ‘어떤 책을 읽으면 좋으냐’는 질문을 곧잘 받는다. 오늘 이 자리가 흥미로운 것은 내게 이 질문을 던진 사람들이 평소 이 질문을 자주 받는 분들이라는 사실이다. 책을 고르고 추천하는 일을 하는 학교 도서관 선생님들이 자리를 마련해 던진 질문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나는 오늘 ‘독서’와 ‘교육’, 다시 말해 ‘책 읽기’와 ‘배움’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려고 한다.
배움을 구하는 이에게 권하는 책 읽기란 어떤 것일까. 내게 좋은 책,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것과 누군가에게 좋은 책, 누군가에게 선물할 책을 고르는 것은 확실히 다른 문제처럼 보인다. ‘어떤 책이 좋을까’라는 물음 속에서,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떠올려야 하는 사람, 아마 이 자리에 있는 선생님들 상당수가 그런 분들이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는 사람, 즉 독서가의 입장에서는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와 ‘어떤 책을 읽힐 것인가’가 다른 문제가 아니다. ‘내가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는 ‘내게 어떤 책을 읽힐 것인가’와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문제가 된 건 단순한 ‘독서가’가 아니라 ‘독서교육자’다. 과연 ‘독서교육자’의 특별함은 어디에 있을까. 그에게 ‘책을 고른다’는 것, ‘책을 권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가 읽을 책을 고르는 것’과 ‘남에게 권유할 책을 고르는 것’, 특히 그 ‘남’이 ‘나’와 차이가 없다고 느끼는 동료가 아니라, 내게 ‘배움’을 청한 ‘학생’인 경우, 책을 고르는 일은 아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 경우에 ‘좋은 책’이란 ‘교육’, ‘배움’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교육자가 고를 ‘좋은 책’이 과연 ‘책’에 달린 문제일까에 의문을 품고 있다. 순전히 개인적 경험에 기초해서 말해보자면, ‘독서’를 우리가 하나의 ‘사건’이라고 부를 때, 그 ‘사건’의 성격은 책보다는 그 책을 만나게 되는 ‘상황’과 더 깊이 관련되는 것 같다.
사실 ‘객관적으로’(?) 좋은 책들은 많다. 모래밭에서 사금을 찾는다기보다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는 것처럼, 찾는 물건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당황스러울 정도다. 그냥 쉽게 생각해보면, 소위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이 있다. 전문가나 명사들이 추천하는 책들도 대개 그런 책들로 받아들여진다.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된 책들도 대강 그렇다. 사람들이 많이 읽는 책도 그렇고. 뒤로 갈수록 검증할 자신은 없지만 어떻든 우리가 책을 고르는 방식이 대개 그렇다. 책은 이토록 넘쳐나고 좋은 책에 대한 권유도 이렇게 많은데, 왜 오늘 우리는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까. 그냥 좋은 책들, 가령 고전을 마구 읽히면 되는 것 아닌가?
학교에서 ‘독서인증제’라는 걸 시행한다고 들었다. 주변에서 대강 들어 정확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발상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읽게 하면 좋은 것 아니냐’는 발상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독서’가 갖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좋은 책 리스트를 작성하고 아이들에게 그냥 마구 읽히면 될 것인가. 나는 오늘 내게 던져진 물음이 양서 리스트의 빈칸을 채워 달라는, 적어도 그 효율적인 방법을 알려 달라는 것이 아니길 빈다(이와 관련해서는 나는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그냥 읽히면 된다’는 것에는 중요한 뭔가가 생략되어 있다. 그게 무엇일까. 간혹 TV 아침드라마에 나오는, 잘나가는 집안 혼사 이야기가 떠오른다. “조건 좋은 사람이면 됐지, 뭘 이것저것 재고 그래.” 여기 무엇이 생략된 것일까. 가장 중요한 것, 바로 ‘사랑의 체험’이 없다. 사람과 사람이 ‘사랑의 체험’이 없이 만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훌륭하고, 일반적으로(?) 훌륭하면, 서로의 인연이 훌륭하게 엮이도록 보장된 것인가. 하지만 사람들은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제 눈에 안경’인 사랑을 하지 않는가. 그만큼 사랑은 ‘특이적singular'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사람을 만난다기보다, 만남이 좋은 사람을 데려다 준다고 할까. 어떤 상황 속에서 일어난 만남의 사건 속에서, 우리는 갑자기 서로를 휘어잡는 독특한 매력을 낳고 발견한다. 나는 독서의 경험에 비슷한 점이 있다고 본다.
그래도 그냥 ‘좋은 책’은 있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좋은 책’은 세상에 좋은 책으로 있을 뿐 내게 ‘좋은 책’은 되지 못한다. 내가 고등학교 때 겪은 일, 아직까지도 생생한 어떤 일을 말하고 싶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1987년, 당시 사회 분위기도 그랬지만 특히 우리 학교는 민주화 열기로 뜨거웠다. 학교가 공부를 너무 심하게 시킨 게 화근이었다. 매주 주초고사라는 게 있었는데, 영어와 수학을 번갈아가며 시험을 봤다. 그걸 50% 반영하고 월말고사를 50% 반영해서 성적을 결정했다. 매주 월요일에 시험을 보니 단 한 번도 주말을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그해 가을, 그러니까 사회에서 6월 민주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이 끝난 뒤, 우리 학교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학생들이 시험을 거부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시위는 가을마다 일어났다. 직접 투표해서 학생회를 만들게 해달라, 동아리를 만들게 해달라, 3학년 때는 전교조 창립으로 학교가 들썩거렸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도 시위로 학교가 어수선할 때였는데, 갑자기 도서관에 가고 싶었다. 지리 선생님이 사서 업무를 담당하셨는데, 책을 읽고 싶다고 했더니, 보통은 도서신청 카드에 책 이름을 적어 내라고 하는데, 그날은 직접 들어와서 골라보라고 했다. 그때 고른 책이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의 『군중과 권력』이었다. 책 내용도 모른 채 제목, 그리고 표지에 실린 몇 구절에 끌린 것이다. 그 당시 상황 때문이었는지 책이 서가에서 내게 튀어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고른 책을 본 선생님의 그 야릇한 웃음과 표정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네가 과연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표정. 대출 기간이 일주일이었는데, “너 한 주 더 줄게. 그렇다고 될 것도 아니지만.” 그 말이 옳았다. 자존심이 상해서 오기를 부리며 2주 동안 책을 붙들었지만 3분의 1도 채 읽지 못했다. 2주 후 “어때?” 하며 웃는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는, 책을 테이블 위에 얹고 그냥 황급히 도서관을 뛰어나와 버렸다.
수준에 맞지 않은 책을 고른 대가를 치른 셈이라고,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은 정말 좋은 책이다. 카네티가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 작품이기도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도 10여 년 전에 ‘대중’에 대한 글을 쓸 때, 이 책을 읽고 얼마나 감탄을 했는지 모른다. 이제야 그 책을 읽을 ‘수준’이 된 걸까. 좋은 책이란 역시 ‘수준’이 맞는 책인 걸까. 그런데 최근 노들장애인야학에서 니체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며, 책을 권하는 결정적 기준이 ‘수준’일 수만은 없음을 느꼈다. 오늘 강연은 바로 지난주까지 계속된 노들야학에서의 책 읽기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이 강연을 시작하며 제기했던 문제를 다시 상기하고 싶다. 내가 읽을 책을 고르는 독서가가 아니라 내게 배움을 청하는 학생에게 책을 권하는 교육자라는 문제 말이다. 교육자란 수준에 맞는 책을 골라주는 사람일까. 물론 그것도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먼지를 뒤집어쓴 채 어느 고등학교 도서관 책장에 박혀 있던 책이 어느 학생에게 튀어나왔을 때, 단지 제목과 표지에 적힌 글, 첫 장을 넘기며 본 몇몇 구절이 이상하게도 한 고등학생을 사로잡았을 때, 독서 교육자는 “그건 아직 네 수준이 아니야”라고 말려야 했을까(애당초 고등학교 도서관에 그 책이 있지 않아야 했을까). 당시 사서 선생님은 내게 책도 시간도 건네주셨지만, 그런 일들을 교육자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공공도서관의 ‘직원’도, 심지어 도서대출 자동기계도 그런 사무는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배움을 일으키는 자는, 책을 건네고 시간을 건넬 때, 뭔가 다른 것도 건네야 하는 게 아닐까. 책에 ‘교육자’가 개입한다는 것, 책과 관련해서 ‘배움이 일어나게 한다’는 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물건을 교환하는 일은 누구나 하는 일이다. 하지만 연인들이 잘 알 것이다. 물건이 전달될 때, 물건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잉여의 것이 소통된다는 것, 그 ‘잉여의 것’이 두 사람을 ‘연인’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는 핵심임을. 독서 교육자도 마찬가지다. 어떤 책을 골라줄 때, 어떤 책을 권유할 때, 어떤 잉여의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잉여’라고 했지만 결코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바로 그것이 전체 성격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책을 건네는 두 사람이 연인 사이인지, 상인과 손님 사이인지, 스승과 제자 사이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그 ‘잉여의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책을 권유할 때 선생이 실어 보내는 것, 책의 권유 속에서 스승과 제자를 ‘스승’과 ‘제자’로 만들어주는 그것은 무엇일까. 오늘 그 점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2. 책 읽기와 책 읽어주기
1) 책 읽기의 곤란함
2010년 2월 아주 흥미로운, 하지만 조금은 부담스러운 제안을 받았다. 노들야학에서 한 학기 동안 정규과목으로 인문학 강의를 해달라는 거였다. 노들야학과 수유너머는 이미 2년 전부터 함께 인문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매월 다양한 주제로 인문학 강좌를 열었고 주마다 특정 책이나 이론가를 공부하는 집중 세미나를 운영해왔다. 하지만 월례 인문학 강좌는 강사들이 돌아가면서 특강을 하고 매번 그 참여가 자유로워 학생들은 그냥 맘에 드는 강좌를 한두 개 골라 듣는 식이었다. 집중 세미나는 주로 교사와 활동가들 중심으로 했기에 장애 학생들의 참석이 거의 없었다. 결국 학생들이 정규수업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한 교사의 열정으로 어렵게 수업이 만들어졌고 내가 교사로 초대되었다.
수업을 진행할 ‘불수레반’은 중등과정을 공부하는 열 명 정도의 중증장애인 반이었다. 중등과정이라고 하지만 학생들은 20대와 30대가 약간 있고, 반 정도는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40대 중후반의 어른이었다. 수업계획을 짜며 학생들의 욕구조사를 했다. 나와 함께 수업을 진행한 ‘김선생’의 보고서를 인용해보겠다. “욕구조사를 했다. 학생들에게 ‘뭐 공부하고 싶으냐’고 물어 보니 ‘그런 거 없어’ ‘니가 알아서 해’ ‘언니 맘대로 해’ 같은 답이 돌아왔다. 전부터 ‘인문학 하기 싫다’라고 일관되게 얘기했던 배모 씨는 ‘코디, 섹스, 성, 돈, 이성, 정치, 심리, 연예인의 실제, 영화, 마약, 그리스로마 신화, 성형, 한국방송 50년 기획물(?), 무속, 유체이탈, 사주풀이, 영혼, 컴퓨터 해킹, 평행이론, 사회변천사, 인간심리학, 일본 역사’에 관심이 있으며 ‘장애인 야학, 운동, 자본주의, 문학은 빼’라고 했다. 대체로 의견이 없었고, 있어도 뭘 원하는지 알기 힘들었다.”
학생들의 욕구는 좀처럼 모아지지 않았다. 모아지지 않았다기보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월례 인문학 때 니체를 강의한 적도 있고, 김선생이 강력히 추천하기도 해서, 결국 니체를 공부하기로 했다. 문제는 교재였다. 니체 원전으로 수업을 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던 나는 진은영 선생이 10대를 겨냥해서 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추천했다. 내용을 알기 쉽게 잘 풀이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제기를 받았다. 문체가 문제였다. 아이들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그 문체가 40대 학생들에게 맞지 않다는 거다. 사실 많은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을 대할 때 마치 ‘애’를 대하듯 해서, 그 점이 장애인들에게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 예전에 국어 수업시간에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똥』을 읽었을 때도 비슷한 문제제기가 나왔다고 한다. 내용은 좋은데도, ‘우리가 언제까지 『강아지똥』이나 읽어야 하느냐’고 말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개학 날짜는 다가오는데 교재 선정은 난항을 거듭했다. 그때 김선생이 그냥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직접 읽으면 안 되냐고 했다. 내게 두 가지 기억이 동시에 떠올랐다. 하나는 20여 년 전의 『군중과 권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10대 추천도서로 『차라투스트라』가 들어갔다고 분개하던 지인에게 내가 했던 말이었다. 언젠가 어느 기관이 초등학교 고학년 추천도서로 『차라투스트라』를 넣었던 모양이다. 그는 “네가 쓴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애들한테 만만치 않을 텐데, 정신 나간 모양”이라고 흥분했다. 어떻게 『차라투스트라』를 직접 읽게 하느냐고. 그런데 나는 어린아이들이 굳이 니체 원전을 읽어야 한다면 그래도 『차라투스트라』가 나을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에피소드가 많아 어른들과 달리 재밌게 읽을지도 모른다고.
김선생의 제안과 그때 떠오른 생각으로, 결국 『차라투스트라』를 직접 읽기로 결정해버렸다. 그런데 불수레반 학생들 중에는 난독증이 있는 사람도 있었고, 대부분의 학생이 철학책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한 주 읽는 분량을 아주 적게 잡아야 했다. 일단 내가 에피소드를 10개 가량 뽑고 해당 페이지를 타이핑해서 빔프로젝트를 이용해 벽에 쏘아 놓고 함께 읽어갔다. 내가 먼저 큰 소리로 한 번 읽고 난 후 문장을 해설하는 방식을 취했다.
학생들 대부분은 말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 그나마 두세 사람이 곧바로 말을 전할 수 있고 나머지는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정도는 말없이 손으로 책상에 글자를 쓰는데, 그것을 내가 읽어야 했다. 한 사람은 말도, 손짓도 불가능했다. 약간의 소리를 내고, 눈빛을 미묘하게 변화시키는 게 의사표현 방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차라투스트라』를 읽을 수 있을까. 니체 연구자에 따라서는 가장 어려운 책으로 꼽기도 하는 이 책을, 이런 상황에서 읽는 게 가능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하라고 했으니까 했지, 내게 맡겨 두었으면 아마 단번에 포기했을 것이다.
2) 알 수 없는 맹수들
어떤 면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마땅한 책을 고를 수 없었기에, 즉 중등 수준의 독해력을 지닌, 하지만 40대의 어른인, 거기에 중증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마땅한 인문학 책을 골라줄 수 없었기에 선택된 책이었다. 한마디로 ‘선택을 포기했기에 선택된 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에라 모르겠다, 일단 부딪혀보자’는 심정으로 택한 책이다.
첫 번째 시간에는 니체라는 인물과 그의 철학을 개략적으로 소개했다. 사람들은 대체로 성의껏 내 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정말 ‘성의껏’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상당수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습관적으로 나는 강의 때 그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그런데 그런 서술형 질문은 금세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반에는 아주 느린 속도로 조금씩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소수뿐이다. 한 사람의 이야기만 듣는다 해도 제법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말조차 할 수 없다. 일반적인 수업에서 가능한 피드백을 여기서는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작은 강의실에는 내 목소리만 울리는 것 같았다. 한 학기 동안 허공에다 혼자 소리를 계속 질러야 하는 것일까. 참 막막했다.
첫 번째 시간이 끝나고 책을 잘못 골랐다는, 아니 이런 식의 수업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회장을 맡고 있는 A는 첫날부터 딴청을 부렸는데, 수업이 언제 끝나는지 시간만 체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강의가 조금만 길어지면 수업시간 끝났다고 소리를 쳤다. 사실 그는 책도 많이 본 것 같고 무엇보다 글을 아주 잘 쓴다. 그의 블로그 독자가 아주 많다고 들었다. 첫 시간 후 김선생이 그에게 소감을 물어본 모양이다. “나체?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애쓰지 말고 대충해. 학생들이 관심이 없는 걸. 너만의 만족.” 첫 수업을 마치고 그가 한 말들이라고 한다.
본격적인 책 읽기는 두 번째 시간부터였다.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시작했다. “말은 어떻게 하더라도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이 내게 살 가치가 없는 곳이라고 속삭이는 존재들이 있다”고, 그들을 ‘죽음의 설교자’라 한다고 했다. 첫 텍스트를 ‘죽음의 설교자’로 시작한 것은 힘든 세상을 회피하지 말고 직시해야 하며,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이 세상에서 삶을 가꾸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책을 읽은 후에는 ‘예/아니오’나 ‘객관식’ 아니면 바로 낱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질문을 했다. 그때 과제는 내 주변에서 ‘죽음의 설교자’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문장들은 쉽지 않았는데, 소리를 내서 앞에서 낭독하는 순간, 나는 이 책을 고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야학에 오기 전에 이 책을 열 번도 넘게 읽었다. 그런데 책을 읽는 장소, 책 읽는 내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 때문인지, 참 많은 생각이 들었고,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읽었던 문장에서 나 스스로 큰 감동을 받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 문장을 여러 번 힘주어 다시 읽었고, 내게 떠오른 일들을 말하기도 했다.
‘죽음의 설교자’를 찾아오라는 과제를 발표하는 사람은 김선생이었다. 그가 일주일 동안 학생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그것을 발표했다. 조금씩 초점이 맞지 않은 답들이 나왔는데, 딱 한 사람, B의 답변이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녀는 몸이 자꾸 뒤틀리고 고개가 돌아가 전동휠체어에 몸을 묶고 옆을 보며 강의를 듣는다. 장애 정도가 가장 심해서 부모님 외에는 아무도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런데 곁에서 활동보조를 하던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는 ‘엄마’가 ‘죽음의 설교자’라고 답했다. 처음에는 잘 못알아 들었나 싶어 아버지에게 물었는데 역시 ‘엄마’라고 답했다. 헌신적으로 자신을 돌보는 어머니가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죽음의 설교자’라고 했는데, 그 까닭은 아직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가 어머니를 미워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반대일 것이다. ‘죽음의 설교자’란 꼭 ‘죽어라’고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불쌍하게 바라보는 눈길만으로도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 눈길은 나로 하여금 세상에서 자꾸 고개를 돌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죽음만이 궁극적 탈출 내지 구원인 듯. 어떻든 그녀의 답변은 더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순간의 눈빛은 참 대단한 것이었다.
세 번째 시간,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를 읽었다. 예전에 이 부분은 이성 내지 정신 중심의 서양철학의 전통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만 읽었는데, 이 부분을 불수레반에서 읽는 순간 책은 그 이상의 의미를 낳고 있었다. 중증장애인들, 누구보다 신체 때문에 차별적 시선을 느꼈고, 그 자신이 자기 신체를 ‘경멸’했던 사람들이기에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책을 소리 내서 읽으며 나는 학생들이 매우 집중하고 있음을 느꼈다.
참 희한했다. ‘이 글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을 그 시간 내내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어떤 문장을 읽을 때는 살얼음 위를 걷는 느낌이었고, 또 다른 문장을 읽을 때는 불로 달궈진 철판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분명 소리를 내서 읽는 것은 나 혼자인데, 나는 여러 개의 눈이, 여러 개의 입이, 여러 개의 정신이 소리를 내고 있다는 느낌을 실제로 가졌다.
마침내 하나의 불꽃이 일었다. 차라투스트라가 신체에 대해 “우리 안에 맹수들이 살고 있다”는 말을 할 때였다. 이때 맹수란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불쑥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삼켜버리는 충동이나 욕망 같은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구절을 읽고 있을 때, 갑자기 여러 학생들이 동시에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손을 휘젓고 휠체어를 들썩였다. B는 급작스레 근육의 강직이 일었고, C는 자기를 손으로 가리켰으며, D는 “내가 그렇다”고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를 여러 번 읽었고, 여기저기서 강의도 많이 했지만, 그 문장에 그런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처음이었다. 학기가 시작될 때만 해도,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이들에게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이들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 문장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는 듯했다. 세상 그 누구보다 그 문장을 자기가 잘 안다는 듯이 그들은 뭔가를 쏟아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두어두었을 우울과 분노, 슬픔, 격정이 쇠우리에 갇힌 괴물처럼 자기 안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 눈에는 학생들 모두가 정글에서 살아온 맹수같이 보였다. 학생들이 자기 안에 산다고 확신하는 그 맹수는 아마 그동안 입은 상처의 표시겠지만 앞으로 그들의 엄청난 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독증이 있던 D는 집에서 다시 듣겠다며 내 책 읽는 소리를 녹음했다. 그래 봐야 대부분 해당 부분을 다시 읽어주는 정도다. 물론 약간의 해설이 있고 중간중간 이런저런 느낌을 말하기는 하지만 어떻든 기본은 책을 소리내서 읽는 것뿐이다. 그런데 D는 활동보조인이 읽어줄 때는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딱딱한 번역 문장 탓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원문을 크게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내가 문장을 다듬어 새로운 텍스트를 제공했다. 한결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읽어줄 때는 이상하게 느낌이 다르다고 했다. 사실 그건 내 목소리에 어떤 마력이 있어서가 아닐 것이다. 바로 그 장소, 모두가 모여서 함께 읽는 그 자리가 그런 역할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간혹 중국 작가 루쉰의 글도 함께 읽어줬다(루쉰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의 일부를 중국어로 번역한 적이 있다). 조금 오래된 번역이기도 하고 루쉰 문장도 만만치가 않아, 이 글을 여기서 읽는 게 가능한가 싶었지만, 이미 『차라투스트라』에서 보인 반응을 봤기에 그냥 읽었다. 가령 『차라투스트라』의 ‘살무사에 물린 상처에 대하여’를 읽으며 루쉰의 「죽음」을 읽었다. 너무 오랫동안 원한과 복수의 정신, 양심의 가책으로 살아온 나머지 모든 감정을 몸 안에 독으로 만들어버린 살무사, 그의 말과 행동은 그것을 당한 사람에게 치명적 독Gift(독일어로 ‘Gift’는 ‘독’을 의미한다)이 되고 만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그것을 선물Gift로 받는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에게 “누군가 너희에게 저주를 할 때 얼마쯤은 너희도 그렇게 해주어라”라고 말한다. 선물로 바꿀 힘이 없다면 마음속에 원한을 품는 것보다는 얼마간 복수를 하고 마음에서 그런 원한을 없애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루쉰의 「죽음」이라는 잡문을 읽어주었다. 독사 이야기를 정반대에서 접근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은 임종 시에 여러 사람들과 화해를 한다고 하는데, 루쉰은 “멋대로 원망해라. 나 역시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도덕군자인 양 할 게 아니라 얼마간 복수를 하는 것도 중요하고, 어떤 일은 죽을 때에도 쉽게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 『화개집』의 어떤 문장을 읽어주면서 독사 같은 사랑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했다. “호소할 것도, 사정할 것도, 혈서를 쓸 것도 없다. …… 계속해서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 독사처럼, 원귀처럼.” “시체의 숲 사이를 조용히 기어가는” 독사처럼, 우리를 칭칭 감고는 놔주지 않는 뱀처럼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고. 『화개집』에 실린 이 글은 『차라투스트라』의 ‘크나큰 사건에 대하여’를 읽을 때 함께 읽은 것이었다. 특수효과(?)가 많은 떠들썩한 사건이 아니라, 대지를 배로 기어가며 숲을 조용히 가로지르는 독사처럼, 소리없이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원귀처럼 달려들 때, 위대한 사건이 우리를 찾아온다고. 루쉰의 글은 D에게 큰 반응을 일으켰고(그는 다음 학기에는 루쉰의 글을 읽자고 했다), 또 수업 참관을 위해 온, ‘환자들의 권리찾기 운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사실 활동가이기 이전에 큰 병을 오래 앓고 있는 남편을 둔 분이었는데―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나는 어느 철학자, 독문학자, 중문학자보다 이들이 이때 이해한 것이 뒤처졌다거나 오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과연 누구일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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