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맺기를 배우는 교육
시험문제 잘 푼다고 인생이 잘 풀릴까
한 젊은이가 이렇게 말했다. “눈보라 치는 외딴 곳에서 자동차 팬벨트가 끊어지면 저는 망할 놈의 피타고라스 정리나 외우다 얼어 죽을 거예요.” 이런 말을 한 미국의 젊은이나 우리들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살아가는 데 정말 도움이 되는 것들은 하나도 배우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 세상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육이라고 한다면, 그 능력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무엇보다 필요한 능력은 크게 보아 ‘관계 맺기’와 ‘길 찾기’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까운 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자신이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면 어디서나 ‘잘’살 수 있지 않을까?
흔히 말하는 인성 교육과 지식 교육이라는 것도 결국 이런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학교가 교육 목표로 삼고 있는 전인교육이라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겠다. 단지 말로만 그걸 하고 있거나 엉터리로 하고 있어서 문제다. 대안교육이란 그걸 한번 제대로 해보자는 것일 따름이다. 대안교육의 이념적 토대가 되는 생태, 평화, 인권, 공동체성 같은 것들도 따지고보면 결국 관계를 올바르게 맺자는 것이다. 그 토대가 제대로 갖추어졌을 때 지식 교육도 의미가 있다.
시험문제 잘 푸는 기술만으로는 도저히 풀 길 없는 수많은 문제들이 끝없이 펼쳐지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팬벨트를 갈아 끼울 줄 아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 무엇보다 필요한 기술이 다름 아닌 ‘관계 맺기’ 기술이다.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친구, 선생과 제자, 남편과 아내, 동료들 사이에서 관계를 잘 맺을 줄 아는 것은 곧 진실로 ‘잘’ 사는 것과도 통할 것이다.
삶이 곧 관계 맺기이듯 ‘나’의 실체도 알고보면 숱한 ‘관계’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하나의 그물코일 따름이다. 그리고 모든 관계는 서로 얽혀 있어 그물코 하나하나가 우리 삶에 알게 모르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관계의 그물 속에서 스스로를 살리고 서로를 살리는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곧 교육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다른 존재와 건강하게 관계 맺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건강한 관계 맺기라고 할 수 있다. 자기와 건강한 관계를 맺을 줄 알면 다른 존재와 건강한 관계를 맺는 것은 저절로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 교육은 근본적으로 실패하고 있다. 자기를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고, 자신을 좋아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 결과 모든 관계가 단절되고 왜곡된다. 끊어진 팬벨트 앞에서 속수무책이듯이, 우리는 관계의 단절 앞에서 속수무책인 채 당황하고 있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건강한 정신을 좀먹는 바이러스들 가운데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것들이다. 학교는 이 바이러스를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퍼뜨린다. 유행성감기처럼 우리에게 조금만 빈틈이 있어도 그 틈새를 파고드는 이들 바이러스에 저항할 수 있는 항체는 다름 아닌 진정한 자신감일 것이다. 남들과 견줘서 갖는 자신감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는 데서 오는 자긍심, 누가 어떤 시선으로 보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당당함, 그런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떤 바이러스도 우리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자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아 속상해 하는 어른들이 많다. 부모들도 선생들도 요즘 아이들과는 대화가 안 된다고 한다. 왜 그럴까? 아이들이 ‘이상해진’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그런데 다른 한편 아이들이 보기에 이상한 쪽은 어른일 수도 있다.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가 교감을 못하는 면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문화가 다른 세계의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교감은 가능하지 않은가. 우리가 아이들과 교감이 안 되는 까닭은 아마 교감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방법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생명체라면 절로 타고나는 것이 다른 생명체와 교감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다가 그런 능력을 잃어버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어른들은 자꾸만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든다. 자기 잣대를 아이에게 들이대고는 아이가 거기에 맞추기를 바란다. 그러다 아이가 거기에 맞춰주지 않으면 야단을 치고 심하면 매를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가르쳐야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보고 배운다. 아이일수록 본 대로 행동한다. 흔히 모방의 시기라는 일곱 살 전의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본때라는 말이 있듯이 본을 보고 배우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므로 매를 드는 것은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말로 가르치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행동으로 본을 보이지 못할 때나 쓰는 수단이다. 하지만 행동보다 더 근원적인 가르침이 있다. 바로 부모나 교사의 사람 됨됨이다. 행동 이전에 우리의 존재 상태가 알게 모르게 미치는 영향이야말로 실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이다.
젊은 아빠가 직장에서 너무 화나는 일을 당해 분노에 차서 집으로 돌아와 평소처럼 갓난아기가 누워 있는 요람으로 가서는 아이를 안으려고 하자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트린다. 아빠는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한다고 하지만 아빠의 상태를 몸으로 느끼는 아이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어린아이일수록 감각이 깨어 있어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동물들이 그렇듯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학원에 보내는 것으로 교육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몇 십 년 살아본 사람이라면, 우리가 정말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은 학교나 학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시험 잘 보는 기술만으로는 도저히 풀 길 없는 수많은 문제들이 끝없이 펼쳐지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그러므로 진짜 교육이란 결국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삶이란 결국 ‘관계 맺기’가 아닐까? ‘나’란 존재의 실체도 따지고 보면 부모와 자식, 선생과 제자, 친구와 애인, 아내와 남편 등등 살아가면서 맺게 되는 그런 수많은 관계 속에서 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제대로 살 줄 안다는 것은 결국 관계를 제대로 맺을 줄 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교육이 삶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그 토대 또한 올바른 관계 맺기에 있다.
듣기
올바른 관계의 기본은 ‘제대로 듣기’에서 비롯된다. 무엇을 제대로 듣는 일은 의사소통의 기본이다. 가정이나 사회의 성격은 그 구성원들의 의사소통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어떻게 듣고 어떻게 주고받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우리 교육에서도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우리네 학교에서 아이들은 ‘듣는 척하는’ 훈련을 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운동장 조례 때는 열중쉬어 자세로 열심히 듣는 척을 하다가, 교실에서는 7, 8교시까지, 그것도 모자라 보충수업이란 이름으로 밤중까지 듣는 척 하는 훈련을 하고 또 한다.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이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 사회가 거의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회라는 데는 다들 공감할 것이다. 대화나 토론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국회가 굴러가는 모양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어려서부터 남의 말을 제대로 듣는 훈련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말하기 교육의 하나로 이루어지는 웅변대회만 봐도 우리 교육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 수 있다. 앵무새처럼 남의 말을 자기 말인 양 읊어대는 아이들과 그 말을 귓등으로 듣는 아이들이 벌이는 재미없는 연극판이 웅변대회의 실상이다. 말 잘하는 척하는 연사들과 잘 듣는 척하는 청중들의 한판 연극.
이제는 수업 시간에도 아이들은 선생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듣는 척이라도 했었는데 이제는 아예 그런 척도 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그것이 더 낫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나마 정직한 모습이니까. 이런 상황에서 국어 수업이란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마당에 은유법과 직유법의 차이를 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는 대체로 이야기를 나눌 때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속으로 딴 생각을 하느라 아예 귓등으로 듣거나, 주의해서 들을 때조차도 자기 식으로 해석하기에 바쁘다.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진 셈이다. 자기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상대방의 말을 판단하지 않고 주의 깊게 그냥 듣기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이처럼 남의 말에 진정으로 귀 기울일 줄 아는 능력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진정한 민주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나아가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도 자연의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환경문제라는 것도 자연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가 열릴 때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다.
주류의 집요함과 성실성을 넘어설 수 있는 길
집요함과 성실함
얼마 전 마포 ‘민중의 집’ 부설 공부방을 여는 날에 홍세화 선생이 들려준 이야기 한 자락. 당신 집에 찾아오는 낯선 이들이 두 부류가 있는데 한 부류는 “예수 믿으세요!” 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조중동 보세요!” 하는 사람들이란다. 그 두 부류한테서 공통으로 느껴지는 것이 ‘집요함’과 ‘성실함’이라며, 대안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들만큼 끈질길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고 했다. 주류와의 싸움에서 비주류가 밀리는 것은 이런 면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말씀이었다. 붐비는 지하철에서 공중도덕일랑 아랑곳없이 ‘예수천국, 불신지옥’ 팻말을 들고 다니며 소리치는 이들, 시도 때도 없이 벨을 눌러서는 보는 신문 끊고 자기네 걸 봐주면 자전거도 주고 뭐도 주겠다는 이들. 후안무치하게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들이대는 그들의 전략을 ‘성실함’이라고 표현하기는 뭣하지만, 신자 수와 부수 늘이기에 매진하는 그들의 집요함은 분명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들과 달리 대안을 추구한다는 이들은 이른바 ‘정도’를 걸으려 애를 쓰면서 체면도 차리고, 좋으면 알아서 찾겠지 하며 배짱을 부리고 있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신자 수든 신문 부수든 세를 불리고자 하는 그 열정은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전도 또는 홍보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인생을 염려하는 측은지심의 발로일까, 아니면 반대급부가 확실하기 때문일까? 천국이 좀 비좁아지더라도 함께 천국 가자는 그이들의 선한 마음을 의심하기는 힘들다. 신도 수가 느는 만큼 전도 수당이 나오는 것도 아닐 텐데, 웬만큼 믿음이 투철하지 않고서야 그렇게 가가호호 방문하기란 쉽지 않을 게다. 하지만 그 선한 이들의 뒤에 있는 교회는 신문사 뺨치는 사업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천국행 티켓은 자전거처럼 돈이 들지도 않고, 배달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된다. 물론 반품도 신경 쓸 필요 없다. 게다가 신도 한 명은 신문 구독자 한 명보다 부가가치가 훨씬 높다).
집요함이나 성실성은 신념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이해관계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어느 쪽이 더 생산력이 좋은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신념과 이해관계가 세상을 움직이는 두 가지 큰 힘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주류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성실성은 대개 눈앞의 이익이 만들어내는 것이지 그들의 도덕성이 높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출근 카드, 성과급, 보너스, 승진 점수 같은 당근과 채찍이 만들어내는 성실성일 따름이다. 학교로 말하자면 출석부, 일제 고사, 대학 입시 등등을 들 수 있겠다.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성실인 셈이다. 이런 강제 시스템이 없는 대안적인 회사와 단체, 학교나 가정에서는 집요함과 성실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먼저 집요함과 성실성이 바람직한 가치인지부터 따져보자. 개근상이란 것이 자본가를 위한 값싼 도구라 하더라도, 성실성은 어떤 분야에서든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고비고비에 좌절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근성. 에디슨이 대나무 필라멘트 전구를 발명하기까지 수천 번의 실험을 했던 것처럼, 집요함과 성실함은 가치 있는 뭔가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요소다.
하지만 집요함은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고, 그 자체가 곧 바람직한 가치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스토커도 집요함에서라면 둘째가기 서러운 존재다. 집요함이나 성실함이 집착을 동반할 때 그 집요함은 중독에 가까워진다. 연인이 아니라 스토커가 된다. 집요함이 집착이 되지 않으려면 성찰의 힘이 동반되어야 한다. 성실함만 있으면 집착으로 흐르기 쉽지만, 성찰력을 갖춘 성실은 집착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가치 있는 무언가를 이루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갖춘 사람들이다. 성실함과 집요함, 거기에 성찰력까지.
몰입과 중독 그리고 성찰
시스템이 강제하는 성실이 아닌 자발적 성실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바둑이나 게임 같은 데 재미를 붙여본 사람이면 누구나 몰입의 힘을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다보면 어느덧 급수가 올라간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고, 잠자리에 누우면 천정에 바둑판이 좍 펼쳐진다. 어떤 일이든 재미를 붙이면 이처럼 몰입은 쉽게 된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학교 공부에 몰입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진짜 공부’의 맛을 알면 공부만큼 사람을 몰입하게 하는 것도 드물다. 과학과 기술, 학문의 성과는 모두 이런 몰입의 결과다. 그 속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으면 일과 공부, 놀이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몰입은 시스템이 강제하는 성실보다 훨씬 질 높은 집중력을 낳는다. 하지만 고수의 수준에 이르는 데는 몰입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연애 감정이 시들해질 때가 찾아오듯, 중독 상태가 아닌 한 시간이 지나면 어떤 일이든 열기와 재미가 식기 시작한다. 이때는 바로 근면 성실하게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이 고비를 넘지 못하면 영영 아마추어에 머물게 된다. 그래서 한때 바둑에 빠졌던 사람들도 대개는 5~7급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 고비를 넘어서면 1~2급에서 또 한 번 고비가 찾아오고, 그 고비를 넘으면 프로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된다. 삼류 프로도 아마추어에 비하면 하늘같은 고수인 셈이다.
일에서의 집요함과 성실함을 달리 말하면 ‘프로 근성’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삼류라 할지라도 프로는 아마추어에게서 보기 힘든 집요함과 성실함을 갖고 있다. 프로 세계에서 일류는 집요함과 성실함, 거기에 더해 비전과 성찰력까지 갖추고 있다. 자기와 상대를 읽을 줄 알고, 세상을 읽을 줄 아는 것이다. 학문의 세계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중독 상태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세계이다.
게임에 중독된 아이들이 프로게이머가 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운 좋게 프로의 세계에 진입할지라도 금방 도태될 수밖에 없다. 중독은 성찰력이 마비된 상태이다. 도박에 중독된 사람이 늘상 돈을 잃는 것은 자기를 읽는 힘이 없고, 따라서 판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타짜들은 결코 도박에 중독된 사람들이 아니다. 프로게이머들이 게임에 중독되지 않듯이. 판을 읽는 힘, 상대를 읽는 힘은 자기를 읽는 힘에서 나온다. 바둑의 고수들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 판을 한 걸음 떨어져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출 때 진정한 프로가 된다.
인생이 게임이라면, 승패의 열쇠는 몰입의 능력과 동시에 거기서 한 걸음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성찰력, 그리고 고비를 만났을 때 물러서지 않는 근면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주류의 집요함과 성실성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은 이러한 힘을 기르는 데 있을 것이다. 출근 카드, 성과급 같은 시스템이 강제하는 성실이 아닌 자발적인 성실을 낳는 몰입은 비교적 쉽다. 신명身命의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면 된다. 다행히 우리는 기질상 그 에너지를 더 많이 내장하고 있다. 신명은 우리 몸속에 프로그래밍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한때 수백만 개의 촛불이 타오를 수 있었던 것도 이 신명의 에너지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신명의 에너지만으로 넘어설 수 없는 산이 있다. 촛불이 시들해진 것도 그 산에 가로막힌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명박산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명박산성 같이 허접한 컨테이너 블록도 넘어서지 못하는 근본 원인을 보자는 거다. 내공의 부족, 비전과 통찰력의 부족. 비전을 갖추려면 현실을 읽고 미래를 읽을 수 있는 내공이 있어야 한다. 몇 수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실력, 꿈과 비전을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 68혁명이, 촛불 집회가 그러했듯이 타오르는 열정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열정이 아닌 냉정한 이성으로 갈고닦은 내공이 필요하다. 오늘날의 유럽 사회도 68혁명 세대가 지난 40년 동안 기른 내공만큼 건강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내공을 기르지 못하면 영영 7급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 주류의 뒷담화나 까는 비주류로.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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