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산다는 건 우리를 무척 흥분시키는 풍요로운 경험이다. 인간의 모든 삶에는 시련과 슬픔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삶은 우리가 지식을 얻고 사고의 지평을 넓히며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정서 면에서건 물질 면에서건 혹은 직업 관련 전문 분야에서건 자신이 세운 목표와 꿈을 실현해가는 멋진 기회임이 분명하다. 의학의 발전으로 우리는 인류 역사상 예외적이라 할 만큼 질적으로 우수한 삶, 예전에 비해 월등하게 늘어난 기대 수명의 혜택을 보는 시대에 살고 있다. 훌륭한 의사와 과학자가 거듭 강조하듯이,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몇몇 만성질환(암, 심혈관 질환, 제2형 당뇨, 알츠하이머)의 출현을 억제해주는 좋은 생활 습관을 통하여 이 길어진 수명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러한 예방적인 접근법이 현대의학의 엄청난 치료 잠재력과 결합하게 되면, 삶의 질이 향상됨은 물론, 기대 수명도 늘어날 수 있으며, 따라서 매 순간 살아 있음을 만끽하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된다.
인간은 생존과 종種의 번식이라는 생물의 기본적인 기능으로만 요약되는 삶에 만족하지 않는 유일한 생물이다. 삶에 대한 애착과 더불어, 우리가 실존 문제에 으레 연결지어 생각하기 마련인 성공이나 발전 지향성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필연성은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성공이 삶의 덧없음에 대한 진정한 성찰의 정도보다는 물질적인 소유와 권력의 크기로 가늠되는 시대이니만큼, 우리는 궁극의 비극적 사건으로서의 죽음을 애써 모르는 척 하려 하거나, 죽음으로부터 도망가거나, 아니면 아예 죽음을 부정하는 편을 선호한다.
어째서 죽음에 관한 책을 써야 하는가? 종양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언제나 죽음과 대면하기 마련이다. 암 연구의 목표는 건강한 세포들은 살려두면서 암에 걸린 세포들만 선별하여 죽이는 치료법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이해해야 하며,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모호한 경계선 위에서 일상적으로 줄을 타보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신경종양학과 신경외과 분야에서의 오랜 연구가 암 가운데에서도 가장 무서운 암으로 손꼽히는 뇌종양 치료제의 개발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짐작하겠지만, 뇌종양은 우리에게 인간이라는 종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해주고 우리를 개인으로 정의하게 해주는 바로 그 전체를 총괄하는 곳, 즉 뇌를 공격한다는 이유 때문에 가장 힘들고 어려운 암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죽음에 대한 성찰이 우리가 여러 해 동안 곁에서 지켜보았던 중병 환자들과의 빈번한 접촉을 통해 가다듬어졌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그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었던 건 우리에게 일종의 특권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환자들이 느끼는 깊은 절망감 또는 죽음에 대한 초연한 태도는 어떤 식으로건 항상 삶의 의미, 삶의 덧없음에 대한 명상으로 이어졌다. 이 책은 우리의 학술적 연구, 우리에게 풍부한 생각할 거리를 주는 환자들과의 이 같은 만남에서 비롯된 성찰이 한데 어울려 태어났다.
죽음을 예견하기란 불가능하겠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미리 방지하는 건 가능하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동원되는 모든 과정이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되기 때문이다. 과학은 애초부터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현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시작되었고 지금도 그러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과학은 죽음과 관계있는 모든 기제의 신비를 벗길 수 있으며, 우리 사회에서 최후의 금기로 남아 있는 이 현상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곧 우리 모두에게 닥칠 시련을 길들이는 것이다. 죽음의 불가피성을 의식하고 죽음이 무엇인지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매우 소중한 삶의 한순간 한순간을 낭비하는 일 없이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을 충분히 향유하기 위해 죽음을 이해하기, 이것이 바로 이 책을 쓰는 목적이다.
빈센트 반 고흐, <손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 |
들어가는 말
인간의 운명은 죽음으로 귀착된다…….
나에게 닥칠 일이 통상적이며 나의 운명이 다른 사람들의 운명과 같은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슬퍼해야 한단 말인가?
- 열자(列子), 『충허진경沖虛眞經』(기원전 400년경)
선禪 수행 중인 제자와 스승 사이에 오고간 유명한 대화가 있다.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어떻게 하면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까?” 그러자 스승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잘 사는 법을 배우면 된다.” 스승의 대답에 얼떨떨해진 제자가 다시 물었다. “하지만 스승님, 그렇다면 잘 사는 법은 어떻게 배울 수 있습니까?” 스승이 다시 알쏭달쏭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야 간단하지, 죽음을 이기면 되지.”
이 재미난 대화는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한 이후 줄곧 시달려왔던 가장 근본적인 딜레마를 단 몇 줄로 요약하여 보여준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으로 끝날 것이 확실한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인가? 철학적 사색과 주요 종교들이 성장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이 실존적인 질문은 지난 수천 년간 인류가 낳은 뛰어난 지성들을 사로잡았다.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단테, 데카르트,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얼핏 떠오르는 대로 가장 대표적인 인물들만 꼽아보아도 이 정도다) 같은 철학자들의 책은 여러 세기를 관통하면서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있다. 죽음과 직면해야 하는 인간 조건에 대한 이들의 성찰은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가 제기하는 질문과도 상당 부분 일맥상통한다.
지상에 잠깐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치는 존재가 지니는 타당성 혹은 부당성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인간처럼 이성적인 동물은 늘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일어나는 자연 현상의 의미를 찾고자 애쓰기 때문이다. 죽기 위해서 태어난다는 건 사실 납득하기 어려운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설혹 그것이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지라도, 부질없고 비논리적인 이 과정은 아무래도 당혹스럽고, 그렇기 때문에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이 사실이다. 흔히들 죽음은 모든 인간의 실존에 유일한 공통분모라고 말한다. ‘위대한 죽음의 여신’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 천재나 바보, 국제적 스타나 가장 평범한 인물을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하지만 이렇듯 죽음 앞에서의 평등이 아무리 만고불멸의 진리라고 해도, 솔직히 그것만으로는 우리 자신 혹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에 위로가 되지 못한다. 인류 전체를 놓고 볼 때, 지금으로부터 2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상에 나타난 이래 1천억 명이 죽었음을 고려한다면, 죽음이 평범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개별적인 죽음은 하나하나가 비극적인 사건이다. 실제로 죽음에 이르는 자나 그들과 가깝게 지내던 친지들 입장에서 보자면, 유일무이한 삶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누구나 공통적으로 겪는 ‘사물의 이치’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 각자가 개별적으로 맞이해야 하는 가장 큰 시련임에는 변함이 없다. 죽음은 무대에서 연극이 시작되기도 전에 미리 정해져 있는 결말이다. 매일 조금씩 써나가는 이 연극 극본의 소재가 되는 하루하루의 사건들을 조금이라도 일관성 있게 엮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한다. 마지막 막이 끝나고 커튼이 완전히 내려지기 전에 우리는 그 같은 결말이 내려져야만 하는 까닭을 이해하려 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의 갑작스러운 종말에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삶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죽음이 지닌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
인류의 역사 전체는 도구의 발견, 불의 사용, 언어의 발생 등과 같이 인간이라는 종이 진화하는 데 일조해온 여러 단계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이 여러 단계 중에서도 장례 의식의 출현이야말로 현대적 인간, 곧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을 가장 잘 상징한다는 주장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한다. 동굴 인류가 출현(약 10만 년 전)한 무렵부터 이미 확실하게 지켜져온 이 의식은 죽음이 이들에게 안겨준 당혹감을 웅변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이들이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시도했다는 단서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초기부터 적지 않은 무덤에서 부활을 염두에 둔 요소들이 발견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만하다. 가령, 자궁의 생산성을 재현하는 뜻에서 죽은 이의 몸을 태아 자세로 눕혔으며, 붉은 황토를 이용해 그 몸을 칠했다. 이 붉은 색은 십중팔구 생명의 피를 상징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평상시에 쓰던 물건(토기 그릇, 무기)을 곁에 놓아주어 죽은 이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될 때 불편이 없도록 배려했다. “어떻게 하면 죽음을 이길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인류 최초의 반응은 아마도 인간의 삶이 지상에 머무는 짧은 시간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희망은 장례 의식, 점점 더 복잡해지는 종교적 상징체계 확립 과정을 통해 인류 역사가 이어지는 한 지속되어 내려오는 듯하다. 비록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엄청나게 변했다고는 하나, 여러 종교들이 저마다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불안에 대처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다. 종교들은 예외 없이 지상에서의 삶은 하나의 단계, 다시 말해 사후 부활로 이어지는 훨씬 긴 과정 중에서 눈에 보이는 단계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상황이 어떻든 간에,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에 속수무책이다. 나이 든 사람의 죽음, 예를 들어 부모나 조부모, 친척, 혹은 어린 시절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던 인물의 죽음은 엄청나게 슬픈 사건이다. 죽은 사람이 장수를 누렸고, 그의 죽음이 자연의 이치임을 우리가 충분히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건 없다. 그런가 하면 아직 한창 나이의 친구나 배우자 또는 동료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이며, 이로부터 우리는 삶의 불의에 대한 반항심마저 품게 된다. 마지막으로, 가능성이 무한한 어린아이의 죽음은 모든 죽음 중에서 가장 고약하다. 자연의 순리에 위배되는 죽음이니만큼 이해할 수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우며, 이로 인한 상처는 결코 진정으로 치료되지 않는다. 17세기에 라로슈푸코La Rochefoucauld가 말했듯이, “태양도 죽음도 정면에서 뚫어지게 바라볼 수 없다”면, 이는 그것이 항상 우리에게서 소중한 사람들을 영원히 앗아가는 끔찍하고 잔인한 위협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발둥 그린, <인간의 세 시기와 죽음> |
하지만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들과의 추억을 그리는 것이 인류의 고귀한 습성이라지만, 남의 죽음이 아닌 우리 자신의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불안감으로 말하자면 그건 정말이지 우리의 실존을 망쳐놓을 수 있는 독버섯과 같은 특성이라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상당 부분은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사후 세계의 존재를 믿건 믿지 않건, 죽음은 어쨌거나 입에 올리지 않는 편이 낫거나, 꼭 입에 올려야 한다면 마지못해 주저하며 언급하는 금기이다.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의 죽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북함의 상당 부분은 죽음에 대한 몰이해에서 온다. 우리는 왜 죽는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역설적이게도 모든 종교와 철학 사조들이 죽음의 심리적·사회적·형이상학적 측면에 대해서 깊이 있는 성찰을 계속하고 있음에도 우리들 대다수는 삶의 과정이나 죽음을 몰아오는 사건들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우리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믿기 어렵고 있음직하지 않은 경험인지, 지금으로부터 30억 년 전에 출현한 하나의 원시세포에서 시작된 경이롭기 그지없는 모험인지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 더구나 우리는 죽음이 실존을 마감하는 부정적이거나 부당한 종말이라기보다,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상에 출현하기까지의 과정에 필연적이고 본질적인 역할을 해온 긍정적인 현상임을 자주 잊어버린다. 이 같은 상황은 사실 매우 유감스럽다.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죽음을 이해하게 되면 삶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따라서 영생 중의 한순간을 사는 특권을 한층 더 충실하게 맛볼 수 있다. 그 한순간이 아무리 덧없고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이런 관점에서 우리 두 공저자는 삶을 구성하는 굵직한 윤곽선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죽음의 여러 방식을 예시해보자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암은 어째서 불치의 병일까? 어떻게 해서 무게가 10억 분의 1밀리그램도 안 되는 일부 바이러스나 박테리아가 단 며칠, 아니 몇 시간 만에 인간을 죽일 수 있을까? 왜 어떤 상처는 죽음에 이르게 하고, 다른 상처는 겉보기엔 위중해 보여도 표피적인 손상만 입힐 뿐일까? 인간은 어떻게 독살에 이르는가? 또 용케 이러한 시련을 모두 피했더라도, 왜 결국 늙어서 죽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이러한 과정에 대한 이해가 삶이라는 현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납득하고, 죽음이야말로 실존의 논리적이며 유일한 귀결이라고 믿는 우리의 확신을 독자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죽음을 길들이는 것이야말로 삶을 최대한 향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겠는가?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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