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당신의 달콤한 독서를 위하여
1.
독서운동이라는 말은 참 이상하다. 독서란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그 즐거움을 운동을 통해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독서가 비디오나 게임에 비해 재미가 덜해서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가? 만일 무인도에 아주 재미있고 두꺼운 책 한 권과 비디오 한편, 게임 하나가 있다고 하자. 오랜 시간이 지나면 아마도 책을 보고 있지 않을까? 책을 다 외웠다 해도 그 즐거움은 다하지 않을 것이다. 스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체스 이야기》에서 어느 정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소설의 등장인물 B박사는 나치에 의해 아무것도 없는 호텔방에 갇힌 채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아무런 할 일도 없을 뿐 아니라 볼 것도 없는 완전한 무無의 상황에서 지내는 일은 끔찍한 정신적 고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심문을 받으러 나갔다가 책 한 권을 훔친다. 그 책은 비록 체스 기보에 지나지 않는 건조한 책이었지만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책이 재미있다는 증거는 현실에서도 발견된다. 2012년 한국에서는 <레미제라블>이 뮤지컬 공연과 영화로 대단히 큰 성공을 거뒀다. 그 공연과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소설 《레미제라블》을 읽었다. 올해 5월에도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인 《위대한 개츠비》가 영화로 상영된 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런 종류의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만일 영화나 공연이 책보다 훨씬 더 재미있어 그것으로 충분했다면, 그들은 왜 다시 책을 읽고 싶었을까? 단순히 책이 더 재미있다고 말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분명 다른 종류의 재미가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독서운동의 목적이 더 많은 사람들이 책 읽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독서가 즐겁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 운동가는 독서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보여줄 때 자격이 생긴다. 만일 한국 사회가 그랬다면 지금 더이상 독서운동이 필요 없는 상황이 됐을 것이다. 즐거움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순식간에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얼마나 많은 어른들이 얼마나 많은 재원을 들여 독서운동에 매달렸던가. 도서관은 세 배 이상 늘어났고, 장서 수는 몇 배인지 모를 정도로 많아졌다. 그러나 그 독서운동의 열기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된 지금, 한국의 성인 평균 독서량은 1990년대 이전으로 돌아가버렸다.
책 읽기를 즐기는 아이들을 만나면 꼭 물어본다. “네 친구들도 책 좋아하니” 대개의 답은 이와 비슷하다. “아뇨, 제가 희귀동물이에요.”
2.
한 권의 책을 제대로 다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은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가 아니라 독후감을 끝낼 때다. 그런데 그 독후감 때문에 책을 읽는 것도 싫어할 만큼 부담감을 느끼게 만드는 상황이 자주 만들어지는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독후감이 부담스럽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즐겁거나 슬플 때, 또는 싫을 때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독후감이 부담스러운 이유는 감동이 없는 책에 대해서도 억지로 독후감을 쓰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매우 아름다운 경치를 혼자 보게 되었다고 하자. 그 경치를 음미하며 감탄한 다음에 무얼 하는가? 대개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그것을 누구에겐가 보여주면서 자기의 느낌을 말한다(사실은 페이스북에 올리거나 트위터나 카카오스토리 같은 데 올리는 일이 많으니 “말한다”보다는 “글로 쓴다”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런 것이 바로 독후감이다. 저절로 넘쳐 나온 감동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고 해도 억지로 끌려간 곳이라면 감동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그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지 않거나 심한 경우에는 다시는 가보고 싶지 않은 곳이 될 수도 있다.
책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주어진 것일 때 그것을 좋아하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자발적으로 그 텍스트에 빠져들어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권장도서목록 같은 것은 독서를 괴로운 경험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좋은 경치라고 해도 끌려가 보고서는 감동하기 어렵듯이, 아무리 좋은 책이라고 해도 억지로 읽고 감동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고 해도 누구에게나 좋은 약은 없다. 특정 시점의 나에게 맞는 약이 있을 뿐이다. 정말 좋은 약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내가 잘 받아들이지 못하면 독약이 될 수 있다. 그러니 꼭 고전을 읽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고 해도 내가 잘 소화하고 잘 받아들이면 최고의 약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읽고 싶은 책이라면 무슨 책이든 상관없다.
게다가 어차피 이 세상 모든 책은 하나하나가 다 하나의 편견이다. 인간은 모두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들을 뿐 아니라 쓰고 싶은 것만 쓴다. 사실은 없다. 해석만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 해석조차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는다.
과학조차 그렇다.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증명한 내용이 바로 그것 아닌가. 실험을 통해 과학이론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론이 실험을 만든다. 그런 과학적인 실험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강화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더 합리적이며 새롭고 혁명적인 발견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나마 가장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구조를 가졌다는 과학이 그런데 다른 분야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사회생물학 대논쟁》을 읽어보라. 최고의 석학들이 ‘사회생물학’에 대해 얼마나 서로 다른 평가를 하는지 알 수 있다. 혹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열광했다면, 스티븐 로우즈 외 2인이 쓴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식으로 과학적 편견을 지적하는 책들 가운데 하나가 스티븐 핑커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제리 포더의 비판을 담은 책 《마음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다.
과학책이라 좀 어려운 사람이라면 박노자와 허동현이 쓴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를 보라. 이 책에는 한국의 근대 100년 역사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시각이 담겨 있다. 같은 사실에 대해 얼마나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편견은 수많은 편견을 접함으로써 해소된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썼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주변 사람들과 공유할 필요가 있다. 친구를 만나 말로 길게 설명해도 좋다. 페이스북에 올리거나 카카오스토리 같은 곳에 올려서 친구들의 반응을 볼 수도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내 생각과 비슷한 경우를 확인할 수도 있고, 내 생각과 다른 경우와 맞닥뜨릴 수도 있다.
이 세 번째 단계가 매우 중요하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 내가 가진 편견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 함께 살아가는 방법까지 배울 수 있다. 만일 그 사람이 내가 닮고 싶은 형이나 누나, 선생님이라면 내 생각도 변하고 독서의 방향도 조절될 것이다. 이것이 독서의 세 번째 기쁨이다.
이렇게 독서의 세 가지 기쁨을 생각해보면 한 권의 책을 제대로 다 읽는 시점은 내 주변 사람들과 소통이 끝나는 시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회를 조직하고 잘 운영하는 것은 참 중요하다. 조심할 것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독서회가 아니라 친목회가 되기 쉽다. 그리고 굳이 한 권의 책을 정하고 좋으나 싫으나 모두가 함께 읽고 토론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책의 내용 또는 독후감을 발표자가 자세히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그것에 대해 참석자가 토론하는 방식이 훨씬 더 좋을 수 있다.
3.
이제 인간은 잘 죽지 않는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 40~50대라면 100세 정도까지, 20대라면 120세 정도까지 살 것이라 한다. 삶의 환경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기성세대도 남은 세월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다. 이전 세대는 이렇게 오래 살지 않았기 때문에 역할모델도 없다. 그래서일까. 50대, 60대 독서인구가 빠르게 늘고 있다. 책을 통해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20대 전후의 젊은이라면 이 문제는 더 심각하다. 학창시절이 끝 난 뒤에 100년을 더 살아야 한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세상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지 지금으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세계의 유명한 미래학자들조차 미래의 모습은 어떨지 알 수 없다고 발뺌하지 않는가. 아이들 역시 학교를 떠난 뒤에도 지속적으로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학창시절에는 어쨌든 이런저런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사회에 나온 뒤에는 오롯이 자기 힘으로 살아나가야 한다.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 적응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터넷의 토막지식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결국 책을 읽어야 한다. 그런데 독서의 즐거움이 아니라 독서의 지겨움만 기억하는 아이들이 과연 독서를 선택할까?
어른들은 알지 않는가. 나이가 들수록 좋아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게 된다. 그런 자유의 폭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 책은 억지로 읽힐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결국 책 읽기는 인생 대부분의 시기에 선택의 영역으로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동열풍이 아니라 독서열풍이 불어야 한다. 스스로 독서를 즐기고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 경험인지 몸소 보여주어야 한다. 독서의 즐거움이 전염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고 가장 빠른 길이다.
4.
‘메타북’이라는 말이 있다. 메타비평이 비평에 대한 비평을 말하듯이 메타북은 책에 대한 책을 이른다. 메타meta라는 접두사는 뒤에 오는 명사를 ‘탐구하는quest of 어떤 것’이라는 의미를 만든다. 이 개념은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실제로 책을 분류할 때 사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진지한 독자에게는 무척 중요하다.
메타북은 책이란 무엇인가,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무엇인가, 그리고 책에 담긴 내용인 ‘생각’의 정체는 무엇인가를 다룬다. 《읽는다는 것의 역사》(로제 샤르티에, 굴리엘모 카발로 편저), 《독서의 역사》(알베르토 망구엘)나 《생각의 역사》(피터 왓슨)와 같은 책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언어의 기원》(파스칼 피크 외 2인)이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월터 옹)처럼 언어 그 자체를 다룬 것도 있다. 이런 종류의 메타북은 책의 내용이 담기는 그릇으로서 언어의 정체를 밝힌다. 그리고 책은 문자문화의 핵심이지만 구술문화와 비교할 때 그 정체가 더 잘 드러난다. 빛이 어둠과 비교될 때 가장 잘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종류의 메타북은 주로 수천 년에서 수만 년에 걸친 거시적인 역사를 다룬다.
반면 미시적인 주제를 다루는 메타북도 있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저작물에 대한 책이 그런 종류다. 그런 메타북으로는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I. F. 스톤의 《소크라테스의 비밀》, 박홍규의 《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나 《플라톤 다시 읽기》 같은 것이 있다. 이 메타북들은 플라톤의 저작물을 설명하기보다는 비판한다. 사실은 그래서 중요하다. 플라톤 저작물에 대한 칭찬과 감탄 일색인 해설서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메타북은 균형 감각을 가지게 해준다.
또 논리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을 짚어가며 생각하는 방법을 다루는 메타북이 있다. 이런 종류의 메타북은 드물다. 무엇보다 앞에서 든 두 종류의 메타북에도 ‘논리적으로 따져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들’이 필수적으로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따로 한 권으로 쓰이기 어렵다. 그래서 더욱더 놓치면 안 되는 메타북이다. 이런 종류의 메타북으로는 페리 노들먼이 쓴 《어린이 문학의 즐거움》이 있다. 저자 페리 노들먼은 ‘어린이 문학’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모든 종류의 책으로 확장시켜 일반화해도 좋을 만큼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다. 그것은 《심리학의 오해》(K. E. 스타노비치, 1996/2003)와 같은 책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에 대해 설명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결국 과학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이고 논리적인 문제를 다룬다.
혹시 여기에서 논리학이라는 제목을 단 책이 비판적인 독서를 위한 ‘논리’적인 훈련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나도 재미있게 본 책이 있기는 하다. 《창의 논리학 방패의 논리학》(니컬러스 캐펄디 외 1인)이 그런 것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는 이런 책보다는 훌륭한 저작물에서 실제로 써먹을 수 있는 논리학을 더 잘 배울 수 있었다. 그런 책 가운데 하나가 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이다. 이 책은 심리학, 사회학 책들을 비판적으로 읽어내기 위해 꼭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메타북이다. 본성과 양육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심리학과 사회학 이론의 전제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논리학에서 다루는 논리 문제는 대개 퀴즈를 푸는 것과 비슷하다(얼마 전에 대단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도 좀 그렇다). 퀴즈를 통해서도 논리학적인 훈련이 가능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좀 비판적인 입장이다. 퀴즈는 일단 문제가 주어진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문제를 직접 찾아내야 한다. 퀴즈는 단순화한 조건 속에서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답을 찾는다. 그리고 답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신이 찾아낸 문제의 논리적인 결함을 증명하는 조건들을 직접 찾아야 하고, 그런 것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문제가 안 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리고 답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퀴즈는 논리적인 훈련만 받으면 풀어낼 수 있는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그 속에서 문제를 느끼고 경험하면서 통찰해봐야 한다. 그래도 답을 얻을 수 없을지 모른다. 논리학으로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훈련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실험실에서 잘 통하던 논리가 현실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경우가 많은 것과 비슷하다.
5.
《책의 정신; 세상을 바꾼 책에 대한 소문과 진실》 역시 메타북이다. 이 책을 계획한 것이 대략 2005년이다. 도서관운동을 시작하면서 한국에 불어 닥친 독서운동 열풍(독서 열풍이 아니다!)과 그 방식에 의문을 품었고, 효과를 의심하면서 나름 대안을 제시하고 싶었다. 앞에서 말했듯 독서는 즐거워야 한다. 그렇다면 이 책에 담길 이야기는 책을 좋아하는 당신의 달콤한 독서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내가 책을 바라보는 기본 입장은 ‘즐거움’이다. 깊고 넓게 이해한 다음 떠나는 여행이 더욱 즐겁다. 이미 수천만 종의 책이 존재하는 드넓은 책 세상을 여행할 때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책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질문은 정말 “좋은 책이란 어떤 것인가?”이다.
현대의 금서정책은 아이러니하게도 권장도서목록을 통해 이뤄진다. 특정 타이틀이나 주제를 권장하고 그것들을 ‘시험’과 관련시켜 목록 바깥의 책들을 고사시키는 방식이다. 권장도서목록은 언제나 그것이 ‘좋은 책’이라는 주장을 통해 사람들을 억압한다. 한 줌도 안 되는 권장도서목록이 독서의 즐거움을 빼앗는 원흉인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은 즐거운 독서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스러운 점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바탕이 될 만한 중요한 실증적 연구서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고, 또 그 영향을 받은 한국의 젊은 학자가 쓴 박사학위 논문도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주류학자들이 골라 뽑은 문학사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읽었던 책에 대한 연구서’가 나왔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마련했다. 그것이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 “포르노소설과 프랑스대혁명”이다.
두 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의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프랑스대혁명에서 시작된 인권과 평등이라는 원리는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것처럼 놀랍고 혁명적인 생각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런 혁명적 생각의 기원이 되었을까? 실마리는 근대 과학혁명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이야기를 다룬 두 번째 이야기는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다.
세 번째 질문은 ‘고전은 정말 위대한가?’였다.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히는 플라톤의 대화편 중 소크라테스(그 가운데서도 《변명》을 중심으로)와 공자의 《논어》를 선택했다. 이 책들을 어떻게 읽어야 즐거운지 말해보려 한다. 가장 즐거운 방법은 언제나 비판적 독서다. 그래서 세 번째 이야기 제목은 “고전을 리모델링해드립니다”이다.
네 번째 질문은 두 번째 이야기의 뒤를 잇는 의미가 있다. 근대의 과학혁명은 뉴턴에서 완성되었고, 그것이 당시 계급 중심의 사회제도를 깨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면 이후 현대사회를 규정한 과학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시작된다. 다윈 이후의 수많은 학자들은 그를 곡해해서 자신의 필요에 맞춰 이용했다. 다윈의 메시지가 아니라 공감하는 부분만 따서 자신의 이론을 만드는 데 열중한 것이다. 그 가운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중요한 문제는 본성과 양육 논쟁이다. 그래서 네 번째 이야기는 “객관성의 칼날에 상처 입은 인간에 대한 오해”이다. 이 본성과 양육 논쟁에 관한 이야기는 생물학과 문화인류학, 심리학 분야(진화심리학을 포함하여)를 거쳐 현대로 이어진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책의 운명에 관한 것. 책은 고대로부터 학살의 대상이었다. 책은 태생적으로 정치적 물건이다. 가장 큰 규모의 학살은 20세기에 일어났다. 책의 죽음이 더욱 슬픈 것은 그런 적극적인 학살 이전에 책의 감옥에서 하염없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유태인이 문서를 버리는 쓰레기통인 게니자 geniza에서 끝난다. 학자들은 천년 묵은 게니자에서 그 어떤 도서관의 장서보다도 더, 지나간 시대의 메시지를 포괄적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범인을 쫓는 수사관들은 늘 용의자의 쓰레기통을 뒤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실을 발견한다. 우리는 게니자가 암시하는 진실의 장소가 어딘지 잊으면 안 된다. 그 이야기가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그 다섯 번째 이야기가 “책의 학살, 그 전통의 폭발”이다. 이 마지막 글은 몇 해 전 번역한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알마, 2010)에 해설로 붙인 글이다. 독서에 대한 이야기에서 책의 운명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그 번역서는 그리 많이 읽힌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여기에 실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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