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와 행복한 삶
(...)
통념에 도전하다
이 책에서의 과제는 신뢰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 즉 신뢰가 왜 중요하고 어떤 영역에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신뢰에 대한 내 관점은 유일무이한 것은 아니어도 기존의 관점과는 다르다(다음을 보라: 베이어 1986년, 파그덴 1988년, 후쿠야마 1995년, 셀리그먼 1997년, 맨스브리지 1999년). 내가 주장하는 신뢰의 도덕적 토대론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신뢰에 관한 다른 이론들의 몇 가지 핵심적인 전제들이다. 그러므로 우선 다른 이론들을 살펴보고 그것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신뢰를 둘러싼 기존의 통념은 타인에 관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잘 모르는 낯선 사람들도 믿을 수 있고 실제로믿는다고생각한다. 사실 신뢰와관련된설문‘( 대다수사람들을 믿을 만한가?’)의 전형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 문제이다(3장을 보라). 그러나 신뢰의 유형은 매우 다양해 낯선 사람들을 믿는 것도 신뢰의 한 가지인 도덕적 신뢰이다. 이에 반해 아는 사람들을 믿는 것은 전략적 신뢰이다. 후자는 경험에 좌우되지만 전자는 그렇지 않다. 전자의 바탕에는 낙관적 세계관과 세상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 때문에 현재의 평탄한 삶을 포함해 개인적 경험은 낯선 사람들에 대한 신뢰 여부에 미치는 영향이 지극히 미약하다(2장과 4장을 보라). 낯선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정적 정보를 무시해야 할 때도 있다.
기존 통념하에서는 신뢰란 덧없는 것이어서 자신을 실망시키면 쉽게 깨진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신뢰란 세월이 흘러도 크게 변하지 않는 영속적인 가치이다(3장을 보라). 설령 변화를 겪는다 해도 이 변화는 살면서 경험하는 개인적 사건이 아닌 사회적 사건, 즉‘집단적 경험’에 영향을 받는다(로스스타인 미간행 참고).
미국의 경우 베트남 전쟁으로 사람들 간의 신뢰가 감소했고, 민권운동으로 신뢰가 증가했다(6장을 보라).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으로 사람들은 공동의 유대감을 느낄 때 서로를 신뢰할 가능성이 높다. 경제적 불평등 수준이 높아질수록 그런 유대감은 점점 줄어들고, 그에 따라 타인에 대한 신뢰가 감소한다(6장과 8장을 보라).
최근 들어 신뢰가 사회과학의 뜨거운 주제로 부상했다. 이처럼 새롭게 주목받은 데는 사람들을 공동체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알려진 신뢰 특유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기존에는 다른 사람을 잘 믿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시민단체에서 더 많이 활동하며 사회적 유대 관계 형성에 훨씬 더 적극적이라는 게 통념이었다(스톨 1998년a·1998년b·1999년a 참고). 그러나 사람들은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며 서로 믿는 방법을 배운다는 점이 중요하다(토크빌 1945년, 퍼트넘 1995년a·2000년, 브렘과 란 1997년). 그러므로 신뢰, 단체활동, 협력 등은‘선순환’을 이루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뢰관에 대한 기존의 통념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에는 몇 가지 방법론적 문제뿐 아니라 두 가지 핵심적인 오류가 있다. 첫 번째는 시민참여가 신뢰를 창출할 수 있다는 오해이다. 사람들이 공적인 시민단체 활동이나 사적인 사교활동을 시작할 때는 대체로 기본적인 세계관이 정립되어 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찌감치 부모로부터 신뢰에 관해 배웠다(4장을 보라). 하지만 아주 어릴 때는 도덕적 나침반을 바꿀 정도로 어떤 단체에 소속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뉴턴 1997년 579쪽).
두 번째는 단체활동이나 사교활동을 통해 교류하는 사람들의 범위를 너무 넓게 잡았다는 점이다. 사실 친구들과의 교제나 시민단체의 회의참석도 비슷한 사람들과의 교류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 공동체의 범위를 확장하지 않는다. 단체활동이나 사교활동을 통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더 믿게 될지는 모르지만(스톨 1998년b),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을 만하다’라는 일반적 신뢰(2장, 3장, 5장을 보라)가 아니라 개별적 신뢰, 즉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강화할 뿐이다. 기존에 알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뛰어넘어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로 나아가는 길이 전혀 없다. 이 책에서는 정교하고 완벽한 통계학적 모형을 사용해 주장을 펼칠 예정이다(5장을 보라).
볼링 동호회나 합창단은 친구를 사귀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친구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것은 저녁시간을 보내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런 행위들은 타인과의 신뢰를 창출하지 못한다. 흔히 대부분의 사회적 유대관계는 비슷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공적 조직생활과 사적 사회생활 모두 낯선 사람들에 대한 믿음 생성에는 적합지 않다(7장을 보라). 물론 자선활동이나 봉사활동 같은 예외도 있다. 이런 바람직한 행위들에는 일반적인 단체활동보다 공동체의 복리에 훨씬 더 뜨거운 관심이 담겨 있다. 이런 선행으로 인해 신뢰가 생성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신뢰가 이런 선행을 이끌어내는 경향이 더 강하다.
무엇보다 신뢰가 중요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염세주의자들도 사회생활을 한다. 그들 또한 신뢰 같은 도덕적 가치를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요소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은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차단시키고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같은 부류 사람들과의 교류는 도덕적 신뢰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집단 내부의 신뢰, 즉 개별적 신뢰를 구축하는 행동일지 모른다(2장, 3장, 4장을 보라).
대다수 형태의 시민참여가 신뢰를 창출할 수 있다는 증거가 없다면 단체 회원수의 감소는 신뢰의 감소현상을 초래한 원인도 그것에 따른 결과도 아닐 수 있다. 사회적 혹은 정치적 영역에의 시민참여가 줄어드는 현상으로는 전 국가적으로 신뢰 수준이 낮아지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감소하는 신뢰는 시민참여의 추이에 대한 책임도 없다. 미국에서 일어난 신뢰 감소의 추이는 시민단체 회원수의 추이와는 상관이 없다. 실제로 다양한 회원으로 이뤄져 신뢰를 생성할 수 있는 일부 단체들은 회원수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참여가 매우 두드러진 나라라고 해서 반드시 다른 나라에 비해 신뢰 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다(6장과 8장을 보라).
기존의 통념에서는 1960년대와 1990년대 사이의 급격한 신뢰 감소현상이 이른바‘시민세대(1920년대 출생자들을 가리킨다-역자)’가 사라진 자리를 비교적 타인을 덜 믿는 젊은 세대가 차지한 점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퍼트넘 1995년a·2000년). 신뢰 문제와 관련한 최초의 전국 설문조사 연구결과인《시민문화》(아먼드와 버바, 1963년 출판)에 따르면 지난 몇 십년 동안 사람들 간의 신뢰가 급속도로 감소했다. 1960년 미국인의 58퍼센트가‘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을 만하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그렇게 대답한 사람은 전체의 3분의 1이 조금 넘었다. 그러다가 1998년에는 상황이 조금 호전되어 40퍼센트 정도였다.
신뢰는 급격하고도 선형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그림1-1>은시간에 따른 신뢰의 감소현상을 나타낸 것이다. <그림1-1>을 보면 신뢰가 매년 0.5퍼센트씩 감소한다. 미국 사회는 약 35년 동안 다툼이 훨씬 더 빈번한 사회로 변모했다. 대체로 젊은 사람들일수록 나이 든 사람들보다 타인을 덜 믿는다. 그러나 중요한 예외가 하나 있는데, 전기 베이비붐 세대(1946-1955년생)는 원래 타인을 가장 믿지 않는 세대였으나 1980년대 후반 들어 가장 믿는 집단이 되었다.
전기 베이비붐 세대의 신뢰 증가현상은 미국 사회의 신뢰 감소현상이 세대교체가 아닌 모종의 요인에 의해 초래되었음을 의미한다. 전기 베이비붐 세대의 신뢰 증가현상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되살아났다는 점이 반영된 것이다. 다른 집단, 예를 들어 특히 베이비붐 세대보다 젊은 세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타인을 덜 믿고 미래를 덜 낙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베이비붐 세대의 낙관론에는 그들의 소득향상과 함께 공평한 소득 분배가 반영되어 있다. 전기 베이비붐 세대는 이전이나 이후 세대보다 소득을 더 공평하게 분배받았다(6장을 보라). 따라서 그들이 가장 낙관적이고 가장 신뢰 지향적인 것은 당연하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미국 사회의 신뢰 감소현상은 비관론의 증가현상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비관론의 증가는 경제적 불평등의 증가와 관계있다. 이렇듯 도덕적 가치는 실생활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 차원의 경험은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조성하지는 않지만 한 사회의 집단적 복리는 서로를 믿는 것이 합리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민주주의 국가들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신뢰 조성의 관점에서 사회적 부는 자원분배의 공평성만큼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6장과 8장을 보라).
기존 통념에서는 신뢰를 일반적인 증후군으로 여긴다. 즉 타인을 믿는 사람일수록 정부를 믿을 가능성도 높다고 본다. 이렇게 볼 때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정부기관은 국민들 사이의 신뢰를 구축할 수 있다. 민주주의 국가는 법과 공정성을 확립함으로써 신뢰를 창출한다. 물론 훌륭한 정부는 신뢰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에 대한 신뢰가 훨씬 더 중요하다. 사법제도가 공정하다는 믿음은‘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을 만하다’라는 평가를 담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로스스타인 2000년).
하지만 이와 같은 통념과 달리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정부에 대한 신뢰는 서로 다른 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뢰의 일반적인 증후군은 없다. 낯선 타인을 믿는다고 해서 정부가 옳은 일을 할 것으로 믿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건 아니다. 정부에 대한 신뢰는 현 정권의 정책에 대한 동의 여부 외에 권력자들과 정부기관에 대한 호감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사람들의 경험이 정부에 대한 믿음의 바탕이다. 반면 타인에 대한 신뢰의 바탕은 개인적 경험이 아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차이는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편향성을 띠게 마련이다. 정치란 진영을 선택하는 문제이고, 아울러 어떤 이념 대신 다른 이념을 선택하는 문제이기도 하다(샤트슈나이더 1960년).
대인 신뢰, 봉사활동, 자선활동, 관용, 집단행동 문제의 해결 등은 여러 사람들과함께문제를해결하는것, 즉유대인들이 티쿤 올람tikkun olam‘( 세상을 치유하기’라는 뜻-역자)으로 부르는 것과 관계있다(5장을 보라). 정부에 대한 신뢰와 타인에 대한 신뢰는 모두 민주주의적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뿌리는 아주 다를 뿐 아니라 서로 적대적인 관계일 때가 많다(워렌 1996년). 양자의 이런 긴장관계를 감안하면 미국인들의 정치적 참여의 추이가 사실상 타인에 대한 신뢰와는 무관하다는 점과(7장을 보라) 정치적 참여의 국가별 다양성도 낯선 사람들에 대한 믿음과는 관계가 없다는 점을(8장을 보라)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뮤지컬 <애니, 총을 잡아라Annie, Get Your Gun>에서 애니 오클리는 “총으로 남자를 차지할 수는 없어”라고 노래한다.* 그녀의 노래는 틀렸다. 즉 그녀는 남자를 차지했고, 총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전반적인 취지는 옳다. 즉 법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통해 도덕적 감정을 생성할 수는 없다. 효율적인 사법제도나 모범적인 관료제를 갖춘 나라의 국민들이 그렇지 못한 국가의 국민들에 비해 다른 사람을 더 잘 믿는 건 아니다. 시민적 자유나 민주주의 제도도 신뢰를 유발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들이 비교적 다른 사람을 더 잘 믿는 것은 대체로 그런 국가들이 대인 신뢰에 보탬이 되는 문화적 토대(개인주의, 개신교, 평등주의)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 애니 오클리는 19세기 미국에서 활약한 여류 명사수이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애니, 총을 잡아라>는 애니 오클리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훌륭한 정부라고 해서 타인에 대한 신뢰를 창출하지는 못한다. 반면 타인에 대한 신뢰는 정부가 좀더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데 도움이 된다. 미국인들이 다른 사람을 더 많이 믿을수록 의회는 더 생산적으로 작동했다(7장을 보라). 국민들이 서로를 믿는 나라일수록(동시에 공산주의 지배 경험이 없는 나라일수록) 부패가 심하지 않고, 사법제도가 효율적이고, 관료주의의 폐해가 덜하고, 국내총생산 대비 정부지출 비율이 높고(특히 교육부문), 부의 재분배가 잘 이뤄져 있고, 경제 개방도가 높다(8장을 보라). 이렇듯 신뢰는 훌륭한 정부의 결과라기보다는 원인이다. 이것은 남을 잘 믿는 사람들이 예를 들어 장물을 구입하지 않는 것 같은 도덕적 행위의 엄격한 기준을 인정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신뢰가 감소함에 따라 범죄율이 증가했다(7장을 보라).
신뢰의 길
일반적 신뢰는 현대사회의 특징이다. 과거에는 좀처럼 위험을 무릅쓰면서 마을 밖으로 떠나지 않았고, 마을 밖에서 마주치는 것은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루이스와 와이거트 1985년 973쪽, 얼과 츠베트코비치 1995년 10-13쪽). 낯선 사람들은 우리의 적일 가능성이 높았다(셀리그먼 1997년 36-37쪽). 과거에는 사회가 고도로 계층화되어 있었다. 각각의 경제집단은 나름의 위치가 있었고, 사회적 관계는 고정적인 역할기대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낮은 계층 사람들은 높은 계층 사람들에게 지시받은 일을 수행했다. 그러므로 사회의 여러 부문까지 신뢰가 확대될 여지가 없었고(셀리그먼 1997년 36-37쪽), 이방인을 믿는 것은 위험천만한 행위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더 큰 규모의 공동체를 이뤄 살기 시작하면서 점차 다른 사람과 접촉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경제적 번영을 위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낯선 사람들과 교역관계를 맺었다(오스트롬 1998년 2쪽).
봉건제도가 해체되면서 사회적 관계는 더 평등해졌다. 제임스 브라이스 경은 사회적 평등을 미국인이 유럽인보다 다른 사람을 더 잘 믿고 관대한 까닭을 이해하는 열쇠로 여겼다. 브라이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1916년 873-874쪽).
이곳 사람들은 누구나 남을 올려다보거나 내려다보는 나라의 국민들과 달리 단순하고 자연스런 분위기에서 솔직하고 편하게 사람들을 대한다…….이런 자연스러움 덕분에 우정의 범위가 확대된다……. 이것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넓히고, 자신과 계급이 다른 사람들의 정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것은 국민 전체에 연대감을 선사하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질투와 원한의 뿌리를 잘라버린다.
이 새로운 평등주의는 사회적 신뢰를 고양했다(퍼트넘 1993년 174쪽, 본서의 6장과 8장을 보라). 오늘날 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비록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직장이나 봉사단체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뉴턴 1997년 578-579쪽). 물론‘돈독한’관계가 사라지는 모습이 안타깝기는 해도‘비교적 느슨한’유대는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과의 교류기회를 제공한다(그래노베터 1973년, 우스나우 1998년).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과 상대하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들은 대규모 집단 행동의 문제해결이라는 결실뿐 아니라 교역을 통한 이득을 얻을 것이다.
신뢰를 둘러싼 초기의 논의(로젠버그 1956년, 레인 1959년)에서는 신뢰하는 사람을 이상적인 시민으로, 즉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인정하고, 자부심을 갖고, 공동체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런 초기의 관점은─ 몇몇 주목할 만한 예외는 있지만(7장을 보라)─아주 정확한 시각이다. 신뢰가 사회의 모든 악을 치유할 수는 없어도 집단행동 문제해결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신뢰는 결국‘더 나은’정부로 이어지고(라포르타 외 1998년), 의원들 간에 서로의 전문지식을 기꺼이 존중하는 의회, 그리고 의원들이 의사결정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의회로 이어진다(우슬러너 1993년, 본서의 5장). 신뢰는 사람들이 공동체에서 자선활동과 봉사활동 같은 선행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이끈다.
과거에 비해 요즘은 신뢰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이런 신뢰의 감소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자선적 기부의 비중 감소, 적십자 봉사활동의 참여율 저하 등으로, 이런 감소추세는 신뢰의 감소현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미국인들은 서로를 덜 믿게 되면서 점점 더 작고 동질적인 공동체 안에서 보호막을 두른 채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이(소수집단, 동성애자, 이민자) 다수에 비해 특혜를 받을까봐 우려하는 것 같다. 호황기에는 점점 커지는 파이가 빈곤과 차별 같은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이후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자─예부터 경제적 불안을 느끼면 늘 그랬듯이─내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고립주의와 근본주의가 고개를 들면서 외국인·소수집단·이민자 등이 점점 다수의 복리를 해치는 위험한 이방인으로 간주되었다. 일반적 신뢰가 개별적 신뢰에 무릎을 꿇어 이제는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만 믿는다(5장을 보라).
남을 믿는 사람들, 즉 일반적 신뢰를 고수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를 포용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우호적이고 관대한 태도를 보이며 상대적으로 불우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싶어 한다. 또한 미국의 국제적 활동을 환영하고, 자유무역과 시장개방에 찬성한다(6장과 8장을 보라). 반면 개별적 신뢰를 고수하는 사람들은 정반대의 관점을 갖고 있다. 즉 그들이 보기에 이 사회에서는 너무 많은 집단이 이익을 위해 다투고 있다. 물론 이 사회에 공통의 정체성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일 뿐 용광로가 아니다. 그리고 일반적 신뢰에 입각한 사람들의 비율이 줄고 개별적 신뢰에 입각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자신과 같지 않은 자들이 부당한 이득을 보고 있다는 주장이 더 거세지고 있다.
서로 믿는 사회에서의 삶은 즐거운 반면 그렇지 못한 사회에서의 삶은 피곤하다. 불신이 팽배하는 곳에서는 일상생활이 생존투쟁의 연속일 수 있다(밴필드 1958년, 펠레즈 1996년).
물론 불신으로 인해 사회가 극심한 분열을 겪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미국인의 3분의 2 정도가 ‘사람을 상대할 때 되도록 조심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면 여러 가지 사회적 쟁점의 해결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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