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이진오
주말에 집에서 뉴스를 보는데 잔혹한 살인사건 기사가 나오더라고요. 같이 텔레비전을 보던 아빠가 이런 말을 하셨어요.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저런 범죄를 저지르냐”고요. 문득 사람이 대체 뭐길래, 사람답게 사는 게 뭐길래 저런 말씀을 하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집 강아지 아둥이도 그런 범죄를 저지르진 않잖아요. 사람이 동물이나 식물이랑은 분명 다르겠죠. 그렇다고 저는 사람이 더 잘났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대체 사람답게 사는 게 뭔가요? 동물이나 식물과 어떻게 다르다는 건가요?
존재한다는 것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서 이 글을 읽고 있나요? 집에서요? 아니면 교실이나 공원 벤치에서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 책을 읽으며 사색에 잠겨 있을 여러분을 생각하니 왠지 대견스럽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을 둘러싼 이 세상에는 어떤 것들이 존재하나요? 우선 눈에 보이는 것들만 살펴볼까요? 우리가 모여 사는 도시가 있고, 수많은 생명체를 키우는 산과 바다가 있네요. 고개를 드니 해와 달 그리고 별이 빛나는 우주가 우리가 사는 이 지구를 품고 있군요. 이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에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볼까요? 사랑과 미움, 분노와 동정심, 불안과 희망은 물론이고 물건이나 일에 부여하는 가치나 의미 역시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이지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들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든 모든 것들은 마치 조그마한 텔레비전에 대자연과 광활한 우주가 펼쳐지듯 인간의 의식에 나타난답니다. 심지어 ‘아! 자연에서 태어난 나라는 존재는 이 우주에서 티끌보다 못한 존재구나. 나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겸손하게 살자’며 스스로를 낮출 때, 이런 생각 역시 다른 어느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마음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런 것들이 나타나는 우리 자신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요? 그런데 생명체인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탐구와 같습니다.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어렸을 때 읽었던 피노키오 이야기 잘 알죠? 말썽꾸러기 피노키오는 인형일까요, 사람일까요? 나무로 만든 팔과 다리만 보면 확실히 인형이죠. 그런데 가끔 피노키오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피노키오가 짓궂게 장난을 칠 때, 거짓말을 할 때, 울고 웃을 때는 사람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겉모습뿐만 아니라 말이나 행동, 태도 등 정신과 관련된 부분이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분해주는 요소일 것입니다. 어느 날 고릴라와 로봇이 여러분 교실에 들어와서 함께 수업을 듣는다고 상상해보세요. 털이 숭숭 나고 근육이 울퉁불퉁한 고릴라가 여러분 곁에 앉아 있으면 처음에는 좀 무서울 것입니다. 번들번들하고 각진 외모를 한 채 뒤뚱뒤뚱 걸어온 로봇은 생명체와는 거리가 먼 기계인형처럼 보일 테고요. 그런데 사람과 다른 이런 외모를 지닌 고릴라와 로봇이 얌전히 앉아 수업에 열중한다고 상상해보세요. 처음에 여러분은 이들을 쿡쿡 연필로 찔러보면서 다루기 만만한 동물이나 기계인형쯤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컴퓨터를 이용해서 선생님의 질문에 여러분보다 대답을 더 잘 하고, 가끔씩 교실이 떠나갈 정도로 웃긴 농담도 하면서 수업 분위기를 이끈다고 생각해보세요. 과연 이때도 고릴라와 로봇이 사람보다 못한 동물이나 기계인형으로만 보일까요? 아마 여러분과 동등한 자격을 갖춘 인격체로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겉모습은 우리와 다르지만, 말하거나 행동하는 게 사람과 유사하다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느끼겠지요. 이제 우리 인간에 대해 생각해볼까요?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라고 해서 모두 사람을 사람답게 보이게 하는 건 아닙니다. 좀 더 사람다운 말과 행동이 있지요. 가령 번뜩이는 지혜나 심금을 울리는 말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행동 등이 그것들이지요. 거짓말을 하고 짓궂게 놀기만 하던 피노키오가 언제 진짜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세요. 바로 책임감 있고 신중한 말과 행동을 했을 때입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사람답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동물이나 더러운 물건의 이름을 붙여 “xx 같은 놈아 사람답게 행동해라!”라고 말하지요? 말과 행동이 사람답지 못한 사람은 거짓말만 늘어놓던 피노키오처럼 점점 사람다움을 잃어간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신적인 면 외에도 뼈나 살처럼 물질적인 면도 지니고 있습니다. 나무인형이던 피노키오나 기계인형이던 로봇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몸도 기본적으로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지요. 다른 한편 우리는 동물과도 공통점이 있지요. 우리가 먹고, 자고, 뛰고, 자식을 낳듯이 고릴라와 같은 동물도 먹고, 자고, 뛰고, 자식을 낳습니다. 그런데 단순한 물질이나 동물과 우리는 어떤 부분이 다른가요? 겉모습만 보아도 금방 구분된다고요? 우리는 단지 겉모습이 아니라 정신이나 내면을 보여주는 말과 행동에 따라 사람다움을 판단한다는 사실을 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겉모습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 주목하며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 언어적 동물, 사회적 동물이라고정의합니다. 여러분이 키우는 애완동물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것 같다고요? 새들도 짹짹짹 말을 하고 늑대나 개미도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산다고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사유 능력은 동물과 다르지 않을까요?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은 자연에는 없었던 컴퓨터와 같은 도구를 발명하거나 법이나 도덕과 같은 행동 규칙을 만들기도 합니다. 또한 생존에는 꼭 필요해보이지 않는 감동적인 소설이나 음악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먼 미래를 걱정하거나 수천 년 전 과거나 현재를 반성하면서 자신을 변화시킬 생각도 하고요. 이러한 사유 능력 때문에 인간은 동물과 달리 세월이 흐르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 가능성이 있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을 ‘가능 존재’나 ‘역사적 존재’라 부를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라고 선언할 때 인간의 사유 능력은 이런 수준을 말합니다. 이 정도 수준의 사유 능력을 바탕으로 복잡한 언어와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면서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사람 안에는 사람다운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와 같은 물질적인 측면이나 고릴라나 사자와 같은 동물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인간만의 특징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인간, 자유롭기에 책임질 수 있는 존재
혹시 ‘매일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공부에 쫓기는 우리에게 과연 자유란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해본 적 있나요? 이렇게 공부하는 것은 여러분의 의지나 선택과 무관하게 이 시대에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원시시대에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따라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일정 부분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과 무관하게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은 우리들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학교나 직장을 떠나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런 일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곰곰이 생각한 후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여 행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지? 과연 제대로 살고 있나? 잘 사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본능에 따라 뭔가를 할 때 그것을 자유로운 행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본능과 무관하게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여 행할 때, 우리는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뭔가를 했다고 인정합니다. 본능에 예속되지 않고 의지의 자유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유 능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포함하여 의자, 나무, 집, 산, 도시 등 세계를 이루는 모든 존재자들이 가지는 자유는 그들이 지닌 사유 능력에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지 계산하는 사람이 있고, 그런 계산이 과연 인간적인 삶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이중 어떤 경우에 인간은 더 자유로워지는 것일까요? 물론 후자겠지요. 어느 정도 실천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 사유 능력을 지닌 모든 인간은 눈앞의 이익을 뛰어 넘어 생각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동물로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타고난 본성과 사는 환경이 같더라도 똑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행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 책임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책임 존재’라고도 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인간이 무한정 자유롭다거나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얼마나 책임을 지느냐는 우리가 얼마만큼 환경이나 타고난 본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고려해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 사물 그리고 말의 관계
서동은
학교에 새로운 친구가 전학을 왔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15년을 넘게 살았대요. 외국에서 온 친구라 신기하기도 하고, 한국말을 서툴게 하는 것도 재밌어서 저는 그 친구랑 이야기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독도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친구가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하는 거예요. 심지어 오늘 국사 시간에는 교과서에 나온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더라고요. 일본의 국왕을 죽였다고요.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국주의 침략자를 죽인 독립운동가라고 저는 당연하게 생각해왔거든요. 왜 그 친구와 저는 같은 사람, 같은 상황을 두고 다르게 부르는 건지, 대체 우리가 하는 말, 우리가 하는 생각은 누가 만드는 건지 궁금해졌습니다. 왜 우리는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이름을 지어서 부르는 걸까요?
말과 사물의 관계
평생 우리는 말을 배우고, 말을 사용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루도 말하지 않고 살 수 없지요. 그런데 말은 여러 가지 기능을 합니다. 그중 하나는 사물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지요. 우리는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각자 이름이 있어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들의 이름도 부르면서 생활합니다. 말은 또한 나의 생각을 표현해주기도 합니다. 즉 내가 생각한 것을 남에게 전달합니다. 이렇듯이 말은 우리 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만약에 말이 없어서 사물을 가리키지 못하고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어떨까요? 말없이 한 시간만 있어보면 우리는 말이 우리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금방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한 말은 그 말을 사용하는 문화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도 드러나고, 그 사람의 생각이나 가치도 알 수 있지요. 서양 사람이나 아프리카 사람이나 똑같이 말을 하며 살고 있지만, 말하는 방식에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한마디 말이 의미하는 것도 달라집니다. 나의 편에서는 오른쪽이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왼쪽이 되는 것처럼, 자신이 있는 시간과 공간의 위치에 따라 사물에 대한 태도 또한 다르지요.
어떤 사람의 이름이나 장소에 대한 명명도 아주 중요합니다. 만약 선생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잘 몰라서 부르지 못하고, 이름을 알고 있는 다른 친구들과만 대화를 한다면 여러분은 매우 섭섭할 것입니다. 마치 나의 존재가 없는 것처럼 무시당한다고 느끼기도 하겠지요. 이름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름을 가지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학교에서 는 선생님이지만 집에서는 아버지로 불리는 것처럼, 같은 대상이지만 이름을 다르게 부르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경험합니다. 그 다른 이름에 따라 다른 역할이 주어지고, 다른 사건이 일어남을 경험하는 것이지요.
‘금성과 샛별’, ‘독도와 다케시마’ 등은 같은 대상에 대한 서로 다른 이름 붙이기의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 섬인 울릉도 옆에 있는 독도를 자꾸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섬은 독도가 아니라, 다케시마竹島라고 말합니다. 이 섬은 독도獨島일까요? 다케시마일까요? 또 일본은 우리나라 동쪽에 있는 바다가 동해가 아니고 일본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이 바다는 동해일까요? 아니면 일본해일까요? 과연 어떤 이름이 맞는 걸까요? 일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다케시마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한국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케시마라는 섬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 섬이 독도로 불리지 않고 다케시마라고 불리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지금 당장은 몰라도,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 섬은 일본 영토에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만약 세계지도에 그 이름이 국제적인 이름으로 불린다면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은 그 섬이 일본에 속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일본이 언젠가 그 땅을 빼앗은 다음,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모두 그것을 당연하게 여길 것입니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가에 따라 자신의 것이 되기도 하고 남의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이름을 어떻게 부르느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지요.
또 우리가 무심코 부르는 이름에는 어떤 사람의 생각이 긴밀하게 반영되어 있으므로 잘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제국주의 시대’라고 하면, 식민지 지배를 했던 일본이 주인이라는 입장을 반영한 표현이지요. 하지만 ‘일본식민지 시대’라고 하면 식민지 지배를 당한 나라의 입장을 반영한 표현이 됩니다. 영어에 underdevelopment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한국말로 ‘개발도상국’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저개발 국가’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발전된 국가와 대비되는 의미로 저개발 국가라고 불릴 수도 있고, 개발 국가에 가까이 있는 나라를 지칭하는 이름인 ‘개발도상국’이라 불릴 수도 있지요. 이름과 언어가 바뀌면 그에 따라 사물이 가지는 뜻과 가치도 달라집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예들이 아주 많습니다.
무지개는 몇 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는 무지개가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일곱 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다섯 가지 색깔을 가졌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무지개에는 몇 가지 색이 있는 것일까요? 또한 개는 ‘멍멍’ 짖는 걸까요, 아니면 ‘바우바우’ 짖는 걸까요? 우리는 당연히 ‘멍멍’ 짖는다고 생각하지만, 미국 사람이나 독일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연 어떤 게 진짜 개 짓는 소리일까요? 이렇듯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과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문화가 달라지면 소리와 색깔도 다르게 알려집니다.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어른들은 뜨거운 국을 마시면서도 ‘아 시원하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더운 여름, 찬바람을 받거나 물에 뛰어들었을 때도 시원하다고 말하지요. 어떤 표현이 맞을까요? 혹은 표현은 서로 같지만 다른 느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친구가 길에서 넘어져서 ‘아이고 아파~’라고 말하면 나는 그 친구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나의 비슷한 경험에 입각해서 친구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나는 절대로 그 친구가 그 순간 느낀 고통을 경험할 수 없을까요? 말은 이렇게 우리의 감정과 느낌뿐만 아니라 세상을 보는 우리의 태도와 생각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로 세상을 ‘창조’하면서 산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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