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이것이
어머니가 서른해 동안 서울 살면서 오간 길이다.
약방에 들러 소화제를 사고
떡집을 지나다가 잠깐 다리쉼을 하고
동향인 언덕바지 방앗간 주인과 고향 소식을 주고받다가,
마지막엔 동태만을 파는 좌판 할머니한테 들른다.
그이 아들은 어머니의 손자와 친구여서
둘은 서로 아들 자랑 손자 자랑도 하고 험담도 하고
그러다보면 한나절이 가고,
동태 두어마리 사들고 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면
어머니의 하루는 저물었다.
강남에 사는 딸과 아들한테 한번 가는 일이 없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오가면서도
만나는 사람이 너무 많고
듣고 보는 일이 이렇게 많은데
더 멀리 갈 일이 무엇이냐는 것일 텐데.
그 길보다 백배 천배는 더 먼,
어머니는 돌아가셔서, 그 고향 뒷산에 가서 묻혔다.
집에서 언덕밭까지 다니던 길이 내려다보이는 곳,
마을길을 지나 신작로를 질러 개울을 건너 언덕밭까지,
꽃도 구경하고 새소리도 듣고 물고기도 들여다보면서
고향살이 서른해 동안 어머니는 오직 이 길만을 오갔다.
등 너머 사는 동생한테서
놀러 오라고 간곡한 기별이 와도 가지 않았다.
이 길만 오가면서도 어머니는 아름다운 것,
신기한 것 지천으로 보았을 게다.
어려서부터 집에 붙어 있지 못하고
미군 부대를 따라 떠돌기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먼 지방을 헤매기도 하면서,
어머니가 본 것 수천배 수만배를 보면서,
나는 나 혼자만 너무 많은 것을 보는 것을 죄스러워했다.
하지만 일흔이 훨씬 넘어
어머니가 다니던 그 길을 걸으면서,
약방도 떡집도 방앗간도 동태 좌판도 없어진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걸으면서,
마을길도 신작로도 개울도 없어진
고향집에서 언덕밭까지의 길을 내려다보면서,
메데진에서 디트로이트에서 이스탄불에서 끼예프에서
내가 볼 수 없었던 많은 것을
어쩌면 어머니가 보고 갔다는 걸 비로소 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서른해 동안 어머니가 오간 길은 이곳뿐이지만.
역전 사진관집 이층
사진관집 이층에 하숙을 하고 싶었다.
한밤에도 덜커덩덜커덩 기차가 지나가는 사진관에서
낙타와 고래를 동무로 사진을 찍고 싶었다.
아무 때나 나와 기차를 타고 사막도 바다도 갈 수 있는,
누군가 날 기다리고 있을 그 먼 곳에 갈 수 있는,
어렸을 때 나는 역전 그 이층에 하숙을 하고 싶었다.
이제는 꿈이 이루어져 비행기를 타고
사막도 바다도 다녀봤지만, 나는 지금 다시
그 삐걱대는 다락방에 가 머물고 싶다.
아주 먼 데서 찾아왔을 그 사람과 함께 누워서
덜컹대는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 소리를 듣고 싶다.
낙타와 고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다.
다락방을 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싶다.
그 사람이 날 찾아온 길을 되짚어가면서
어두운 그늘에도 젖고 눈부신 햇살도 쬐고 싶다.
그 사람의 지난 세월 속에 들어가
젖은 머리칼에 어른대는 달빛을 보고 싶다.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첫날을
다시 그 삐걱대는 사진관집 이층에 가 머물고 싶다.
두메양귀비
1
나리 흐려 걱정했는데 지프차를 타고 천문봉에 이르니 발아래로 천지가 말갛게 온몸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때맞추어 구름 사이로 막 지던 해가 옷을 조금 열어 몸 한 부분을 살짝 보여주기도 한다. 저녁을 먹고 기상대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별을 보겠다고 나와보니 하늘은 두껍게 구름으로 덮였다. 아침에도 하늘은 잠깐 뜨는 해만 보여줬다가 완강하게 구름으로 몸을 덮는다. 해가 지고 뜨는 곳이 지척인 것이 놀랍다.
2
서울서 장마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 떠났는데 이곳은 봄이 한창이다. 산록이 온통 연초록의 비단으로 덮였고 그 비단을 붉고 희고 노란 들꽃이 수놓았다. 그 갖가지 꽃들 중에서 나는 굳이 녹황색의 두메양귀비를 찾아본다. 백두산 밤하늘의 별들한테 듣지 못한 얘기들을 그것들이 대신 들려준다고 해서다. 갑자기 구름 사이로 쏟아진 햇살이 꽃밭을 훑고 간다. 뜰 수 없을 만큼 눈이 부시다.
3
백두산을 내려와 연변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처녀 가이드는 외할머니가 고국을 떠나면서 외할아버지를 잃고 다른 외할아버지를 만나 정착한 사연을 옛말하듯 들려준다. 개방 후 외할머니가 옛 형제들을 만나는 재회와 갈등의 사연도 눈물겹다. 그녀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줄곧 두메양귀비를 생각했다. 어쩌면 그 꽃은 힘겹게 백두대간을 타고 올라와 이곳에 피면서, 늘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울고 있을 것 같았다.
4
오락가락하던 비가 멎고 구름이 갈라지더니 동쪽 하늘에 쌍무지개가 떴다. 무지개는 산과 마을을 바꿔가면서 우리를 쫓아온다. 초승달도 구름으로 얼굴을 덮었다 벗었다를 되풀이한다. 별들이 다닥다닥 붙은 백두산의 하늘은 끝내 펼쳐지지 않고 대신 떴다 감았다 하는 눈앞에 수천수만송이의 녹황색 두메양귀비만 어른거린다.
옛 나루에 비가 온다
백성이 낸 세금으로 오히려 나라가 나서서
강을 파헤치고 산을 허물고 있으니
나라는 말해도 산하는 남는다*는 옛 시구절은
이제 허사가 되었다.
* 두보의 시 「춘망春望」의 첫 구절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에서 따왔음.
불도저가 파헤치고 있는 것이
강바닥이 아니라 제 심장이라는,
다이너마이트가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
바위너설이 아니라 제 팔다리라는,
오랜 촌로들의 항의 따위 한낱
힘없는 넋두리로만 들리는 강마을은 서럽다.
댐 공사를 반대하는 시위를 마치고
민물생선집에 모여 밥과 술을 먹는 우리는
모두 서울서 온 뜨내기들이다.
너희들이 여기서 살아보았느냐고 대드는
팔 하나 없는 중년 앞에서 머쓱해 있다가
상에 나온 민물고기를 놓고
우스개를 주고받는다.
발파 소리도 불도저 소리도 그친 옛 나루에 비가 온다.
시위도 끝난 옛 나루에, 나룻배 대신 관광차가
줄지어 서 있는 옛 나루에
모두를 비웃듯 추적추적 철적으로
비가 온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