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폰과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 본다는 것의 의미
이 포스터를 본 적이 있나요? 건물에 화재가 났을 때 트위터에 사진을 올리려 하지 말고 신속히 건물을 빠져나가라는 농담 같은 경고문이에요.
불이 났을 때 트위터에 올리려 하지 말고 빨리 건물을 빠져나가라는 경고를 담은 포스터. |
많은 사람이 카메라가 장착된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게 되면서, 우리는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을 사람들과 공유하려는 욕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가 먹는 음식, 길을 걷다 마주치는 풍경이나 사건들을 찍어 카카오스토리나 트위터, 페이스북에 올리고, 친구들의 ‘좋아요’나 멘트를 받고, 그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는 건 우리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회생활이 되었지요. 나의 삶에 대해, 나의 일상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이야기 나누려는 욕구가 큰 나머지, 자신이 위험할 수도 있는 화재 현장에서도 그 장면을 트위터로 보내려 하는 것이겠지요?
내가 ‘지금 보는 것’을 거의 실시간으로 친구들과 ‘함께 보고’ 싶어 하는 욕구는, 스마트폰과 소셜 네트워크가 없다면 생겨날 수 없었던 욕구예요.(이러한 점에서 욕구 역시 사회, 문화적 산물이지요.) 내가 보고 겪었던 일들에 대해 편지를 쓸 수도 있었지만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에요. 사진을 찍어 두었다가 나중에 보여 주며 이야기할 수도 있었지만, 당장 내가 느낀 생생한 감정을 전하기는 어려웠지요. 언제, 어디서든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 준 스마트폰과 또 그렇게 찍은 사진을 친구들과 공유할 수 있게 해 준 소셜 네트워크 덕분에, 내가 본 것, 내가 체험한 것을, 그 흥분과 감동이 채 가라앉기 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함께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해졌지요.
그를 통해 생겨나는 친구들 사이의 소속감이나 친밀함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에요. 스마트폰이나 소셜 네트워크가 없었다면 생겨날 수 없었을, 전혀 새로운 인간관계, 새로운 공동체가 가능해진 거예요.
1909년, 아방가르드 예술가였던 필립포 마리네티는 전보, 전화, 기차, 비행기, 영화, 신문 등의 매체가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세계감정’을 낳는다고 말했어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속도로 인간을 다른 장소로 이동시켜 주는 자동차, 비행기, 기차가 글자 그대로 세계를 ‘줄어들게’ 했고,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해 주는 신문의 덕택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세계 전체로 넓어졌기 때문이었죠.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해 보면 20세기 초 새로이 발명된 교통과 통신수단이 가져다준 변화는 실로 엄청났어요. 사람들은 갑자기 서로 공간적으로, 또 심정적으로 매우 가까워졌다고 느꼈죠.
하지만 오늘날 인터넷, 스마트폰, 소셜 네트워크가 가져다준 새로운 세계감정에 비하면 그것은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하죠? 우리는 이 매체들 덕분에, 지금, 내 곁에서 일어나는 사사로운 일들을 그 즉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나 동료들에게까지도 생생하게 전달하고, 감정과 의견을 나눌 수 있으니까요.
20세기 초 마리네티가 말한 ‘세계감정’이 추상적인 글자와, 늘 하루나 이틀 정도 뒤늦게 도착하는 뉴스들로 이루어진 ‘활자적’ 세계감정이었다면,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즉시, 사진과 영상, 그리고 목소리로 함께 소통하는 오늘날의 세계감정은 생생히 살아 있는 멀티미디어적 세계감정이라 할 수 있어요.
인터넷, 스마트폰과 소셜 네트워크는 새로운 공동체적 감성을 형성하게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새롭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볼 것을’ 염두에 두고 세상을 보는 시각, 여기에는 이전의 문화에서는 없었던 새로운 태도가 있어요.
사람들과 함께 보고, 공감하고, 이야기를 나누려는 마음가짐으로 이 세상의 사물들을 본다면, 우리는 나 혼자의 편협한 생각이 아니라 친구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보려고 하겠지요. 내가 신기하고, 아름답고, 멋지다고 생각한 장면들을 친구들과 공유할 때 우리는 내가 느끼는 주관적 감정과 판단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님을, 친구들이, 사람들이 거기에 ‘좋아요’를 눌러 주고, 함께 느껴 주리라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를 통해 함께 느끼는 어떤 공동체적 감성을 전제하는 것이지요.
스마트폰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서로 다른 사진, 서로 다른 세상의 모습들이 공유되고, 이야기되면서 만들어지는 감성적 공동체는, 일방적으로 주어진 세상의 모습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감성 공동체와는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렇게 본 세상의 모습을 공유하고 함께 이야기 나누면서 형성되는 공동체의 시선은, 그만큼 더 민주주의적인 성격을 띨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스마트폰이 지닌 부정적 가능성 또한 잊어서는 안 돼요. 스마트폰은 우리가 보는 걸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게’ 해 주었지만, 또한 그것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보이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우리가 화장실에 앉아 용변을 보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걸 원치 않아요. 부모님께 꾸중을 듣거나, 친구에게 상처받아 혼자 훌쩍거리는 모습도요. 자기 자신에게만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한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가지고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 출발점이에요.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자기 자신만의 시선에만 노출된 공간이, 자기 자신과만 만나는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그런 시간, 그런 장소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모든 행동과 모습이 언제든지 누군가에게 보일 수 있다면?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자발성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보인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를 외적으로 규제하게 될 것이고, 결국 우리의 자율성을 상실하게 될 거예요.
조지 오웰이 쓴 소설 『1984』에는 모든 시민들이 ‘빅 브라더’라 불리는 국가의 권력자에 의해 감시받는 디스토피아가 등장해요. 모든 시민들의 집마다 설치된 모니터가 그들의 모든 말과 행동을 감시하지요(Big Brother is watching you!).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CCTV. 수많은 감시 카메라는 보이지 않을 권리가 훼손한다. |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보이고, 감시되고 있는 상황은 시민들 스스로에게 내면화되어, 결국 대부분의 시민들은 자기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까지 잃어버리지요. 이러한 점에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을 권리’, 내 삶의 모든 순간을 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내보여 주지 않을 권리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데 아주 중요한 권리예요.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그를 공유할 수 있는 조건은 이 권리가 훼손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카메라가 달린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다니고, 또 그렇게 찍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금방이라도 전 세계의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가 원하지 않은 나의 모습이 언제라도 ‘공공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예를 들어, 유튜브는 유명한 학교를 졸업하거나 별다른 경력이 없는 사람이, 자신이 가진 능력과 기량만으로 순식간에 전 세계의 관심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지요. 하지만 그 매체가 그 사람의 ‘보이지 않을 권리’를 훼손하는 데 활용된다면 그건 그 사람의 인생을 파괴할 수도 있어요. 앞에서 말했던 뉴욕 지하철 사진 기억나시죠? 보기 위해, 보는 것의 욕구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경우라면, 상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의 사진이나 영상을 찍고, 그를 소셜 네트워크나 인터넷 등에 공개하는 행위는 시선의 욕구가 타인에 대한 공격이 된 경우에 해당됩니다.
다른 사람의 존엄성을 훼손할 수 있는 그런 사진이나 동영상을 공유하고 유포함으로써 생겨나는 공동체는, 위에서 말한 세상의 사물을 함께 보고 서로 공감함으로써 스스로 확장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건 마치 나치주의자들이, 유대인들의 머리를 깎이고 발가벗겨, 목에는 전단을 걸고 거리를 걸어 다니게 하면서 유대인들을 적대시하는 유대감을 강화했던 것처럼,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라나는 공격적, 배타적인 폭력 집단에 다름 아니죠. 그렇게 모욕당하는 유대인들을 ‘함께 보며’ 생겨난 이 도착적 유대감은 결국 유대인 수백만 명의 학살을 용인하는 것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사실, 기억해야 하겠지요?
이처럼 ‘본다는 것’은, 주변의 친구들, 길을 가다 마주치는 이웃과 시민들, 이 지구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다른 먼 곳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답니다. 본다는 것은 나의 눈의 생리적 작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윤리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사회적 행위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잘’ 보는 법을 생각해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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