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그냥 피어나는 것
- 실존주의
내 삶은 왜 이리 불안할까? - 의미 중독
인간의 두뇌는 쉴 틈이 없다. 깨진 항아리를 보면 우리는 온전한 항아리의 모습을 먼저 떠올린다. 항아리의 오롯한 모습을 먼저 그려 보아야 눈앞에 놓인 물체가 깨진 항아리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구름을 볼 때도 우리의 뇌는 토끼나 염소, 사자 같은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을 그 위에 덧씌우려 한다.
산길을 걸을 때도 등산로의 전체 모습을 알지 못하면 마음이 불안하다. 자기가 어디를 향해 어디쯤 걷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탓이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목적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한 과정인지, 내가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를 모르면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이처럼 인간은 의미를 좇는 존재다. 내가 하는 일이 인정받지 못할 때, 왜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삶은 괴롭다. 차라리 누가 나서서 내가 할 일을 알려 주고 내 인생의 의미까지 정해 주었으면 좋겠다.
독재자는 인간의 이런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나치스가 지배하던 독일에서는 모든 남자가 14세가 되면 히틀러 유겐트(나치스 독일의 청소년 조직)에 들어가야 했다. 조직 안에는 무려 11단계의 서열이 있었다. 여러 장식과 자리로 청소년들의 지위와 역할이 분명하게 갈렸다. 잘한 사람은 칭찬을 받고 단계가 올라갔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도 평가하고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평가와 진급, 보상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좀 더 높은 지위와 역할은 삶의 ‘의미’를 가득 채워 주었다.
히틀러가 무너졌을 때, 그들의 마음은 헛헛했다. 치열한 경쟁이 주던 삶의 의미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동안의 모든 노력에도 그들은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되지 않았다. 이제 어디에서 삶의 가치를 찾아야만 하는 것일까?
히틀러 유겐트에 열정을 쏟았던 젊은이의 허탈함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도 별다르지 않다. 어른들은 직장에서 승진을 위해 목을 매고, 학생들은 더 높은 성적을 얻어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면 내 인생은 가치 있어질까? 나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모든 직장 생활에는 끝이 있다. 언젠가는 모든 것이 내게서 떠나가 버린다. 최고 성적을 거두어 이른바 명문 학교에 가면 무엇하겠는가. 인생의 최종 결과는 누구나 똑같다. 죽음에 이르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세상을 떠나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찾듯, 삶의 의미를 주는 일을 절절하게 찾는다. 내 삶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듯싶으면, 나라는 인간의 가치를 알아주고 내 인생의 의미를 줄 새로운 일을 찾아 매달린다. 우리 대부분은 인생의 의미를 느끼지 못할 때 불안해한다. 이 점에서 인간은 ‘의미 중독자’인 셈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내 삶의 의미와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한목숨 바치면 내 인생은 가치 있어질까? 나를 진정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내 마음에 부는 찬바람이 사라질까?
이런 물음에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1905~1980)는 고개를 젓는다. 그 무엇도 내 삶을 의미 있게 해 주지는 못한다. 사르트르는 종이 자르는 칼을 예로 든다. 장인은 자기 머릿속에 그려진 모습대로 칼을 만든다. 칼의 가치는 종이를 잘 자르는지에 따라 정해진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가? 인간에게는 원래부터 주어진 역할과 기능이 없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그의 유명한 말이 뜻하는 바다. 종이 자르는 칼에는 ‘종이를 자르는 것’이라는 본질이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무엇이어야 한다는 ‘본질’이 없다. 그냥 세상에 던져졌을 뿐이다.
물론, 사람들은 ‘인간의 바람직한 모습’을 나름대로 정해 놓곤 한다. 예컨대,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장인의 머릿속에 종이 자르는 칼이 들어 있듯, 신은 ‘제대로 된 인간’을 벌써 알고 있다. 이 모습대로 사는 사람만이 가치 있는 삶을 꾸린다고 인정받는다.
권력자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는 삶’이 가치 있다며 소리를 높인다. 심지어 본보기가 될 만한 ‘영웅’들을 보여 주기도 한다. 시민들은 그들처럼 살아야 제대로 된 인생이라 인정받는다. 회사는 또 어떤가. 기업들은 직장에 헌신하는 생활이 보람차고 가치 있다고 외친다.
자기기만
그러나 사르트르는 그 무엇도 내 인생에 의미를 주지 못한다고 잘라 말한다. 국가와 민족이 위대하면 나 자신의 가치도 높아질까? 힘세고 돈 많은 나라 사람들이 못사는 나라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모습은 눈꼴사납다. 무엇에 기대어 자신의 가치를 세우려는 치들은 한심해 보인다.
인생의 가치가 자신 바깥에 있는 무엇으로 정해진다면, 내 삶은 언제나 휘둘릴 수밖에 없다. 회사가 망해 버리면 그동안에 기울인 헌신도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리지 않겠는가. 제아무리 높은 지위를 차지했어도 내 삶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다.
나아가, 사르트르는 ‘자기기만’에 빠지지 말라고 충고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투덜대곤 한다. “나는 환경이 좋지 않았지. 나는 위대한 사랑을 하지 못했어. 그럴 만한 사람을 못 만났기 때문이야. 나는 좋은 책을 쓰지 못했어.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지. 나는 아낌없이 애정을 쏟을 아이를 낳지 못했어. 삶을 같이할 만한 남자를 못 만났던 탓이야.” 여건이 안 되어서 내가 지닌 가능성이 피어나지 못했을 뿐, 나는 소중하고 뛰어난 존재라며 스스로를 기만하곤 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유롭지 않을 방법이 없다. 너무 골치가 아파서 차라리 돌처럼 생각 없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투덜거릴 때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유롭지 않을 방법이 없다. 자유는 우리에게 언제나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자유를 마치 벌인 양 선고받았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삶의 가치는 자유를 어떻게 썼는지에 따라 정해진다. 인간은 실천을 통해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 간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는지 안 하는지는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주변 여건이 좋은지 나쁜지도 내 뜻대로 결정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을 할지를 자유롭게 결정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밖에 없다. 사르트르는 힘주어 말한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실현하는 한에서만 실존한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남의 결정과 환경에 책임을 돌리지 말라는 뜻이다.
앙가주망 - ‘행복은 그냥 피어나는 것’
그러나 사르트르의 말을 모두 받아들인다 해도 여전히 내 삶은 막막하다.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실존주의 심리 치료 분야를 개척한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1905~1997)의 주장은 좀 더 분명한 해답을 준다. 그는 “행복이란 손에 쥘 수는 없고, 단지 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 좋아하는 일에 빠져 있을 때, 마음 통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행복감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이 순간 행복을 굳이 떠올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행복감은 저절로 피어오른다.
의미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애써 매달릴 때, 오히려 내 삶의 가치는 스러져 버린다. 절실히 하고 싶은 일, 꼭 해야 하는 일을 온전하게 파고들 때 의미는 저절로 피어날 테다. 빅터 프랭클은 생활 속에 ‘참여’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라는 뜻이다.
물론, 자신의 선택이 잘못될 경우도 있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 인생을 허비했다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은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 누구도 내 과거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의미 있다고 여기는 일에 치열하게 뛰어들었던 경험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그때 느꼈던 뿌듯함 또한 누구도 앗아 가지 못한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상황이 어떻게 바뀌든, 튼실했던 삶의 순간은 아무도 앗아 가지 못할 ‘나의 가치’로 내 삶을 굳세게 다잡아 줄 것이다.
사르트르도 비슷한 말을 한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앙가주망’(참여)하는 데 있다. 현실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내 인생을 스스로 만들고 개척하는 일이다. 남들이 나를 받아들일지, 사회가 나를 인정할지는 나에게 달려 있지 않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나에게 달려 있다. 매 순간의 결정과 행동이 어느 누구도 빼앗지 못할 내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낸다.
‘우드스톡의 나라’ - 우리는 왜 초라할까?
실존주의는 196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시기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때이기도 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치열하게 대결하고,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소련군이 거침없이 쳐들어가던 ‘위협의 시대’*였다.
* ‘프라하의 봄’을 말한다. 1968년 체코에서 민주 자유화 운동이 일어나자, 이 운동을 막기 위해 소련군이 불법 침략한다. ‘체코 사태’라고도 한다.
반면, 1960년대는 히피*의 시대이기도 했다. 히피들은 감지 않은 긴 머리, 청바지에 티셔츠, 자유롭고 거침없는 생활, 그리고 젊음을 앞세워 주어진 사회의 틀에 맞섰다. 그들은 ‘우드스톡의 나라’를 꿈꿨다.
* 기성의 가치관과 사회적 관습을 부정하고, 인간성 회복과 자연과의 교감 등을 주장하며 자유로운 생활 양식을 추구하는 이들을 말한다.
“우드스톡은 소외된 젊은이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어디서든 그곳에서 살아갑니다. 수족*(Sioux) 원주민이 어느 국가에 속해 있건 자신들의 나라에서 사는 것과 똑같은 마음인 거죠.”
* 북아메리카에 살던 원주민 부족 연합.
히피 지도자인 애비 호프먼(1936~1989)의 말이다. 그들은 주어진 틀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는 삶,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찾아가는 인생을 꿈꿨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대학가는 ‘공시족’(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 ‘임용 고시족’들로 넘쳐 난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상, 모험 가득한 인생을 살겠다는 당찬 꿈을 꾸는 젊은이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대학 입시에서도 튼튼한 밥그릇을 챙길 수 있는 전공이 더더욱 인기를 끈다. 이들 중 성공한 사람은 ‘소시민’으로 살아갈 것이다. 과연 이것이 그들이 꿈꾸던 삶일까? 뜻한 바를 이루었다 해도, 어느 순간 그들은 세상살이에 전전긍긍하는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인간은 자유롭다. 우리가 꼭 사회가 원하는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주어진 자유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산다.
철학화두
“나는 누구의 자식이며 누군가의 형제다. 어느 학교나 직장에 소속되어 있으며 학년, 또는 직위는 무엇이다.” 여느 자기소개는 이렇게 이루어진다. 관계 속에서 내가 어디 위치해 있는지를 나타내는 식이다. 이렇게 말고 나 자신을 ‘그 자체’로 소개해 보라.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보여 줄 수 있을까?
더 읽어 볼 책
· 장 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 어빙 D. 얄롬, 『실존주의 심리 치료』
· 제이슨 델 간디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시스템은 우리를 행복하게 할까?
- 구조주의
귤껍질 조각의 힘
장기를 두려고 하니 말의 개수가 모자란다. 졸이 하나 사라져 버린 것이다. 급한 대로 귤껍질을 찢어서 작은 조각을 만들었다. 이를 졸 대신으로 썼다. 모양은 빠지지만 장기를 두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왜 그럴까?
필요하면 귤껍질을 장수 격인 초나 한 대신으로도 쓸 수 있다. 차나 마로 삼아도 괜찮다. 장기를 두는 사람끼리 귤껍질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만 약속하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장기판의 말들은 그 자체로 힘을 갖고 있지 않다. 말들의 능력은 장기의 전체 규칙 속에서 그 말이 어떤 지위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CEO’(최고 경영자), ‘과장’, ‘유권자’, ‘소비자’ 등등의 힘은 어디에서 올까? 회사가 없으면 CEO라는 명함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공원에 덩그러니 홀로 앉아 있을 때 ‘과장’이라는 꼬리표는 별 가치가 없다. 한 사람의 가치와 능력은 그가 어떤 ‘구조’ 속에서 어느 위치를 차지하는가에서 온다.
세상을 읽으려면 사람들 하나하나만 보아서는 안 된다. 사회 전체가 돌아가는 판세, 즉 구조를 짚어 내야 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구조주의’란 사회가 움직이는 구조를 드러내며 세상을 설명하려는 사상을 말한다.
양반걸음은 왜 촌스러울까?
그러나 사회 구조를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구조는 공기와도 같아서 좀처럼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숲 속에 있으면 오히려 숲을 보기가 어렵다. 마찬가지로 구조 안에 있는 우리가 사회를 움직이는 구조를 깨닫기란 정말 힘들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에게 ‘양반걸음’은 무척 낯설다. 초등학생이 팔자걸음으로 팔을 휘휘 저으며 다녔다가는 야단을 맞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기이한 걸음걸이’일 뿐인 양반걸음이 100여 년 전만 해도 우아하고 당당한 걷기 자세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사회 구조에 있다. 이 땅에 지금과 같은 학교가 생긴 것은 100여 년 전이다. 학교에서는 공부뿐 아니라 걷기와 ‘바른 자세’도 가르쳤다. 학생들은 조회 시간 등을 통해 새로운 걷기 방법을 익혔다. 친구들과 발을 맞추어 가슴을 펴고, 가볍게 손을 흔들며 경쾌하게 걸어야 했다. 왜 이렇게 걸었을까?
산업 사회는 공장과 회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공장과 회사는 기계처럼 팽팽 돌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모두 함께 움직여야 한다. 게다가 속도도 중요하다. 나 혼자만 튀게 움직였다간, 전체가 삐거덕거릴지도 모른다.
산업이 중심이 되는 사회 ‘구조’에서 양반걸음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에게도 눈꼴사납게 다가올 테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에는 땅을 스치듯 걷는 ‘난바なんば'라는 걸음이 있었다. 지금은 스모에나 겨우 모양새가 남아 있을 정도로 거의 찾아보기 힘든 걸음걸이다. 심지어 일본이 산업화하던 무렵, 난바로 걷는 사람은 ‘문명개화에 반대하는 자’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조선 시대에 누가 지금처럼 빠르고 씩씩하게 걸어 다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촐싹댄다며 손가락질을 받았을 것이다. 이처럼 구조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정해 주기도 한다. 사회를 지배하는 구조를 알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가 분명하게 보인다.
에크리튀르,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려면
구조는 사람들을 눈에 안 띄게 차별하고 억누르기까지 한다. 언어학자 롤랑 바르트(1915~1980)는 ‘에크리튀르ecriture로 이를 설명한다. 에크리튀르는 영어의 ‘모드mode' 정도로 옮길 수 있는 말이다.
‘policeman’, ‘chairman’, ‘boxer’ 같은 낱말들을 떠올려 보라. 우리말에도 ‘출제자’, ‘경력자’ 같은 단어가 많다. 언뜻 보면, 이 말들이 뭐가 문제인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는 ‘man’, ‘er’, ‘자(者, 놈 자)’, 곧 남성을 나타내는 꼬리말이 붙어 있다.
이런 말들을 자연스럽게 쓰는 상황에서는 남녀평등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여자 police‘man’, 여성 출제‘자’는 도대체 남자일까, 여자일까? 이런 낱말들은 당연히 경찰관은 남자이고, 문제를 내는 이도 남자여야 한다는 성차별을 담고 있다. 남성의 ‘에크리튀르’를 띠고 있는 말의 구조 속에서 남녀가 똑같이 대접받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에크리튀르’를 바꾸어야 한다.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는 더 이상 ‘policeman’, ‘chairman’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 대신 ‘police-person’, ‘chair-person’같이 공평한 낱말을 사용한다.
롤랑 바르트는 어떤 차별도 억누름도 담고 있지 않은 에크리튀르를 꿈꾸었다. 그는 어떤 편견도 담기지 않은 구조를 ‘영 도degre zero'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런 구조가 과연 있을까? 없다면, 우리가 이런 구조를 만들 수 있을까?
나는 보이지 않는 권력에 길들여진다
미셸 푸코(1926~1984)는 이 물음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구조는 그 자체로 사람들을 옥죄어 든다. 그는 구조를 ‘권력’으로 여긴다. 푸코는 학교, 교도소, 병원을 들여다보며 우리 시대의 구조를 드러내려 한다.
만약 누가 나를 ‘길들이려’ 한다면 어떨까? 본때를 보인답시고 나에게 손찌검을 한다면? 당장 욱하고 치받을지 모르겠다. 대놓고 억누르려 할 때 이를 고분고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아침에 지각을 해서 벌칙을 받아야 한다면 어떨까? 당신을 차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준에 못 미치기 때문에 지원금을 줄 수 없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별 불만 없이 받아들일 테다. 이처럼 권력은 구조를 통해 사람들을 조금씩 길들여 나간다.
푸코가 보기에 학교, 교도소, 병원은 모두 똑같은 구조로 움직인다. 학교는 학생들이 하루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행동해야 할지를 세세하게 정해 놓았다. 아침 8시까지는 학교에 와야 하고,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들을 때는 가슴을 펴고 바르게 앉아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식이다. 감옥도 똑같다. 죄수들의 하루 일과는 철저하게 정해져 있고, 작업장·감방 안에서의 생활 규칙도 잘 짜여 있다. 병원은 또 어떤가. 병원에서는 병의 종류별로 환자를 어떻게 다루고 관리해야 하는지를 세세하게 정해 놓는다.
구조는 사람들을 힘으로 윽박지르는 법이 없다. 그냥 ‘규칙을 지키라.’고 안내할 뿐이다. 규칙에서 벗어나면? 무엇을 어겼느냐에 따라 돌아오는 벌칙도 다르다. 이런 경우에는 함부로 반항하기도 쉽지 않다. 이렇게 규정을 하나하나 따르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구조에 길든 인간이 된다.
독재 사회에서는 우리를 억누르는 권력자가 누구인지 한눈에 보인다. 그가 사라지면 우리는 자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시스템’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독재자 없이도 억눌려 살아간다. 물론, 사회 질서가 뿌리내리고 여기에 잘 길들수록 세상살이는 편해질 테다. 그러나 안정된 나라일수록 국민들은 쉽게 우울증에 빠진다. 까닭 없이 자신이 자꾸만 작아지고 초라해지는 기분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다.
숲 속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야만인과 안전한 도시에서 궁싯거리는 우리를 견주어 보라. 우리는 야만인보다 훨씬 더 잘 먹고 안전하게 잠든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잃었을까?
부조금은 거래가 아니다, 도대체 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주된 구조는 무엇일까? 현대 사회는 무엇보다 ‘돈’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듯싶다. 그런데 우리는 인류가 돈이 지배하는 세상을 극구 피하려 했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린다.
옛 양반들은 돈을 만지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하인을 통해 건네고 받았을 뿐이다. 돈을 주고받아야 하는 때에도 ‘경우’와 ‘의리’를 앞세웠다. 지금도 결혼식·장례식 등의 부조에는 이런 전통이 남아 있다. 그가 나한테 한 만큼 상대에게 부조‘금’을 주곤 하지만, ‘거래’라는 느낌은 애써 피하려고 한다. 왜 그럴까?
돈에는 얼굴이 없다. 돈은 누구도 가리지 않으며 어느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한다. 예를 들어 길거리를 가다가 무거운 보따리를 든 친구를 만났다고 해 보자. 안쓰러운 마음에 짐을 대신 들어 주었다. 그런데 수고했다며 친구가 만 원을 건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돈을 받았다는 기쁨 대신 섭섭하고 황당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내가 한 행동은 ‘우정’과 ‘의리’라는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돈’의 구조로 나의 행동을 가늠하면, 우정과 의리는 사라지고 기계적인 계산만 남게 된다. 돈이 앞면에 나서면 소중한 관계도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돈거래를 오랫동안 부끄러운 일로 여겼던 이유다.
물론, 돈이 사회 구조를 지배하는 사회는 합리적이다. 주고받아야 할 몫이 딱 부러지기에 시비할 일도 적다. 경제가 커 나가고 나라의 살림살이가 좋아질수록, 사회에는 돈 중심의 시스템이 점점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정과 의리에 휘둘릴 여지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세상은 점차 투명해지며 경제도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그렇지만 외로움과 불안이 세상에 널리 퍼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조금씩 더 치밀하게 우리를 관리하려 드는 구조를 우리는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까?
철학화두
입학 사정관 제도는 대학에서 신입생을 뽑을 때 성적만을 잣대로 삼지 않고 인성이며 적성 등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여 선발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최고의 학생으로 꼽힐 수 있는 나름의 선발 기준을 제시해 보라. 이 선발 기준을 내세웠을 때 다른 사람들이 반발하지는 않을까? 지금 대학들의 선발 기준보다 사람들의 저항이 적을까, 많을까?
더 읽어 볼 책
· 우치다 타츠루,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발리스 듀스, 『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 사상』
· 김찬호, 『돈의 인문학』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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