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중독의 위험성
술이나 담배도 그렇지만 책도 한번 중독되면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 책 중독에 걸린 사람은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귀한 시간을 책에 고스란히 헌납한다. 책 중독 현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책이 눈앞에 없으면 안절부절못한다. 길을 걸을 때도 책이 손에 들려 있지 않으면 불안을 느낀다. 둘째, 책이 없으면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따분해서 견디지 못한다. 셋째, 책이 없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읽을 책을 찾아낸다. 넷째, 책 중독자는 물불 안 가리고 책을 사들이는 책 수집광이 되기도 한다. 다섯째, 인생의 다른 중요한 일을 제치고 책 읽기에만 몰두한다. 알고 보면 책도 마약 못지않은 강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책 중독자들은 글자로 만든 술을 마시고 문자로 제조한 담배를 피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들은 문자의 숲을 하염없이 헤매느라 소중한 인생을 허비한다. 그러지 말라고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다. 그들이 책에 바치는 과도한 신뢰는 때로 신앙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책 중독자는 책을 신처럼 모시는 책 경건주의자가 된다. 책에 세상의 진리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책을 완전히 믿어버린다. 그러다 보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지도 모른 채 문자의 감옥에 갇혀 죽도록 책만 읽는 책의 수인囚人으로 전락한다. 책 중독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거나 책 읽는 방법에 대한 책을 쓰기도 하고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생각들을 모아 서평집을 내기도 한다. 그것은 그들의 선교 활동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안내와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 책을 많이 읽으면 인생의 앞길이 환해지고 세상이 투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그들의 말을 믿어야 할까? 과연 책을 많이 읽으면 누구라도 품위 있는 교양인이 되고 존경받는 인격자가 되는 것일까? 독서가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되레 일상을 황폐화시키지는 않을까? 책을 많이 읽다가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마저 상실한 채 무거운 머리만 가진 자폐적 인간이 되지는 않을까?
생명력의 상실
인간은 문명화되면서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원시적 생명력을 상실했다. 철학자 안병욱은 지성, 감성, 야성이 균형을 이룬 삶을 이상적인 삶으로 생각했는데 문명인은 그중 야성을 상실했다. 함석헌이 즐겨 말한 ‘들사람 얼’이 있어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도 멀리 갈 수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책이 등장한 이후 책에 붙잡힌 인간은 원초적 생명력을 잃기 시작했다. 구텐베르크 이전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살던 사람들은 야생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책은 ‘들사람’을 ‘실내인’으로 만들었다. 백면서생白面書生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실내에서 책만 마주보고 앉아 있어서 얼굴이 하얗게 된 사람을 말한다. 책에 묻힌 하얀 얼굴은 시간이 갈수록 노랗게 변색되기도 한다. 지난날 ‘술 권하는 세상’을 한탄하다가 문학병에 걸린 작가, 세상을 원망하는 자폐적 지식인들은 책에 절고 술에 절어 누렇게 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책 속에 들어앉아 글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먹물’은 약동하는 삶의 에너지를 앗아간다. 책은 생생한 경험과 사고를 억지로 문자로 잡아두고 있다. 문자와 책은 푸르른 삶이 불타고 남은 회색빛 재에 불과하다. 독서는, 말하자면 타고 남은 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이다. 메마른 책에 숨을 불어넣어 죽은 생각들을 살려내다 보면 책 읽는 사람의 몸에서 에너지와 물기가 빠져나간다. 문자는 현실 세계의 생생한 경험과 싱싱한 생명력을 잔혹하게 짓밟아버린다. 그래서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그의 시 ‘책에 부치는 노래 1’에서 이렇게 썼다.
내가 책을 덮을 때
나는 삶을 연다
(…)
어떤 책도 나를
종이로 쌀 수 없었고,
인쇄로
나를 채울 수 없었으며
거룩한 간기(刊記)로도 채울 수 없었고,
여태껏 내 눈을
덮지도 못했다,
나는 책에서 나와 과수원으로 살러 간다.
내 목쉰 노래 일족(一族)과 함께,
달아오르는 금속 일을 하러 가고
산속 난롯가에서
훈제 쇠고기를 먹으러 간다.
(…)
책이여, 나를 놓아다오.
나는 여러 권의 책으로
뒤덮이지 않으련다,
나는 작품집에서
나오지 않았고,
내 시들은
시들을 먹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극적인 일들을
삼켰고,
험악한 날씨로 컸으며,
땅과 사람들한테서
음식을 얻었다.
신발에는 먼지가 낀 채
나는 가는 중이다
신화에서 자유롭게:
책들은 서가로 보내자,
나는 거리로 나가련다.
나는 삶 자체에서
삶을 배웠고,
단 한 번의 키스에서 사랑을 배웠으며
사람들과 함께 싸우고
그들의 말을 내 노래 속에서 말하며
그들과 더불어 산 거 말고는
누구한테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었다.
건강의 약화
모든 중독이 그렇듯이 책 중독도 자칫하면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될 수 있다. 책을 너무 많이 읽으면 건강이 나빠지고 현실부적응자가 되며 심한 경우 정신이상자가 되기도 한다. 술 중독자가 술에 절어 죽듯이 책 중독자는 책에 파묻혀 죽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에게 책 더미는 미리 파놓은 무덤이다. 지나친 독서가 건강을 해친다는 담론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16세기 프랑스에 살았던 몽테뉴는 “책에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점이 있다. 책을 읽는 동안 정신은 활동을 하는데 신체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신이 활동을 하지 않으면 졸음이 오는 것처럼 신체가 움직이지 않으면 생명이 위축된다”라고 썼다. 그래서 그는 짐을 챙겨 말을 타고 로마로 여행을 떠났다.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책이 귀족과 부르주아를 넘어 일반인들 사이로 널리 퍼지면서 지나친 독서가 불러오는 건강상의 해악은 개인 차원을 넘어 공중 보건의 차원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18세기 말 영국에서 작성된 한 보고서는 과도한 독서로 인한 신체적 증상으로 두통, 시력감퇴, 발진, 구토, 빈혈, 현기증, 뇌일혈, 폐질환, 소화장애, 변비, 우울증, 정신착란 등을 제시하고 있다.
출판사 편집자들이야말로 문자와의 싸움을 일상적으로 전개하는 사람들이다. 갈리마르, 쇠이유, 알뱅 미쉘, 플라마리옹, 그라세, 미뉘 등 프랑스의 유명 문학출판사에서 일하는 편집자들의 책상에는 무명작가들의 원고가 수시로 도착한다. 출판사의 편집자는 산처럼 쌓인 그 많은 원고들 가운데 출판할 만한 원고를 찾아내기 위해 쉴 사이 없이 원고를 읽는다. 그렇게 해서 출판할 원고를 솎아내고 골라내고 나면 그 원고가 책으로 나올 때까지 여러 번에 걸쳐 교정지를 읽고 또 읽으며 세련되게 다듬는다. 유능한 편집자가 되려면 출판 시장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 자신의 출판사는 물론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신간들도 읽어야 한다. 더군다나 그렇게 일로 하는 독서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독자로서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도 읽어야 한다. 출판사 편집자로 30여 년 동안 오로지 책만 읽어왔다는 아니 프랑수아는 그런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책과 바람난 여자』라는 제목의 자전적 소설 한 편을 썼다. 이 책에서 그녀는 책 읽는 사람의 신체적 고통을 이렇게 묘사했다. “책을 가지고 다니는 일만으로도 독서광은 부두노동자로 변하고 만다. 간단히 말해, 적어도 3킬로그램을 어깨에 메거나 등에 짊어지고 다니다 보면, 제2경추부터 미저골에 이르기까지 척추가 변형되어 망가진다. 고개를 숙이고 책을 들여다보는 모든 독서광을 호시탐탐 노리는 목 부분의 관절통이나 책을 읽을 때면 늘상 어딘가에 괴고 있는 팔꿈치에 생기는 까끌까끌한 못이나 접촉성 피부염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어디 척추와 목뿐인가. 책을 많이 읽다 보면 눈이 침침해진다. 잘 보이던 글자가 점점 희미해진다. 그래서 돋보기를 코에 걸치게 된다. 신경을 쓰면서 오랫동안 책을 읽다 보면 예민한 위에 부담을 주게 되고 지속적인 위장장애를 겪게 된다. 햇빛을 보지 못해 얼굴이 창백해지거나 누렇게 된다. 붙박이 장롱처럼 방 한구석에 고착되어 앉아만 있다 보니 무릎에도 문제가 발생해 걷는 데 지장이 생긴다. 편두통이 생기고 온몸이 쑤시고 뒤틀린다. 그러니 부디 그런 상태가 되지 않게 스스로를 조절하며 책을 읽을 일이다. 아니, 일정한 시간 이상으로는 책을 읽지 말아야 한다.
직접경험 기회의 축소
책만 끼고 살다 보면 현실에서 멀어져 세상 물정을 모르게 된다. 세상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직접체험이 점점 줄어들고 책을 통한 간접경험만 무작정 늘어난다. 직접체험이 인격 형성을 비롯한 인생행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독서를 통한 간접경험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독서만 하다 보면 직접경험을 할 시간이 줄고 모든 것을 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하려는 습관이 생긴다. 간접경험이 직접경험을 대신할 수는 없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책에 쓰인 말보다 진솔한 마음이 더 크게 사람을 움직인다”고 말했고 니체는 “공부를 하고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현명해질 수 없다. 여러 가지 다양한 체험을 함으로써 사람은 현명해진다”고 말했다. 제대로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책만 읽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무슨 일이든지 열정을 가지고 해보아야 한다.
문자를 통한 지식 숭배를 경계하고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 책은 인생을 망치는 위험한 대상이다. 루소는 자신이 쓴 책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며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지칭한 『에밀』에서 책에 의한 교육이 아니라 자연에 의한 교육을 주장했다. 이 책의 주인공 에밀은 열네 살에 접어들어 “책이 싫다”고 선언한다. 그 이유는 책은 우리에게 잘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만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는 한 권의 책을 추천했다. 자연에 내던져진 인간이 낯선 상황에서 새로운 삶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그린 『로빈슨 크루소』가 바로 그것이다. 무인도에 버려진 로빈슨 크루소가 현실에서 부딪치는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가는 과정이야말로 살아 있는 교육이라고 본 것이다. 루소는 에밀이 책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직접체험을 통해 배우기를 바랐다.
시인 정현종은 숲이야말로 최상의 학교라고 생각한다. 그는 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학교 교육에 회의적이다. 그에게는 자연이야말로 온갖 배움의 원천이다. “자연은 예술과 더불어 정서적 윤택의 원천이며 생명현상에 대한 민감성의 모태기 때문이다.” 생텍쥐페리는 『인간의 대지』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대지는 우리에게 온갖 책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왜냐하면 대지는 우리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장애물과 스스로 겨룰 때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비행기 조종사에게 대지의 저항이란 폭풍우, 갑자기 솟아오르는 낭떠러지, 삼나무 뿌리라도 뽑아버릴 듯한 회오리바람 등등이다. 그런 장애물들은 책의 글자를 통해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현실의 모험을 통해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헤쳐 나가야 한다.
설익은 지식인의 범람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이 있다. 책깨나 읽은 사람들 중에는 아는 척하기에 바쁜 사이비 지식인이 많다. 책을 어설프게 많이 읽은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을 자신보다 지적으로 열등한 사람으로 간주하여 자신이 지금껏 책을 읽어서 알게 된 정보나 지식, 가치나 관념을 가르치려는 경향을 갖게 된다. 잘 알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서도 아무런 대안 없이 이러쿵저러쿵 비판만 늘어놓는다. 책에서 읽은 어설픈 지식을 떠들어대는 설익은 지식인들은 세상을 밝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어지럽게 만든다.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자기 나름대로 사리를 판단하고 주체적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 읽은 책에 나온 내용을 마치 자신의 생각처럼 이야기하며 지적 허세를 부린다.
“자신의 사상을 갖지 않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은 틈날 때마다 책을 읽는 일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그에게 “책에서 얻은 다른 사람의 사상은 타인이 먹고 버린 쓰레기고 타인이 입다 버린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이나 급격한 정치 변동의 시기에는 그렇게 부화뇌동하는 사이비 지식인들이 날뛴다. 무신론적 계몽주의 철학 입문서를 두어 권 읽은 사람들이 프랑스 혁명 시기 귀족들을 공격하는 데에 앞장섰고, 마르크스-레닌주의 해설서 몇 권 정도 읽은 사람들이 러시아 혁명 때 영주들을 몰아내는 일에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반유대주의 소책자나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은 사람들이 나치 전위대가 되었고, 마오쩌둥의 ‘빨간책’으로 불린 서적을 읽은 청년들이 홍위병이 되었다. 그들이 책을 읽는 대신 루소나 정현종이 말한 대로 들이나 숲에서 자연과 함께 지냈더라면 그런 무자비한 폭력의 축제에 그렇게 쉽게 참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실 부적응
책에 흠뻑 빠지다 보면 책의 내용이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르트르는 자서전 『말』에서 책에 푹 빠졌을 때는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본, 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파리 한복판 뤽상부르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보다 더 사실적으로 보였고, 책에 나오는 원숭이가 진짜고 동물원의 원숭이가 가짜로 보였다고 고백했다. 사르트르처럼 부유한 집안의 관념적 지식인이라면 몰라도 각박한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책은 멀리해야 할 물건이다. 작품 속 허구와 현실을 혼동하면서 어떻게 현실을 타개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책을 숭배하다 보면 문약하고 우유부단해지며 실천력이 떨어진다. 책은 생활력이 없는 백수나 잉여인간을 만든다. 중세 기사도 소설을 지나치게 많이 읽는 바람에 현실과 유리되어 환상 속의 원정을 떠나는 돈키호테야말로 독서가 만든 현실부적응자의 전형이다. 그가 첫 번째 원정에서 돌아와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마을의 신부와 돈키호테의 조카딸이 그의 서재에 있던 100여 권의 책을 창밖으로 던져 불태워버린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문자의 독배를 즐겨 마시는 책 중독자들은 활자에 스스로를 유배시키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자발적 유배에서 시작하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이 될 수도 있다. 독서는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과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태를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독서에 몰입하면 할수록 세상의 흐름과 유리된다. 책에 나오는 이상적인 이야기만 생각하면서 살다 보면 각박하고 무자비한 현실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그 결과 현실부적응자 내지는 현실도피자가 되기 쉽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가난한 사람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책이란 도대체 뭣 하는 물건입니까. 터무니없는 거짓말만 늘어놓은 게 아닙니까. 소설책이란 것은 정말 백해무익한 물건입니다. 허튼 수작을 하기 위해 쓴 것들입니다. 그런 건 빈둥빈둥 놀고먹는 게으름뱅이들이나 읽는 물건이지요.” 평생 먹고살 것이 보장된 귀족이나 재산가라면 책을 벗 삼아 인생을 탕진할 수 있다. 그러나 거친 현실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생활인이라면 책과 멀어져야 한다. 그래야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영성의 고갈
신앙은 말과 글을 넘어선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썼다. 괴테의 『파우스트』 5막 2장에는 “흉측한 지옥아! 입 벌리지 마라. 루시퍼여 오지마라/내 책을 모두 불태워버려야지, 오 메피스토펠레스여!”라고 외치는 파우스트의 대사가 나온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입을 떡하니 벌린 지옥으로 끌려 들어간다.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박학다식은 참다운 믿음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대한 지식이 많다고 해서 마음의 참평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불행은 지식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신학자들이 이성을 동원하여 책을 읽고 또 책을 쓰다 보면 오히려 신앙이 약해지거나 사라진다는 말도 있다. 책을 통해 얻는 지식은 굳건한 믿음을 갖고 영성의 수준을 높이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영성은 굳건한 믿음을 낳지만 그와 달리 지성은 끝없는 의문을 낳는다. 성경의 전도서에 나오는 구절처럼 “책은 아무리 읽어도 끝이 없고/공부만 하는 것은/몸을 피곤하게 한다.”
누구보다 많은 책을 읽고 또 많은 책을 쓴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자신의 회심 체험을 다룬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 이렇게 썼다. “지식인들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생각의 상자나 지식의 상자에서 해방되려고 노력을 합니다. 지성을 거부하는 반지성의 단계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감히 지성인이라는 말을 쓸 수 없지요. 그런 점에서 겸손이 아니라 저는 지성의 근처에도 미치지 못한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확실한 것은 책에 의존해온 저의 지식에 대해 파우스트적 회의가 든다는 것입니다. 문학청년이나 하는 그런 회의를 이제서 알았나 싶어 창피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는 것과 몸으로 느끼고 깨닫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아주 작은 힘이지만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글을 쓰는 것과 말을 하는 천한 능력밖에 없사오니 그것이라도 좋으시다면 당신께서 이루고저 하는 일에 쓰실 수 있도록 바치겠나이다.”
자연으로부터의 소외
누구라도 더 나은 인생을 위해 책을 읽는 것이지 책을 읽기 위해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홀로 산보하거나 친구의 결혼식이나 집안 친척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시간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꼭 해야 할 일들이다. 아무리 책이 좋더라도 그런 일을 다 뿌리치고 책만 읽고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이니 독서를 위한 독서에만 시간을 바쳐서는 안 된다. 특히 아름다운 심성을 가꾸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과 자연과의 심미적 접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라는 말이 있지만 때로 책에서 벗어나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이 인생과 세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세상은 살아 있는 책이요, 조물주는 천하의 위대한 문장가다.” 19세기 조선의 선비 홍길주의 말이다. 그에게 진정한 독서는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을 꺼내 읽는 데 한정되지 않았다.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대자연과 일상을 읽어내는 것 또한 독서였다. “문장은 다만 독서에 있지 않고, 독서는 다만 책 속에 있지 않다. 산과 내, 새, 짐승, 풀, 나무 등의 세상만물과 일상의 세세함 속에 독서가 있다.” 홍길주는 자연을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로 보고, 이를 관찰하고 그 속에서 사유하는 일체의 행위를 독서로 규정했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책 읽을 시간만이 아니라 들로 산으로 나가 새와 나무와 시냇물과 아침 햇살과 저녁노을을 바라볼 시간이 필요하다. 케케묵은 먼지에서 해방되어 맑은 공기를 들이마실 시간이 필요하다.
책으로부터의 탈주
책과 삶은 서로를 밀어내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끌어당기는 관계여야 한다. 독서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것인데 책에 묻혀 정작 삶이 사라져버린다면 무엇을 위한 독서란 말인가? <중앙일보>의 책 서평란을 담당하면서 책에 파묻혀 살던 조우석 기자에게 어느 친구가 “조구라, 됐어, 이제 책 좀 그만 읽어. 이제부터는 그대의 삶을 살 때 아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조우석은 백기완 선생에게 이런 말을 듣기도 했다. “책을 버려야 책이 보이고, 그래야 세상이 온전히 보이는 법입니다. 책만 보고 있으면 엉덩이가 썩어요! 썩어!” 책을 통한 정보의 양이 많아질수록 직접 체험이 줄어들고 삶의 의미가 시들해진다. 그래서 때로는 책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책에 들어 있는 ‘먹물’은 중금속보다 더 해악이 클 수도 있다. 책이 죽어야 책이 산다. 책을 버려야 책이 보이고, 그래야 세상이 온전히 보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몸을 움직이는 ‘들사람’ 조르바와 머리를 쓰며 책을 많이 읽는 ‘실내인’ 사이의 대화가 나온다. 전자는 후자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 몇 해 동안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뜩 쓰인 책을 읽었을 겁니다. 모르긴 하지만 종이도 한 50톤쯤 집어삼켰을 테지요. 그래서 얻어낸 게 도대체 무엇이오. (…) 내 생각을 말씀드리겠는데 부디 화는 내지 마시오. 당신 책을 한 무더기 쌓아놓고 불이나 확 싸질러버리소. 그러면 누가 압니까? 당신이 바보를 면할지.” 흔히 책을 읽는 사람들은 몸을 써서 일하는 사람들을 바보로 알지만 여기서는 그 방향이 역전되어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 책을 읽는 인간을 바보로 취급하고 있다. 생명력을 상실한 백면서생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책 읽기를 멈추어야 한다. 책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책에 묻혀 살던 시인 정현종은 ‘빈방’이라는 시에서 책으로부터 벗어난 해방감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날이 추워지기 전에
도배를 하기로 한다
(…)
책을 모두 내다가
마루에 쌓는다
장작더미 같기도 하고
성벽 같기도 하며
폐허 같기도 하다
방이 텅 빈다……오오
나는 꽉찬다
이렇게 좋구나
(설명적이어도 할 수 없느니)
이렇게 좋구나
빈 책장을 향하여 나는 춤을 춘다, 발작적으로
그 빈 書架를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빈 걸 끌어안으며, 이렇게
한껏 폭발하는 法悅이 어디 있느냐
빈 걸 끌어안으며
빈방을 본다
흘러 넘치는 시선으로
책 속의 밤보다 더 깊은
밤을 빈 방과 더불어
오오 책 없는 데로 가야지
(…)
인간해방?
책에서 해방돼야지
말에서 해방돼야지
(…)
책 읽기는 가상의 현실이고 독서는 타인의 체험을 통한 간접체험이다. 그러나 나의 삶은 지금 여기서 진행되고 있고 나의 삶의 핵심은 나의 직접체험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러니 독서라는 간접체험에 빠져들어 삶이라는 직접체험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특히 자아가 형성되는 아동기에서 청년기까지의 시기에는 더욱더 직접체험을 많이 해보아야 한다. 사랑과 모험의 체험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문학책과 역사책을 제대로 읽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책은 다만 모든 것을 다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상상과 추체험을 통해 타인이 겪은 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는 보조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로 서재에서 벗어나고 책에서 해방되어 세상으로, 자연으로 나가야 한다. 산과 들로, 도시와 농촌으로, 지방과 외국으로 떠돌며 세상과 맞닥뜨리면서 인생을 배우고 세상 돌아가는 방식을 알아가야 한다. 사람을 만나고 자연을 체험하고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종교의 거룩한 예식에 참여하는 직접체험이 없이 독서를 통한 간접체험만 늘리다 보면 머리는 크고 다리는 약한 불균형 상태에 빠져 지식을 행동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게 된다. 꼭 문자로 된 종이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 독서가 아니다. 삼라만상이 다 문자요, 책이다. 삶이 곧 독서다.
그래도 책을 읽는 사람들
내가 아무리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를 위와 같이 줄줄이 제시해도 책 중독에 걸린 책벌레들은 내 이야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책 읽기를 계속할 것이다. 책벌레이자 ‘로쟈’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서평가 이현우는 벌써 이렇게 써놓았다. “책 따위야 읽을 사람만 읽으면 된다고 말하는 몽매주의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책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여러 교육기관이나 연구기관의 책임자들은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를 하나하나 제시하는 나에게 강력한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실례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국사학자 정옥자는 국가적 차원에서 책을 읽어야 할 이유를 이렇게 제시했다. “문화 능력은 책 읽기에서 길러진다. 교양과 품위는 책을 읽지 않고는 함양될 수 없고 구성원 모두 품격 있는 교양인이 되어야 비로소 고품격 사회가 되어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책을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