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과 재판
재판의 목적과 기능은 분쟁을 해결하고 권리를 보호하여 사회질서 ─거창하게는 ‘사회정의’ ─ 를 유지하는 것이다. 재판의 대상이나 분쟁의 내용은 경제적 이익만이 아니라 사회적 위신의 보장 등 다양하다. 그런데 주목할만한 사실은 개인의 주관적 만족을 위해서도 소송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분쟁은 인간의 원죄?
사람은 혼자서 살기 어려우므로 여럿이 무리를 이루어 산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무리를 이룰 수도 있지만, 규모가 커지고 사람이 많아지면 그렇게만 할 수 없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과 함께 모여 살아가게 된다. 이렇게 살다 보면 불가피하게 다툼도 생겨나고, 이를 해결할 방법을 강구하게 마련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둥글둥글하게 살아가는, 곧 원만한 세상살이를 강조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는 줄곧 손해를 보며 그 아픔을 속으로 삼켜야 하는, 그야말로 인고의 날들로 밤낮을 지새워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 정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모나게 사는 길을 갈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사다. 이는 대다수가 가는 길이기도 하다.
다툼은 먼저, 자기가 처해진 상황이 부당하다 여기고 이 불만을 표출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나 불만을 갖는 것만으로는 다툼으로 번지지 않는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듯이 그 불만을 야기한 사람에게 자신의 주장을 말하고 해결을 요구할 때 비로소 갈등 상황으로 발전한다. 이때 상대방이 그러한 불만을 인식하고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갈등은 어렵지 않게 해결된다. 그러나 상대방 역시 불만을 품어 서로의 갈등이 공식적으로 드러나면 본격적인 다툼, 즉 분쟁의 단계로 발전한다.
불만이 있어도 꾹 참고 당사자들끼리 적당히 해결하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불만이 생기기 전에, 당사자들 사이에 갈등으로 나아가기 전에 그 불만이나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사회를 유지하는 데 더 바람직할 것이다. 좀 억울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혼자 삭이며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살아간다면, 다툼으로 서로 얼굴을 붉힐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모든 이들이 착하고 어질게 희생적이고 봉사적으로 살아가는 사회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일까? 어쩌면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곪아 터져서 언제 주저앉아 버릴지 모르는 아주 비정상적인 사회일지도 모른다.
불만이나 분쟁 그리고 그 해결 방식인 재판이 아예 없는 사회는 굉장히 이상적인 사회일 것이다. 유교는 다툼이 없는 조화를 추구하였다. 다툼이 없는 이상 사회를 추구한 공자는 “재판은 나도 남들처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반드시 소송이 없도록 하겠다子曰,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논어』 12 「안연顔淵」)”라고 했다. 소송을 없게 하려면 자연의 질서처럼 절도 있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다. 그래서 자연의 질서에 인간의 질서를 맞추고자 법전은 하늘과 땅, 사시四時를 본받아 이호예병형공吏戶禮兵刑工의 육전六典 체제로 만들었으며, 살아 있는 목숨을 앗는 사형은 원칙적으로 가을과 겨울에 집행하도록 하였다. 법을 자연 질서에 합치하도록 제정하고 그 집행 또한 이에 따르려고 노력했지만, 현실에서 불만은 쌓이게 마련이고 다툼이 재판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이 역시 자연의 질서다.
분쟁은 사회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따라서 분쟁의 해결 과정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기도 하고, 성숙한 사회로 발전해가는 과정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구성원의 불만과 구성원 사이의 갈등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 무리, 사회, 심지어 국가마저도 유지될 수 없다. 합리적이고 원만하게 분쟁을 잘 해결한다면 당사자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갈등을 없앨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분쟁을 예방하고, 나아가 사회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요컨대 억울한 상황에 놓인 사람이 불만을 드러내고 서로 다투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회는 더욱 원만하고 조화로워지며, 발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사회에서 분쟁은 필요악이지 않을까?
오늘날 우리나라는 소송이 넘쳐 난다. 2009년을 기준으로 고소된 인원은 이웃 일본의 67배, 인구 10만 명당 비율은 171배이다. 이러한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조선 초기에도 그러하였다. 조선 초기 위정자들은 분쟁과 소송의 폭주를 고려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인식했다. 그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공자가 말한 무송無訟 사회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조선 초기 실록에는 소송 건수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적게는 666건(1400년, 정종 2)에서 많게는 12,797건(1414년, 태종 14)이나 된다. 15~16세기 조선의 인구가 600만~70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당시의 인구와 신분 구성을 고려하면 이러한 소송 건수는 엄청난 수치이며 소송의 홍수라고 할 수 있다.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기보다는 ‘동방소송지국東方訴訟之國’이라 할 만하다.
적체된 소송을 단칼에 해결하는 방법은 현재 재판 중인 사건을 일정 시기까지 종결하고, 특정 시기 이전의 사건은 아예 수리를 하지 않도록 ‘단송斷訟’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다. 1485년(성종 16)에 반포된 『경국대전』「형전」에는 ‘노비결송정한奴婢決訟定限’이라는 부록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름 그대로 특정 사안에 관련된 노비 소송의 경우 일정 시기 이전에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는 소송의 수리를 금지한 것이다. 또한 「호전」 ‘전택田宅’ 조에서는 5년이 지난 사건의 수리를 원칙적으로 금지했는데, 이를 ‘청송聽訟 기한’ 또는 ‘정소呈訴 기한’이라고 한다. 심지어 소를 제기하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도 처벌했다. 소송은 한 번에 끝나는 법이 거의 없다. 이긴 자는 이긴 자대로 진 자는 진 자대로 판결에 불만을 품게 마련이고, 그 불만을 속으로 삭이기보다는 다시 재판을 해서 결국에는 이기려고 했다. 이렇게 여러 번 소송을 쉬지 않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비리호송非理好訟’, 즉 까닭없이 소송을 즐기는 사람이라 단정하여 사형 아래의 형벌인 전가사변全家徙邊 : 전 가족을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형벌으로 처벌했고, 이러한 소송을 수리한 관원은 장杖 100으로 처벌한 다음 다시는 벼슬살이를 못하도록 ‘지비오결죄知非誤決罪 : 그릇됨을 알고 잘못 판결한 죄’로 다스렸다.
때로는, 소송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판결의 최종 결과를 제시하여 소송을 억제하려고도 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나온 ‘노비중분법奴婢中分法’이 그 대표이다. 당시 일어난 소송 중에 특히 노비 소송이 가장 많았는데, 대부분 상속에 따른 불만에서 불거졌다. 소송 당사자는 형제나 사촌 등 상속인이었다. 이 때문에 소송의 싹을 자르는 방법으로 분쟁의 대상이 된 노비를 반으로 나눠 원고와 피고에게 고루 주는 방안이 시행되었다. 이 법은 처음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지만, 곧 악용되었다. 상속이 부모의 유언이나 법에 따라 이루어지긴 했어도 불만을 품은 어느 한 상속인이 불균분不均分이라고 제소하는 순간, 다른 상속인이 이미 정당하게 받은 노비를 절반에 맞춰 가져가는 일이 나타난 것이다. 승소하면 노비를 더 받고, 설사 패소하더라도 손해 볼 일이 없는 이상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노비중분법은 곧 폐지되었다.
<그림 1> 『태종실록』, 태종 13년(1413) 9월 1일, 노비중분법을 제정하는 기사 - 노비중분법이란 조선 초기 노비에 관한 쟁송(爭訟)이 그치지 않은 탓에, 왕명으로 소송 중에 있는 노비를 원고와 피고에게 똑같이 나눠주게 한 제도이다. 2,000명이 소송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 눈에 띤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정부의 지속적인 단송 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내내 소송은 계속 늘어났다. 형조나 장예원掌隷院 등 사법기관 외에 임시로 기관을 설치해서 재판을 독려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청송 기한으로 대표되는 단송 정책은 정당한 권리자를 희생시켜 분쟁을 종식하는 것이다. 즉 사건의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은 채 오직 사건의 발생 시점만 문제 삼아 5년이 지난 사건의 수리를 금지함으로써 부당하게 재산 등을 차지한 이를 보호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니 억울함을 호소하며 단송 정책의 완화를 주장하는 논변이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경국대전』에 “토지를 훔쳐 판 경우, 소송이 5년 이상 지속된 경우, 부모의 유산을 독차지한 경우, 빌려서 경작하다가 땅을 차지한 경우, 세 들어 살다가 집을 차지한 경우盜賣者, 相訟未決者, 父母田宅合執者, 因幷耕永執者, 賃居永執者, 不限年(「 호전」 ‘전택’ 조)”에는 예외를 인정하여 비록 5년이 지났더라도 제소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1518년(중종 13)에는 앞의 두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30년이 지나면 제소할 수 없도록 규정하여 단송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림 2> 『결송유취보』「 범례」 - 국가의 법령이 방대하기 때문에 소송에 관련되는 규정만 초록하였다. 여기에는 ‘단송(斷訟)’ 항목을 ‘물허청리(勿許聽理)’로 변경한 이유가 밝혀져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그러나 단송 정책은 한편으로는 강력한 권리 의식, 다른 한편으로는 절차적 정의正義보다는 실체적 정의를 중시하는 관념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1585년(선조 18)에 간행된 『사송유취詞訟類聚』의 ‘단송’ 항목을 약 50년 뒤 간행한 『결송유취보決訟類聚補』에서는 소송의 접수를 허용하지 않는 ‘물허청리勿許聽理’로 바꾸었는데, 그 이유를 「범례凡例」에서 “‘단송’은 소송을 없게 한다는 뜻이나, 소송을 접수하지 않는, 즉 ‘재판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와 차이가 있기決訟類聚中 斷訟卽無訟之意, 而與勿許聽理有間 故今改以勿許聽理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무송 사회는 이상일 뿐이고, 소송을 현실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방향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소송법도 자연스레 발달하게 되었다.
무엇 때문에 다투는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만큼이나 분쟁의 양상도 다양하다. 돈 때문에 발생하는 채송債訟, 노비 소유권을 둘러싼 노비송奴婢訟, 묘지에 관련된 산송山訟 등이 분쟁에 따른 대표적인 소송이다. 조선 전기에는 노비송이 많았지만 후기에는 산송이 절대적이었다. 대부분의 소송은 경제적 이익 때문에 발생하며, 때로는 개인이나 가문의 사회적 위신이 관건이 되기도 했는데, 이런 소송일수록 오랫동안 심각하게 진행되었다. 이 외에도 다양한 갈등에 따른 소송의 종류가 많았다.
오늘날엔 거의 보기 힘든 옛날의 소송 사례를 몇 개 살펴보자.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
용인에 사는 어떤 사람이 벼락이 치는 통에 쏟아져 내린 돌무더기에 깔려 갑자기 죽었다. 사람들은 돌무더기를 치울 수 없어서 그대로 시신을 매장하였다. 그 사람이 저승에 가서 조사를 받으니, 죽을 때가 아니라며 이승으로 다시 돌려보내졌다. 그런데 영혼이 돌아갈 시신이 없어서 그냥 떠돌다가 진천까지 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그 사람과 나이가 비슷한 부잣집 아들이 자식도 남기지 않고 죽었는데, 부모는 혹시나 하면서 죽은 아들을 매장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용인 남자의 영혼은 그 시신에 들어갔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 되살아난 남자는 진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용인 이야기만 했다. 결국 진천의 부인은 용인을 찾아가서 수소문 끝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그 남자는 용인에서도 살고 진천에서도 살면서 각각의 부인에게서 아들들을 얻었다. 그럭저럭 살다가 그 남자가 죽었는데, 진천과 용인의 아들들이 서로 아버지의 혼백을 모시겠다고 다투었고, 결국 진천군수에게 소장을 올렸다. 소장을 본 진천군수가 “고인이 살아서는 어디에 살았는가?” 하고 물으니, “진천에서 살았다”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진천군수는 “살아서는 진천에서, 죽어서는 용인에서 살아라”고 판결하였다.
━『 한국구비문학대계』
지방자치단체의 홍보로도 활용되는 위 이야기는 아버지의 제사를 서로 모시겠다고 자식들 간에 다툰 사례이다. 이는 경제적 이해관계나 사회적 위신과는 관계없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소송거리가 전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인식에서 볼 때, 살아서는 아버지가 있었지만 죽어서 아버지가 없는 것(즉 제사를 모시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용인과 진천의 아들이 다투었고, 현명한 수령이 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했다.
그런데 위의 이야기는 오늘날 비슷하게 재현된 적이 있다. 2008년 1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위와 비슷한 사례를 다루었다. 어떤 사람이 본부인에게서 자녀를 얻은 뒤, 법적으로 이혼을 하지 않은 채 다른 부인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고 함께 살았다. 그 사람은 둘째 부인의 자녀와 함께 자신의 묏자리를 잡고 그들에게 제사를 부탁했다. 그 남자가 사망하자 첫째 부인의 아들들이 둘째 부인의 아들을 상대로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겠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에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장남이 당연히 제사를 잇는다는 관례에서 탈피하여 자녀들이 합의하여 봉사奉祀를 결정하고, 그렇지 못하면 적자와 서자를 가리지 않고 장남·장손이 우선하며, 그것조차 안 될 경우 딸도 출생순으로 지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수 의견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었는데, 제사를 지낼 후손을 그들의 다수결로 결정하거나 법원에서 정해줘야 한다는 의견, 그 밖에 매장이나 제사 방법에 대한 망인의 유언이 있다면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가 제사를 지낼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이 분쟁은 생전에 아버지 없이 살아온 생활에 대한 설움을 해소하려는 목적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소송에 따른 경제적 이익이 전혀 없고, 또 사회적 위신과도 상관없지만, 본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다.
씨·밭 논쟁―누가 아버지?
경남 하동 지방에 내려오는 이야기다. 한동네에 아들이 없는 부잣집과 아들이 많은 가난한 집이 있었다. 부잣집 마나님은 대를 잇고자 남편에게 양자를 들이자고 했으나, 남편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에 걱정이 된 마나님은 가난한 집 남자와 이러저러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무럭무럭 자라자 이웃집 남자는 마나님에게 자기 아들이라면서 이를 이용해 한몫 챙기려고 하였다. 참다못한 마나님이 이 사실을 아들에게 털어놓았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걱정 마시라고 하면서 자기 생일에 동네 사람들을 모아 큰 잔치를 열어달라고 하였다. 생일 잔칫날이 되어 동네 사람들이 모이자, 아들은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를 냈다. “밭이 나란히 붙어 있는데, 씨앗을 뿌리다가 어떻게 해서 한 톨이 이웃집 밭으로 떨어져 곡식이 열렸다면, 그 곡식은 씨앗 임자 것인가, 아니면 밭 임자 것인가?”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당연히 밭 임자 것이지”라고 답하였다. 이 대답을 들은 이웃 남자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 한국구비문학대계』
한 아비가 아들을 빌미로 재산을 차지하려는 욕심에서 분쟁의 싹이 튼 사례이다. 이는 아들의 재치로 쉽게 해결되었다. 얼마 전 호주제戶主制의 존폐를 둘러싸고 호주제를 찬성하는 유림 측에서는 아버지는 ‘씨’이고 어머니는 ‘밭’이며 밭보다 씨가 중요하기 때문에 자녀의 성姓과 본관本貫은 씨인 아버지를 따라야 한다면서 그 씨를 잇는 것에 바탕을 둔 호주제는 존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위 사례는 전혀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무엇이 옳을까?
다양한 분쟁의 사례는 또 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수제자 자리를 두고 안동 지역의 명문 사족인 풍산 유씨와 의성 김씨의 후손들은 200여 년 동안 다퉜다. 이른바 ‘병호시비屛虎是非’이다. 유성룡柳成龍의 후손과 그 제자들은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이, 김성일金誠一의 후손과 제자들은 연장자인 김성일이 이황의 수제자이어야 한다며, 서원에서 퇴계 신주의 좌측에 있어야 한다고 서로 주장하였다. 2013년 5월에 두 문중과 유림의 대표가 합의하고 경상북도지사가 함께 선언하여 400여 년에 걸친 갈등이 해결되었다. 복잡한 정치적 명분이 깔려 있기는 하지만 아버지의 묘지명을 둘러싸고 윤증尹拯이 송시열宋時烈에 대해 사부가 아니라고 주장하여 벌어진 ‘회니시비懷尼是非’도 있다. 이 외에도 적자 없이 죽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적자 논쟁(이 사건은 식민지 시기까지 지속되어 1921년 당시 최고법원인 조선고등법원에서 내린 판결도 있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서자와 양자의 후손 사이에 적통을 다투는 등 다양한 분쟁이 일어났다. 이는 모두 경제적 이익이나 권리 확보와 관계없는, 개인이나 집단의 주관적 만족을 위한 소송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분쟁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별 것 아닌 듯이 보이지만 당시에는 목숨보다도 소중하여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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