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변화의 길목에서
발전과 부채
외채 위기는 독립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아프리카 경제의 발목을 잡은 장본인이 바로 이 외채였다. 1960~1970년대부터 계획이 부실한 기획에 빌린 돈을 쏟아 부으면서 위기가 시작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기존의 빚을 갚기 위해 또다시 빚을 지는 구조로 빠져들게 되었다. 무역 조건은 날이 갈수록 나빠져 수출 가격은 계속 떨어졌다. 아프리카 정부로서는 세수를 늘려 점점 확대되던 경제적 위기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1970년까지 아프리카 대륙이 서방세계의 정부와 은행,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에 진 빚은 모두 90억 달러였고 1997년에는 3,210억 달러로 늘어났다. 연체금도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났다. 이자율도 무척 높았다. 이는 날이 갈수록 외채의 덩치가 커질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 제때 상환하지 못한 기존의 빚은 계속 곱절로 불어났다. 갈수록 높아지는 GDP가 국가경제가 아니라 외채를 갚는 데 사용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 결과 아프리카 국가들을 돕기 위한 서구의 원조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서구가 1990년대에 아프리카 국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지출한 평균 지원 액수는 1년에 약 120억 달러에 달했다. 하지만 서구의 재정 지원은 단기적인 처방책에 불과했다. 아프리카 수출품의 가격이 여전히 낮았기 때문이다. 해외 원조금은 사회사업이나 기반시설을 확충하는 데 쓰였다. 원조를 빌미로 공여국의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었다.
서구는 외채를 오랫동안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했다. 냉전 시대에 서구는 동맹국이라 간주될 법한 국가의 재무부로 자금을 투입했다. 이를 통해 공산주의와 맞서 싸울 아군을 확보했다. 나이지리아와 자이레의 독재자들도 이 돈을 받았다. 아파르트헤이트의 남아프리카공화국도 든든한 후원자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다. 1980년대 이후, 특히 1990년대와 2000년대부터 서구의 공여국은 원조를 빌미로 내정간섭을 강화했다. 이들은 조건부로 돈을 풀었고 구조조정은 바로 그 조건 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경제 자유화와 사유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반면에 위생이나 교육 분야에 대한 정부 투자는 철저히 제한했다. 경제는 갈수록 외부 투자에 의존해야만 했다. 그런가 하면 특정 영역을 중심으로 경제 성적표가 좋아지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 이후로 여러 아프리카 지역에서 중산층이 출현한 것이 발전의 증표였다. 하지만 부의 편차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게다가 경제 발전의 토대는 여전히 취약했다.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있던 외채 때문이었다.
더딘 성장 탓에 문제는 더욱 복잡해져 갔다. 아프리카의 산업은 기대한 것과 달리 빠르게 성장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선진화된 산업 기반시설을 갖추고 있던 나라는 극소수였다. 이집트와 보츠와나,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도가 그런 나라였다. 석유 생산을 통해 상당한 정도로 산업적 성장을 이룰 가능성이 있는 나라도 있긴 했다. 앙골라와 나이지리아, 리비아, 가봉이 그런 나라였다. 광물 채취가 활발한 나라도 있었다. 니제르와 가봉은 우라늄을, 기니는 보크사이트를, 라이베리아와 모리타니아는 철광석을, 토고는 인산을 활발하게 채취했다. 그러나 대다수 아프리카 국가는 1970~1980년대까지도 농업 생산물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독립 직후에 시도한 초창기 산업 계획들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결국 아프리카는 산업과 제조 부문에서 투자를 끌어내는 데 실패했고 그 결과로 이 두 영역은 발전이 답보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를 보상할 정부의 정책이라고는 세계은행으로부터 원조 패키지를 받거나 융자를 받는 일뿐이었다. 그 때문에 외채 위기는 한층 더 심화되었다. 그런가 하면 서구의 다국적 기업들이 토착 산업들을 흡수했다. 식민 통치 때와 마찬가지로 이들 기업은 아프리카 경제의 발전에 눈을 감았다.
아프리카의 빚을 청산해 주자는 운동이 최근 들어 공공단체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18세기 후반에 노예무역 폐지를 주창했던 집단도 공공단체였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프리카 대륙을 혁신하고 구원하자는 취지에서 이루어진 운동이었다. 도덕적인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기존의 차관에 담겨 있는 정치적 특성을 둘러싸고도 뜨거운 성토가 이어졌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외채 때문에 가난에 찌든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동정도 덩달아 피어올랐다. 1996년에 결국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을 대상으로 채무액을 일부 변제해 주기로 했다. 대개 아프리카 국가들이 그 대상에 선정되었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실행 과정이 너무 지지부진해 여러 가지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빚을 청산한 나라들은 사실 채무 반환 능력이 없었음에도 외채 청산 운동은 탄력을 받고 있었다. 이를 둘러싸고 많은 토론이 벌어졌다. 서구의 정치가들이 참여한 토론은 뜨거운 열기와 감정 격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서구의 정치가들은 문화적?정치적 틀이 과거와 좀 다르긴 해도 19세기의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를 하나의 개념이자 해소해야 할 조건으로 여기고 있었다. 또 서구의 자유주의, 더 나아가 문명의 시혜가 투사되어야 할 일종의 장막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토니 블레어였다. 채무 변제와 ‘발전’을 둘러싸고 온갖 공치사가 난무했다. 공치사에 불과한 이러한 수사들이 아프리카의 과거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감지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 공치사를 언제, 어떻게 현실의 언어로 바꿀 것인지 여부는 여전히 미지의 상태로 남았다.
그럼에도 발전 계획은 공간을 확장해 갔다. 아프리카 대륙 내의 비정부기구들은 가난을 청산하기 위해 피억압 민중이나 소외된 사람들과 손잡고 일했다. 이들은 피해 지역에 긴급 구호를 제공하기도 했고, 기술을 가르치고 지원함으로써 특정 지역에 힘을 실어 주기도 했다. 비정부기구는 여러 지역에서 가장 잠재적으로 그리고 가장 가시적으로 이른바 ‘공여국’의 의지를 표현했다. 비정부기구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는 지난 20년 동안인데, 이들은 국제적인 규모의 집단에서부터 소규모 집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집단적 특성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연구는 물론이고 종교적인 성격까지 띠고 있던 전문적인 집단이었다. 이 집단들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주로 서구의 정부나 유럽연합에서 충당했다. 기실 민초 집단이자 토착 조직인 이들은 외부로부터 재정적 지원과 기술적 지원을 받기도 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집단으로는 옥스팜Oxfam, Oxford Committee for Famine Relief,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 케어CARE, Cooperative for Assistance and Relief Everywhere, 구세군 등이 있다. 가톨릭구호서비스Catholic Relief Service와 월드비전World Vision도 물론 빼놓을 수 없다. 적십자와 국경없는의사회는 주로 인도주의적 지원을 조달하는 일을 한다. 한편 유엔은 주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유니세프 활동을 통해 구조와 원조 사업을 벌인다. 동시에 국제난민기구UNHCR를 통해서는 난민들을 위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조직들은 주로 전쟁 지역이나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지역에서 사업을 펼친다. 물론 이 단체들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좀 더 장기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이들이 수행하는 사업의 도덕적·문화적 의미도 하나하나 따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단기적으로는 이들 조직이 여러 아프리카 지역에서 삶과 죽음의 차이를 손아귀에 쥐고 있음은 명백하다. 이들은 야전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국 정부의 정책이나 발전 의제 등을 만드는 일에도 관여하고 있다. 최근 들어 이들은 국가 차원의 활동이 줄어든 경제 영역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이고 있다. 비정부기구는 국가가 시행한 일들 가운데 비효율적인 사업으로 생긴 간극을 메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지불한 돈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이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서구의 행정부는 비정부기구 같은 자발적인 조직을 더더욱 선호하고 있다.
비정부기구의 효율성이나 문제점을 둘러싼 논쟁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들이 권리 강화와 대중 참여 면에서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다고 상찬한다. 우간다의 경우 그런 평가는 사실이다. 민간의 작업이 아주 인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에 기근 구호 사업을 벌인 에티오피아의 비정부기구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조직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다. 비정부기구를 비판하는 이들은 이 기구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고 비전문적이라고 비난한다.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요구도 잘 수용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스스로 갈등의 정치 속에 나포되는 비정부기구도 있다. 남부 수단의 반군들에게 식량을 원조한 미국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미국은 기독교도 중심의 비정부기구와 미국국제개발처USAID를 통해 식량을 원조했다. 나아가 이따금 아프리카 행정부가 제 역할을 할 여지를 원천봉쇄함으로서 본의 아니게 또는 의도적으로 당사국 행정부의 역할 자체를 무시하는 비정부기구도 있다. 분명한 것은 비정부기구와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에리트레아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1990년대 후반에 에리트레아 정부는 대다수의 원조 조직을 자국에서 추방했다. 이미 했던 일을 또다시 반복함으로써 재정을 낭비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회의 변화, 교육과 보건
아프리카가 최근에 직면하고 있는 온갖 문제의 뿌리에 교육이 있다는 사실은 무척 의미심장하다. 다시 말해 교육만이 장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라는 뜻이다. 보건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사실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은 독립 이후에 국가 발전의 수단으로 교육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그 결과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초등학교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특별히 초등학교 수준에서 여학생 비율을 높이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성공 여부는 지역에 따라 편차가 컸다. 관건은 문맹률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최근에 들어서는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났다. 노후화되어 가는 기반시설과 정부 예산의 감소, 교육의 질이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지역 간 불균형도 여전히 골칫거리이다. 도시와 그 주변 지역은 시골 지역에 비해 특권을 누렸다. 성비 불균형도 큰 문제였다. 전국에서 가장 불리한 집단이라면 단연 시골에 사는 여자아이들이었다. 여성의 문맹률이 남성의 문맹률보다 훨씬 높다.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높은 지역이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이다. 아프리카 정부가 교육 예산을 줄인 것은 1970년대 이후 지속된 경제 위기 때문이었다. 초중등 교육 관련 예산이 상대적으로 많이 축소되었다. 대학 진학률은 꾸준히 늘어났지만, 예산의 증가는 물론이고 기반시설의 개선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학 관계자의 여건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하루하루 먹고 사는 데 급급해 의미 있는 연구 성과물들을 생산하지 못했다. 1960년대에 놀라운 성과를 내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교육이 이렇게 전반적으로 퇴조 분위기를 띤 이유는 1990년대 이후 ‘사립’ 학교나 대학들의 팽창 때문이었다. 사립학교는 특히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대도시를 중심으로 확장되면서 기득권 세력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사하라 이북의 정부들도 교육과 대학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들은 유럽식 모델이나 문화 대신 이슬람과 아랍어를 정체성의 중심으로 내세워 새로운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성차별이었다. 북아프리카인들은 딸보다는 아들에게 교육비를 투자했다. 한편,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국가의 초등 및 고등 교육 관련 예산이 축소되었다. 북아프리카의 문맹률도 여전히 낮은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이슬람의 교육 전통은 여러 탄력적인 대안을 제공했다. 무슬림 자선단체들이 초등학교를 열기도 했고, 몇몇 대학을 중심으로 무슬림 교육 조직들이 양성되기도 했다. 이러한 조직들 덕분에 새로운 세대의 북아프리카인들이 정치적으로 의식화되고 급진화되기도 했다. 그리고 신세대 북아프리카인들은 유럽의 문화와 그 문화가 지닌 기득권을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독립 당시의 기대감을 제대로 충족시켜 주지 못한 탈식민 행정부도 유럽 문화를 거부했다.
넓은 의미에서 교육은 정치적인 무기였다. 문맹률을 조금만 낮추어도 신문을 읽고, 인터넷에 접속하고, 정치 논쟁에 참여를 할 수 있는 인구수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특히 인터넷은 정치적 표현을 하기에 더 없이 좋은 매체이다. 물론 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정치적 각성으로 곧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능성을 확대시켜 주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억압적인 정권에 대항하는 투쟁 능력을 강화시켜 나갈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엘리트 집단을 제외한 계급의 여성이 남성들보다 독립에 따른 정치적 혜택을 덜 입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여러 운동 집단들과 정부가 ‘정치적 각성을 선양’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서로 교육을 통제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교육을 통제함으로써 특정 집단의 이데올로기가 투사된 세계관을 함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배 엘리트들은 교육과 학습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우간다의 마케레레대학은 오랫동안 정치적인 논쟁과 저항의 산실 역할을 했다. 하지만 재정적 어려움과 좀 더 단순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서로 포개지면서 학생들은 점차 정치적 투쟁의 의지를 상실해 갔다. 이런 상황은 ‘선진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디스아바바의 사정은 달랐다. 이 대학의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에 참여했고 에티오피아 정부도 이에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한 사회와 그 사회의 경제가 바람직하게 성장하려면 필수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야만 한다. 건강하고 질 높은 교육을 받은 인구 집단이 존재해야만 한다. 이 책 첫머리에서도 지적했듯이, 아프리카의 역사는 대단히 독특하고 거친 환경에 맞서 싸우며 이룩한 역사이다. 1800년의 아프리카인들은 온갖 참혹한 질병과 맞서 싸웠다. 그래서 21세기 초까지도 아프리카의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말라리아와 수면병은 여전히 파괴력을 발휘하고 있다. 에이즈 또한 콜레라나 폐렴 같은 지구적인 전염병과 경합을 벌이며 아프리카 대륙을 지금까지도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러한 질병들 가운데에서 가장 끔찍한 전염병이 말라리아이다. 말라리아는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지역에 퍼져 있다. 말라리아에 전염이 된다고 해서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지만, 문자 그대로 농촌 지역의 고혈을 빨아 그 지역 전체의 힘을 빼앗기도 한다. 노동력이 황폐화되기 때문이다. 수면병도 그에 버금가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수면병은 다행스럽게도 식민 통치기부터 1960년대까지 꾸준히 시행된 프로그램 덕분에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안정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수면병이 열대우림과 산림 지역의 체체파리 때문에 말라리아와 마찬가지로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는 증거도 있다. 수면병은 시골 지역에서 가축을 기르는 집단에게 특히 치명적이다.
이 모든 질병들은 아프리카의 토착병이고 다양한 환경의 산물이다. 가령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는 열대 기후의 산물이다. 이러한 질병들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사실은 독립 이후의 아프리카 정부가 국민 대다수의 건강과 직결이 되는 보건 정책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교육과 마찬가지로 보건 관련 예산이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보건 관련 설비 문제도 심각하다. 과거보다 훨씬 더 열악해졌다. 공급이 불균등한 것은 물론이고, 보건 인력 자체가 태부족이다. 의사들이 월급을 더 많이 주는 미국이나 유럽으로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공중보건이나 예방 대책보다는 치료약에 의존하는 아프리카 정부들도 문제이다. 공여국들은 비정부기구 등을 통해 보건 관련 지원책을 제공해 왔다. 세계보건기구 같은 국제기구도 필요한 약물과 전문 인력을 제공하여 특정 질병을 뿌리 뽑으려 애썼다. 그렇지만 아프리카의 질병들은 쉽사리 근절되지 않고 있다. 가난과 부실한 영양 상태 그리고 도시를 중심으로 한 열악한 위생 환경과 오염된 수질 탓이 크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흔한 전염병 가운데 하나인 콜레라는 더러운 물과 상한 음식을 먹어서 발생하는 병이다. 이 병은 도시의 빈민촌을 중심으로 창궐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바깥 세계에서는 오늘날 거의 사라진 이 전염병이 유독 아프리카에만 남아 있는 까닭은 경제적인 실패의 탓이 크다.
전 세계 에이즈 인구의 3분의 2가 아프리카에 살고 있다. 최초로 환자가 발생한 1980년대 초반 이후 약 3,400만 명에 이르는 인구가 에이즈에 감염이 되었다. 이들 가운데 약 1,100만 명이나 되는 환자가 사망했다. 사망자 중에는 300만 명의 어린아이들이 포함되어 있다. 에이즈 고아들이 곳곳에 퍼져 있고, 사망자 수도 갈수록 늘어날 것이 뻔하다. 동부와 남부 아프리카가 특히 이 전염병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다. 에이즈는 인간의 목숨은 물론이고 사회경제적 안정마저도 해치고 있다. 에이즈의 피해는 명약관화하고 원인은 다양하다. 가난과 이주가 손꼽히는 원인이다. 에이즈에 걸려 면역체계가 약화된 사람들이 폐렴에도 쉽게 걸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매독을 비롯한 다양한 성병도 에이즈 발병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인 전염 경로는 이성 간의 성 접촉이라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에이즈를 통제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는 정부와 비정부기구는 성행위를 가장 핵심적인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에이즈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환기시켜 발병률을 낮추는 데 성공을 한 국가들도 제법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간다가 모범적인 국가이다. 세네갈도 우간다 못지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나미비아와 짐바브웨, 보츠와나, 스와질란드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남부 아프리카 나라들은 높은 발병률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는 대단히 비효율적인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발병률 규모를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1990년대의 케냐도 이 질병을 통제하기 위한 적절한 처방약이 없어 국가의 장래가 위협받고 있다. 물론 에이즈 치료약을 좀 더 대중적으로 이용하게 하자는 문제는 여러 가지 논쟁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에이즈의 파괴력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 그러나 이 질병이 지닌 진정으로 무서운 파괴력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앞으로 수십 년 뒤에 나타날 것이다.
아프리카의 경우 생존율과 기대수명, 위생과 보건 등이 다른 대륙에 비해 상당히 뒤쳐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차와 지역 차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북아프리카 사람들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인들에 견주어 좀 더 나은 보건 혜택을 누리고 있다. 남부 아프리카인들은 서부와 중부, 동부 아프리카인들에 비해 좀 더 낮은 기대수명을 기록하고 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회경제적인 환경 탓이 크다. 사회적 역할과 가난이라는 짐 때문에 여성과 아이들은 특히 질병에 가장 취약한 집단으로 노출되고 있다. 그리고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 보건 관련 복지에 취약하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해답을 찾아 가는 지속적인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해외의 지원을 지역 정부의 프로그램과 효율적으로 결합하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다. 기초적인 의약품을 공급하고 면역 관련 프로그램을 가동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유아 사망률을 현저하게 낮출 수 있을 것이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는 1960년대 이후 이 방법을 채택하여 커다란 효과를 보았다. 유아 사망률이 크게 떨어지고 몇 년 지나지 않아 기대수명이 크게 올라갔다. 공중 보건의 경우, 지역 수준에서건 국가 차원에서건 조금만 투자해도 큰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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