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아미쉬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모델들
3. 민속사회
전 세계의 사회들을 비교하는 인류학자들은 반半고립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단을 ‘민속사회folk society’ 또는 ‘원시 사회’라고 부른다. 혹은 ‘단순한 사회’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런 사회는 개인주의적인, 이른바 문명화된 사회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유형이다. 로버트 레드필드Robert Redfield가 개념화한 ‘민속사회’란 작고 고립되었으며 전통적이고 단순하며 균질화된 사회로, 구두 커뮤니케이션과 관습적인 방식이 사람들의 삶 전체를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집단이다. 그런 조건이 이상적으로 잘 맞는 사회에서는 구성원 사이에 공유되는 실천적인 지식이 과학보다 중요시되고, 관습이 비판적인 지식보다 가치 있으며, 구성원 사이의 관계도 추상적이거나 범주화되기보다는 개인적이고 감정적이다.
또한, 민속사회는 변화에 익숙하지 않다. 젊은이들은 나이 든 사람들이 젊었을 때 한 일들을 그대로 한다. 구성원들은 입으로 하는 말뿐만 아니라 관습과 상징을 매개로 서로 친밀하게 소통한다. 이처럼 관습이나 상징은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기도 하지만 각자의 소유물이라는 의미도 강하다. 그럼에도 민속사회는 공동 사회와 비슷해서 ‘우리’로서의 의식이 강하다. 리더십은 제도화되었다기보다는 개인적인 성격을 띤다. 큰 경제적 불평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상호 부조mutual aid 또한 사회 구성원들의 특성이다. 인생의 목적이 교리의 대상으로 진술되는 일은 절대 없지만, 그것을 의문시하는 사람도 없다. 이런 경향은 작은 사회에서 나타난다. 그러한 사회에서 관습은 거의 신성한 것처럼 여겨진다. 행동은 매우 유형화되고, 문화 또는 행동의 대상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부여되고 종종 종교적인 의미가 스며든다. 종교가 속속들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형적인 민속사회의 구성원들은 고유한 노래와 기도를 하며 파종과 수확을 성스럽게 행한다.
아미쉬 사회는 얼굴을 마주하는 친밀한 일차적 집단으로서 그 중요성이 오래전부터 인식되었다. 찰스 P. 루미스Charles P. Loomis는 아미쉬 사회의 특성을 처음으로 개념화해서 설명했다. 루미스는 가족주의적이고 공동 사회 유형의 시스템을 지닌 아미쉬 사회를 오늘날 문명사회에서 볼 수 있는 고도로 지역적인 이익 사회Gesellschaft 시스템과 규모 면에서 비교했다.
이런 민속사회 모델은 전통적인 방향으로 이끌리는 아미쉬 사회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른 방식으로는 아미쉬 사회가 전통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예컨대 아미쉬 사회는 19세기에 농촌 사회에서 흔하던 관습과 소규모 기술을 보전해왔다. 덕분에 아미쉬의 종교적 가치는 혼합주의syncretism의 방식을 통해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일할 수 있는 규모의, 모든 사람이 말을 끌고 농사를 짓는 단순한 초기 농촌 사회와 융합되었다. 아미쉬 사회는 현대 국가의 농촌 하부 문화 속에 민속적 또는 ‘작은’공동체로 존재하며, 이는 인류학 문헌에 기술되는 원시적이거나 농경적인 유형과는 구분된다. 레드필드의 농촌 사회 모델과 퇴니스-루미스의 공동 사회의 특성 일부를 살펴보면 특이성, 소규모성, 문화 유형의 균질성, 자급자족을 향한 노력과 같은 아미쉬 사회의 여러 요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특이성
아미쉬 사람들은 눈에 아주 잘 띈다. 아미쉬 거주지로 들어온 외부인들은 그들의 복장, 농장 집, 장신구, 활동 범위, 그리고 기타 물질적인 특색 때문에 자신들이 그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또 아미쉬 사람들은 외부인과 완벽하게 영어로 소통하지만, 그들끼리는 독일 방언으로 소통한다.
아미쉬 사람들은 종교와 관습이 삶의 한 방식으로 녹아든 독특한 생활을 한다. 그들의 삶에서 그 둘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공동체의 핵심가치는 종교적인 믿음이다. 구성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의 계시를 통해 신을 이해하고 숭배하며, 이들의 유형화된 행동은 종교적으로 의미가 있다. 이러한 독특한 삶의 방식은 일상생활과 농경문화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목적의 에너지 활용에도 스며들어 있다. 이들의 믿음은 자기 자신, 우주,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한 이들의 개념에 영향을 미친다. 아미쉬 사람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특정한 영적인 가치와 존엄성이 우주 속에 자연적인 형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종교적 고려는 일하는 시간뿐만 아니라 삶의 경험과 관련되는 매일, 매주, 매 계절, 매년의 의식을 결정한다. 직업이나 여행의 수단과 목적지뿐만 아니라 친구와 배우자 선택까지도 말이다. 그래서 종교적인 태도와 직업적인 태도는 서로 보완적이다. 신과 아미쉬 사회를 포함한 우주는 아미쉬 사람들이 스스로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여기는 한 신성하다. 아미쉬 사람들은 자연을 지배할 방법을 찾거나 환경에 거스르는 일을 하기보다는 환경과 더불어 일하고자 한다. 아미쉬 사회와 땅, 대지, 식생 같은 자연 사이의 친화성은 다양하게 표현된다.
종교는 고도로 유형화되어 있으므로 누군가가 아미쉬 사회를 전통에 얽매인 집단이라 말한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성경』에 나오는 비유가 세상에 대한,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이들의 견해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여러 세기에 걸쳐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융합되었다. 강렬한 종교적 경험, 사회적 갈등, 그리고 친밀한 농경적 경험에서부터 새로운 것보다는 오래된 것을 선호하는 사고방식mentality이 발전했다. 이러한 원리는 종교에 특히 잘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며, 사회적 행동에 대한 선언이 되기도 한다. “오래된 것이 최고이고, 새로운 것은 악마의 것이다.” 이 말은 일종의 격언으로 굳어졌다. 아미쉬 사람들은 이런 사고가 널리 퍼져 있고 함께한다는 의미가 강한 친밀한 공동체 속에서 생활하며 통합적인 삶의 방식과 민속적인folklike 문화를 이루었다. 복종과 관습의 지속성이 당연시되고, 개인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갖는 무언가에 대한 필요는 통합적이고 공유된 의미 체계 안에서 충족된다. 구전되는 전통, 관습, 그리고 인습은 집단이 기능적인 전체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집단의 관여자들에게 종교와 관습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책무와 문화가 결합되어 안정적인 인생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는 작은 아미쉬 공동체에 나타나는 특이성이다. “공동체의 경계가 어디서 시작하고 끝나는지는 명확하다. 외부 관찰자들의 눈으로 보면 그 특이성은 명백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의 집단의식으로 표현된다.” 공동체는 어떤 측면에서는 현대 사회의 기능적인 일부분이지만 그 속에 독특한 하부 문화가 있다.
소규모성
아미쉬 공동체의 사회 단위는 기본적으로 작은 편이다. 그리고 사는 곳과 상관없이 아미쉬 사람들에게 일차적인 자치 단위는 ‘교구’다. 생활의 규칙들은 이처럼 얼굴을 맞대는 집단 내에서 결정되며, 이 집단은 소규모로 유지된다. 한 집에 모여서 진행하는 의례 방식과 마차로 이동하는 데 따르는 한계 때문이다. 대부분 지역에서 아미쉬 사람들은 비아미쉬 사람들 거주지와 가까운 곳에서 농장을 이루고 산다. 그럼에도 아미쉬 가구들은 지리적으로 하나의 단위를 이룬다. 30~40가구로 이루어진 작은 단위가 교회의 신자들congregation이다. 이들은 돌아가며 2주에 한 번씩 각자의 집에서 종교적인 의식을 치른다. 그들에게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 따로 준비한 중심이 되는 건물이나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아미쉬 가구는 한 정착지에서 다른 정착지로, 또는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겨갈 수 있지만, 이주한 곳에서도 해당 지역의 교구에 소속된다. 규모가 큰 정착지라도 기본이 되는 사회 단위는 소규모이고 토착적이다.
각 교구에 통용되는 규칙들은 개인의 경험 범위를 포괄한다. 이러한 작은 공동체는 외부 세계를 배제함으로써 살아남은 만큼 금기도 많고, 문화의 물질적인 속성도 상징적인 것이 되었다. 예컨대 복식 스타일을 통일하는 것은 중요하다.
규모가 작으면 가족이 다양한 기능을 담당함으로써 아미쉬 생활을 할 수 있다. 아미쉬 주교에게 그의 신도가 얼마나 되는지 물으면, 개인이 아닌 가족단위로 수를 헤아릴 것이다. 이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은 계보적인 위치에 있다. 이 사회의 사람들은 대부분 끈끈한 혈통과 사회적 연결 고리가 있어서 사실상 사회 전체가 친족 집단을 이룬다. 아미쉬 공동체에 합류한 이방인들은 비록 얼마 되지 않지만 그들은 아미쉬 공동체의 민족적, 혈연적 가치를 인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은 공동체에서 도망쳐 나오는 사람은 아미쉬의 믿음뿐만 아니라 사회적, 혈연적 고리까지 끊는 셈이다.
아미쉬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조직적이기보다는 인간적인 규모를 유지한다. 이들은 큰 규모의 통합된 학교에 저항하고, 큰 학교(또는 농장)가 작은 것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관료제가 나이 터울이 얼마 안 나는 학생들을 한곳에 모아서 사회 구성원이 공유해야 하는 가치와 개인의 책임감을 배제하며 과학과 기술을 강조한다는 점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아미쉬 사람들은 자신들의 세계와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음미한다. 그렇다 보니 이들은 함께 일하는 집단이나 단위가 너무 커지면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다. 만약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 세상이 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 된다면, 그들은 그런 의미 없는 일에 참여하기를 그만둘 것이다.
아미쉬 공동체들은 각기 지역적인 문화의 특색이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각 공동체의 기본적인 방향은 같다. 예컨대 조직화, 역할, 권위, 법적 제재, 편의시설, 바깥세계와의 관계를 조절하는 통제력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아미쉬 사회는 모두 소규모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서로 이름을 알고 종교의식과 관습을 공유할 수 있는 규모 이상으로 커지지 않는 기능적인 단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레드필드 모델과 마찬가지로, 아미쉬 공동체는 “규모가 작아서 그 자체로 개인의 관찰 단위로 충분하거나, 그보다 크더라도 여전히 균질적이다. 이 공동체는 전체에 대해 완전히 대표성을 띠는 개인 관찰 단위를 제공한다.”에서는 인간의 노동력, 자연을 돌보는 책무, 자연과의 협동이 한데 어우러진다
문화 유형의 균질성
아미쉬 공동체는 문화적, 심리학적 측면에서 전체적으로 균질하다. 같은 나이나 동성인 경우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방식이 매우 비슷하다. 그뿐만 아니라 한 세대와 그다음 세대가 ‘마음의 상태states of mind’ 면에서 꽤 비슷하다. 생계와 소비, 생산에 대한 사회적인 승인 수단에서 평등주의가 명확히 드러난다. 얼굴 유형이 비슷한 사람끼리 짝을 지어 결혼했던 아미쉬 사람들 사이에서는 생리학적인 균질성도 감지된다. 최초의 미국 메노나이트(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네덜란드의 메노 시몬스Menno Simons가 창시한 재세례파 교파-역주)출신 역사가로 1907년에 시카고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딴 C. 헨리 스미스C. Henry Smith(1875~1948)는 아미쉬 가정에서 태어났다. 스미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 선조들은 메노나이트파였고 신앙이 독실했지요. 마치 오랜 시간 동안 믿음의 균질성 못지않게 육체적으로 비슷한 점이 많아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우리 혈통도 집안 내부에서 혼인하는 근친혼 과정에서 독특한 여러 특성을 축적해오지 않았는가 하고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공유해온 지식을 선호한다는 점이 이들의 심리학적인 균질성을 설명한다. 모든 구성원이 동일한 수준의 교육을 받으며, 한 세대가 삶에 대해 바라는 바는 이전 세대와 같다. 비판적인 사고는 이러한 작은 공동체에서 별다른 쓸모가 없다. 이들에게는 농촌의 민간 전승과 전통이 여전히 지식을 얻는 잠재적인 원천이다. 하지만 과학은 세계 어디서든 통용되는 보편적인 지식인 만큼 아미쉬 사람들도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바깥 세계의 지식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아미쉬 공동체는 미국에서 생산량이 꽤 많고 매우 안정적인 농업 사회 가운데 하나다. 아미쉬 사회는 공동체의 목적에 부합하게끔 한 가족이 운영할 정도의 농장을 소유하는 것 이상으로는 돈을 더 벌고자 하는 욕구가 없다. 이들은 도시로 이주하거나, 학교를 통폐합하거나, 도시의 위락시설이나 조합을 들여오는 다른 농촌 공동체의 흐름을 거부해 응집력이 강한 균질성을 보인다.
아미쉬 공동체의 균질적 패턴은 구성원들의 놀이, 활동, 삶을 경영하는 역할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의 기능은 이전 세대와 일치한다. 아미쉬 가정에 태어난 아기는 기쁨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조부모, 사촌, 삼촌, 숙모와 비슷한 이름을 받는다. 물론 아기의 성은 아버지의 것을 따르는데, 아마 공동체에서 흔한 몇 가지 성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아기는 아미쉬 농장이라는 환경에서 놀고 사물을 실험해 지식을 얻는다. 또 이를 통해 형, 오빠, 언니, 누나와 비슷한 삶의 패턴을 따르며 자랄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지식이 쌓이며 존경받는다. 노인들은 나이 들어서도 자녀와 손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부모에 대한 순종은 아미쉬 교회의 설교에서 아주 흔한 주제다. 가족 관계에서 특히 그러하며, 일반적으로 혈족 관계에서 강조되는 순종이 생활의 대원칙으로 여겨질 정도다. 『성경』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존경하는 자는 장수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나이 든 사람들의 지혜가 젊은이의 충고보다 더욱 무게 있게 여겨지며, 그로써 공동체 전체를 보존하고 종교적인 이상을 큰 변화 없이 보호할 수 있다. 나이 든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들의 자녀가 아미쉬 신앙 안에서 행복하다면, 그리고 교회의 규칙 안에서 살아 나간다면 만족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자녀들과 더 큰 친족 집단이 아미쉬 방식에 맞게끔 안정적으로 믿음을 이어간다면 자랑스럽게, 그리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자급자족을 향한 노력
아미쉬 사회가 매우 통합적이기는 하지만, 이들은 경제적으로 완전히 자족하지는 못한다. 농장을 매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더 큰 사회와 완전한 분리를 추구할 수도 없지만 그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공동체는 종교적인 생활, 사회화 방식, 교육에서는 자급자족한다. 개인의 기본적인 필요가 공동체 안에서 충족되는 것이다.
자급자족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농지 개혁 운동 및 자연과 가까운 활동과 연계된다. 삶에 대한 아미쉬 사회의 견해나 바깥세상과의 접촉이 한정적이라는 사실은 이들이 흙, 동물, 식물, 기후와 가깝다는 점과 일관적이다. 힘든 노동, 근면, 자조, 그리고 여가 생활이나 비생산적인 소모 같은 도시적인 방식에 대한 혐오는 『성경』에서도, 나날의 일상적인 경험에서도 강조된다. 실용적인 지식과 힘든 노동, 넉넉한 생활은 흙에서 얻을 수 있으며, 아미쉬 사람들은 이러한 것에 꼭 알맞은 장소는 가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아미쉬 여성들의 영역과 직업적 활동은 공장이나 임금을 받는 다른 직업이 아닌 바로 집안일이다. 요리, 바느질, 정원 일, 청소, 울타리에 흰색 페인트 칠하기, 닭 돌보기, 우유 짜는 것 돕기 등으로 여성들은 계속 바쁘다. 또한,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물론 그녀들의 주된 일이다. 아미쉬 여성들은 교회 모임이나 목사 선출에서 투표권이 있긴 하지만, 공동체의 종교 생활에서 그녀들의 위치는 종속적이다. 아미쉬 여성들의 일은 일반 미국 여성들의 일과 마찬가지로 결코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들은 언제나 아이들과 함께이고, 그러한 일상생활의 단조로움을 깨뜨리기라도 하듯 결혼식, 퀼트 짜기, 유쾌한 모임, 경매, 일요 예배에 참석한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정원에 밝은색 꽃을 키우고, 겨울에는 양탄자 짜기, 퀼트나 베개 커버, 수건에 자수 놓기를 하며, 주방 찬장에 색색의 접시들을 구비하기도 한다. 몇몇은 자신이 하는 일을 가정의 기쁨과 친척들 사이에서 안주인 노릇을 위한 중요한 일로 생각한다. 아미쉬 가정주부라는 역할은 도시의 여느 주부보다도 인정받을 가능성이 크다. 아미쉬 사회에서는 주부에게 어떤 기술이 있다든지 없다든지 하는 것이 곧 그 가족이 누리는 생활의 등급으로 이어진다. 주부는 가족의 모든 옷을 바느질하고, 식물을 키우고, 저장 식품을 만들고, 가족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며, 퀼트와 양탄자, 꽃 등으로 생활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통조림이나 절임 음식을 만들고 저녁 식탁에 집에서 준비한 음식을 내놓는 일은 아미쉬 여성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인정받고 보상받는 성취다.
아미쉬 사회에는 고등 교육기관에 해당하는 학교가 없다. 그리고 바깥세상의 중앙 집권적 학교 체계에서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스스로 초등학교를 세웠다. 아미쉬 아이들은 집에서 일하기 위해 학교를 오래 다니지 않고 그만 둔다. 아미쉬의 관점에서는 “남자 아이가 21세 전에 힘든 일을 별로 해보지않으면 이후에도 그런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 아이는 농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여가 생활과 사회적 쾌락에 대한 필요는 공동체 내부의 비공식적인 제도를 통해 충족된다. 일례로 친족 간에는 지속적인 방문이 의무적이다. 오락 활동은 일차적으로 의미 있는 사회적 경험, 집단의 결속, 그리고 공동체 내부의 통과의례로 이루어진다. 헛간 짓기, 나무 베기, 벌 돌보기, 퀼트 짜기, 그리고 교회 예배와 결혼, 장례식(관 만들기를 포함) 준비하기 등에서 모두 일과 오락이 결합된다. 젊은이들에게 사회적 생활의 중심은 일요일 저녁의 노래 부르기다. 인생의 가장 큰 행사인 결혼식에는 축제 기분, 음식, 친족 간의 의무, 의식이 있어야 한다. 신랑과 신부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얼마나 부유한 집안 출신인가가 아니라 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 좋은 가정주부, 좋은 농부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작은 아미쉬 공동체는 배타적인 경제 시스템을 갖춘 자치 사회가 아니다. 다만 재산 소유권에 관한 개념은 더 큰 사회와 다르다. 아미쉬 사회에서는 경제적 보상뿐만 아니라 불행에 대해서도 함께 나누고 협조한다. 필수불가결한 외부 사회 제도와의 연결은 이들의 특유한 중심적 가치와 인간관계를 운용하는 특별한 법칙에 따라 조절된다. 농업을 성스러운 직분으로 생각하는 아미쉬 사람들은 노동으로 얽힌 관계와 직업 같은 복잡한 세상으로 말려 들어가는 것을 꺼린다. 아미쉬 농장은 주일에 무언가를 수확하거나 배달하지 않는다. 종교가 아미쉬 구성원들이 일요일에 ‘필요’ 이상의 활동을 하지 않도록 막기 때문이다. 아미쉬 농부들은 조직화된 농장이나 지역의 정치적 집단, 통폐합된 학교 속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
자급자족은 농업 보조금이나 사회 보장 제도와 같은 정부의 부조 프로그램에 대한 이 공동체의 대답이다. 아미쉬 사람들은 노인 연금, 농업 보조금, 보상금 등 그 무엇이든 정부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지 않는다. 또한, 자녀나 증손에게 그런 보조금을 상속시키는 것도 거부한다. 정부가 아미쉬 구성원에게 질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이들에게는 곧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다. 이들에 따르면, 그러한 행위는 자신들 고유의 안정적인 공동체와 상호 부조를 손상시킬 수 있다. 아미쉬 사회에서는 스트레스, 화재, 질병, 노령, 죽음 등이 닥칠 때 끈끈한 인맥과 책임감을 바탕으로 구성원들의 안전을 보장한다. 이러한 필요를 상업이나 연방 정부를 통해서만 만족시키는 것은 죄스러울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속적이라고 여긴다. 아미쉬 사람들의 삶은 파벌, 무리, 이익 집단으로 나뉘지 않으며 공동체 한 덩어리가 거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하는 준비를 갖추었다. 이 작은 공동체는 “그 안의 구성원들에게 필요한 것, 그리고 전부, 아니면 적어도 대부분의 활동을 제공한다.”
로버트 레드필드Robert Redfield가 민속 모형folk model의 장선상에서 발전시킨 아미쉬 공동체 모형은 세계 여러 곳에 실제로 나타나는 인류 공동체의 모형의 하나다. 팽창하는 문명의 가장자리에 남아 있는 이런 ‘작은’ 공동체들은 어떤 특성을 공유한다. 하지만 아미쉬 공동체는 더 오래되고 지리적으로 고립된 집단들처럼 원시적이거나 농경적인 것은 아니다. 아미쉬는 종교개혁에서 파생되었고, 이는 그 자체로 해방적이고 자결적인 운동이었다. 아미쉬 사람들의 삶에는 기독교 전통과, 현실에 미치는 규준들이 스며들어 있다. 민속 모형은 아미쉬 공동체의 구조와 전통 지향적인 특성, 개인 간의 관계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미쉬 공동체의 내적 역학을 이해하려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이어서 소개하는 모형으로 아미쉬 공동체와 미국 주류 문화에 대한 사회적 담론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문제점을 해명하고자 한다.
4. 고-맥락(high-context) 문화
문화 인류학자들은 그동안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엄청난 다양성과 더불어 단일한 문화 속의 중요한 유연성을 발견했다. 문화적인 패턴은 사람들이 어째서 어떤 것에 주목하고 어떤 것은 무시하는지를 결정한다. 사람들이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 행하는 것은 문화마다 다양하다. 에드워드 T. 홀Edward T. Hall은 ‘고-맥락high-context’ 문화와 ‘저-맥락low-context’ 문화를 구별했는데, 이는 사고와 지각 방식이 다양하다는 점을 드러내고 그 점을 정당화한다.
고-맥락 문화는 사람들이 서로 깊이 연계되는 문화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입장이나 경험, 활동에 대한 인식awareness, 어떤 사람의 사회적 지위 등이 빈틈없이 발달해 있다. 정보는 폭넓게 공유된다. 단순하지만 깊은 의미를 담은 메시지가 자유로이 전달된다. 그렇게 다양한 수준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 명백하거나 은밀한, 명시적이거나 숨겨진 기호, 상징, 몸짓이 그것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들이다. 이 문화의 구성원들은 외부인과 내부인을 구별하는 데 민감하다.
자연을 설명하려고 만들어진 이러한 모형은 문화-삶의 대부분-에 뿌리를 두지만 아주 특별한 환경을 제외하면 분석하기가 매우 어렵다. 비언어적이고 명백히 규정되지 않은 문화 영역은 정보 전달자에게 매우 중요하다. 고-맥락문화는 공동선의 시스템에 따라 완전하게 사고하는 기술을 갖춘 구성원들에 의해 통합되어 있다. 충실성이 실제로 존재하며, 개인들은 그들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일한다. 어떤 구성원에게 문제가 생기면 나머지 구성원들은 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이와 비교해 저-맥락 문화는 읽고 쓰는 능력literacy과 합리성rationality을 강조한다. 미국인들의 삶에서 고도로 관료화된 문화의 분절들은 맥락의 정도가 ‘낮다’. 정보가 일차적으로 언어적인 의사소통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언어적이지 않은 인식의 다른 수준들은 개발되지 않았거나 잠자고 있다. 지각 방식은 일차적으로 선형적인 사고 시스템에 한정되며, 그것이 참truth을 이끌어낸다고 여겨진다. 또한, 논리가 현실로 이끄는 유일한 길로 여겨진다. 저-맥락 문화는 일차적으로 수학적 모형을 사용해서 자연과 환경을 설명한다. 사람들은 고도로 개인주의적이어서, 어느 정도 타인에 대한 관여가 필요한 맥락과 분리되어 있다. 저-맥락 문화는 통합되기보다는 분절되어 있고, 사람들은 점점 기계처럼 살아간다. 삶을 구획화하는 모순점들은 조심스럽게 다른 것으로 가려진다. 저-맥락 문화의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속임수를 쓰는 경향이 있으며, 동시에 속임수에 당하기도 한다. 실패하면 시스템 탓으로 돌린다. 위기가 오면 개인들은 사람이 아닌 제도가 도움을 주길 기대한다.
고-맥락 문화와 저-맥락 문화는 각각 의식적인 설계를 거쳐 발생했거나 사람들이 덜 지적이고 무능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의식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심층적인 문화적 흐름이 사람들의 삶을 미묘하게 구조화하는 방식 때문에 생겨났다. 이는 그 영향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구획하는 숨겨진 문화의 흐름이다. 이러한 차이점은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 그리고 어떻게 움직일지, 어떻게 문제를 감지하고 해결할지, 교통 시스템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그들의 시공간을 어떻게 배열하는지에 뿌리를 둔다. 에드워드 홀은 어떤 단일한 문화(예컨대 미국 문화 전체) 안에서의 고-맥락, 저-맥락을 논하지 않았지만, 홀의 이 발상은 그러한 비교를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미국 주류 사회 안에 아미쉬(고-맥락 문화) 사회와 저-맥락적인 부분이 공존하면서 생겨나는 결과는 무엇일까? 이들이 특정 방식으로 협력하지 못한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럼에도 조직적인 오해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사례 두 가지가 발생할 수 있는 결과들을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 같다. 하나는 정보시스템, 다른 하나는 젊은이를 훈련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정보 과다information overload란 너무 많은 양의 정보가 부과된 결과 그것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어 붕괴에 이르는 정보 처리 시스템에 관한 기술적인 용어다. 홀이 제시한 사례는 어린아이와 집안 살림을 돌보고, 남편과 같이 생활하고, 정상적인 사회적 삶을 꾸리는 한 가정의 어머니가 문득 모든 일이 한꺼번에 벌어져 자신에게 육박해오고 있음을 느끼는 상황이다. 이 미국인 어머니는 회사의 영업 지배인, 행정가, 의사, 변호사, 항공 관제관을 괴롭히는 것과 똑같은 정보 과다를 겪고 있다. 아미쉬 사람들과 미국 주류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정보 과다를 처리하는 방식은 각각 중요한 결과를 낳는다. 아미쉬 문화는 자기 자신과 바깥세상을 가르는 매우 선택적인 가름막을 갖고 있다. 아미쉬 공동체로 들어오는 정보의 흐름은 고도로 선택적이다. 더구나 아미쉬 사회는 자신의 차단 과정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다. 그러한 차단으로 대중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에 대한 직접적인 노출은 매우 줄어들며, 구성원들과 그들의 머릿속이 정보 과다로부터 보호된다. 아미쉬 사람들이 (맥락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무시하는 것은 저-맥락 문화의 선택지들과 다르다. 정보 과다는 이 두 종류 문화에서 서로 다르게 처리된다. 미국인 대부분은 날마다 다량의 정보에 노출되며, 자신과 바깥세상 사이의 차단에 관해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도 고-맥락, 저-맥락 사회라는 문화 또는 설정에 따라 달라진다. 아미쉬 같은 고-맥락 문화에서 젊은이들은 가족과 공동체에 의해 어른의 삶을 효과적으로 준비한다. 공식적인 학교 교육은 그들의 삶에서 부차적인 부분이다. 아미쉬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사회적 결속과 실용적인 기술, 사회적 책임감을 가르친다. 이러한 것은 서로 잘 아는 작은 마을 학교의 작은 집단에서 달성될 수 있다. 서로 각자의 재능을 알고 또 그것을 인정한다. 배움은 항상 일이나 놀이를 하지 않는 자유로운 시간에 드문드문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오래가고 친밀한 우정을 쌓으며 서로 원활하게 의사소통하여 집단적인 일을 효율적으로 해낸다. 작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8명에서 12명 정도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집단)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더 큰 학교의 아이들보다 결석률이 낮고 신뢰도가 높으며 자기 의사를 잘 표현한다. 또한, 자신이 하는 공부를 더 의미 있게 생각한다.
미국의 큰 공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배워야 할 것이 아주 많다. 이러한 대규모 집단에서는 지도자의 리더십이 자연스레 나타나지 못하고, 속임수와 정치가 필요하다. 저-맥락 문화에서는 아이들이 과도한 구조화와 관료주의 및 사회적 구조를 예산에 맞추도록 강제하고 합병하려는 강박적인 요구에 시달린다. 홀에 따르면, 미국의 조직화된 공공 교육은 “인간의 모든 활동에 대한 보상을 고통스럽고 지루하며 시시하고 단편적이며 마음을 위축시키고 영혼을 뒤틀리게 하는 경험으로 전환”시켜왔다.
공립학교가 학습의 질에 대한 이러한 판단을 수용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두 가지 맥락의 문화에서 삶에 대한 준비가 서로 매우 다르다는 것은 확실하다. 어떤 사회에서든 사회적 결속과 기술적인 능력은 둘 다 매우 중요하다. 아미쉬 사회는 일반적으로 사실을 강조하지 않아도 괜찮은 가치들을 중시한다. 아미쉬 학교는 교육 프로그램만 보더라도 예술가나 음악가, 화가, 배우를 배출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다. 또한, 현대적인 산업 복합체의 위쪽으로 이동하게 하는 기관 역할도 하지 않는다. 공립학교는 아이들에게 단순함, 겸손,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가르치려고 고안된 것이 아니다. 미국 사회에서 학교 승인에 관한 주의 규정은 발음에 중요한 연습들을(저-맥락적인 상황) 당연하게 여긴다. 주의 교육 담당 부서와 아미쉬 사회 사이의 오랜 갈등은 이러한 깊은 문화적 저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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