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책의 역사인가?
책의 재료는 점토판일 수도 대나무일 수도 비단일 수도 종이일 수도 있다. 재료들은 경쟁했고, 최종적으로 종이가 승리했다. 책은 종이란 물질을 거의 유일한 자기표현 형식으로 선택했다. 인쇄술의 발명은 책의 무한한 자기복제를 허락했다. 책은 복제되어 독자에게 전달됨으로써 생명을 얻는다. 인간의 언어는 종이 위에 문자로 고정되고, 모든 사유와 정보가 종이책을 통해 교환되는 것이다.
이제는 책도 디지털화하고 있으며 장차 얇은 컴퓨터 모니터가 종이책을 완벽하게 대체할지 모른다. 이 대체는 지식과 정보의 유통·교환 방식에 엄청난 변화와 충격을 불러올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지 책의 자기표현 방식의 변환일 뿐이다. 종이에서 모니터로의 급격한 변화는 종이책을 제작하거나 종이책을 읽어왔던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럽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일 수 있지만, 책의 역사가 끊임없는 자기변신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사실 이 변화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나는 이 변화가 죽간竹簡에서 종이로 바뀌었을 때의 변화와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디지털화가 책, 곧 지식과 정보의 유통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할지라도, 내가 거기 쓰인 문자를 읽고 해석하는 행위에는 어떤 변화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인류의 역사가 진보를 향한 변화라면, 그 변화의 이면에 아주 복잡한 요인이 있다면, 책 역시 반드시 거기에 끼일 것이다. 사유와 정보의 교환을 전제하지 않고 역사의 변화를 기대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씀이 복음서로 고정되지 않았다면,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의 인쇄술이 독일어판 성경을 낳지 않았다면, 마르크스의 저작이 간행되지 않았다면, 인류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책은 곧 인류 역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궁극적 요인의 하나다. 책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역사를 이해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사실 책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학문 분야는 따로 존재한다. 서지학 또는 문헌학, 인쇄기술학 등 책의 형태학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학문은 책의 내용을 문제 삼지 않는다. 책에 쓰인 내용을 연구하는 분야는 실로 무한하여 문학, 역사, 철학 등으로 얼마든지 세분화될 수 있다. 그러나‘책’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다산 정약용의 사유는 높이 평가되지만, 그의 저술이 인쇄되었는가 아니면 필사본으로 존재하는가, 만일 인쇄되었다면 언제 누구에 의해 얼마나 찍혔는가 하는 질문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런가 하면 다산의 저술이 어떤 유통구조를 통해 보급되었으며, 또 당대 독자를 얼마나 확보했는가 하는 문제도 다루지 않는다. 나는 다산의 사유와 함께 이 문제도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제기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서지학과 문헌학, 인쇄기술사와 문학과 역사, 철학 등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인가? 비유컨대 책의 물질적 형태에 관련된 문제와 책의 내용은 인간의 신체가 정신과 맺는 관계와 같은 것이다. 신체와 정신은 분리 가능한 것인가? 신체 없는 정신이 존재하지 않듯 책이라는 물질적 형태를 갖지 않는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으로 정신 없는 신체가 존재하지 않듯 내용 없는 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책의 형태학은 책의 내용학과 조우해야 하며 또 조우할 수 있다.
책이라는 신체가 정신과 조우하려면 책의 형태에 대한 고찰을 넘어 책에 생명을 불어넣는 조건들이 무엇인지 살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곧 책의 제작·탄생·유통·집적(도서관) 등의 문제와 긴밀히 관련될 것이다. 책의 물질적 형태의 변화가 책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책과 사회가 맺는 여러 조건이 책의 역사를 구성하는 것이다. 나의 소망은 이런 여러 조건을 가지고 조선시대 책의 역사를 구성함으로써 조선시대사를 읽어내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내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도전의 꿈
이 책은 조선시대를 다루지만, 그 전에 먼저 고려시대의 역사를 간단히 서술한다. 조선전기 서적문화의 기원은 고려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그리고 남아 전하는 서적의 절대다수는 조선의 것이다. 지금 전해지는 고려의 서적은 극히 미미한 양이고, 서적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료 역시『고려사』를 비롯한 소수 문헌에 지나지 않는다. 고려의 서적은 이자겸의 난이나 무신난 같은 내란과, 몽고와 홍건적의 침입으로 인해 거의 망실되었다. 아울러 고려의 서적문화에 대해 증언할 문헌자료 역시 대부분 사라졌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고려사』와『고려사절요』, 문집 몇 종과 소수의 금석문일 뿐이다. 고려의 인쇄와 출판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많지만 알 수 있는 것은 드물다. 그런 탓에 고려에 대한 기술은 그야말로 희미한 밑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다만 한 가지 꼭 해두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 고려의 인쇄·출판을 생각했을 때 거의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두 가지 열쇠말이 있다.『 팔만대장경』과금속활자가그것이다. 이 둘은 ‘민족의위대한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라. 이 위대한 두 유산이 다른 모든 것을 삼켜버리지 않았는가를. 예컨대 인쇄·출판 문화에서 보다 본질적인 문제, 예컨대 출판 시스템과 서적유통, 발행한 서적의 성격은『팔만대장경』과 금속활자의 그림자에 가려졌다. 이 점은 반성되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인쇄·출판 문화에서 큰 변화가 시작된 시기는 고려 말이다. 조선을 건국하는 새로운 혁명주체가 탄생하고 난 뒤에야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다. 정도전鄭道傳은 조선을 건국했던 혁명주체답게 고려와 변별되는 새로운 체제와 문화를 기획했다. 이 기획은 서적 문화에도 공히 적용되었다. 그는 성리학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는 사대부의 나라를 구상했던 바 그 기획은 오로지 인쇄와 출판으로만 가능했다. 정도전은 금속활자로 서적을 찍어내 그 구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는 태종에 의해 제거되지만 그의 기획은 조선으로 고스란히 이관되어 구체화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의 서적에 관해 간단히 서술하면서 정도전의 기획이 갖는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금속활자와 조선
조선의 출판이 금속활자 주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금속활자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금속활자’라고 했을 때 당신의 뇌리에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추측건대 그것은 아마도 ‘세계 최초’라는 말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연도를 외는 데 비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구텐베르크보다 몇 년 빨리’란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갈 것이다.
‘구텐베르크보다 빨리’라는 말의 이면에는 복잡한 사유의 뭉치가 있다. 그것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위대한 사건이었음을 내포하는 한편 ‘……보다’ 우월함을 드러낸다. 위대한 문화적 발명에서 우리가 서양보다 앞섰음을 암암리에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열등감이다.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보다 몇년 앞서 발명되었다는 말에는 서양에 대한 우리의 콤플렉스, 좁게 말해 서양의 근대에 대한 콤플렉스가 작용하는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지식의 전파와 유통에 일대 혁명을 일으켜 서양의 근대를 견인했던 것은 췌언을 요하지 않는다. 실로 구텐베르크에 의해 새로운 세계가 탄생했다. 그렇다면 금속활자를 만든 고려와 그 활자를 보다 보편적으로 사용한 조선을 구텐베르크의 시대와 등치시킬 수 있을까? 금속활자의 궁극적 의미가 활자의 재질이 금속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역사적 영향력에 있다고 한다면, 양자는 결코 동일한 결과에 도달하지 않았다. 조선의 금속활자는 독서인구 증가, 지식의 해방, 지식의 값싼 공급과는 상관성이 희박하다. 나의 판단으로, 고려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활자의 재질이 금속이라는 공통성 외에 다른 공통성은 없는 것 같다. 두 활자는 저 멀리 떨어져 상관 없는 두 공간에서 각자 독립적으로 일어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금속활자가 끊임없이 운위되는 이면에는 강고한 민족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금속활자의 최초 탄생지’라는 영광은 활자와 인쇄에 대한 광범위하고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했다. 김두종의『한국고인쇄기술사』란 기념비적 업적을 위시하여, 천혜봉의『한국전적인쇄사』에서 윤병태의『조선 후기의 활자와 책』에 이르기까지, 활자와 인쇄 문제에 기울인 노력은 연구인력 부족이라는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혁혁했다.
그 연구결과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아름다운 금속활자를 만들어냈다는 것 외에 그 활자와 관련해 우리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조선시대에 금속활자는 후기에 나타난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국가의 소유였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민간에서 제작되어 그 기술이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던 데 반해 조선의 금속활자는 오로지 국가의 소유물이었다. 이는 과연 어떤 의미인가? 금속활자란 본래 대량의 인쇄물을 얻는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조선의 금속활자가 대량의 인쇄물을 쏟아냈던가? 이런 질문 앞에서 나는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금속활자’에 대한 논의는 그보다 더 중요시되어야 할 것, 곧 ‘활자로 인쇄된 책’자체를 집어삼킨다. 우리가 금속활자를 찬양하느라 몰두하는 그 시간에 책을 둘러싼 다종다양한 담론은 망각되었다. 그래서 나는 조선시대의 금속활자를 민족문화의 화려한 꽃으로 보지 않고 다만 조선이라는 국가 내부의 인쇄·출판이 만들어낸 역사라는 콘텍스트에서 읽어낼 것이다.
한글, 민중문자의 탄생과 책
말하고자 해도 자기 생각을 펼쳐낼 수단이 없는 백성을 위해 세종은 한글을 만들었다. 아마도 조선의 발명품 중 가장 위대한 것을 꼽으라 하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한글을 꼽을 것이다. 사족士族을 위한 국가가 민중을 위해 그토록 합리적이고 익히기 쉬운 문자를 발명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만약 조선 전기가 아니었다면, 세종이 아니었다면 한글은 발명되지 못했을 것이다.
세종의 시대는 한편 금속활자의 시대였다. 금속활자를 세종이 창안한 것은 아닐지라도 세종은 이를 수단으로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인쇄함으로써 그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한글과 금속활자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한글 금속활자’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양자의 결합이 아마도 한글로 쓰인 책을 무수히 쏟아내며 민중에게 지식을 쏟아 부었으리라 상상하는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인쇄기술만으로 책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연 한글과 금속활자는 잘 결합되었는가? 아니 목판으로 인쇄된 한글 책이 있었던가? 있었다면 얼마나 있었으며, 어떤 의도로 어떤 내용을 담은 것이었던가?
국가와 출판
책의 출판 여부는 누가 결정하는가? 현대의 출판에서 그 주체는 출판사다. 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한국의 경우 빨리 잡아야 18세기 말에 출현한 방각본坊刻本에서 출판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고, 보다 명백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19세기 말 연활자鉛活字 인쇄 방식을 채택한 민간의 상업적 출판사가 등장하면서부터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출판의 주체는 누구였던가? 우리는 그 주체로 국가, 지방행정기관, 사찰, 서원 등을 상정할 수 있다. 이 외에 순수한 민간 영역에서 개인적 차원 혹은 문중이나 지식인 그룹에서 주관하는 출판이 있다. 개인의 문집이나 족보 등이 그 예다. 또 조선 후기에는 미약한 수준이지만 민간의 상업적 출판업자인 방각본 업자가 출현한다. 하지만 조선 전기로 한정한다면 출판의 주체는 중앙의 주자소, 교서관과 지방행정기관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사찰이 출판의 중요한 주체였으나 조선 건국 이후로는 그 지위를 잃는다. 서원은 조선 후기에 와서야 출판의 주체로 부상한다. 조선 후기에 민간 영역의 인쇄·출판이 다소 활성화됨으로써 국가의 출판 독점에 균열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조가 종언을 고할 때까지 국가가 인쇄·출판의 주류였던 점은 바뀌지 않았다.
국가가 인쇄·출판을 독점한다는 것은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중국은 송대에 이미 민간의 출판사와 서점이 존재했으며,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이후 민간에서 출판사와 서점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에 반해 한국은 민간 영역의 출판이 국가의 출판 독점을 압박하거나 능가하거나 전복시킬 정도로 성장한 적은 없었다. 출판물의 성격으로 볼 때 도리어 국가가 담당하지 못한 부분을 보완하는 역할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국가는, 특히 중앙의 주자소와 교서관은 어떤 것을 출판할지 그 대상 선정부터 활자와 장인 결정까지 인쇄·출판의 전체 시스템을 일관되게 갖춘 유일한 기관이었다. 바로 이것이 한국 출판의 역사, 곧 책의 역사를 기본적으로 규정했다. 이 책에서 나는 그 내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책의 가격과 유통방식 그리고 서점
문고본은 책값을 떨어뜨리기 위해 나온 것이다. 박리다매라는 상업적 전략의 산물이지만, 어쨌든 지식 확산에 크게 기여한다. 서적의 값은 지식과 정보의 유통에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따라서 책값 연구는 서적의 문화사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서적의 가격과 그 시간적 변동을 계량적으로 알아낼 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책값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게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점이 지식의 유통과 보급에 장애로 작용했다는 것 정도다. 이 부분은 서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서적의 유통이라는 문제가 부각된다. 아무리 중요한 책이 있어도 유통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독자 손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 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서적의 유통은 책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의 서적유통에 관해서는 상세히 검토된 바가 없다. 한 사람의 사유가 어떤 경로로 유통되고 어떤 비평공간에서 읽히고 이해되고 평가되었는지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박지원의『열하일기』가 공간公刊된 것은 20세기 들어서였다. 그 전에는 오로지 필사본으로만 유통되었다. 필사본은 인쇄에 비해 불리한 유통방식이며, 숱한 오해를 낳기 마련이다. 정약용은 어떠했는가?『 목민심서』도『흠흠신서』도, 아니 모든 경학 관련 저작이 당대에 인쇄되어 유통된 것이 아니다. 정약용의 저작은 참으로 중요하지만 사실 당대 민중에게는 그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지식인 내부에서도 정약용의 방대한 경학 연구물을 읽어본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아주 가까운 극소수 지인들 사이에서만 겨우 읽히는 정도였다면,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닐 것인가?
책의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책의 유통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1만 권의 서적이 저 음습한 장서고藏書庫에 유폐되어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다면, 그 1만 권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서적의 유통 문제는 이래서 더할 수 없이 중요하다.
오늘날 서적의 유통을 전담하는 기구는 서점이다. 서점이 얼마나 대규모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서점은 서적의 구매자와 판매자를 직접 연결시키는 전문적 기구다. 인터넷서점도 구매자와 판매자의 연결방식을 사이버스페이스로 옮긴 데 지나지 않는다. 책이 확산되려면 아무래도 일정한 전문적 판매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중국은 송대에,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이후에 민간 서점이 출현했다. 그러나 조선에는 서점이 없었다.
책을 보다 널리 보급하고자 중종조에 서점을 설치하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그 논의가 명종조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서점은 설치되지 못했다. 이 책에서 나는 서점을 세우지 못한 이유와 저간의 사정을 밝히고자 한다. 그런데 결국 서점이 설치되지 못했다면, 서적은 어떻게 유통되었을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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