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없는 학문, 한국의 디자인에 대하여
한국 디자인사 서술의 문제점과 역사적 특수성
한국 디자인의 역사가 21세기에 들어서도록 합의된 하나의 정론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주체적인 서술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의 미술사나 디자인사는 서구의 가치 기준으로 재단되어 왔다. 역사 발전의 보편성이라는 서구의 계몽주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인간 이성을 중심으로 한 서구 근대화의 성공 과정을 찬양했으며,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미술 양식인 ‘모더니즘’을 미술을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문화의 상대성이 박탈되었고, 서구 선진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역사 발전 단계가 뒤처지는 국가이자 서구에서 실험한 조형 양식을 뒤늦게 좇는 후진 국가로 전락했다.
그렇다고 모더니즘의 가치 기준을 우리 미술사 혹은 디자인사에 엄격하게 적용한 것도 아니었다. 모더니즘의 핵심 가치라 할 수 있는 ‘근대성’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식민지와 독재국가의 문화, 혹은 후발 산업화 국가의 문화 양상은 그 가치를 평가할 필요도 없는 주변부의 역사였다. 서구 디자인사에서 나치 치하의 독일이나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 나타난 소련의 디자인에 대해서 가치를 부여하지 않듯이, 한국의 미군정기와 독재정권기에 이루어진 디자인 작업들은 근대 디자인사의 서술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1980년대 초까지도 우리 사회에서는 민주주의와 대중사회가 본격적으로 도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근대성의 기본 조건도 충족되지 못한 사회였다고 할 수 있으며, 1990년대 초까지도 국내 대부분의 디자인은 모방 일생의 후진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 미술계는 서구의 역사 서술 방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우리의 실정에 맞게 ‘한국적’으로 끼워 맞추고 있다. 인상파 미술을 모더니즘의 출발점으로 잡는 서구 미술의 경향에 비추어 처음으로 일반 대중의 생활상을 그렸던 단원 김홍도의 작품을 부각시키고, 관념산수화가 아닌 실경을 그렸다는 이유로 겸재 정선을 근대 한국화로 분류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서구의 앵포르멜Informel 미술과 우리나라 단색조 회화를 비교해 약간의 시차만 있을 뿐 서구와 우리의 미술 발전이 ‘거의 동일한’ 발전 양상을 보인 것처럼 해석한다. 모든 것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구분틀에 끼워 맞추다 보니, 1980년대에 나타났던 자생적인 미술 흐름인 민중미술의 구분은 모호해졌다.
디자인의 역사에서도 디자이너와 디자인 운동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나열하고, 일부 천재적이거나 창의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역사가 발전되어왔다는 식의 서술을 하고 있다. 독일에서 처음으로 아에게AEG라는 기업에 디자이너로 고용되었던 최초의 산업디자이너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와 비교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디자이너를 채용했던 금성과 디자이너 박용귀의 작업을 부각시킨다. 그뿐 아니라 서구의 여러 모더니즘 디자인 운동 단체의 활동에 비추어, 1970년대를 전후해 국내에 설립되었던 수많은 디자인 협회와 단체, 한국디자인포장센터의 활동을 한국 디자인 사조를 이끈 선구적 단체로 비유하기도 한다. 단지 몇몇 개인들의 활동과 서울대학교나 홍익대학교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이합집산을 거듭했던 단체에 선구자적 가치를 부여하고, 근대화 과정의 독재와 가난, 산업화의 병폐 등과 사회 현실은 외면한 채 질곡의 역사를 낭만적으로 해석한다. 정권의 정책 홍보와 수출을 위해 봉사했던 디자인계의 노력은, 엄밀히 따져보자면 근대화 이전 봉건시대 미술의 행태에 가까우며, 실제로 많은 수의 작품들이 역사적 형식을 재현하는 한국판 신고전주의 미술이었다. 여기에 서구 모더니즘의 기준을 엄격히 적용해보면 결코 근대 디자인의 범주에 포함시켜 한국 디자인의 원류로 평가해서는 안 될 부분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한국의 디자인 역사를 서술해나가야 하는 것일까? 서구의 시선으로 디자인사를 정리한다면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 문화의 주도권을 가져오지 않는 한 영원히 주변부에 머무를 것이며, 그 문화적 가치에 대해서도 평가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생적인 산업화 전통과 강대한 제국주의 역사를 가지지 못한 비서구권의 공통된 고민이기도 하다. 비서구권의 개발도상국이나 경제적으로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나라들에서 받아들여진 모더니즘은 과거 미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이념이 사라진 상업적 가치와 스타일로서의 모더니즘이었다. 민주주의와 산업화의 이념을 사상과 조형 언어로 담아낸 서구의 근대성과 근대주의, 즉 모더니즘 운동의 가치는 우리에게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단지 군사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한 개혁의 표상으로, 자유주의를 선전하는 이데올로기로, 반공과 근대화의 상징으로, 수출 상품을 위한 기술로 모더니즘 양식이 받아들여지고 활용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서구 디자인의 보편타당한 평가 척도인 역사 발전 단계로서의 근대화와 모더니즘이라는 기준을 우리 역사에 그대로 대입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렇다고 역사 서술에서, 특히 미술 분야에서 판단의 기준을 바로 잡지 않고 역사를 서술하는 것은 단순한 사건의 나열과 역사적인 미술 데이터의 집합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이 책도 서구 모더니즘의 기본 틀을 결국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다만 모더니즘의 기준에 근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기준을 더해 절충점을 찾고 있을 따름이다. 역사 해석에 관해서는 더 많은 논의와 검토가 필요하다. 문화의 상대성을 인정하듯, 무엇이 되었건 우리 역사를 해석하기 위한 틀이 있어야만 서구의 관점으로 각색된 역사가 아닌 참된 우리의 역사 서술이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만의 특수성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디자인사 서술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부분이 한국 근대 디자인의 기점을 언제로 볼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다. 현재 일반적으로는 1800년대 말, 일제강점기를 디자인 역사의 출발점으로 잡는 경향이 짙다. 이 기준은 근대적 형태의 인쇄 매체가 등장한 시점이나 산업 시설과 제품이 등장한 시점을 근거로 삼고 있는 듯 보이며, 일견 타당성도 있다. 하지만 일회적이고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하나하나의 디자인 현상을 근거로 한국 디자인의 출발점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프리카의 어는 오지에 텔레비전을 한 대 가져다 놓고 그곳이 근대화될 것이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텔레비전은 단지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으며, 그 텔레비전을 통해 문명에 대한 이해와 생활의 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해야 비로소 그것이 하나의 기점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찾아왔던 근대의 조각들이 궤를 갖추거나 스스로 작동하지 못한 상황에서 단지 그 조각을 근거로 스스로 근대화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다.
그렇다면 디자인교육 시스템이 정착되기 시작한 해방 이후의 미군정기는 어떠한가? 이 또한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여지가 다분하다. 서구 모더니즘의 역사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잡고 있는 산업화와 대량생산을 근거로 한다면 1960년대가 한국 디자인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만일 서구에서 말하는 근대적 주체, 즉 민주주의와 자유로운 개인이 등장하는 시기,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고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시기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1980년대 말이나 1990년대를 디자인의 출현 시기로 잡아볼 수 있다. 독창적인 디자인 양식으로 세계의 디자인 조류를 이끈 디자이너와 디자인 작품의 등장을 근거로 삼는다면 세계적인 히트상품들을 배출해내기 시작한 2000년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강박적으로 한국의 디자인 역사를 100년에서 150년 정도로 길게 늘이는 것은 형식적으로나마 서구 디자인사에 한국이 뒤지지 않았다는 식의 억지 부리기일 뿐이며, 단순한 디자인 사건과 데이터의 나열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한국 디자인의 역사가 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다소 무리로나마 한국 근대 디자인의 기점을 미군정기로 설정했다. 이유는 미군정을 통해 근대적 시스템을 이식하기 시작했고, 또 근대 문물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배경으로 국민들 내부에 체화되는 경험으로서의 디자인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미군정기를 근대 디자인이 형성되기 시작한 지점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이를 토대로 정부의 진흥 정책과 대기업의 활동이 연쇄적으로 일어났으며, 디자인 국부론을 근간으로 하는 디자인 문화가 정착되어간 것도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 디자인 역사의 발전 단계를 이 책에서는 정권의 성향을 기준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는 각 정권의 정책이 디자인계의 주요 흐름을 결정짓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더 많은 논의를 통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는 기준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다음으로 고민해야 할 부분은 우리 근대 디자인의 발생 과정과 계몽적 성향이다. 서구의 경우에는 산업의 발전에 뒤따르는 산업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디자인교육이 생겨났다. 하지만 우리는 산업 수요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미군정을 통해 대학 디자인교육이 정착되었다. 일찍이 디자인교육을 받은 소수의 디자이너 겸 교수들도 별다른 활동 없이 작가 생활을 전전해야만 했을 정도로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부재했다. 하지만 이들은 1960년대 이후 혁명정부 수립과 함께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정책 관료들을 도와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권위적인 정부의 시책에 동조하면서 근대화 정책에 필요한 중요 집단으로 변모해갔다. 이것은 비단 디자인계의 문제만은 아니었고, 건축계나 문화예술계의 전반적인 경향이었다.
특히 일부 엘리트 디자이너들은 교육자로, 정책 입안자로, 국전 심사위원으로, 실무 디자이너로 국가의 전방위적인 업무를 수행하며 정부가 발주하는 수많은 국가 프로젝트의 수혜를 받았다. 그들의 활동을 통해 한국 근대 디자인의 틀이 형성되고 평가되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국내의 거대 프로젝트 대부분이 극소수의 디자이너에 의해서만 수행되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인데, 한국 디자인사는 바로 이들 소수 엘리트 디자이너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이들은 무지몽매한 국민을 교화하고 열악한 국내 디자인을 진흥한다는 입장의 ‘계몽주의 디자인관’을 견지한 반면, 당대 한국의 사회 현실과 디자인의 관계를 회복시키지는 못했다.
한편 국내 대기업에서는 일찍부터 인하우스 디자인 시스템이 정착되었지만 익명성에 의지하는 기업의 디자인은 영웅적인 디자이너를 탄생시키지 못했다. 오랜 독재 체제로 아방가르드와 같은 반사회적인 디자인 그룹을 형성할 여유도 없었다. 산업 자원으로서의 디자인은 일반 문화나 예술로부터 분리되어 자생적 문화 담론을 형성하지 못했고, 오직 ‘디자인 국부론’으로 무장한 산업 전사를 양성할 뿐이었다. 1970년대에 이미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디자인·포장진흥법’과 정부 디자인 진흥기관을 설립했음에도, 단지 정부와 소수의 엘리트 디자이너 차원에서 논의될 뿐이었던 디자인은 국가 이벤트나 수출산업과 같은 거대담론으로만 발전했을 뿐 시민의 일상 문화로, 또는 보편적인 복지의 일환으로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으며, 사회적 괴리의 폭을 좁히지도 못했다.
2000년대 이후 지방분권화 과정에서 등장한 많은 공공디자인 담론들은 이전과 다소 양상을 달리하며 문화와 복지의 차원에서 디자인의 역할을 재조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불어닥친 ‘디자인 서울’이나 ‘공공디자인법’과 같은 정치적 움직임과 함께 또다시 퇴행적 변화가 감지되었다. 정부와 지자체의 공공디자인 정책들은 거대담론으로 변질되었다. 시민들의 생활환경은 정부와 구청의 관리 영역으로 격하되었고, 환경정비사업 등의 명목으로 일사불란하게 정리되어갔다. 천박하고 큰 간판, 규제해야 할 아파트, 이를 정비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청, 규제하는 정부만 있을 뿐 시민의 일상 속에 디자인 문화가 차분히 녹아들 만한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 Carr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고 규정했다. 역사는 현재의 시각에서 어제와 오늘을 평가하며, 내일의 세계를 바라보게 한다. 서구의 근대 역사 이론을 넘어서지 못하고, 새롭게 변화된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한 역사 서술은 건강한 역사관을 형성하지 못할뿐더러 새로운 문화 정체성을 형성해내지도 못한다. 따라서 식민주의적 역사 해석 방법은 서술 방향은 이제라도 현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재평가하고 바꿔가야만 한다.
우리에게 ‘근대’와 ‘근대화’ ‘근대주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등은 극히 혼란스러운 개념이다. 표상은 같으나 내용 면에서는 상반되기 일쑤고, 같은 단어임에도 각 사회상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 서구에서 근대화는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의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식민지 제국주의의 논리로 활용되었다. 일본의 근대화는 민주주의를 제외한 자발적인 서구화와 산업 발전 그리고 제국주의의 논리로 활용되었다. 우리는 개발독재를 정당화하는 통치 논리에 가까운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용어의 혼동으로 인해 역사 인식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우리가 ‘근대’를 오해했듯이 ‘디자인’ 역시 오해하긴 마찬가지엿다. 수출품 포장지가 디자인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던 한국 근대의 디자인사에서 서구적 개념의 근대 이론을 들이대는 것은 모순에 가깝다. 사회 전복적인 혁명 정신과 규범의 일탈을 통해 근대 디자인관이 형성되었던 서구와 달리, 일찍이 제도와 법, 정책기관을 통해 근대화의 도구로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된 디자인을 서구와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그렇다고 일체를 부정하고 회의론에 빠져서는 대안이 없다. 국가가 잘못된 목표를 제시했더라도 당시에 그것이 최선이라고 믿고 신념에 따라 작업을 진행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한꺼번에 부정한 것으로 매도해서도 안 된다.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정권과 정책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전한 문화예술 분야는 없다. 다만 규제나 심의, 검열 등의 제재가 없었음에도 자발적으로 정책에 동조하고 앞장섰던 사례도 그리 많지 않았지만, 당시의 신념이 현재와 상충된다 하더라도 시대상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맹목적인 비판이나 부정은 결코 옳지 못하다. 근대사의 역사가 짧고 모든 디자인 현상이 현재 진행형임을 감안할 때 결코 누구도 이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좁디 좁은 디자인계 내부의 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관성적으로 그 흐름이 지속되는 것을 묵인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며, 변화된 사회에 발맞춘 새로운 가치관과 역사 해석의 지향점을 만들어가야 함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 중 하나라는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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