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말
포카라, 안나푸르나, 네팔
내팔 내전
18세기 후반부터 네팔 왕국은 구릉족 출신의 구르카 왕조가 집권했다. 왕국은 힌두교의 전통 아래 카스트 계급사회를 만들어왔다. 약 이백 년간 외부와 교류 없이 쇄국정책을 펼치며 소위 ‘신비의 나라’로 지냈는데, 20세기 초반부터 남쪽에서 인도와 영국의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력이라기보다는 외세의 영향으로 인해 1951년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었으나 이후 사십 년간 사실상의 왕정이 유지되었다. 1990년 마침내 다당제 민주주의를 골자로 한 개헌이 이루어지면서 개혁, 개방 그리고 민주화의 여망이 전국적으로 불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야당이 생긴 것 말고는 왕정시대와 비교해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고 사람들의 불만은 서서히 고조되기 시작했다.
1996년 2월. 다수당 중 하나였던 네팔공산당의 마오쩌둥주의 분파가 입헌군주제 폐지와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하는 프롤레타리아 무장봉기인 ‘인민전쟁’을 선포했다. 네팔에서는 이들을 지지하는 반군 게릴라를 ‘마오이스트’라고 통칭하는데 사실 마오쩌둥의 사상을 계승하겠다는 사상적 투철함과는 별 상관이 없다. 네팔공산당을 지지하고 왕정 폐지를 주장하는 반군을 통틀어 ‘마오이스트’라고 불러왔다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이런 게릴라 활동이 득세하게 된 배경에는 정치사회적 환경이 어디까지 꼬이고 꼬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며 ‘불평등 엑스포’를 벌이던 당시의 네팔이 자리하고 있었다.
극심한 빈부격차를 포함한 경제적 불평등과 카스트에 의한 신분적 불평등, 왕족을 배출했으나 소수민족이었던 구릉족과 다수민족인 네와르족 간의 분열, 곡창지대인 까닭에 더욱 수탈이 만연했던 테레이 평원지대와 수도 카트만두를 중심으로 한 산악도시 간의 지역적 차별, 기간시설과 에너지자원을 쥐고 있는 인도 등 외국자본의 착취 등이 얽히고설킨 상황이었다. 다당제 민주정이 도입된 이후 최대 야당이었던 통일사회주의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후 집권하였으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과격주의자들인 마오이스트 반군의 ‘인민전쟁’은 이념적 정합성과는 별개로 서민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마오이스트 반군 지도부 역시 원내정치세력이기도 한 네팔공산당의 분파였던 까닭에 이들의 행태 또한 정부보안군이 자행했던 고문 같은 인권침해 행위를 고스란히 답습하는 등 정국은 혼란에 혼란이 거듭되었다.
21세기의 시작과 동시에 네팔 왕가에서 희대의 막장드라마가 펼쳐진다. 2001년 6월 국왕의 동생이었던 갸넨드라는 재임 중인 국왕과 여왕 및 왕족들을 대거 학살하면서 왕권을 차지한다. 이듬해 갸넨드라 국왕은 국가안보라는 미명하에 정부해산령을 공포하고 선거를 무기한 연기시켰다. 그 다음해인 2003년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마오이스트 반군 소탕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책임을 의회에 물어 의회를 해산하고 왕정복고를 선언한다. 이에 일곱 개의 야당은 연합을 이루는데 이것이 ‘SPAThe Seven Party Alliance'이다. SPA는 마오이스트들과 연합하여 민주화 시위와 총파업에 돌입한다. 그러니까 ‘번다’는 단순히 뜻 맞는 사람들이 몰려다니면서 시위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야당연합의 공식적인 정치전술이었던 것이다.
2006년 4월, 우리의 1987년 6월처럼 대규모 민주화시위가 수도 카트만두를 비롯해 네팔 각지에서 진행되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갸넨드라 왕은 왕정을 포기하고 SPA와 하원의회에 정권을 이양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하원은 국왕의 면책특권과 각종 지위를 박탈했고, 십 년에 걸친 내전과 혼란은 소강 국면에 접어드는 듯했다. 하지만 왕정의 완벽한 폐지를 목표로 했던 마오이스트들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희대의 폭군으로 민심을 잃은 갸넨드라에 대한 사람들의 적개심도 마오이스트의 왕정폐지론을 지지하고 있었다. 다시 7개월간 SPA 정부군과 마오이스트 간의 내전이 진행되었고, 11월 마침내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12년간의 네팔 내전은 막을 내린다.
12년 동안 1만 4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그 몇 배에 달하는 이들이 망명을 떠났다. 주로 구릉족 브라만, 갸넨드라 왕정하에서 일했던 관리, 정부보안군에 복무한 장교들이 그들이었다. 그 중에는 까말 아저씨 바로 밑의 남동생도 포함되었다. 내전이 진행 중이던 2004년 말, 까말 아저씨의 남동생은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저 유명한 구르카 용병으로 이미 오랫동안 영국에서 지낸 사람이었다. 일반적인 구르카 용병들은 충분한 돈을 모으면 유럽에 정착해서 산다. 하지만 까말 아저씨의 남동생은 비록 늦었지만 고향에서 결혼도 하고 가족들과 다시 지내고 싶어 네팔로 돌아왔다. 마침 갸넨드라 왕정이 마오이스트 반군과의 싸움에서 힘에 부치자 정부보안군을 수혈하는 과정에서 보안군 장교로 임관하게 되었다. 교외 면사무소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던 까말 아저씨도 남동생의 소위 ‘빽’으로 군청 정도 되는 곳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아주 잠시 권력의 달콤함을 맛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외국 생활을 통해 견문이 넓었던 까말 아저씨의 남동생은 갸넨드라 왕정이 얼마 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했고, 가족들에게 편지 한 장만 남기고 부인과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떠났다고 했다. 졸지에 왕정 입장에서도 배반자의 가족이 되고 마오이스트 입장에서도 부역자의 가족이 되어버린 까말 아저씨 역시 언젠가 닥치게 될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사표를 냈다고 했다. 그 이후 아저씨는 일거리를 찾아서 포카라까지 흘러들어왔고, 그나마 배운 사람이었던 까닭에 영어를 하는 것이 수월했던 아저씨는 포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문 세르파처럼 해발 6천∼7천 미터를 넘나드는 고산등반을 할 수는 없었고, 내전을 겪으면서 영어께나 한다는 사람들은 죄다 포카라나 에베레스트로 몰려들어 경쟁이 심해졌다. 하지만 푼힐이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처럼 레저 등반을 원하는 관광객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공무원을 하던 때와 비교해 벌이는 그리 나쁘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까말 아저씨는 삼십대 이후로는 사무직을 해왔고 별 준비 없이 포터를 시작한 터라 요령이 없었던 까닭에 몇 년 사이에 피부도 많이 상하고 주름살도 깊이 패었다며, 사십대 후반의 나이에 비해 자글자글한 주름을 매만지며 담배를 쪽쪽 빨면서 이야기한다. 자신의 동생은 그나마 외국 생활을 오래 했으니 그렇게 유럽으로 떠날 수 있었지만, 자신이 만약 장교였던 동생을 믿고 욕심을 내서 중앙직으로 갔거나 공직에 좀 더 오래 머물렀다면 어디 망명 갈 생각도 못 하고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을지 모른다며, 이렇게 포터를 하면서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즐겁게 생각하며 산다고 했다.
마시면 바로 당뇨가 나올 만큼 달디단 뜨거운 찌아에 까말 아저씨는 굵은 설탕을 한줌 넣고는 모래 갈리는 소리가 나도록 휘저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단내가 느껴지는 찌아를 꿀꺽꿀꺽 마셔 한 잔을 비우더니 남은 담배를 다 피우고 자리에서 일어난 까말 아저씨가 내일은 천천히 내려갈 거니까 트레킹의 마지막 밤을 재미있게 보내라며 우리를 남기고는 포터 전용 숙소로 타박타박 발길을 옮겼다.
헌법이 사라진 세상
총선에서 승리한 야당연합은 2008년에 왕정을 완전히 폐지시켰고, 그 다음날부터 모든 동네에서 왕정의 흔적들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트리부반 국제공항에 입항해 있던 네팔 국적기들에 원래 적혀 있던 ‘Nepal Royal Airline’은 가운데 단어가 하얀 페인트로 모두 지워져 ‘Nepal Airline’으로 변해 있었다.
이백 년간 존속해온 왕정이 폐지되는 사건은 네팔 민중들에게 적잖은 기대감을 고양시켰을 것이다. 네팔공산당 마오쩌둥주의 분파가 여당이 되었고, 만 명이 훌쩍 넘는 마오이스트 반군 잔류자들 중 절반은 정부보안군으로 편입된다. 서로 총을 쏘며 죽이고 죽던 이들이 같은 군대에 소속되는 기현상이 생겨난 것이다. 아마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12년간의 내전 동안 발생한 난민들을 정착시키는 것에 실패했고 게토는 점점 늘어갔다.
민주주의하에서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고고한 이상과는 달리 단기간의 이익을 바라고 표를 던진다. 그런데 당시 네팔에서는 사람들이 어디에도 표를 던지기 애매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석유를 위시하여 에너지 공급을 독점하고 있는 인도와의 협상에서 무능을 보인 마오이스트 정부는 기본적인 물가 폭등을 잡아내지 못한다. 거기다 중간상의 농간이 끼게 되어, 휘발유와 경우는 중간상을 거치면서 폐타이어 녹인 물이나 석탄 가루와 섞이는 등 거의 다 유사석유로 바뀌게 되는 까닭에 비싼 돈을 주고 기름을 넣어봐야 차나 오토바이를 굴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난방용 등유의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해서 카트만두 시내는 ‘청정 히말라야’라는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21세기에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스모그 자욱한 하늘을 보여준다. 야당연합의 주요 정치결사 행동이었던 ‘번다’가 이제 민중들의 자체적인 시위 수단이 되었고, 다른 의미에서 혼란은 계속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개헌이 실패하면서 정부 기능은 마비되어버렸다. 2008년 이후 결성된 제헌의회에서 입헌군주제 폐지 이외의 헌법 개정은 지지부진했다. 개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행정부의 정체성이 모호한 가운데 국가기반시설도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었던 네팔은 헌법상으로는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다. 실질적인 무정부 상태에서 왕정복고파의 테러도 기승을 부렸다. 신헌법 제정에 반대하는 폭탄 테러도 일어났고, 브라만 계층이 주도하는 파업도 이어졌다. 급기야 2012년 5월 제헌의회 재개를 앞두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헌법 제정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2013년 현재까지도 헌법은 초안조차 발의되지 못하고 있다.
모순의 기억, 슬픈 거울
다시 고산병으로 돌아가보자. 고도에 대한 순응력은 개인의 기질에 따라 다르다. 고지대의 산소가 얼마나 희박한지, 등반을 하는 평속이 어떠한지, 산에 올라가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에 따라서 다양하게 영향을 받는다. 고도에 대한 순응은 등산을 시작함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지만 순응이 완료되는 시점은 개인에 따라서 몇 시간에서 몇 주로 큰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해발고도 2천 미터 정도에서도 고산병 증세를 보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해발고도 4천 미터를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도 고산병 증세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사람에 따라서 고산병은 다양한 양상을 나타내지만 분명한 것은 몸은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이다. 완벽한 순응을 하든 하지 못하든 환경이 바뀌면서 어쨌든 순응은 진행되기 마련이다.
세계 각국에서 지난 수세기 동안 벌어졌던 정치적 위기와 불평등 위기를 반세기 안에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이 네팔의 근현대사이지만, 네팔 사람들은 이 혼란과 혼돈 안에서도 분명히 적응을 해가고 있다. 공무원에서 포터가 된 까말 아저씨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 아세타졸아마이드처럼 고산에 대한 신체의 적응을 돕는 방법이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의 적응을 돕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5년 동안 지지부진한 개헌이 완료되는 것이 어쩌면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의 경우 제1조는 2항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간단하게 말해서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다. 네팔은 아직 이 간단한 초안조차 입법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모든 불평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나라에서 국민이 주인 되기란 쉽지만은 않은 일일 것이다. 국민이 주인이 되고자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 반군들조차 국민들 위에 군림했다. 왕정이 폐지되면서 주권이 국민에게 이양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어떤 국민이 주인이 되어야 하는가를 두고 백색테러와 적색테러는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 체제와 삶은 또 이렇게 별개다. 어쩌면 네팔의 체제 혼란은 고산병에 몸이 적응해가는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 나아질 과정일지 모른다.
신헌법 제정을 두고 빚어지고 있는 난맥상이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후진국의 모습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헌법이 거쳤던 과정을 생각해보면 과연 이 느린 변화의 모습이 부정적이기만 한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헌 이래 총 여덟 번의 개헌을 거쳤다. 개헌에 국민투표가 필요한 나라 중에서 불과 반세기 만에 이토록 많은 개헌을 한 나라를 찾기는 힘들다. 어느 헌법학자는 헌정사의 기간에 비해 잦은 개헌의 원인을,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건국에 참여하지 못하고 친일파가 권력을 차지하면서 역사적 전통성이 훼손되었던 왜곡된 건국 과정에서 찾는다. 헌법 전문前文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시작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해방 당시에 미군정이 들어서고 체제의 안정적 이양을 위해 일제 시기에 권력을 차지했던 부역자들이 다시 그 자리에 앉게 되었던 해방 전후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현실 헌법이 모순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음이 뚜렷하게 보인다. 부역자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그것이 대물림되어 한국 사회의 주류 기득권을 형성하게 된 역사의 아이러니 앞에서 국가 체계의 근간인 헌법은 자가당착에 빠져 이렇게 바뀌고 저렇게 바뀌는 슬픈 역사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네팔만 해도 최소한 갸넨드라의 폭정에 부역했던 이들은 대부분 망명을 했거나 그에 응분한 처벌을 받았다. 물론 근현대에 들어서 탈식민했거나 민주정을 세운 국가 중에서 구체제의 부역자들이 권력을 독점한 예가 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사를 청산하고 부역자들에게 덧씌워진 신화를 걷어내어 화해와 협력의 길로 연착륙한 알제리,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랑스와 같은 예를 찾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님을 상기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런 자화상을 보면서 신헌법 제정을 두고 벌어지는 네팔의 혼란상을 과연 마음 편하게 비판만 할 수 있는 것일까? 까말 아저씨의 일화를 듣고 담푸스를 거쳐 하산하는 동안 모국의 역사를 복기하면서 나는 이들의 혼란과 느린 변화에 대해서 섣불리 이야기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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