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문학전집, 왜 읽는가
도정일(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
문학은 이상하다. 나온 지 수천 년 수백 년 된 책들을 사람들은 지금도 읽는다. 기원전 700년의 『오디세이아』를 지금도 읽고 17세기의 『실낙원』을, 19세기의 『안나 카레니나』를 지금도 읽는다. 왜 자꾸 읽는가? 작년에 읽은 시를 나는 금년에 또 읽고 10년 전에 읽은 소설을 오늘 다시 읽는다. 친구가 읽은 책을 내가 읽고 내가 읽은 책은 친구들이 읽는다. 내 인생 속으로 걸어들어와 이리저리 얽힐 기약이야 있건 없건 나와 함께 한 세월 이 지상을 걸으며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 일하고 장보러 다니고 가끔 꽃집에 가고 카페에 앉아 사랑과 음모의 저녁 시간을 나누는 사람들, 크고 작은 상실과 배반에 가슴이 멍든 사람들―그들이 나처럼 문학을 읽고, 또 기이하게도 종종 같은 책을 읽는다. 문학은 꿀통인가? 오르페의 연주장인가? 한겨울 모닥불? 왜 사람들은 꿀통에 벌 모이듯 문학의 집으로, 오르페의 숲으로, 문학의 모닥불 앞으로 모이는가?
문학은 이상하다. 같은 작품인데도 읽을 때마다 다르다. 고등학생 때 읽었던 소설을 10년, 20년 후에 다시 읽으면 같은 소설이 다른 얼굴, 다른 메시지, 다른 주파수로 다가온다. 20대에 만난 카프카, 도스토옙스키, 발자크는 중년에 또는 노년기에 만나는 카프카, 도스토옙스키, 발자크가 아니다. 그들은 보물 감추듯 내게 무엇을 감추고 있었던가? 세월이 내게 다른 눈을 주었는가? 내가 더 예민한 가슴의 탐정이 되었는가? 이상한 일은 또 있다. 같은 작품인데도 읽는 사람에 따라 반응, 수용, 해석이 다르다. 내 친구 김개똥이 읽은 개츠비 이야기는 또다른 친구 이소똥이 읽은 개츠비 이야기와는 다를 수 있다. 20대 여성 독자가 『폭풍의 언덕』에서 만나는 폭풍은 같은 연배의 남성 독자가 만나는 폭풍이 아닐 수 있다. 좀 튀겨서 말하면, 하나의 작품에 대한 읽기와 반응의 가짓수는 읽은 독자의 수만큼이나 많을지 모른다.
사람들이 문학작품을 읽고 또 읽는 이유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한 자력이 문학에 있기 때문이다. 그 매혹의 비밀을 단숨에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사람들은 문학작품을 읽다가 문학에 끌리는 것이지 매혹의 비밀을 미리 알고 문학을 찾는 것이 아니다. 그 비밀의 열쇠를 건네주는 것은 문학연구자도, 비평가도, 편집자도 아닌 나 자신의 ‘읽기의 경험’이다.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을 좋아할 수 없듯 한 번도 문학을 접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 문학을 좋아할 방법은 없다. 읽기의 경험이 ‘문학적 경험’이며, 사람들이 문학세계의 이상한 매혹을 알게 되는 것은 ‘읽는다’는 구체적 경험을 통해서다. 이 경험의 풍요화를 위해 만들어지고 향수되는 것이 문학전집이다. 전집 중에서도 세계문학전집은 인간의 손에서 문학이란 것이 창조되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이 작은 유성의 동서남북으로부터 건져올려진 최상급의, 그래서 사람들이 흔히 고전, 명작, 혹은 걸작 등등의 이름으로 불러주는 작품들을 선별적으로 집성해놓은 문학 컬렉션이다. 그것은 문학의 숲이고 문학의 나라이며, 가장 작은 이름으로 불러도 ‘문학의 집’이다. 그 숲, 나라, 집에 발을 들여놓을 때에만 우리는 문학이 가진 매혹의 비밀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하는 것은 좀 무책임하다. 문학은 시간과 장소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높은 이동성을 갖고 있다. 나온 지 오랜 작품들을 사람들이 지금도 찾아 읽는 것은 시간을 건너뛰고 장소를 넘나드는 문학의 ‘마술적 이동성’ 때문이다. 이 이동성이 문학의 몇 가지 큰 특성들의 집합에서 발휘되는 효과 같다.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문학이 지식 전수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체계가 아니고 과학의 경우처럼 진眞이냐 위僞냐의 검증에 종속되어야 하는 가설의 구축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학문으로서의 과학은 ‘참’을 추구하고 이 추구작업은 진/위의 판별을 요청한다. 참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지식이나 가설은 즉시 폐기되어야 하고 오류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 문학은 그런 의미에서의 지식의 추구가 아니다. 문학에서는 많은 경우 오류조차도 진실이다. 중세가 막을 내리고 있었던 시대에 중세적 기사도의 길에 올라서고자 한 것은 돈키호테의 시대착오이며, 시계를 과거로 되돌려 옛날의 연인을 되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은 개츠비의 환상이다. 그들은 그 착오와 환상의 오류 때문에 죽는다. 보바리 부인과 안나 카레니나 같은 여성인물들은 사랑과 욕망의 강렬한 불길에 휩싸여 파멸한다. 그 불길을 선택한 것은 그들의 오류다. 그러나 이런 오류와 실패, 착각과 패착 때문에 문학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폐기처분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초시대적 생명을 획득하는 것은 오히려 오류의 진실 때문이다. 오류의 진실이란 오류를 통해서 드러나는, 경우에 따라서는 오류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인간 경험의 진실성이다. 이 진실성은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예나 지금이나 나약하지 않은 인간은 없다)가 뿜어내는 눈부신 광채다. 문학의 시공간 초월성의 비밀 하나를 말해주는 것은 그 진실의 광채다.
경험의 진실성이라는 말은 다소 애매한 느낌을 줄 수 있다. 인간은 그의 소망이나 의지에 상관없이 반드시 맞닥뜨려야 하는 항구한 경험의 조건들 속에서 살아간다. 그가 죽어야 하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은 그런 경험의 조건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인간은 이 유한성이 발생시키는 경험들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세 가지 전형적인 유한성의 조건들을 경험해야 한다. 무한히 살 수 없다는 생의 유한성, 무한한 자원을 가질 수 없다는 자원의 유한성,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다는 능력의 유한성이 그것이다. 유한성은 인간 공통의 보편적 조건이다. 상실, 좌절, 이별, 배반, 실망 같은 고통의 경험도 그 조건으로부터 나오고 사랑과 욕망, 기쁨과 성취조차도 그 조건에서 나온다. 그런데 그 유한성의 공통 조건에 대응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사는 법이 다르고 죽는 법이 다른 것은 그런 대응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이 차이가 경험의 특수성을 구성한다. 유한성의 조건들은 항구하고 일반적이되 그 조건에 맞서는 개인들의 이야기는 일반적이지 않고 추상적이지 않다.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유한성의 조건들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것이지만 그 조건에 맞서는 한 사람 한 사람 개인들의 이야기는 특수하고 특이하다. 문학이 다루는 것은 그런 특수하고 구체적인 경험이다. 우리가 경험의 진실성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그 개인적이고 특수한, 그리고 많은 경우 모순적인 인생 경험의 거부할 수 없는 진실성이다. 삶의 고비고비에서 사람들이 겪는 난관과 딜레마와 선택의 어려움에 관한 개인적 경험의 치열성으로부터 발산되어 나오는 광휘, 그것이 경험의 진실성이다. 이 진실성은 특정의 문제에 대한 모범답안이 아니고 시효를 가진 지식도 아니다. 사람들이 문학을 읽고 또 읽는 이유는 읽을 때마다 그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진실의 광휘를 만나고 발견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문학은 기본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알레고리’다. 어떤 특정한 것의 알레고리가 아니라 많은 것들의 알레고리일 수 있는 것, 그것이 문학이다. 이것은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과감한 진술이지만 나는 그 진술을 포기하지 않는다. 가장 사실적인 소설도 알레고리라는 광주리에 담길 수 있을 때에만 ‘문학’이 된다. 『모비 딕』은 미국의, 백인 문명의, 욕망과 죽음의 알레고리다. 『동물농장』은 소비에트, 전체주의, 혁명의 알레고리이면서 동시에 역사의 알레고리다. 파우스트 서사는 무한 욕망에 대한 알레고리이면서 동시에, 좀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돈’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나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문학의 마술적 이동 가능성의 또다른 중요한 비밀이 문학의 이 알레고리적 성격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2천 년 전 오비디우스의 신화시집 『변신』에는 ‘에뤼식톤 이야기’라는 것이 있다. 자본주의와 관계없었던 시대에 나온 그 에뤼식톤 이야기가 21세기 독자에게는 영락없는 자본주의 알레고리로 읽힐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읽으면 파우스트 서사도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 문명과 그 문명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운명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문학작품은 완결된 최종 텍스트가 아니라고 사람들은 곧잘 말한다. 맞는 말이다. 문학은 냉장고, 자동차, 진공청소기 같은 완성품 생산체제가 아니다. 문학의 이런 비결정성은 문학 자체가 알레고리라는 넓은 암시성의 언어적 구조물이라는 사실에, 그리고 문학이 생산의 시간과 수용의 시간이라는 두 시간대를 모두 포괄한다는 사실에 연유한다. 알레고리는 열대의 우림과도 같다. 그것은 수많은 읽기를 가능하게 한다. 작품은 완성품의 형태로 생산되어 독자에게 전달되는 일방적 유통체계가 아니고 특정의 의미를 특정의 방식으로 읽어내도록 설계된 닫힌 회로도 아니다. 문학읽기에서 오늘날 상식처럼 되어 있는 것은 읽기 자체가 창작행위이고 생산행위라는 주장이다. 독자가 작품을 완성한다는 말은 이 주장을 요약한다. 그러나 독자가 자기 혼자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이 최종성을 거부한다면 독자의 읽기에서도 종결성은 거부된다. 문학이 비종결적이라는 말은 읽기 자체가 비종결적이라는 말과 사실상 같은 의미다. 어떤 탁월한 독자도 한 작품에 대한 그의 읽기가 최종적 읽기라고 천하에 자랑할 수 없다.
문학의 나라에는 최소한 네 종류의 구성원들이 참여한다. 작가, 작품, 독자, 그리고 시대가 그 구성원들이다. 이 구성원들이 문학의 공동체를 이룬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이들 네 구성원들 사이의 대화, 협상, 경청의 과정이다. 동일한 작품에 대한 읽기의 내용이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다를 수 있는 것은 구성원들 사이의 대화와 교섭의 결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독자라는 구성원 하나만 놓고 봐도 그렇다. 독자 그 자신도 바뀐다. 그의 경험, 감성, 사유의 능력은 세월과 함께 바뀔 수 있고 이런 변화는 읽기의 변화를 독촉한다. 10년 전에 읽은 작품이 지금 달리 읽힌다면 그 변화에는 ‘나의 변모’가 개입해 있다. 나의 읽기에 변화를 일으키고 나의 문학경험을 풍요하게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당신의 읽기, 그 여자의 읽기, 그 남자의 읽기다. 나와 당신과 그가 같은 작품을 놓고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문학공동체는 대화의 공동체, 마음의 공동체, 소통과 이해와 공감의 공동체가 된다. “넌 이 작품 어떻게 읽었어?”라고 서로 묻는 것이 그 공동체 사람들의 습관이다. “그 사람은 어떻게 읽었을까?”라는 것도 그 문학의 나라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깊은 궁금증이자 관심이다.
왜 그럴까? 이건 순수 바보의 질문이다. 문학공동체 사람들은 함께, 그러나 서로 다른 눈으로, 문학읽기에 참여한다는 것이 인생 경험을 심화하고 인간 이해와 공감의 가능성을 확장시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삶을 기쁘고 즐거운 것이게 하는 비결의 하나는 바로 이런 종류의 심화와 확장의 경험이다. 읽는다는 것은 삶 그 자체이고 우리네 인생이며 이 지상에 살아 숨쉬는 동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짧은 영광의 순간이 아닌가. 이 책은 바로 그런 즐거움과 영광을 위해 이런저런 방식으로 이런저런 작품들을 읽어낸 이런저런 독자들의 작은, 그러나 값진 기여다.
가장 위대한 사회소설이 말해주는 것
『안나 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
이현우
너무도 유명한 작가와 소설에 대해 간략하게 말하기, 이게 내게 주어진 미션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은 소감을 적는다는 미션. “『안나 카레니나』는 예술작품으로서 완전무결하다”는 도스토옙스키의 평이 『안나 카레니나』 뒤표지에 박혀 있는데, 이건 사실 톨스토이 자신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작품의 주제가 뭐냐는 질문에, 그걸 말하려면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읽어야 한다고 했다던가. 요컨대 군더더기라곤 한 군데도 없는 완벽한 작품이라는 뜻이리라.
완벽한 작품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다. 경탄이 아니라면 경탄에 경탄 정도?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토마스 만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사회소설이다”라는 게 그가 남긴 경탄이다. 무얼 덧붙이겠는가. 햄릿의 말처럼 “그리고 침묵”. 위대한 작품에 대해선 침묵하는 게 옳다. 일단은 그렇다. 그럼에도 몇 마디 거들려고 한다면 뭔가 다른 빌미가 필요한데, 이번에도 출처는 톨스토이 자신이다.
『안나 카레니나』를 쓰고 난 직후 소위 ‘정신적 위기’를 경험한 톨스토이는 『참회록』을 쓰면서 모든 예술을 부정한다. 너무도 ‘과격한’ 톨스토이였기에 자신의 작품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예술작품으로서의 소설은 더이상 쓰지 않겠다는 게 그의 결단이었다. 만년에 그가 서가에서 빼낸 책을 읽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표지를 보니 『안나 카레니나』였다는 전설적인 에피소드가 나오게 된 배경이다. 가장 완벽한 작품이지만 동시에 작가에게는 잊힌 작품. 근대소설의 정점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작가에게는 그 한계를 깨닫게 해준 작품. 『안나 카레니나』의 문제성이다. 이걸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너무도 유명한 첫 문장이 실마리이자 맥거핀이다. 실마리처럼 보이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 히치콕이 즐겨 구사했던 맥거핀이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적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이 문장은 1부의 첫 문장이기에 전체 8부로 구성된 소설 전체의 첫 문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통상 작품의 대략적인 내용과 주제까지 암시해주는 문장으로 읽힌다.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이 있다는 것, 그리고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이라는 것. 소설의 초점은 물론 불행한 가정들에 맞춰진다.
행복한 가정은 엇비슷하기에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소설의 재미는 무엇보다 남들의 가지가지 불행한 가정사를 읽는 재미다. 아이들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우다 들통이 나는 바람에 곤경에 처한 스티바와 돌리 커플의 이야기부터가 얼마나 흥미로운가! 오빠 부부를 중재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기차를 타고 달려온 안나가 젊은 장교 브론스키와 눈이 맞아 열애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는 또한 얼마나 위력적인가! 고위 관리이면서 가정에서도 사무적인 남편 카레닌이 안나의 불륜에 대한 응징으로 이혼을 거부함으로써 안나와 브론스키의 관계는 교착상태에 빠지고 점차 삐걱거리게 된다. 브론스키의 애정이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에 상심한 안나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결국은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다.
대략 이런 줄거리라면 러시아식 ‘막장 드라마’의 소재로도 변주될 만하다. 여주인공 이야기의 기본구조만 보자면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와 『안나 카레니나』의 거리는 몇 뼘 되지 않는다. 그런데 플로베르와 다르게 톨스토이는 안나의 이야기에 또다른 이야기를 병치시키고자 했다. 그것도 동등한 비중으로. 바로 레빈의 이야기인데, 건축으로 비유를 들자면 안나 이야기와 레빈 이야기는 『안나 카레니나』를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이다. 공정하게 제목을 붙이자면 『안나와 레빈』이라고 해야 맞을 만큼 레빈은 이 작품에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한다. 놀라운 것은 이 두 주인공이 거의 만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7부에 가서야 레빈은 안나를 찾아가 독대하고 그녀의 솔직함에 좋은 인상을 받는다. 바로 7부 끝부분에서 안나가 자살하게 되므로 둘의 만남은 분명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대체 안나와 레빈의 이야기를 한데 묶어주는 ‘연결의 미로’는 무엇인가? 어째서 두 인물은 주인공이면서 각기 다른 장면에 나오는가?
물론 이런 의문을 작가가 의식하지 못했을 리 없다. 톨스토이는 소설의 두 기둥을 덮어주는 지붕이 작품에 존재한다고 시사했다. 잘 찾아보라고?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자면 이 작품에선 레빈만이 아니라 안나 또한 작가 톨스토이의 분신이다. 곧 레빈이 정신적 자아를 대표한다면, 안나는 육체적 자아를 대표한다. 톨스토이 자신이 레빈처럼 삶의 의미라는 형이상학적 물음에 과도하게 사로잡힌 인물이었고, 안나처럼 강렬한 육체적 욕망의 소유자였다. 문제는 이 두 자아의 통합이다.
육체적 욕망에 의해 결합된 안나와 브론스키 커플이 결국 파국에 봉착하는 데 반해서 레빈과 키티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교감을 통해 이상적인 커플상을 보여주는 듯싶다. ‘행복한 가정’의 모델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8부의 마지막 장면에서 레빈은 자신의 깨달음을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한다. 비록 사랑스러운 아내이지만 키티는 형이상학적 물음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레빈의 고뇌를 특이한 성벽 정도로 이해할 공산이 크다. 실제로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야 역시 남편을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가정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얼핏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을 대비시키려는 듯 보이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가정의 가능성 자체에 회의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마무리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란 첫 문장이 맥거핀이라고 말한 이유다. 불행한 가정에 대한 소설적 탐구는 작가 톨스토이로 하여금 ‘가정의 불행’이란 결론으로 이끈다. 모든 가정은 필연적으로 어긋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가 도달한 결론이다. 하지만 이 결론을 그는 『안나 카레니나』 안에는 적어두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정도의 문장이지 않을까. “무릇 모든 가정이 행복을 꿈꾸지만 행복은 가정 안에 깃들지 않는다.”
톨스토이에게 인생의 진리와 함께하지 않는 행복이란 가능하지 않으며, 설사 존재한다 하더라도 기만에 불과하다. 그리고 가정은 그런 진정한 행복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참회록』에서 예술과 함께 가정을 삶의 진리를 은폐하는 기만으로 간주한다. 『안나 카레니나』를 떠나면서 톨스토이는 예술로부터, 그리고 가정으로부터 떠난다. ‘죽음’이라는 인생의 진리 앞에서 완벽한 예술도 행복한 가정도 모두가 기만에 불과하다. ‘위대함의 허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안나 카레니나』는 한번 더 위대한 소설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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